3. 리그로우와 김영수
문제는 책이었다.
이 집안에서 그 어떤 평지풍파가 일어난다 한들, 준수한 청년들이 불꽃 튀는 분위기 속에서 삭막하게 경쟁을 한들, 실상 정태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유유히 그가 바라는 것, 카일의 책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면 그만이었다. 방관자의 마음으로 그 저택 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책이나 찾아본다, 그것이 정태의가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초장부터 그 바람은 순탄치 않을 기미가 보였다. 어쩌면 철창 대문 앞에서 경비원이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을 때가, 그가 걸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 기회는 지나가 버린 지 오래였고, 정태의는 이 불화의 구덩이에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책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카일에게서 크리스토프가 빼낸 책은 여남은 권.
지금 눈앞에 있는 크리스토프의 간이책장에는 그 중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정태의도 카일의 책장에서 익히 보았듯이, 책들 하나하나가 오래된 책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책들과는 외형부터가 판이하게 달랐으니, 다른 책들 속에 섞여서 구분이 잘 안 갈 리도 없었다.
정태의는 몇 칸 안 되는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책장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거대한 침대. 그 안에, 목 위까지 이불을 바싹 끌어다 덮고서 크리스토프가 누워 있었다.
정태의가 침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을 때 잠깐 실눈을 뜨고 정태의를 보는가 싶더니,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곤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미간의 주름이 사라지는 모양새를 보니 자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문턱에 서 있을지언정 침실 안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어젯밤 변덕스럽게 ‘내일 아침 일곱 시에 날 깨우도록 해.’라고 뜬금없이 내선으로 전화를 했다.
그 말만 남기고 뚝 끊어진 수화기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정태의는 잠시 동안 정말로 내일 아침에 이놈의 침실에 들어가서 깨워도 되는 건가 고민했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해도 내선번호를 알 리가 없었고, 결국 현재, 침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문을 멋대로 열고 들어온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크리스. 일곱 시에 깨우라면서. 일곱 시다.”
정태의가 말했지만 잠이 깊이 들었는지 크리스토프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참에 어디 한 번, 하고 침실 안을 주욱 살펴봤지만 정태의가 찾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침실 안에는 책 자체가 많지 않았다. 침대 바로 옆에 둔 조그만 간이책장 말고는 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재를 따로 두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쪽에 있는지도 몰랐다.
방 주인이 잠들어 있는 틈에 방 안을 구석구석 노려보았지만, 역시나 그가 찾아야 하는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쉽게 찾아내면 오히려 이상하지.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가슴속에는 초조와 불안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얼른 찾아서 돌아가야 했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니, 이제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혹은 가늠해 봐야 이미 헛일인지도 모른다.
“……. 에고 두야…….”
정태의는 침실 아래쪽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스툴을 끌어당겨 그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신음했다.
비극적인 소식은 어젯밤, 크리스토프가 갑작스레 전화하고 끊은 직후에 들려왔다.
무슨 심경의 변화로 자신의 침실 출입을 허가해 준 걸까 의아해하면서 정태의가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다시 전화해서 ‘날더러 네가 출입을 금지시켰던 네 침실에 들어가서 너를 깨우라는 뜻이냐?’라고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내선번호를 알 수 없어 고심하던 정태의는, 수십 초도 안 되는 시간차를 두고 다시 걸려온 전화가 당연히 크리스토프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왜.’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졌어? 라는 뜻을 담아 응답한 정태의는, 전화 안에서 짧은 침묵 뒤에 ‘누구 전화 기다리고 있었나?’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어, 하고 우물거리고 말았다.
‘아니, 아니에요. 조금 전에 크리스토프가 전화하고 막 끊은 참이라서 저는 그 녀석인 줄 알았죠.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카일.’
정태의는 반갑게 대답했다. 전화를 걸어온 카일이 의외라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토프와는 그래도 잘 지내고 있나 보지.’
‘아―뭐―.’
대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저 심드렁하고 차가운 눈길이며 냉담한 말투 따위를 생각하면 과연 잘 지내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았으니까 사이가 좋은 건가 봐요, 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책은 어때. 좀 찾았어?’
‘아, 전혀요. 하지만 내일 아침에 그 녀석 깨우러 갈 거니까 혹시 침실에 있는지 훑어볼게요.’
‘……아하, 사이가 좋아졌구나.’
어떤 부분이 사이가 좋아졌는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인간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곧 다른 생각이 떠올라 화제를 바꾼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는, 연락 있었어요? 설마 또 카일이 없을 때에 연락을 했다거나…….’
‘……아. 그게.’
또다. 또다시 뭔가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얌전히 있던 심장이 다시 불길하게 두근거렸다.
‘내가 없을 때 전화를 했는데, 그걸 리타가 받았었나 보더라고.’
‘…….’
카일의 난처한 듯한 목소리가 묘하게 귀를 간질였다.
아냐. 리타는 내 편이었을 거야. 그녀가 몹시 태도가 엄격하고 쌀쌀맞은 것처럼 보이긴 해도 사실은 상냥하다는 걸 난 알고 있단 말야.
정태의는 욱신거리는 심장 위를 꾹 누르면서 그래서요, 하고 뒤를 재촉했다. 으음, 하고 잠시 뜸하게 말꼬리를 끌던 카일이 드디어 말을 이었다.
‘그녀가 멋모르고, 네가 외출중이라고 말했나 봐. 그러니까 볼일이 있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해 보라고.’
‘…….’
핸드폰은 베를린에 두고 왔다.
아마도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서 허무하게 울렸을 핸드폰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그래서……, 카일은 일레이에게…….’
‘연락을 하려고 시도는 해 봤는데 통화가 안 되더라. 그래서 아직 말을 못 전해 줬는데…….’
수화기가 귓가에서 미끄러졌다. 손에서까지 핏기가 가셨다. 기분 탓인지 손톱이 파르스름하다.
정태의의 침묵을 금세 알아차린 카일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냐, 내가 다시 그놈한테 연락을 해 볼게. 걱정하지 마. 괜찮다니까, 네가 도망갔다고 생각할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그놈에게서 도망갈 만큼 정태의가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을 하겠지.
갑자기 세상이 암울해졌다. 정태의는 자신이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세상에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믿고 있던 카일도, 리타도, 사실은 이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애꿎은 피해망상까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침울해진 정태의를 애써 위로하며, 연락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재차 다짐하는 카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정태의는 전화를 끊었다.
현재 확실한 사실은 하나였다.
일레이는 정태의에게 ‘나가면 죽는다’라고 말했고, 정태의는 베를린에서 떠나왔고, 일레이는 정태의가 나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사태였다.
얼른 책 찾아 돌아가서, 그런 적 없는 척 시침 뚝 떼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 바엔,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다.
그놈보다 먼저 집에 돌아가서 어쨌든 모른 척하는 수밖에.
멀쩡히 집에 있는데, 왜 나갔다 왔냐면서 닦달하지는 않겠지. 좀 고달파질 수는 있겠지만.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 역시 다시 생각해도 문제는 책이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책을 찾으면 된다. 그럼 훔쳐서든 갈취해서든 베를린으로 튀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정태의는 책장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침대 옆에 서서 애꿎은 침대 다리를 툭툭 걷어찬다.
“일곱 시 넘었어. 안 일어나?”
따뜻하다 못해 슬슬 더워지고 있는 이 시기에도 두꺼운 오리털 이불에 푹 파묻혀 아무렇지 않게 잠들어 있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뺨이 약간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소리가 평화롭다. 아주 가끔씩 속눈썹이 떨렸다.
“너는 평생 자야겠다…….”
숲속의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는 심경으로, 정태의는 괜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다시 봐도 조각 같았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 얼굴을 한 번 쓸어 보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렸지만 억지로 억눌렀다. 남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결코 용납지 못하는 그 접촉기피의 기벽은 이미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안 일어나? ……. 흔들어 깨운다. 만져도 돼?”
정태의는 이불 위로 그의 팔 언저리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했다. 설마 이불 위로 건드리는 것도 난리를 치지는…….
그러나 그때, 이불에 정태의의 손가락 무게가 실리자마자, 거짓말처럼 크리스토프는 눈을 떴다.
반짝, 눈 깜박이는 인형처럼 눈을 뜬 그는 그대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몇 초쯤 그렇게 가만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인 그는, 얼른 손을 치워 버린 정태의에게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 일어나. 일곱 시에 깨우라며. 넘었다.”
“……시끄러워…….”
“네가 깨우랬잖아……!”
사람이 기껏 깨워 줬더니 하는 말이라는 게 ‘시끄러워’다.
그 보드랍고 매끄러워 보이는 뺨을 힘껏 잡아당겨 주고픈 충동과 싸우면서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저혈압인 양 힘겹게 숨을 내쉬면서 흐느적흐느적 앉은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
정태의는 희한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비스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정태의가 거기 있는 것도 모르는 듯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쥐고 나직이 이를 갈며 중얼거린다.
“시끄러워……. 귀가 아파…….”
닫힌 문과 창문으로는 아무런 바깥 소리도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크리스토프의 낮은 웅얼거림뿐이다.
아……하고, 한숨인지 신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가느다란 숨결을 토해 내는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낮게 속삭였다.
“……. 크리스토프. ……크리스?”
그의 어깨가 움칫 떨렸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소리를 들은 것처럼, 혹은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갑자기 불쑥 뭔가가 고개를 들이밀기라도 한 것처럼,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막막한 눈이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초점이 흐린 눈이다.
온몸을 짓누르는 심해같이, 까맣게 보일 정도로 새파란 눈이 정태의를 보았다.
“……크리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모습으로도, 무의식적인 듯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몸을 움츠렸다. 정태의는 손을 멈추었다.
크리스, 하고 한 번 더 부르자 그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감았다 뜬 눈은 이미 여느 때와 같았다. 무심하고 표정 없는 눈이다.
“소리가 들려.”
가라앉은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
“계속 여기서……, 중얼거리고 있어. 계속. 귓속에 개미를 집어넣은 것처럼 조그맣게 끊임없이…….”
정태의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 ……아……시끄러워…….”
이번에는 혼잣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혀를 차며 초조하게 중얼거리더니, 어느 순간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간다. 쏴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
정태의는 한동안 열려 있는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문득 입매를 약간 찡그렸지만 곧 한숨과 함께 표정을 펴고 만다.
깨우기는 한 모양이니 그만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침대에서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주워올려 정갈하게 베드 메이킹을 해 주고 있는데, 물만 가볍게 뒤집어쓰고 나온 듯 금세 크리스토프가 나왔다.
물이 줄줄 흐르는 몸은 내버려두고 수건으로 머리카락만 털며 걸어나온 크리스토프는 곧장 옷장 앞으로 가서 섰다.
“늘 늦게까지 침대에서 안 일어나더니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거야, 오늘은.”
정태의가 온 뒤로 고작 며칠이긴 하지만 그동안 매일같이 정오가 가까워서야 느지막이 일어났던 크리스토프였다.
그런 반면 여러 모로 그와 대비가 되는 리하르트는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성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태의가 새벽 5, 6시경 눈을 뜨자마자 방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있노라면 이미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리하르트의 모습이 저 아래에 보였다.
―어릴 때, 같이 승계 후보로 뽑히기 전부터 그 두 사람은 타입이 아예 달랐어. 크리스토프는 천재형이었지만 리하르트는 노력형이었지.
요한이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마따나 리하르트는 엄청난 노력가인 듯, 하루에 몇 시간도 채 자지 않는다는 신빙성 있는 소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정태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만사에 성실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정태의가 크리스토프를 깨우러 오는데 이미 리하르트는 말끔하게 갖추어 입고 서익에서 나가고 있었다. 듣기로는 동익에서 머무르고 있는 귀빈과 함께 사업체 시찰을 나간다고 했다. 승계 결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귀빈이라서, 그의 환심을 사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리는 삿된 말들도 섞여서 들려왔지만 정태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럴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성격은 속일 수 있어도 성실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승계를 포기했다지만 해가 중천에 뜨도록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크리스토프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정태의는, 자신이 한숨을 쉰 걸 깨닫고 움찔했다.
얼굴 몇 번 더 마주쳤다고, 어느새 자신도 심정적으로는 크리스토프를 거들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중립을 지키다가 책만 찾아가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정태의는 옷장 앞에서 속옷 바구니를 쳐다보며 고심에 잠겨 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일어나다니 몹시 놀랄 만한 일이긴 하지만, 이미 리하르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외출했다는 걸 생각하면 빈말로라도 크리스토프에게 성실하다고 칭찬해 주기는 힘들었다.
“애들을 가르쳐야 하거든.”
“……. 뭐?”
정태의는 그가 무슨 말을 한 건가 멍하게 생각하다가, 그 말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알고 귀를 의심했다.
누가 그 말을 했든 그 난데없는 말이 의아하게 여겨지기는 했겠지만,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자 한층 의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애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크리스토프 타르텐이.
“무슨 애들?”
“이 집 애들.”
“이 집 애들이라니 그게 누구……아니, 왜 네가 가르치는데? 아니, 그 전에 뭘 가르치는데? 아니, 그보다 네게 그런 걸 맡긴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신중하게 속옷을 골라낸 크리스토프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눈길이 스산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사람에게는 걸맞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다.”
“정보전쟁사와 암호독해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집안에 있다면 나는 언제라도 기쁘게 넘겨주겠어.”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토프는, 자신도 전혀 본의가 아니라는 기색이 완연하게 드러난 불쾌한 얼굴로 속옷을 입었다. 그런 다음엔 바지걸이들을 노려본다.
“……. 타르텐에서는 아이들에게 그런 교육도 시키나?”
“다 하는 건 아니지. 다다음대에 이 집을 계승할 싹수가 보이는 애들한테만 제공하는 서비스지.”
정태의는 뭐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곧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바 있었다. 어릴 적에 계승 후보자 몇을 골라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교육과 후원을 해 준다는 이야기는.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뭔가 미심쩍게 납득이 가지 않아, 정태의는 커다랗게 치뜬 눈으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숙부가 그랬던가. 이 남자가 어떠한 면에 있어서는 정재의를 능가한다고.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애들한테 이상한 건 가르치지 마…….”
정태의는 농담처럼, 그러나 진담으로 말했다. 바지를 고른 뒤 다시 셔츠를 두고 고민 중이던 크리스토프는 흘겨보듯이 눈동자만 흘끔 돌려 정태의를 보았다. 문득 그 눈에 즐거운 빛이 감도는 것 같았다.
“하나라도 제대로 못 알아먹으면 눈물 쏙 뽑도록 혼쭐을 내 줘야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는 신난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던 인간의 낯에 갑자기 화색이 도니 것도 심상찮아 보인다.
“왜 애들을 괴롭히려고 그래.”
“리하르트랑 꼭 닮은 아들놈이 거기 섞여 있거든.”
사악한 웃음기가 감도는 그의 말에 정태의는 두 가지 이유로 말을 잃었다.
다 자란 어른이 미운 놈의 아들에게 잘 걸렸다며 심술을 부리겠다는 저 유치한 심보도 놀라웠고, 또한 리하르트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서익에 살고 있는 젊은층들은 모두 미혼인 줄 알았다.
“결혼했어?!”
“결혼뿐 아니라 이혼도 했지.”
타인의 불행을 매우 범상한 어조로 말하면서―기분 탓인지 고소하게 여기는 느낌마저 들었다―크리스토프는 와인 빛깔 니트 셔츠를 골라낸다.
정태의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사회적인 지위며 성실함뿐만이 아니라 결혼에 이혼, 아이 등등의 인생 경험까지…….
경쟁심이란 건 거의 갖추지 않은 정태의였지만 어쩐지 같은 남자로서 몹시 뒤처진 기분이 들어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문득 불쑥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처럼 미친놈한테 찍혀서 테러범이 된 끝에 장기간 연금 상태에 빠지는 경험은 못 해 봤을걸.”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난 정태의는 딱 1초 뒤 그 자리에 슬슬슬 웅크리고 앉았다.
말하고 나니 더욱 좌절감이 들었다.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어이없는 바보를 보는 눈빛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동정과 위로의 눈빛이었던 모양이다.
“부인이 상변태짓을 견디지 못해 달아나 버렸다는 이혼 사유보다는 훨씬 낫네.”
“……. 그건 또 뭐야…….”
무릎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중얼거리는 정태의는 이미 마음이 비뚤어져 있었다. 저 인상 좋고 성실한 리하르트와 상변태라는 말은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거니와, 이미 비뚤어진 마음은 ‘나는 그 상변태짓을 견디지 못해서 달아나기라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구.’라고 목청껏 주장하고 있었다.
정태의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옷을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옷자락을 정돈하면서 크리스토프가 무심하게 말했다.
“힘내서 열심히 살아. 릭도 뭐, 따지고 보면 조건은 좋잖아. 얼굴 멀끔하지, 돈 많지, 힘 좋지, 게다가 그놈이랑 같이 있다 보면 어지간한 일은 다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되잖아?”
“…….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행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라고…….”
정태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인생이 암울해졌다. 아니, 원래 암울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나 버렸다.
애꿎은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현실을 개탄하고 있던 정태의는, 문득 옆에서 아무런 움직이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말끔하게 갖춰 입은 조각상이 그곳에서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나한테 올래?”
“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저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몰라 정태의는 엉겁결에 뜻도 안 통하는 외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입매만 약간 찌푸렸다. 그러나 불쾌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머쓱함에 가까운 투로,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연다.
“릭은 별로 물건이나 사람한테 크게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예전에도 몇 번, 저랑 같이 며칠 지낸 사람을 동료들에게 흔쾌히 넘겨주곤 했으니까. 그러니 아마 내가 적당히 말을 하면 나한테 보내 줄 것도 같은데.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어.”
정태의는 멍하니 눈만 껌벅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는 지그시 정태의를 마주보다가 옷장 안의 서랍을 열어 커프스를 꺼내었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면서 ‘싫으면 말고.’라고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프는 평연하기 그지없었다.
정태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머리를 벅벅 긁는 손길 사이로 ‘어이구…….’ 하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너는 애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는 정태의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보고, 정태의는 다시 어이구,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언뜻언뜻 느껴지던 미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지금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호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어쩌면 그럴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고 홀로 존재해 오는 동안.
“그래, 나중에 말이나 잘 해 주라.”
정태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누구를 떠나서 누구에게 간다는 류의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왠지 귀뚜라미 따위를 잡아다 놓고 칭찬을 바라는 고양이를 눈앞에 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손을 뻗어 저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이 닿으면 당장 싸늘해지던 얼굴빛이 손을 들기 직전에 머리를 스쳐 그만두었다.
크리스토프는 흠, 하고 중얼거리며 소매의 커프스에서 손을 뗐다.
누더기를 입어도 빛이 날 외모의 남자가 옷차림까지 완벽하게 갖추고서 거기에 서 있었다.
천사 같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려다가 정태의는 그 표현이 얼마나 낯부끄러운지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
사람은 가끔 자신의 과거에 의구심을 품을 때가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그 당시의 자신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주로 후회의 감정과 함께 다가오는 그 의구심을, 정태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때나마 그 얼굴이 천사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지, 나는?!”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거친 혼잣말은 실내에 공허하게 울렸다. 풀썩이는 먼지들과 함께.
먼지들은 입김에도 춤추며 책 위에서 허공으로 폴폴 날아올라 정태의의 눈썹이며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도로 먼지를 훑어내느라 손등으로 슥슥 얼굴을 문질렀지만 안 하느니만 못했다. 손에 이미 한 겹 덧칠되어 있던 먼지 따위가 아예 얼굴에 얼룩을 만들었다.
“어으, 눈 따가워…….”
그 결에 눈에 티끌이 들어갔나 보다. 정태의는 아예 흑흑 우는 시늉을 하며 손등을 바지춤에 한 번 문지른 뒤 눈가를 닦았다. 하지만 그 역시 안 하느니만 못했다. 어차피 이 방 안에는 정태의밖에 없었다. 우는 시늉을 하다가 본인만 머쓱해졌다.
방 안에 있는 건 정태의와 책을 가득 채운 책장뿐.
오로지 그 둘뿐이었다.
그러나 그 둘이―정확히는 책장이―좀 과장하자면 운동장처럼 넓은 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무런 규칙도 없이 들쑥날쑥하게 책이 꽂힌 그 수많은 책장들 한가운데서, 정태의는 책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손에는 크리스토프가 쥐여 준 국제십진분류법 메모를 움켜쥐고 있었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연관성……이건 900 역사겠지. 그럼 여기. 다음은 신화의 수수께끼. 이건 종교겠구나, 200번……아니지, 저자가 윌 클랜더라면 인문학 쪽일 텐데, 그럼 300 사회과학인가? 젠장, 읽어 봤어야 알지.”
정태의는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글줄을 노려보았다. 이건 사회과학, 하고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며 300번대에 꽂아넣는다.
이 짓을 오후 내도록 했다.
“이런 방면으로 정신 나간 인간은 우리 삼촌이랑 카일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이쪽은 한 술 더 뜨네……. 프로이트의 종교 이해와 정신분석의 미학적 고찰……미치겠다. 이건 어디다 분류해야 하냐.”
정태의는 책이라기보다는 논문집에 가까운 얇은 장정본에 머리를 박았다. 하드커버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책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과거 한때 집 전체를 책장으로 주욱 둘러 책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던 형에 비하면, 널찍한 방을 책장 몇으로 채운 정도는 나름대로 가볍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책들을 도서관 분류기호에 맞춰 일일이 정리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 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젠장, 그냥 작가별로 분류하란 말이야. 아니면 그냥 제목순으로 꽂든가……. 그냥 다 총류에 집어넣어 버릴까 보다.”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책을 마구잡이로 꽂아넣은 정태의는 바로 옆에 있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택 서익의 2층에 있는 이 개인서재는 오솔길로 이어진 구릉과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숲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적하고 푸르른 숲 쪽에서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말이 탁탁탁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말 위에는 그 하얀 말만큼이나 눈부신 인물이 하나.
점심 식사를 한 뒤 가볍게 근처를 돌고 오겠다며 말을 타고 숲으로 나갔다가 이제야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남은 실컷 일 시켜 놓고 저는 맘 편하게 승마…….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서익에서도 복도를 중심으로 서쪽 편에 위치한 이 서재는 오전에는 거의 볕이 들지 않았지만 오후로 접어들면서는 창 밖에서 볕이 드리웠다.
오후 느지막이 길어진 햇살이 숲에서 저택 쪽으로 비치고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타 해를 비스듬하게 어깨 너머로 걸치고 걸어오는 크리스토프의 하얀 뺨과 밝은빛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다시 봐도 얼굴은 천사 같네…….”
창백하도록 하얗던 뺨은 햇빛 탓인지 약간 혈기가 도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여전히 눈동자만큼이나 파랗고 서늘했다. 하지만 그 서늘한 표정마저, 말 그대로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는 무서울 만큼 잘 어울렸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 표정만을 지어 왔던 것처럼.
……하긴 생각해 보면 냉랭하고 싸늘한 얼굴만 주로 봤던 듯도 하다.
그때,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저택에 제법 가까운 데까지 와 있던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보자 그 삭막한 얼굴 그대로, 입 모양만 움직여 말했다.
다 했어?
그리고 그 입 모양을 인식하자마자, 정태의는 그 눈부신 외모에 홀려 잠시 잊고 있던 과업을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오늘 안에 과연 다 끝낼 수는 있을까 싶은 책 정리.
“아……정말 천사의 얼굴에 악마의 입이다.”
정태의는 유리창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아직도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미분류 책들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분명히 책 구경을 시켜 달라고는 했지만 결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크리스토프가 본관으로 가 있는 동안 하릴없이 서익 안을 어슬렁거리자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람이 몸이 한가하면 머릿속엔 고민이 떠오르는 법인지, 일레이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것이―그 뒤로 다시 베를린으로 전화해 봤지만 일레이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이쪽에서도 연락이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몹시도 불길했다.
서성거리는 걸음걸음마다, 역시 어서 돌아가는 게 최선이겠다는 생각만 머리를 맴돌았다.
그래서 본관에서 돌아온 크리스토프를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던 것이다. 책 달라고.
그러나 심각하게 말한다 해서 넙죽 줄 것 같았으면, 애초에 카일이 책을 빼앗길 일도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얼굴로 심상하게 정태의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정태의가 그를 뚫어져라 마주보며 꼼짝도 하지 않자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재주껏 찾아가 봐.’
‘그 책들이 어디 있는지 구경이라도 해야 찾든 말든 하지.’
‘…….’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흠, 가볍게 한숨을 쉬곤 ‘그럼 그러든가’라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대감을 품은 정태의를 이끌어 데리고 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2층에 있는 크리스토프의 개인서재.
‘잘 됐군. 마침 책을 좀 정리해야겠다 싶던 참인데. 십진분류법은 다 외우고 있지? 그럼 정리 잘 부탁해.’
대수롭잖은 심부름이라도 시키는 어조로 평연하게 말하면서 크리스토프가 가리킨 서재 안에는, 한 사람이 평생 걸려서 읽어도 다 못 읽을 것만 같은 방대한 양의 장서들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었다.
‘뭐? 아니 못 외……. 아니지, 잠깐. 내가 왜 이걸 정리해!’
멍하니 그 말에 넘어갈 뻔한 정태의는 벌컥 소리를 치며 항의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못 외워? 그걸 왜 못 외워?! 쯧. 그럼 적어 주지. 하위분류는 작가명순으로 하는 것 잊지 말고.’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메모지를 꺼내 분류법을 적어내리기 시작한 크리스토프에게 다시 정태의가 버럭 고함을 쳤지만, 크리스토프는 다 적을 때까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걸 내가 왜 정리해, 이걸 언제 다 정리해! 난 못해, 안 해!’
‘책 안 찾고 싶어?’
900 역사․지리, 까지 다 적은 메모지를 찢어내면서 고개를 든 크리스토프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싫으면 말고, 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정태의의 앞으로 크리스토프가 메모지를 내밀었다. 정태의는 그 메모지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받아들기 싫었다. 받아들면 그 순간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터였다.
‘못해?’
‘…….’
‘안 해?’
‘……결과는 책임 못 진다.’
정태의는 침울하게 중얼거리며 메모지를 움켜쥐었다. 바스락, 손 안에서 구겨지는 종이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안락이 구겨지는 소리였다.
“그런데……젠장, 그놈의 책들은 어디 박혀 있는 거야.”
정태의는 투덜투덜 욕설을 중얼거리며 이마의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거뭇하게 먼지 흔적이 남았다.
힘없는 손길로 책 몇 권을 집어올려 다시 분류기호에 맞춰 나누며, 정태의는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바깥에서 승마를 마치고 돌아와 마사 쪽으로 향하는 저 남자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외모를 배신하는 성격을 갖추고 있는 남자를.
정태의는 그런 남자를 하나 더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집안을 거니는 모습만 보면 나름대로 훤칠하게 잘생기고 세련된 남자이지만, 꺼풀 하나만 벗기고 보면 상종조차 해서는 안 될 인종. 이미 두어 달 남짓 못 봤지만 기억에서 희미해지려야 희미해질 수 없는 인간. 인생에서 한 번만 그 진상을 겪어 보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종자.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두어 달 연락이 없었으니.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마 전에도 연락을 하긴 했었지. 그것도 연락이라고 친다면.
마지막 연락의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 머리가 뜨끈뜨끈해졌다. 그러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아니 적어도 그보다는 이르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니면 리타에게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대답만 들은 그 남자가 무슨 패악을 부릴지 몰랐다.
설마하니 또 예전의 언젠가처럼 두 번 달아날 생각은 말라며, 죽여서 삼켜 버리겠다고 귀신같은 형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 테지.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냥 목을 분질러 버릴 것 같아서 두려운데. 사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자신의 시체를 씹어먹고 있는 일레이의 모습이 지나치게 상상이 잘 된다는 점이었지만, 정태의는 애써 그 섬뜩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아니다. 자신은 절대로 달아난 게 아니다. 비록 리타가 그 말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나, 정태의는 카일에게 미리 일러둔 말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는 사소한 오해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괜찮아.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달아날 의도로 나갔다고 그 녀석이 생각할 리는 없다니까. 그렇게 앞뒤 분간도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아.’
정태의가 못내 가엾은지 카일은 그렇게 말해 줬다. 정태의도 알고 있었다.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간이, 비록 미치광이 릭이라고 불릴 만큼 종잡을 수 없는 미친놈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을 지닌 인간이라는 건 이미 익히 알고 있다.
정태의가 그를 아는 만큼 그도 정태의를 알고 있으니, 정태의가 그럴 만큼 목숨을 아쉬워하지 않는 인물은 아니라는 점도 그는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로 죽여 삼키겠다고 들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설령 달아났다고 오해는 하지 않는다 해도 한바탕 회오리는 몰아치겠구나 싶었다.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재삼 짚어 둘 정도였으니, 정태의가 홀랑 집에서 나갔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성격에 순순히 ‘아, 그래?’라고 납득할 리가 없었다. 자칫하면 또 사람을 아주 쥐 잡듯이…….
“아, 몰라몰라. 알 게 뭐야. 그놈이 화를 내든 성질을 부리든, 까짓 것 맘대로 하라고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 ……. ……. 후딱 책을 찾아서 그놈이 돌아가기 전에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탈없이 넘어가겠지…….”
기세 좋게 외친 뒤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중얼거린 정태의는 스스로의 나약한 현실을 슬퍼하면서 책을 꽂아넣기 시작했다.
이 집에 온 지 고작 며칠.
벌써부터 이래서야 참 전도다난하다.
정태의는 거의 기계적으로 책을 분류해 넣다가―이제 구분이 잘 안 가는 책들은 무조건 총류에 넣는다든가 적당히 대충 넣어 두는 정도의 꾀를 피우는 요령은 생겼다―한 무더기의 책을 다 마치곤 어구구, 하고 기지개를 켰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다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내도록 했는데도 아직 분류를 다 못 마친 책들이 태산처럼 정태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대충 전체의 1/3은 넘게 한 것 같다.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 아직도 1/3이라는 점에서 암담해해야 할지, 혹은 뿌듯해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으며 그 책더미들을 바라보던 정태의는 이마며 콧잔등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방울을 닦다가 문득 자신의 옷이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땀으로 목욕을 했구만…….”
정태의는 축축하게 젖은 셔츠의 가슴팍을 팔락거렸다.
하긴 좁지는 않다지만 책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폐쇄된 방에서 열심히 종종거리며 책을 날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태의는 땀과 먼지가 뒤섞여 시커메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이 책들 가운데에는 필경 수백 불을 넘어서 수천 불쯤 하는 책들도 있을 텐데 이 손으로 건드리면 까맣게 지문이 찍히겠다.
“안 되지, 안 돼……. 샤워라도 하고 올까.”
손만큼이나 더러워진 바지에 습관처럼 손바닥을 문지르며 정태의는 책장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사선으로 비쳐드는 금색 햇빛 속에서 풀풀 날리는 먼지를 헤치고 문까지 저벅저벅 걸어나오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반짝, 노오란 빛 속에서 조용하게 춤추는 먼지들과, 그 속에서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책들. 그 속에 숨어 있는 피땀 어린 노고를 모른다면 제법 그럴 듯하게 보였다. 문득 마음이 좀 풀어진다.
돌아가면 카일의 서재도 말끔하게 정리해 줄까. 그쪽도 방대하기가 이쪽과 비등하지만 그래도 리타의 손길이 닿아 적어도 먼지는 없다. 그래, 카일에게 물어보고 괜찮다면 하루쯤 투자해서 말끔하게 정리해 줘야지.
그나저나 돌아가려면 책을 찾아야 한다.
정태의는 난감하게 책더미를 바라보았다.
여태 정태의가 정리한 책 가운데에는 카일이 말한 책이 없었다. 대충 훑어봤지만 미처 정리를 못한 나머지 책들 사이에도 없었다. 하긴 그렇게 허술하게 막 놓아둘 것 같진 않다.
과연 어디에 뒀을까. 여기 아니면 침실일 것 같은데. 하지만 크리스토프의 침실에는 이미 훑어본 바로는 그 책들이 없었다. 혹시 서랍 속 같은 데에 숨겨 놨으면 몰라도, 보이는 데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거야 여차하면 침실로 숨어들어 서랍장이나 옷장을 뒤적거리는 도둑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태의에게는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았다.
호기롭게 큰 소리는 탕탕 치고 나왔다지만, 가급적이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두 달 전에 집을 나가 종적이 묘연한―비록 가뭄에 콩 나듯 연락은 했다지만―일레이가 집에 돌아가기 전에 먼저 돌아가 있어야 그나마 경을 덜 칠 텐데. 다만 문제는 그놈이 언제 돌아갈지 모른다는 거지만.
“하지만, 말이지……. 인간 성격이란 게 이유도 없이 바뀌는 일은 별로 없거든…….”
정태의는 고개를 외로 꼬며 중얼거렸다.
사실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게 아니다.
아니 물론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생명과 신변의 안전이 걸려 있는 문제이니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지만, 뭔가 미묘하게 걸리는 것은 달리 있었다.
정태의 자체가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고 나간다 해도 그 동네 안에서 산책이나 하는 정도에 그치긴 했지만, 일레이는 정태의가 바깥출입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관여한 적이 없었다.
정태의는 감시받으며 집 안에만 갇혀 있는 죄수가 아니었고, 일레이가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정태의도 활동에 큰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정태의 본인이 굳이 멀리 나가려고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두 달 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훌쩍 집을 떠나기 직전 그는 스쳐가듯이나마 정태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었다. 한동안 얌전히 집 잘 지키고 있으라고.
며칠, 몇 주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는 그저 단순한 인사였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던 순간 느꼈던 미묘한 위화감을, 정태의는 아직도 기억했다.
“…….”
정태의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렇게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 있어도 머릿속은 명쾌해지지 않았다.
“에고……. 모르겠다. 뭐 설마하니 인생이 여기서 더 떨어지려고.”
더 이상은 떨어질 곳도 없어,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서재 밖으로 나섰다.
그래, 더 떨어질 곳이 뭐 있을까. 외부적으로는 수배범 신세요, 내부적으로는 인간실격과 나날이 조우하는 이 상황에서.
하지만 맞닥뜨리는 사람이란 게 집에서도 인간실격이요, 여기서도―방향성만 좀 다른―인간실격이라니 대체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정태의는 한탄하며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층 위, 3층 제일 안쪽의 손님방으로 가기 위해 중앙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한숨을 내쉰다.
어쨌든 급선무는 카일의 책을 찾는 거다. 그래서 일레이에게 걸리기 전에 잽싸게 집으로 귀가를…….
끊이지 않는 한숨을 삼키며 정태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봐야 해결되지도 않는 고민은 일단 접어두는 게 상책이다.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그럼 아마 저녁 시간이 될 테니 식사를 하고, 다시 서재로 돌아가 나머지 책 정리를 하는 게 주어진 과업이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중앙계단까지 몇 계단 남겨 뒀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얼핏 들리는 대화의 양상으로 보아 두어 명 가량인 듯했다.
그 소리를 듣고 정태의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껄끄럽다’였다.
이곳으로 온 지 며칠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 집 젊은이들의 양상은 이미 익히 파악했다. 딱 둘로 나뉜 패싸움이다.
외부에 대한 단결력은 엄청나게 좋다고 하지만, 정태의의 눈으로 본 그들은 편갈라 싸우기에 거의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크리스토프에게 시달리고 있는 정태의를 크리스토프 측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정작 정태의는 패싸움에는 털끝만치도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그 속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말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역시 상을 뒤엎는 게 아니었어…….”
얼마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상을 뒤엎어 한몸에 그들의 주목을 모은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적대시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다소의 악의도 포함해 ‘물불도 안 가리고 상부터 뒤엎어 버리는 상종 못할 놈’으로 찍혀 버렸다.
기껏 싸움판을 진정시켜 놨더니 이게 뭐람, 하고 투덜거려 봐야 이미 늦었다.
현실 속에서 정태의는, 이제 집 안을 오가면서 리하르트 쪽 인간들과 스칠 때마다 곱지 않은 시선과 욕설을 받고 있었다.
“어차피 길게 보지도 않을 거, 노려본다고 아픈 것도 아니고 욕이 배째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별로 유쾌하진 않단 말이지.”
정태의는 아래쪽에서 점차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혀를 찼다.
마주치는 사람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면 괜찮다. 대체로 연배가 있는 어른들은 본관과 동익에서만 오가기 때문에 서익에서 그들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지만, 실상 싸움을 부추긴 원흉이기도 한 그들은 사뭇 인자하게 웃으며 열심히 해 보라는 투였다. 하지만 연령대가 조금만 젊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태의는 리하르트의―또한 크리스토프의―아군이든 적이든, 두 쪽 다 내키지 않았다.
일단 패싸움이라는 것부터가 그의 성격과 맞지 않기도 했지만, 크리스토프를 친근하게 여기는 쪽이라도 괜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친한 척해서 거북했고, 그 반대쪽이면 적의감 어린 눈으로 노려봐서 거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외부인 축에 드는 정태의에게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어느 쪽이든 마주치기 싫은데…….
정태의는 머릿속에 스친 ‘껄끄럽다’는 감정에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늦추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래층에서 이 층으로 올라오는 이야기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소리가 두 층 사이의 층계참까지 이르렀을 때.
차라리 얼른 돌아서 도로 서재로 들어가 버릴까, 하고 막 걸음을 돌리려던 정태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
아래층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며 점점 뚜렷해지는 목소리는 낮고 조용해서 대화의 내용까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분명히 귀에 들어왔다.
잘못 들을 리는 결코 없는 목소리.
낮고 담담하며, 그 안에 얼음처럼 분명한 냉막함을 감춘 그 목소리는, 정태의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 ……?”
정태의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였다.
층계참을 돌아 이쪽으로 올라오는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어 계단 앞서 올라오며 뒤쪽에 선 남자를 향해 뭔가 말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정태의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지만 이곳에 온 뒤로 몇 번인가 본 적은 있는 얼굴이다.
리하르트 타르텐.
인상 좋은 얼굴이라고 평했다가 일레이에게 비웃음을 샀던 그 남자다. 동시에 정태의가 이 저택 안으로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던.
밖에 나갔다 이제 막 들어오는 참인지 말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있는 그는 오늘도 까만 복색이었다. 여전히 티끌만치도 음산해 보이지는 않는 산뜻함으로, 그는 인상 좋은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담고서 올라오고 있었다.
비록 일레이는 그를 두고 상변태라고 혹평을 했지만―별반 신뢰가 가지 않는 그 말을 크리스토프도 하긴 했지만―오늘도 여전히 그는 단정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도대체 저 신사적인 남자의 어떤 부분이 상변태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현재, 정태의에게 그 따위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서다가 정태의가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약간 놀란 듯이 시선을 멈추는 리하르트 타르텐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의 한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남자.
그와 뭔가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고개를 젓거나 몇 마디 대꾸를 하곤 하던 그 남자에게 정태의의 시선이 멎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어깨가 널찍한 체격 좋은 몸을 짙은 감색 양복으로 감싼 그 남자는, 마치 어느 대기업의 요직에라도 앉아 있는 듯 거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당당한 태도가 자연스레 배어나오고 있었다.
말끔하게 머리를 정돈하고 폭 좁은 뿔테 안경을 낀 그의 소매에는 은제 커프스가, 스트레이트 넥타이에는 은장 핀이 반짝인다. 어떻게 보면 패션계에 종사하는 고급 인력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날카롭고 섬뜩하다.
그 잘 벼린 칼날 같은 분위기를 제외하고 말한다면 유능한 신진 변호사쯤 되겠다고 여길 만한 그 남자는, 뿔테 안경을 익숙하게 밀어 올리며 리하르트의 뒤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넋을 잃은 듯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는, 그 눈길을 느끼고 천천히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
그 남자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혀끝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에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맞닥뜨리게 되면 말도 사고도 멎어 버린다는 걸, 정태의는 그때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리하르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올라오던 그의 얼굴에서도 순간적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나른한 비웃음에 가깝긴 했지만 어렴풋이나마 표정 같은 걸 띠고 있던 그는, 그 순간 완벽하게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있어선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어…….”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몽롱하게 정태의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금세라도 말이 나올 것 같은 혀끝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약간 달싹거렸을 뿐이다.
그때, 그 남자와 정태의의 사이에 서 있던 리하르트가 조금 더 먼저 말을 꺼내었다.
“크리스토프를 찾아온 손님이었지요. 아니, 크리스티나라고 했던가.”
정태의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그에게 멍한 눈길을 주었다.
“그는 잘 대해 주던가요?” 하고 재차 말을 잇는 그 푸근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태의는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역시 이 남자는 인간이 됐다. 만인이 정태의를 크리스토프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가운데―그 남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도―저렇듯 예의바르고 정중한 태도라니.
아니, 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
뭐야,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이 남자가 여기 있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쩐지 낭패봤다는 기분이 밀려왔다. 등줄기부터 밀려오는 선뜩함.
그러다가 문득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정태의를 보며 리하르트가 약간 머쓱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는 걸 보고 얼른 대답했다.
“예, 덕분에…….”
잘못 봤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 너무 과로를 한 탓에 헛것을 봤는지도 몰라. 그럴 만도 한 게, 그 인간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는 저렇게 말쑥하게 차려입은 실업가 같은 모습으로.
정태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런 김에 눈도 뻑뻑한 것 같아 눈꺼풀 위를 몇 번 누른다. 그러면 시야가 좀 제대로 돌아올 것 같았다.
“들어오면서 보니 그는 마사에 있는 것 같더군요.”
“아, 예……숲 쪽으로 산책을 갔다 온 것 같더라구요.”
정태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흘끔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웃음이 서린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다행히 피로로 눈이 어떻게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정태의는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어깨 너머로, 모르는 척 그냥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천천히,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그 남자의 시선은 냉담했다. 이미 조금 전에 스쳤던 그 놀람에 가까운 무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길가에 뒹굴고 있는 돌멩이를 쳐다보는 듯한 그 무심한 시선에, 정태의는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등줄기가 차가워졌다.
설령 눈앞의 이 남자가 정태의가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분명 이렇게 얼음장처럼 싸늘한 감각이 발끝까지 달렸을 거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저 무감각한 시선이라니.
정태의는 희미하게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럼에도 똑바로 그를 마주보았다. 시선을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면으로 닥쳐오는 시선을 마주하면서, 남자는 미미하게 눈매를 좁혔다. 어쩌면 심경에 거슬린 것도 같았고, 어쩌면 흥미로운 것도 같았다.
정태의의 거침없는 시선이 자신의 어깨 너머로 뻗어가는 것을 보고 리하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에 선 남자 역시 정태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선, 한 걸음 비껴서며 웃었다.
“이쪽은 크리스토프를 찾아온 손님. 며칠 전에 정문 앞에서 잠시 스친 뒤로 몇 번 마주치기는 했는데, 따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 아……그러니까 이름이…….”
리하르트는 그제야 정태의에게 이름을 물었다. 정태의는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눈동자만 흘끗 돌려 리하르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정―.”
“크리스토프의 손님이라.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하군.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기이할 정도야.”
그러나 정태의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고 했을 때, 리하르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한 걸음 다가서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내딛자, 손을 뻗으면 정태의에게 닿을 만한 거리가 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진청색의 얇은 가죽장갑이 정태의의 턱 아래로 다가왔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장갑을 낀 그 손.
그 손이 정태의의 턱에 닿기 직전에, 뒤에서 리하르트가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릭. 그만둬. 크리스토프의 손님이다.”
“그만둬? 이상한 말을 하는군. 마치 내가 이 자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 것처럼.”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지. 나도 너에 대해 조금만 덜 알고 있었더라면 그 손이 언제 내 목을 비틀까 유심히 지켜봤을걸.
이윽고 그의 손이 정태의의 턱을 쥐었다. 싸늘한 가죽의 감촉이 턱을 문지른다.
“크리스토프가 이런 자와 알고 지내는 줄은 몰랐는데.”
남자가 말하며 낮게 웃었다.
해석이 너무 잘 된다. 네가 크리스토프를 어떻게 알아.
“내가 신세진 분이 아끼는 책을 크리스가 빌려가서 그 책들을 돌려받으러 왔을 뿐이라서. ……그렇게 노려볼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애매한 말투로 대답하며 정태의는 자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해 보이지 않기만을 기원했다.
야……,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다. ……아니지. 따지고 보면 이놈이 없는 사이에 희희낙락 나왔다가 딱 걸린 셈이잖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엎어지고 싶었지만 간신히 버티고 서서 그를 마주보았다. 멋쩍게 웃어서 무마하고 싶은 얼굴에 포커페이스를 싣고 있기도 버겁다.
문득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입술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아랫입술을 덧그린 엄지가 살짝, 입 속으로 파고드는가 싶더니 곧 떨어져 나갔다.
“그렇군……, 이번 일을 마친 뒤 곧바로 한국으로 가 볼까, 어디부터 뒤집어 파헤쳐 볼까 했더니.”
아주 조그맣게. 마치 언뜻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정태의가 파랗게 긴장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아듣지 못했을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가 머릿속까지 다다르기도 전에 먼저 남자는 한 걸음 물러섰다. 정태의는 눈동자만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에 언뜻 웃음이 배어 있었다. 쥐를 잡아다놓은 고양이의 웃음이다.
“뭐……좋아. 나중에 천천히 소개받도록 하지.”
남자는 리하르트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그리고 고갯짓을 해 가던 길을 재촉한다.
“어쩐 일이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다 갖고.”
리하르트는 별 일을 다 본다는 듯 농담조로 말하면서 걸음을 옮긴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다음 기회로 넘기려는 듯 정태의에게 눈인사를 남기고 그의 뒤를 따르는 리하르트와, 몸을 돌리기 직전 미묘한 눈웃음을 남긴 그 남자는 곧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정태의는 그들이 층계참을 돌아 모습을 감출 때까지 망연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방에서 나올 때까지, 정태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몽롱한 머리로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눈을 뜨고 꿈을 꾼다면 이런 기분일까.
당치도 않은 곳에서 당치도 않은 인물과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맞닥뜨리는 기분은, 분명히 말을 섞고 체온까지 느끼고 지나쳤는데도 잠시 뒤에 생각해 보면 눈뜬 채로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혹시 나, 진짜로 눈뜨고 꿈꾼 것 아냐? 오늘 너무 지나치게 몸과 두뇌를 혹사해서 잠깐 선 채로 잠들었던 건지도 몰라.”
정태의는 아직 물기가 축축하게 남아 있는 머리를 계속 손가락으로 설렁설렁 털어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방 한가운데에 서서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파묻고 있다가, 어느 순간 으으으, 하고 고개를 세차게 내젓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가설을 세워 본다.
나는 꿈을 꿨다.
즉 저것은 일레이가 아니다.
“……그럼 그놈은 지금 어디 있어.”
제대로 된 결론을 내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의문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닿는다. 그 순간 다시 멍해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자신을 위로하던 믿음직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 태이. 설마 네가 그 녀석을 피해서 달아났다고는 그 녀석도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
위로라고 생각했다. 사색이 된 자신을 카일이 가엾게 여겨 위로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과연 그 말은 위로였을까.
―그 녀석을 피해서 달아났다고는 그 녀석도 절대로…….
“……생각 안 하겠지.”
생각할 리가 있냐, 하고 덧붙이는 것과 동시에 정태의는 깨달았다.
그 말은 위로도, 위안도 아니었다. 그저 작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알려주는 조짐,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와……, 진짜 세상에 내 편 없구나.”
정태의는 테이블에 엎드리고 말았다. 쓰라린 배신감과 함께 카일에 대한 원망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그야 물론 일부러 속인 건 아닐 거다. 어쩌면 속인다는 생각도 없었을 수도 있다.
일레이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일이라면, 굳이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하는 게 꺼려졌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차피 거기 가서 마주치면 알게 되겠지, 가볍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불시에 마주쳤을 때 그놈이 당황하지 않도록 내가 미리 잘 말해 주마, 카일의 말은 그런 의미였는지도 몰랐다.
“아냐……, 그래도 이건 충분히 원망해도 되는 일이야.”
이번에야말로 흑흑 흐느껴 울고 싶어졌다. 아예 테이블에 엎드린 김에 팔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 흑흑, 소리내어 본다. 눈물도 찔끔 나올 것 같았다.
흑흑, 흑흑, 계속 중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정태의는 조용히 침묵했다.
“……. ……아는 척하면 안 된다는 건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정태의는,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머리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것처럼 뜨악하게 아프고 몽롱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배는 고팠다. 오후 내내 서재에서 중노동을 했던 과거가 언뜻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일거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도.
“어쨌든 밥부터 먹고, 일부터 마저 하면서 생각해 보자…….”
정태의는 아련하게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방에서 나왔다.
걸음을 내딛는데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졌다. 갑자기 피로가 몇 배로 몰려오는 것 같아 ‘에구……’하고 한숨을 쉬며 목덜미며 어깨 언저리를 주물렀다.
흐느적흐느적 계단을 내려온 정태의는 식당으로 가기 위해 한 층 더 내려가려다가, 서재의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그리로 발을 질질 끌었다. 그리고 열려 있는 문 틈새로 낯익고도 얄미운 얼굴을 보았다.
크리스토프가 서 있었다.
책장 가운데 서서 팔짱을 낀 채 책장을 살피고 있던 그는, 정태의가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책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아직 정리 다 안 됐잖아. 왜 이쪽은―.”
“너 왜 그놈 있다고 말 안 했어.”
크리스토프의 말은 듣지도 않고, 정태의는 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이놈이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놈이 누군데.”
크리스토프는 도리어 눈살을 찌푸리며 사납게 되물었다.
그 순간, 멍하니 꿈을 꾸며 잠들어 있던 두뇌가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절절한 현실감이 다가와, 정태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일레이! 일레이 리그로우 말이다! 그놈을 봤단 말야, 좀 전에! 이 집에서! 저 계단에서!”
마치 유령을 봤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소리소리 지르는 정태의의 얼굴은, 정말로 유령을 본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탓이다.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펄펄 뛰는 정태의를 보면서 약간 눈을 크게 떴다. 뭘 잘못 먹었는지 몰라도 이놈이 이렇게 날뛰기도 하는구나, 딱 그런 얼굴이다.
“……. 몰랐어?”
잠시 침묵하다가 크리스토프가 되묻는 말에, 정태의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비록 현실감이 여실히 다가왔다고는 하지만, 머릿속으로 이 상황에 대해 그럴 듯한 원인과 결과를 이끌어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니길 바랐다.
백일몽을 꾼 거길 바랐는데. 이 집에 가끔 릭의 유령이 나온다고 말해 주길 바랐는데. 일말의 희망은 가지고 있었거늘.
정태의가 맨바닥에 주저앉아 땅을 짚은 채 넋을 놓고 있으려니, 그런 그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는 다시 평소와 같이 심드렁한 얼굴로 몇 걸음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두 달 전부터 이 집에 있었잖아.”
“…….”
“난 또, 책도 찾을 겸 그놈을 따라온 줄 알았더니. 설마 모르고 왔었어?”
“알았으면 누가 왔을까 봐!!”
때려죽여도 안 왔다. 하물며 나가 버리겠다고 그놈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한 직후에. 아니, 설령 알고서 왔다고 하더라도 리타가 일레이에게 자신의 외출 사실을 알렸다는 말을 들은 시점에서 당장 이 저택에서 백 리 밖으로 도망쳐 버렸을 거다.
정태의는 숨이 턱 막혀 어깨를 들썩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울어?”라고 물어서 “안 울어!” 하고 빽 고함을 지른다.
두 달 전부터.
그럼 집에서 나간 뒤 줄곧 여기에 있었다는 소리다.
애초에 여기서 리하르트를 봤을 때부터, 그가 일레이에게 무슨 의뢰를 했던 건지 확인해 봤어야 했는데.
“……왜 여기 있어.”
“승계자 결정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정태의는 고개를 들었다. 애꿎은―깊이 파고들자면 애꿎지만은 않은―크리스토프를 노려보며 부루퉁하게 묻는다.
“그건 또 뭐야.”
“이제 곧 어르신이 물러나시니까 타르텐의 다음 대 승계자가 나올 때가 됐단 말이지. 이십 년도 넘도록 경쟁을 해 온 후보자들 가운데서 승계자를 선택할 때, 오랜 맹우인 리그로우 쪽 사람의 의견도 들어보는 게 관습이야. 뭐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관습은 관습이니까.”
“웃기지 마.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저놈이 집안 일을 돕겠다며 착실하게 맡아서 한다고?!”
“그러게, 나도 카일이 오거나 여차하면 헬레나라도 미국에서 데려다놓을 줄 알았더니 그놈이 왔더군. 상당히 의외이긴…….”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손가락을 잘근거리다가, 문득 흘끗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
“…….”
침묵에 젖은 그 시선을 의아하게 마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이내 가만히 눈을 돌린다.
뭔가 미심쩍었다. 정태의는 도끼눈을 뜨며 크리스토프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할 말 있으면 얼른 하라고, 화살 같은 시선으로 말없이 재촉했다.
크리스토프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응?”
“너는 그놈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어? 왜 그렇게 난리야? 여기 있는 걸 몰랐다가 마주쳤으면 마주친 거지, 그렇게 사색이 될 이유라도 있나?”
이번에는 정태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토프는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다. 정태의에게 얼굴을 가까이 해 빤히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그놈이 아끼는 책이라도 훔쳤어?”
“내가 너냐!”
“아니면, ……아.”
갑자기 크리스토프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짧게 중얼거렸다. 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정태의는 불안스레 그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그 입술이 문득 아주 느슨한 곡선을 그리다가 멈춘다. 익숙지 않은 웃음이라도 웃는 것처럼.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지. 전생의 업보. ……업보를 피해 도망치다가 발목을 붙들리기라도 했나…….”
“도망 안 쳤어.”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알겠다는 듯 아하, 하고 중얼거린다. 눈매와 함께 그 입매가 다시 살짝 구부려졌다.
그 미묘한 얼굴을 보며 정태의는 문득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못 웃는구나. 웃음이라곤 비웃음조차 이렇게 힘들어하니.
“……너…….”
정태의는 물끄러미 그의 입을 쳐다보았다. 집게손가락을 뻗어 입 끝을 꾹 눌러서 위로 치켜올려 주고 싶었지만, 정태의가 손가락을 뻗자마자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허리를 폈다.
정태의는 손가락을 다시 거두며 입맛을 다셨다.
크리스토프는 웃음기를 지운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옆 책장에 가로로 꽂혀 있던 책을 빼내어 책제목만 흘끔 보곤 건너편 책장으로 걸어가 꽂아넣으며,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글쎄, 베를린으로 돌아간 뒤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그 녀석이 네게 무슨 해코지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꽂아넣은 책의 바로 그 옆에 있던 책을 빼낸 크리스토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꽂았잖아, 이건 철학 쪽이야.’라고 쌀쌀맞게 잔소리를 하며 그 앞쪽 책장에 집어넣는다.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버벅거렸다. 그냥 네가 정리하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겠다는 말과, 베를린으로 돌아간 뒤에는 모른다면 결국 걱정하라는 소리 아니냐는 말과, 왜 여기에 있는 동안은 해코지를 못하냐는 말 중 뭐를 먼저 해야 할지, 잠깐 혀가 꼬였던 것이다.
그, 베, 왜, 하고 더듬거리는 정태의를 돌아보며 크리스토프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흡사 모자란 사람을 보는 눈이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장 의문인 것부터 먼저 해결하자는 마음이 든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왜. 어디 감시의 시선이라도 있나?”
하지만 누가 감시한다고 해서 제 몸을 사릴 인간은 아니다.
정태의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의아한 빛이 떠오른 정태의를 보며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애매하다고 생각하며 분류해 꽂았던 책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새 자리에 집어넣었다. 즉, 애매해서 적당히 꽂아넣었던 책들은 죄다 자리를 잘못 찾았던 것이다.
“너는 지금 내 옆에 있고, 그놈은 지금 리하르트의 옆에 있으니까.”
“……응?”
크리스토프는 답답한지 혀를 찼다. 탁, 책을 꽂아넣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싫든 좋든 너는 내 소속이야, 여기에서. 아닌 것 같나?”
마지막 말과 함께 크리스토프가 흘끔 시선을 주었다. 정태의는 ‘그렇게 편 가르는 건 성에 안 맞는다니까.’ 하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분명 그의 말마따나, 현실적으로 정태의는 이 집 안에서 크리스토프 쪽에 서 있었다. 정태의 자신으로서는 선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여기고 싶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러면, 일레이는 리하르트의 편인가?”
정태의는 리하르트와 함께 제법 친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일레이를 떠올리며 어이없이 덧붙였다.
“그놈이 누구의 편을 들 위인은 아니었을 텐데.”
정태의가 아는 한 일레이 리그로우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편이었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릭은 중립이야. 그는 승계자를 판단 내릴 입장으로 이곳에 있는 이상 누구의 편을 들 수도 없어.”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저으며 딱 잘라 말했다.
“리하르트의 옆에 있다며.”
“그렇지. 승계 후보자인 리하르트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즉, 그는 모든 승계 후보자와 그 주변인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장의 제일 안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파묻혀 있던 책을 꺼낸 크리스토프는 그 책등으로 다른 손을 탁탁 두드리며 말을 맺었다. 지그시 바라보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정태의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러면 분명히 네 소속인 나에게 섣불리 해를 입히지는 못하겠군.”
그놈이 정말로 안 할지는 의문이지만,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흘끔, 시선을 치켜올린다.
“하지만 승계자를 판단 내리다니, 아무리 교분이 깊다 해도 지나친데, 타르텐과 리그로우.”
“음? 아―그렇지 않아. 의견을 묻는 사람은 열 명이야. 이 작으면서도 거대한 왕국을 물려받을 인간인데, 한 사람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야, 열 명이 모두 동등한 발언력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손을 내저었다. 정확히는 손에 든 책을.
“그 열 명 가운데 우리 혈족이 아닌 사람은 둘밖에 안 되니, 실질적인 결정력은 없다고 볼 수 있지. 말했잖아, 리그로우 가에서 사람을 불러오는 건 관습이라고. 그 사람이 반드시 릭일 필요도 없었어. 카일이든, 헬레나든, 혹은 그 집의 어른들이든, 직계 중 누군가이기만 하면 되었지.”
설마 릭이 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하고 덧붙이며 크리스토프는 픽 웃는다. 숨결만 내뱉을 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런 연유로, 입장이란 게 있는 만큼 릭은 여기에 있는 동안은 네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해. 물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도움이라……. 여기서 내가 그놈한테 도움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타르텐의 누군가에게서 돌려받아야 하는 책 상환이라든가, 뭐 그런 사소한 게 있을 수 있겠지.”
“……아.”
그렇구나, 하고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정태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일레이가 나선다고 해서 이 남자가 순순히 책을 돌려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카일의 책이라고 하면 일레이가 일부러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설 리도 만무했지만―, 그래도 정태의는 그런 가능성의 상실을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그러다가 그제야 문득 생각나는 사실이 있어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야. 여기에 책 없잖아.”
오후 내도록 땀투성이가 되어 이 서재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카일의 책을 찾아봤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책이 없다니, 너는 이 방을 가득 채운 이것들이 다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허, 하고 짧은 숨을 내쉰 크리스토프는 엄지로 자신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방대한 장서를 품고 있는 숱한 서가를.
“카일의 책이 없잖아.”
“카일의 책? 그거라면 다른 데 뒀지. 그 책들은 보관에 유의해야 하는 것들이야. 온도와 습도도 잘 맞춰야 하고 심지어는 빛에도 주의해야 하는데, 그런 책들을 여기에 둘 수는 없잖아. ……너는 정말로 책을 잘 간수해서 돌아갈 자신은 있어?”
크리스토프는 사뭇 걱정스럽게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놈이 사람을 고생은 고생대로 시키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딴소리 말고 책이나 빨리 돌려줘. 난 가능한 한 집에 얼른 돌아가 있어야……!”
정태의는 소리를 치려다가 도중에 입을 연 채로 말을 멈추었다.
“집에 얼른 돌아가야 한다? 왜?”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태의는 입을 열고서 눈만 껌벅였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 이젠 집에 얼른 돌아가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가장 피하고 싶던 인물 본인과 정통으로 맞닥뜨려 버린 이상, 이미 버린 몸이었다.
“…….”
눈앞에서 크리스토프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연유를 모르겠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왜? 하고 떠들어 댔지만 그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태의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어쩌면 전생의 업보가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뜸하게나마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이 상황에는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한국에 잠시 돌아가 봐야겠다…….”
정태의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 조그만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크리스토프가 허리를 구부려 정태의에게 몸을 내밀었다.
“심신이 지치니까 고향이 그리워져서?”
“……굿을 알아봐야겠어…….”
“굿? 그게 뭐야?”
“…….”
***
이 저택에 온 날 설명을 들었던 대로, 정태의가 본관에 갈 일은 거의 없었다. 동익에는 한 번도 안 가 봤다.
구조는 대충 알고 있었다.
외부와 연계되어 있는 대외적인 일―작게는 손님맞이에서부터 크게는 사업에 이르기까지―이나 혹은 집안 내부의 총괄적인 관리를 처리하는 대부분의 기능은 본관에서 맡아보고 있었다. 저택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개인적인 공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본관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반면 동익과 서익은 직계와 방계의 구별 없이 혈족들이 머무르며 쉬는 곳이었다. 잠을 자고, 쉬고, 씻는, 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동익과 서익은 각각 연배가 있는 층과 젊은층이 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 기능은 흡사했다.
장기간 묵어가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귀한 손님은 동익에 방을 내어주고 그렇지 않은 손님은 서익에 방을 내어준다는 말을 듣고 정태의는 잠깐 투덜투덜했지만, 정태의가 머무르는 서익의 객실도 충분히 편안했기에 불평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곤 해도, 바로 얼마 전까지 같은 집에서 뒤섞여 살던 사람인데 하나는 귀빈으로 동익에 묵고 하나는 심부름꾼으로 서익에 묵다니, 그러면 좀 빈정 상하지.”
정태의는 서익 앞, 본관과 동익이 건너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토달토달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저만치 본관의 중앙현관으로 양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나왔다. 계단 바로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가면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정태의는 괜히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엉덩이 높이까지 오는 관상수 뒤로 숨다시피 했다.
숨을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그 남자 중 하나가 훌쩍 큰 키에 늠름한 체격이라, 멀리서 얼핏 보기에 일레이와 비슷해 보였다.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냐, 서익에 묵길 잘했지. 동익에 방을 얻었어 봐. 같은 건물 안에서 어디 제대로 다니기나 할까.”
정태의는 또다시 토달토달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았다.
그 대낮의 악몽 같은 현실을 조우했던 날, 당장이라도 험한 꼴을 볼 각오를 하고 방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날이 다 가도록 일레이는 정태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다시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 뒤로 먼발치에서 두어 번 보았을 뿐, 말을 섞을 만한 거리를 두고 스치는 일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정확하게 중립에 서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관찰만 하는 것처럼, 일레이는 정태의에게는 물론이고 서익에 있는 다른 주변인물들에게도 다가오는 일이 없었다. 승계 후보자가 아닌 크리스토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동익에서 머무르며 기본적으로 동익과 본관에서 주로 움직이는 일레이와 서익에서 배회하는 정태의가 맞닥뜨릴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비록 불안감 때문이기는 했지만 오늘 들이닥칠까 내일 들이닥칠까 두근두근하면서 기다리고 있던 정태의로서는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하긴 마주쳐서 별로 좋을 건 없나?”
정태의는 벤치 뒤로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마주쳐서 별로 좋을 건 없는지도 몰랐다. 정태의에게뿐만 아니라 일레이에게도.
마주쳤던 때, 순간적으로 표정이 사라지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놀람과 함께 희미하게 찌푸려지던 얼굴.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데 있다는 듯한 그 빛은, 정태의의 얼굴에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뒤로 먼발치에서 보아도, 그럴 때마다 정태의만이 아니라 일레이도 이쪽을 보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음―. ……모르겠다. 하긴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언제부터 알았다고.”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나요?”
정태의의 뒤편, 서익의 좌편 현관 쪽에서 다가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넋 놓고 있다가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도 듣지 못하고 있던 정태의는 움찔하며 바로앉았다.
아직 적당한 거리가 있긴 했지만 얼마 떨어지지도 않아 말 정도는 소리높이지 않아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어느새 리하르트가 있었다.
“……아.”
인사를 해야 했겠지만 정태의는 엉겁결에 짤막한 외마디 소리만 내고 말았다.
오늘도 새벽같이 완벽한 차림으로 외출하는 걸 봤는데―물론 그 전에 정태의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때 그는 이미 새벽운동으로 한바탕 뛰고 돌아오는 모습도 봤다―점심이 되기 전인 이 시간에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여느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정장이 아니다. 분명히 정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게 몇 시간 전인데 그는 어느새 가벼운 셔츠와 면바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마치 오늘 아침에 정장을 하고 나간 적은 없다는 듯이.
“아까 나가시는 것 같았는데……오늘은 빨리 들어오셨군요.”
그러고 보니 정태의가 크리스토프의 편인 줄 알면서도―이 집 안에서 크리스토프 측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로지 정태의 본인뿐이었다―한결같은 태도로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대해 주는 사람은 이 남자뿐이었다.
역시 인간이 됐어, 훌륭한 인격자야,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걸던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웃는 얼굴 그대로 딱 굳어 버렸다.
리하르트의 뒤로 조금 떨어져 있는 곳, 서익 좌편 현관 쪽에서 막 나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마주쳐서 서로 별로 좋을 것 없는 듯하다’고 중얼거렸던 그 남자, 일레이가 계단 위에서 구두코로 바닥을 톡톡 차 구두의 상태를 약간 가늠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리하르트의 뒤쪽으로 다가오는 일레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 역시 별 내색 않고 그를 마주본다. 양반은 못 될 놈, 하고 속으로는 중얼거렸지만.
“두 분은 꽤 자주……같이 다니시나 봐요.”
정태의는 리하르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리하르트는 곧 어깨 너머를 돌아보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다지 그렇지는 않은데요.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제게는 저의 일이 있으니까……. 가끔 서로 일이 겹쳐서 의견을 나눌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 본 모양이죠.”
리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뒤로 여유로이 다가오는 일레이도 그들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슬쩍 눈썹만 까딱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태의는 그런가 보군요,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마주친 거지, 실상 그들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건 이걸로 겨우 두 번째다.
오늘도 저 어느 증권가 언저리에 던져놓으면 어울릴 법한 말쑥한 차림으로, 일레이는 다가오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의 선뜩한 빛을 가리고 있는 저 뿔테 안경이 몹시 낯설다.
나가면 죽는다.
그렇게 말한 입은 분명히 저 입이었을 텐데, 지금은 닫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위험 상시 대기 중,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애써 리하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일레이와 마주보았다간 눈싸움이라도 할 것 같다.
“그런데 바로 몇 시간 전에 나가시는 걸 본 것 같은데 어느새 들어오셨어요. 옷까지 갈아입으시고.”
“아아. 곧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니까요.”
“아이들―아. 리하르트도 뭔가 가르치시나요?”
“가르친다기보다는 그냥 데리고 놀아 주는 정도지요. 영리하고 사랑스런 아이들이라 즐겁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눈웃음을 짓는 그는 인격자가 틀림없었다. 바로 두어 시간 전에 귀찮고 성가시다는 빛을 풀풀 풍기며 본관으로 향한 누구랑은 참 비교된다.
시계를 보니 곧 크리스토프가 아이들 상대를 마치고 나올 때가 되었다. 아마도 바로 그 다음 텀으로 리하르트가 아이들을 맡는 모양이었다.
“어떤 걸 가르치시는데요?”
“하하, 가르친다고 거창하게 말할 만한 건 없고, 대인관계론이나 협상, 교섭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과연, 이 남자가 가르칠 만한 주제다. 누구의 인선인지는 몰라도 적절하게 잘 뽑았다.
정태의는 눈앞에서 서글서글하게 웃음 짓고 있는 리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다시 봐도 닮기는 엄청나게 닮았구나. 이목구비 자체도 그렇지만 표정 같은 게 정말 찍어낸 것 같다.
“?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정태의가 지나치게 뚫어지게 보았나 보다. 리하르트는 약간 눈을 크게 뜨더니 멋쩍게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태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참 많이 닮은 부자간이다 싶어서요.”
“아아. 올리버를 보셨습니까?”
리하르트는 잠깐도 의아한 빛을 띠지 않고 웃었다. 아마도 수없이 들어서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조금 전에 보았던 그의 아들을 떠올렸다.
크리스토프가 본관으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일주일에 두 차례 있는 그 짧은 여유를 즐기며 맥주와 책을 끌어안고 방에 앉아 있던 정태의는 갑작스런 전화가 와 본관으로 끌려가야 했다. 크리스토프가 필요하다고 말한 책가지를 챙겨다 주기 위함이었다.
본관의 2층 서편 끝에 있는 작고 아늑한 방에 그들이 있었다.
크리스토프가 일러주었던 방에 들어가자 다섯 쌍, 크리스토프까지 해서 여섯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쏟아졌다.
정태의는 그곳에 들어서던 걸음을 멈추었다.
좋은 집안에서 맛있는 것 잘 먹고 즐겁게 잘 놀며 자란 탓인지, 아이들이 하나같이 예뻤다. 반원형으로 둘러앉은 가운데 크리스토프가 테이블에 기대어 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화폭에 담아야 할 것 같은데.’
그 자체가 이미 한 장의 그림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에게 책을 건네어주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낯선 사람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착하게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만 주고 바로 휭하니 나가기도 좀 뭣해서 정태의는 아이들을 칭찬해 주기로 했다. 눈길은 그들에게 주며 입으로는 크리스토프에게 말한다.
‘애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잘생겼네. 귀하게 잘 자라서 그런가 보다.’
‘집안에 돈이 많아서 다들 배우자를 미인으로 골라잡으니 그렇지.’
크리스토프가 무뚝뚝한 어조로 서슴없이 대답하는 말에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령 그 말이 그 나름대로는 타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번연히 듣고 있는 앞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이놈은 역시 범상찮아, 세간 일반상식에 대한 사고의 틀이 아무래도 범상찮아, 정태의는 돌아서서 크리스토프에게만 보이도록 인상을 쓰며 입모양으로 ‘야!!’ 하고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이나마 벌컥 소리를 치자, 크리스토프는 잠시 뭘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윽고 흠, 하고 한숨을 쉬곤 평연한―아이들에게 들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목소리로 말했다.
‘정태의. 너는 이 아이들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어. 봐라, 얘들이 몇 살로 보여. 열몇 살은 되었어. 이 나이대에, 여기서 이렇게 특수 분야에 대한 조기교육까지 받고 있을 만한 애들이, 과연 네가 생각하는 ‘아이들’일까?’
굳이 설명을 해 주는 것도 지겹다는 듯이 느릿느릿 말하는 크리스토프의 말은 이번에도 그 나름대로 타당하게 들렸지만, 그래도 정태의는 그에게 그 입 그만 다물라고 눈짓을 하곤 슬쩍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서 자기네들끼리 눈짓을 하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귀여운 면면들을 보고, 정태의는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무섭게 똑똑한 아이들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좋게 받아들여질지, 상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지라도 어떻게 하면 탈 없이 무마할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른들의 사랑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어린아이들의 본능적인 생존술인지도 모르지만.
‘크리스토프의 친구분인가요?’
귀여운 목소리로 제일 먼저 말을 꺼낸 아이는 가장 오른쪽에 앉아 가장 열렬히 정태의를 관찰하던 여자애였다.
꼭 달콤하고 고소한 버터쿠키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크리스토프가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태의도 그 얼굴을 보곤 그를 이상하게 마주보았다. 왜? 하고 눈으로 묻자 크리스토프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크리스토프의 친구는 처음 봤어요.’
‘나도, 나도.’
‘크리스토프와 사이가 나쁜 사람이라면 많이 알고 있는데.’
‘나도 알아! 올리버의 아빠!’
‘올리버의 아빠가 뭐야. 리하르트지.’
봇물이 터진 것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꼭 다물고서 똘망똘망하게 정태의를 쳐다보기만 하던 아이들이 와르륵 말을 쏟아내었다.
‘하나도 안 궁금하면서 궁금한 척하지 마. 그래 봐야 공부할 시간 안 줄어든다. 지금 노는 만큼 시간 추가돼.’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리자 아이들은 삽시간에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는 다시 한번 뜨악한 심경으로 눈동자만 굴려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중 한 아이의 얼굴 위에서 시선이 멎었다.
어딘지 낯익다, 라는 생각이 제대로 떠오르기도 전에 먼저 깨달았다. 그 얼굴이 누구와 꼭 닮았는지.
그렇구나. 올리버의 아빠 리하르트. 리하르트의 아들 올리버.
리하르트와 똑같이 생긴 어린 남자애가 거기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생김새며 표정, 분위기에다 심지어는 기분 탓인지 책을 들고 있는 손모양마저 똑같아 보였다. 리하르트가 저 나이 때 딱 저랬겠다 싶은 외양이었다.
‘우와…….’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피는 속일 수 없다지만, 저 정도까지 닮으면 대체 부인의 피는 어디로 간 거냐고 도리어 당황스러워질 정도다.
정태의가 왜 놀라는지 아이 본인도 눈치챈 듯 담담하게 웃었다. 그 얼굴도 제 아버지랑 똑같았다.
‘성격은 딴판이야. 그놈은 재수 없지만 걔는 그래도 좀 낫거든.’
정태의가 감탄하는 이유를 알아챈 또 한 사람인 크리스토프도 말했다. 그 무심한 말에 정태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리하르트를 꼭 닮았으니까 혼쭐을 내 줘야겠다는―겉으로 한 말은 조금 달랐지만 속뜻은 이거였다―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대단히 온건했다. 말한 사람이 크리스토프이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리하르트의 아들이란 걸 생각하면, 저 ‘좀 낫거든’은 ‘아주 착해’로 들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 역시 다 들리게 대놓고 말한 크리스토프를 눈짓으로 야단치며, 정태의는 올리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네 아버지도 좋아한단다.’
저놈이 네 아버지를 욕하든 말든, 하고 속으로 덧붙이며 말하자 올리버는 순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목소리도 어른스럽다.
옆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 돌아가, 하고 내뱉는 목소리가 쌀쌀맞다. 나는 너든 리하르트든 중립이라니까, 하고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정태의가 말했지만 크리스토프의 얼굴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때 소년은 갑자기 뭐가 우스운지 약간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소년다운 수줍음이 엿보이는 그 모습을 보며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제 아버지도 좋아하신다면, 크리스토프‘도’ 좋아하시겠네요.’
제 아버지와 크리스토프의 대칭 구도는 이미 소년도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상냥하게 하는 말에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옆에서 크리스토프도 입을 다문다.
정태의는 흘끔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럼, 좋아하지.’
비록 날 좀 구박하긴 해도, 하고 속으로 덧붙이긴 했지만 그 말은 입에서 순순히 나왔다.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정태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이 제법 맵다.
‘난 안 좋아해. 그만 돌아가. 네가 시간을 다 잡아먹고 있잖아. 방해된다고.’
말을 붙일 여지도 없을 만큼 쌀쌀맞은 그 말에 정태의는 ‘성질머리하곤…….’ 하고 투덜거리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귀여운 아이들의 나긋나긋한 인사를 받으며 나오는 통에 기분은 금세 좋아졌다.
아이라. 아이도 좋구나.
정태의는 아이를 좋아했다. 친구나 아는 사람 집에 가거나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놀이터로 들어섰을 때 등, 어린애와 부대낄 일이 있으면 그들과 즐겁게 놀았다. 아이들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노는 것도, 싸우는 것도 보고 있으면 흐뭇하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그 생각을 의식적으로 떠올리고 보니까 한둘셋쯤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평소에 그리 간절히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이미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그래도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으니 사랑스럽구나, 그렇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아이가 자신과 꼭 닮았다면 정말로 얼마나 귀여울까.
“좋으시겠어요.”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리하르트의 얼굴을 구석구석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리하르트는 예, 좋죠, 하고 팔불출 아버지의 대사를 하며 웃었다.
“건강하고 착한 아이예요.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늘 부인에게 고마워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결혼은 아직 안 하셨나요?”
정태의는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려 해 가슴께를 주먹으로 문지르며 “그렇죠…….” 하고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 뒤의 일레이에게 흘끔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레이는 그 시선을 깨달은 듯 눈썹을 치켜올린다. 문득 그의 입가에 흐릿하게 웃음 비슷한 뭔가가 떠올랐다. 기분 탓인지 그 표정이 비웃음과 몹시 흡사해 보였다.
어? 비웃어? 갑자기 울컥한다.
물론 정태의는 원래부터 결혼이라는 제도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성벽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비웃음을 사면 욱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저 뒷분은 결혼 안 하신답니까?”
정태의가 갑자기 삐딱하게 묻자 리하르트는 설마 그런 질문이 날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조금은 당혹스런 빛을 띠며 일레이를 돌아본다.
“아, 그는 이미 애인이 있어요.”
“……. 아, 그래요?”
정태의는 예?! 라고 되물을 뻔하다가 겨우 억눌렀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일레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부담스러워 할 위인이 아닌데도 일레이는 이놈이 뭘 봐, 하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다.
애인이 있는 주제에 사람을 그렇게 집에 붙박아 두냐는 의문이 1초쯤, 드물게 며칠씩 일하러 갈 때 빼고는 늘 집에 있는 인간이 어느새 애인을 두었냐는 의문이 1초쯤, 그 애인이랑 결혼하면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뭘 하고 살까 하는 인생계획 1초쯤.
고개를 끄덕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고민의 시간 3초가 지나고 갑자기 깨달음의 때가 닥쳐왔다.
……아. 저거 혹시.
그와 동시에 일레이가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앗, 잠깐, 말하지 마, 굳이 말할 필요 없―.
“과연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쪽이 내 결혼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황급히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정태의의 그 필사적인 눈짓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레이의 말이 냉정하게 그 입술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이 벤치에서 일어나 백 리 밖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폭풍처럼 치솟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한 뼘쯤 물러앉았다.
그것 참 축하할 일이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정태의는 고개를 숙였다.
과연 그 같이 산다는 애인에게도 축하할 만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자신이 이 몸을 희생해 누군가를 구원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몰려왔다. 조금 뿌듯해졌지만 이내 허무해졌다.
그 가운데에서 이 기묘한 침묵을 알아채지도 못한 듯 리하르트는 웃으면서 계속 불출산의 정상을 밟고 있었다.
“이번에 승계 후보가 된 아이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어 걱정도 많이 되었는데, 다행히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것 같더군요. 원래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놓았어요.”
정 많고 따뜻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팔불출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정태의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이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부모가 보기에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게 자식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그렇게 착하고 영리한 아이라면 오죽할까.
정태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크리스토프를 생각했다.
그렇게나 아름답고 똑똑하니 필경 그 역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겠지―아니 그 성격을 보면 다소 의심이 가긴 하지만 최소한 어릴 적에는 그랬겠지―. 그리고 이번에는 장차 그가 아이를 얻게 된다면, 그 아이도 틀림없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일 거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표정 없이 모든 것이 허무하고 따분한 얼굴로 그렇게.
“……아이가 있으면…….”
그러면 달라질까. 그렇게, 어딘지 알 수 없이 아슬아슬하고 불안스러운 그 느낌도.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그는 달랐다. 어떤 점이, 어떻게?
정태의는 묵묵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있으면 좋겠나?”
그때 불쑥, 낮은 목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정태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몇 걸음 앞에서 일레이가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태의는 아니, 하고 손을 내저었다. 잠시 크리스토프를 생각하다가 어느새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갔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 아이는 싫어하진 않지만―.”
“사람에 따라 다를 테지만 나는 권하고 싶은데.”
리하르트가 말을 섞는다. 아들이 생각만 해도 사랑스러운 듯, 눈가에 웃음이 돈다.
“너는 별로 생각이 없나 보지?”
리하르트는 일레이에게 물어본 뒤에야 괜히 말했나 싶은 얼굴을 아주 잠깐 했다. 아버지가 된 일레이라는 게 영 상상이 안 가는 눈치였다.
그래, 나도 상상이 안 간다, 하고 정태의가 흘끔 일레이를 보았다. 그는 별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본 바가 없으니 좋고 싫고 할 것도 없어.”
“흠. 너랑 같이 살고 있다는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 아이에 대한 건 서로 생각이 맞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리하르트가 일레이에게 말을 하는 동안, 정태의는 일종의 감개무량에 젖어 있었다.
일레이가 누군가와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모습을 언제 또 볼까 싶었다. 정태의가 들어본 한 그가 다른 사람과 하는 이야기라곤 일 이야기나 사회 정세 이야기 같은 게 대부분이었다. 퍽 삭막하고 건조한 대화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 밀착형 대화라니, 매우 신선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정태의는 잠시 일레이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 위에 감돌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이라……. 글쎄, 그쪽이 갖고 싶어한다 해도 별로…….”
“하하, 그러다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얻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실제로 내 아는 친구 중에 그런 경우가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아이를 얻어온다? ……그건 마음에 안 드는군.”
일레이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정태의는 차차 그 이야기 내용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아이고 뭐고, 서로 다른 상대를 꿰차지 않는 한 둘 다 인연이 없는 이야기다. 결혼이라고 하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래도 어딘가 동성혼이 허용되는 나라에 가면 되겠지만―일레이와 누군가의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엄청난 위화감이 밀려왔지만―, 아이는 입양이라도 하지 않는 한 애초에 무리다.
그리고 사실, 정태의가 아이를 좋아한다 해도 굳이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좋은데, 하고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한들 우스운 꼴만 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다른 데 가서 아이를 얻어올 바에는 차라리…….”
일레이는 말꼬리를 끌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공을 떠돌던 시선이 다시 정태의의 얼굴 위로 흘끔 떨어져, 정태의는 공연히 선뜩해지는 팔을 슥슥 문질렀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애가 생길 때까지 해 보는 편이 낫겠군.”
일레이는 심상하게 말을 맺었다. 눈 하나 까딱 않고 그 말을 마친 순간, 정태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해 보다니 뭘.
평생 줄기차게 해도 생길 리가 없잖아.
갑자기 머릿속에 불온한 상상이 떠올랐다. 어디 한 번 아이가 생길 때까지 해 보자며 다가오는 저 남자.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싹 가셨다.
“아니 하지만―일단 그런 이야기도 먼저 물어는 보고 해야지. 또 누가 알겠어, 그 상대가 절대로 애는 바라지 않는 사람인지.”
정태의는 재빨리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열렬한 기세로 끼어든 정태의를 리하르트는 다소 의아하게 보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주었다. 그 옆에서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던 일레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정태의는 불안과 공포로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럼, 그럼, 하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 정태의를 다시 한번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본 리하르트는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한다는 투로 일레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고 해서 놀랐어. 나는 네게 그런 사람이 생길 줄은 정말로 생각도 못했거든.”
“우연이군. 나도 생각도 못했어.”
“그래, 그러고 보니 요전에 갔을 때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하는 걸 까먹었지. 다음에 소개시켜 줘.”
“그러지.”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구다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으면서, 정태의는 어쩐지 엉덩이 아래로 벤치에 바늘이 돋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언제 또 듣기에 무서운 화제가 튀어나올지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못 견디고 슬쩍 일어서고 만다.
“그럼 저는 이만……. 나중에 귀여운 아드님께도 안부 전해 주세요.”
“예, 그렇게 하죠. 아, 그러고 보니 계속 여쭤보지 못했군요. 성함이……?”
리하르트의 말을 듣고서야 정태의는 그에게 자신을 소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 하고 가만히 되짚어보니 그에게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그래도 몇 번쯤 이야기는 나누었는데 왜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을까,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아버지!”
아, 그래, 그래, 이래서 말을 못했었다. 말을 하려고만 하면 꼭 이렇게 방해가 들어왔었다.
정태의는 갑자기 끼어들어온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았던, 리하르트와 똑같이 생긴 소년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본관의 서편에 있는 현관으로 아이들 서넛이 더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그들을 보며 못마땅한 얼굴을 한 크리스토프.
“여기서 뭐하고 있어.”
크리스토프는 리하르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똑바로 정태의만 쳐다보며 다가왔다. 일레이에게는 잠깐 시선을 향하긴 했지만 그조차 잠시다.
그러고 보니 이 둘도 친구 아니었던가. 옛 동료에.
“응? 뭐 그냥 쉬고 있던 참이지.”
“나한테 책 갖다주고 두 시간이나 여기서 계속?”
정태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두 시간이나 여기서 계속 앉아서 하늘구경 땅구경 하고 있었다고 하면 또 무슨 말이 날아올까, 상상하기도 귀찮아서 어물어물 둘러댄다.
“아냐, 방에 들어가서 책 좀 읽다가 좀 전에 나온 거야.”
“……. 본관 2층에서 여기는 다 보이는 위치다.”
싸늘한 눈빛과 함께 날아오는 말에 그제야 움찔하며 본관을 쳐다보자, 확실히 크리스토프가 아이들과 있던 본관 서편의 2층 끝에 있는 방은 이곳에서 거의 정면으로 보였다.
“어……보였어?”
“언제쯤 사라지나 보고 있었지. 끝까지 넋 놓고 앉아 있더군. 신발끈까지 풀어헤치고.”
그걸 뭘 보고 있나, 아니 그보다 넋놓고 좀 앉아 있으면 어때, 하고 입속으로 중얼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문득 고개를 기웃했다.
“자세히도 봤다…….”
그제야 신발끈이 풀어진 걸 보고 웅크리고 앉아 투덜투덜 고쳐매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 위가 따가워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일레이가 지그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손가락이 툭, 툭, 팔뚝을 두드린다.
난 저놈이 저러면 어쩐지 무섭더라, 하고 생각하면서 구두끈을 묶고 있는 정태의의 머리 위로, 크리스토프의 얼음 같은 시선이 리하르트를 향했다.
“이놈은 왜 건드려. 무슨 수작이야.”
평연하게 말하지만 말투는 거칠다. 그 뒤에서 정태의가 ‘아니 그냥 인사나 한 것뿐인데…….’라고 중얼거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물어본 것도 수작인가?”
리하르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늘 웃음을 띠고 있는 그의 얼굴에 드물게도 웃음기가 없었다. 여전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눈매는 차갑다.
과연, 사이가 안 좋기는 안 좋은가 보다.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수작이지. 네가 이놈을 부를 일이 뭐가 있다고 이름을 물어.”
크리스토프가 딱 잘라 말했지만, 리하르트는 그를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정태의를 바라본다.
“그래서, 뭐라고 부르면 되지요?”
정태의는 잠시 침묵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려 정태의를 향하고 있었고, 그의 어깨너머로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이쪽을 보고 있는 일레이가 있었으며, 그 옆쪽에는 크리스토프가 이마에 핏줄을 떠올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몹시 썰렁했지만 여기서 자신이 대답을 안 해서 상대를 우스운 꼴로 만들 수도 없어,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저는 저―.”
“재수 없어.”
크리스토프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 이름 재수 없다, 라고 하던 때와 똑같은 투로 말하며,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정태의는 입을 벌린 채로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남의 이름에 트집도 참 많이 잡는다.
정태의는 벌렸던 입으로 다시 쩝쩝 입맛을 다셨다. 영 씁쓸한 맛이 감돈다.
“김……영수입니다.”
그 이름을 말하면서, 정태의는 일레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썼다. 그 이름을 듣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표정을 할지, 생각도 하기 싫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의 쓰라린 추억이 떠오르는 탓이다.
그래, 이 이름을 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이름도 과히 재수 좋지는 않았어. 결국은 걸렸잖아.
그러나 굳이 일레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리하르트에게 고정시켰다고는 하나, 시야 한끝에서 일레이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는 건 보였다. 피식 웃는 듯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것도 보인다. 옌장.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정태의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돌아서서 리하르트와 일레이를 마주본다.
마치 대치하듯이 서 있는 구도에서, 정태의는 홀로 이 상황을 몹시 거북해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삭막한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정태의는 눈을 어디에 둘까 고민하다가 문득 리하르트의 뒤쪽에 한 걸음 물러서서 서 있는 일레이를 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크리스토프를 보면서, 팔짱을 껴 팔을 쥔 손가락을 천천히 까닥거린다. 그 표정 안쪽으로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장하게 마주선 구도라니 꼭…….
“무슨 2대 2 데스매치라도 하는 것 같군.”
저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다.
정확하게 마주보며 대치한 두 남자. 그리고 그 옆과 뒤에 비스듬히 떨어져 서서 그들을 편을 들고 있는 두 남자.
조용한 가운데 생각보다 그 목소리는 크게 울렸는지, 심각하게 노려보고 있던 남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크리스토프는 물인 줄 알고 들이켰더니 알고 보니 알코올이었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는 그렇게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비슷한 얼굴로 정태의를 본다. 오로지 일레이만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어깨가 약간 흔들리는 게 보인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왕 입 밖으로 나온 말, 이제 새삼스럽게 어떻게 주워담을 수도 없었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낯을 붉히느니, 차라리 정말로 한 번 거하게 싸워서 끝장을 보고 말지 그래. ……요.”
앞말은 크리스토프를 보고, 마지막 한 글자는 리하르트를 보고 말한 정태의는 ‘그럼 안 되나?’ 하고 덧붙였다.
그곳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누구든 무슨 말이든 해 주면 좋을 텐데, 모두 입을 다문 채 아무 말을 않는다. 정태의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승계자 선택을 앞둔 상황에서 싸움을 벌이면 리하르트로서는 좋을 게 없지. 어차피 크리스토프는 승계를 포기했다고 하나, 그는 그렇지 않으니까.”
느릿한 말투로 거들어 준 사람은 일레이였다.
한 걸음 내디뎌 리하르트의 옆에 선 그는 흘끗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어째서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싸우려면 그걸로 싸워야 했어. 누가 뒤를 잇게 되는가―. 그러나 그 싸움을 먼저 포기한 건 크리스토프지. 그가 승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줄곧 백중세였는데.”
평연하고 대수롭잖게 말한 일레이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궁금하군. 왜 그랬어. 뭐, 네가 T&R로 온 덕분에 나는 나름대로 편했지만.”
“내 마음이야. 네 알 바 아니고.”
크리스토프는 냉랭하게 말했다. 일레이는 별반 기분 상한 기색도 아니었다.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문득 다시 묻는다.
“그 뒤로 드레스덴에는 한 번도 오지 않은 네가 굳이 이 시점에 다시 돌아온 것도 말이지……, 아, 그건 알 것도 같군.”
“시끄러워, 리그로우.”
“시끄러운 건 내가 아니라 네 귓속이겠지. 아니면 머릿속이든가. 미친놈.”
정태의는 태연한 어조로 오가는 험악한 말들에 가만히 눈동자만 굴렸다.
듣기로는 이 둘이 친구이자 동료라고 해서 몹시 절친한 줄로 알았는데―그래서 경악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어째 이렇게 보니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잘못된 정보가 떠돌았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둘 다 친구가 있을 만한 성격이 아니지, 하고 홀로 납득하던 정태의는 다음 순간 입매를 찡그렸다.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이 아니다. 평소의 그 지루함과 따분함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유령 같은 무표정.
하지만 잠시였다.
그렇게 표정 없이 일레이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는 어느 순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 얼굴 위로 짜증이 깔린다. 급기야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동익에나 처박혀 있지 왜 어슬렁어슬렁 서익으로 와서 기웃거리고 있어. 네놈이랑 얘기하다 보면 꼭 여전히 그 빌어먹을 기동대에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정말로 친구가 아니었다 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정태의는 흰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 빌어먹을 기동대―예전에 T&R에 있었다는 그 사설 기동대를 이르는 말이겠지―는 분위기가 늘상 이렇단 말인가.
상종해서는 안 될 놈들이 모였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태의는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냅다 떠 버릴까 고민에 잠겼다.
그때 문득 뺨 언저리에 시선이 닿았다.
열몇 걸음쯤 떨어져 있는 벤치에 아이들 다섯이 옹기종기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르치고 뭐고, 이런 꼴을 보여 줘서야 텄다, 텄어.
“애들 보는데 좀 그만하지?”
정태의가 슬쩍 자리를 옮겨 아이들의 시야를 가리며 말하자 시선들이 모두 그에게 날아왔다.
“애를 좋아하나 보지.”
정태의에게 말한 것은 일레이였다. 정태의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건 금구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주제였어.
정태의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에 궁해하고 있는 모습을 한동안 즐긴 뒤―다분히 고의성이 엿보였다―, 일레이는 천천히 입매를 들어올렸다. 그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송곳니가 어쩐지 섬뜩하다.
“일단 여기서 짚어 주자면, 그쪽은 지금 저 아이들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어. 저 아이들은 그쪽이 생각하는 것 같은 ‘아이들’은 절대 아닐걸.”
“……. 둘이 참 친한가 보군. 하는 말이 비슷한 걸 보면.”
정태의는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때, 크리스토프는 쯧, 혀를 찼다. 언제나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약간 주름이 진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지 않은 듯 몸을 틀었다.
“좋을 대로 해. 어차피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리하르트일 테니, 내게 간섭하지 마. 나도 그놈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은 가만히 있을 테니까. 어차피 한 달도 안 남았으니.”
크리스토프는 걸음을 돌려 서익 쪽을 향했다. 곧게 허리를 펴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으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태의도 어깨를 움츠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 그럼 나는 일단은 크리스토프 측에 속한 모양이니까 이 시점에서 사라져야 할 것 같군. ―기회가 닿으면 나중에 또 보죠.”
일레이와 리하르트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은 어중간한 말투로 인사를 하며 약간 손을 들어 보인 정태의는 사뿐히 걸음을 돌렸다. 과히 좋지는 않은 이 분위기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얼른 방에 가서 다시 맥주나 마시면서 책이나…….
“김영수―?”
그때, 몇 걸음 채 떼지도 않았을 때 등 뒤에서 그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멈칫, 정태의는 걸음을 멈춘 뒤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난 그만 가보고 싶은데, 하는 떨떠름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를 부른 사람은 일레이였다.
눈이 마주쳤다.
안경 속에서 끝을 알 수 없이 새카만 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정태의는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를 마주보기만 했다.
시선이 마주한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고작해야 몇 초 가량. 그런데도 그 시간이 아득할 정도로 길다.
이윽고 안경 안에서 까만 눈이 가늘어졌다. 입매가 완만하게 휘어진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후 내내 크리스토프의 서재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저녁께가 되자 몸이 흐늘흐늘해진 기분으로 겨우 서재에서 나올 수 있었다.
책은 언제쯤 돌려줄 거냐고 골백번을 물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돌아오는 말이라곤 ‘돌려받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일이나 잘 해.’뿐이었다.
사실 시키는 일이라고 해도 그리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서재 정리도 한 번 뼈가 부서져라 하고 났더니 그 뒤에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다. 가끔 서재의 구조를 바꾸느니 서가의 순번을 바꿔야겠다느니 하는 탓에 몸고생을 할 뿐.
그 외에는 간단한 심부름이나 장부 정리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에서 그렇듯이, 언제 이루어질지 기약이 없는 희망은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든다.
“에고……. 모르겠다. 언젠가는 주겠지.”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옷을 툭툭 털었다.
도대체가 이놈의 먼지는, 이미 싹 훑어내고 났는데도 어디서 매일같이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서재에서 좀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서 나올 때에는 손이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나오기 전에 서재의 창문을 닫던 정태의는, 바깥에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오후에 별 일이 없을 때의 일과로, 크리스토프는 오늘도 승마를 즐기고 돌아온 참이었다.
서익과 본관의 뒤쪽에 큼직하게 세워져 있는 마사 쪽으로 가던 그는 정태의와 눈이 마주치자 말을 멈춰 세웠다.
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발을 딱히 움직이거나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얌전히 말이 멈춰 서는 걸 보고 정태의는 감탄하고 말았다.
“말이랑 대화라도 하나?”
정태의가 창틀에 걸친 팔에 턱을 괸 채 중얼거리자 크리스토프는 어깨를 약간 들썩이기만 했다.
정태의는 창문을 닫고, 화장실에서 손만 대충 씻은 뒤 서재에서 나갔다.
옷을 툭툭 털고 나서, 굳이 갈아입을 것까지는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가 봐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닌데 옷이 좀 험한 정도야 무슨 상관일까 하는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크리스토프가 들어오는 참이었다. 승마 장갑을 벗으면서 들어오던 그는 계단 위에 서 있는 정태의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배치는 다 바꿔 놨어?”
“어, 대충. 서가별로 순서 정도만 약간 정리하면 돼.”
“그래, 그럼 식사한 뒤에 마저 해 놔.”
이 악마 같은 놈,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크리스토프를 노려본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걸어올 뿐이었다.
“찢어졌어. 버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던진 장갑을 어렵잖게 받아든 정태의는 그 진갈색의 가죽장갑을 훑어보았다. 장미가시 따위에라도 잘못 긁혔는지 가죽이 조금 찢겨 있었다.
“음……아까운데.”
정태의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가 정태의를 흘끔 보았다.
“그럼 고쳐 쓰든가.”
“아니, 나는 장갑은 별로 안 끼니까. 게다가 장갑 버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기도 하고.”
정태의는 나중에 쓰레기통 보이면 버려야겠다며 장갑을 접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요 몇 년은 그럴 일이 없었지만, 예전에 UNHRDO에서 일레이의 교위 노릇을 할 때에는 허구한 날 장갑을 내다버렸다. 정태의가 일레이 대신 내버린 멀쩡한 장갑이 한두 장이 아니었다. 모두 피가 배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처음에는 씻어서 새로 쓸까 했지만, 관뒀다. 그렇게 아까워해 봐야 매일같이 버려지는 장갑의 수가 한둘이 아니었고, 어느 영혼의 원한이 서려 있을지도 알 수 없어 그냥 버렸다.
“……그러고 보니 또 장갑을 끼고 있었지.”
정태의는 그제야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말쑥하고 세련되게 차려입은 일레이의 그 낯선 스타일에 놀라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그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도 집에서는 벗고 다니나 보지.”
정태의가 혼잣말하는 소리를 듣고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음, 장갑 못 본 지 오래됐지.”
그래서 거의 잊고 있었는데, 아직 바깥으로 일하러 다닐 때에는 끼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 성격이 좀 고쳐졌나 보다 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놈 성격에 혈연이라고 곱게 봐줄 리도 없는데, 요새 평화롭게 살았나 보군.”
크리스토프가 불쑥 중얼거렸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시선을 깨닫고 왜 그러냐고 크리스토프가 시선으로 묻는다.
“일레이와 친구라면서. 소꿉친구.”
“누가 그래.”
크리스토프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인상을 썼다 해도 워낙 표정의 표현이 흐린 편이라서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았지만, 평소의 무표정에 비하면 대단히 불쾌한 빛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야? 어릴 때 종종 같이 놀았다며.”
“안 놀았어. 그저 가끔 집안 일 때문에 어른들이 모일 때면 애들도 같이 마주쳤을 뿐이다. ―아, 그래. 거슬리는 인간을 냅다 도끼로 찍어 버리는 것도 논 거라면 놀았다고 할 수 있겠지.”
“…….”
일레이는 어릴 때부터 좀 특이한 성격이었다고 카일이 침중하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하긴 친구라고 다 친구는 아니지. 어릴 적에 같이 어울렸다고 친구라고는 못하겠어. 그렇게 따지자면 리하르트랑도 친구잖아, 너는.”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크리스토프는 다시 사납게 인상을 썼다. 정말로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은 듯 눈매부터가 표표하게 휙 치켜올라갔다.
“친구 아니라니까!!”
“……말을 잘 새겨 봐. 친구 아니라고 그런 거잖아, 나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며 재빨리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낯빛을 확 찌푸린 채 정태의를 노려보다가 쯧, 혀를 차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레이보다 더 격렬한 반응이다. 일레이보다도 더욱 친구라고 여겨지기 싫은 인간이라니, 리하르트도 크리스토프에게는 부정적으로나마 퍽 대단한 의미를 가진 인간인가 보다.
하긴 친구가 따로 있고 원수가 따로 있나. 오랜 시간 동안 좋은 감정을 쌓았으면 친구고 싫은 감정만 쌓았으면 원수다.
“올리버쯤 되는 나이 때부터 알고들 지낸 거지?”
정태의가 손을 꼽아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대충 이십여 년의 관계다. 그동안 불쾌한 기억만 쌓아올렸다면 지금쯤은 철천지원수가 되어도 이상할 것 없다.
정태의보다 반걸음쯤 앞서 걷던 크리스토프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더 어릴 때부터.”
“와……, 그럼 상당히 오래 알았네. ……올리버가 딱 리하르트의 어릴 적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더만.”
크리스토프는 정태의를 흘끔 보았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크게 다칠 것처럼 험상궂던 얼굴이 아주 약간 풀어졌다. 자기 입으로 싫은 인간의 아들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은 듯 잠시 입가가 꾸물거렸지만, 결국 혀를 차며 말한다.
“얼굴은 제법 닮았지만 성격은 달라. 본성이 다르다고. 그 아들은 나름대로 괜찮아. ……동생을 더 닮았어.”
뒷말은 나지막해서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정태의는 어렴풋이 동생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물었다.
“리하르트에게 동생이 있었어?”
누군가에게 형제가 있다는 게 별반 놀랄 일은 아니다. 정태의에게도 형이 있었고 일레이에게는 형과 동생 둘 다 있었다.
아들과도 그렇게 닮은 걸 보면 피가 진한 모양이니, 그와 닮은 동생이라면 그 또한 호남이거나 혹은 미녀겠다.
그러나 리하르트와 닮은 여자―여동생일 경우를 가정하고―를 떠올려 보던 정태의는 문득 크리스토프가 걸음을 멈춘 걸 깨닫고 황급히 발을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멈춰 서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크리스토프에게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자리에 섰다.
설령 불가피하게 닿았다 해도, 크리스토프라면 당장 도끼눈을 하고 주먹을 날릴 것 같았다.
고작해야 몇 센티미터 거리에 멈춰서 슬슬 물러선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여 크리스토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뭣 때문에 갑자기 멈춰 섰나 했지만, 그 앞에는 그들을 막아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토프?”
정태의는 의아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중앙계단을 앞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계단 가운데를 지그시 노려보면서, 그 어딘가에 비치는 과거의 기억이라도 보는 것처럼.
문득 그의 입술이 파래졌다. 부들, 가느다랗게 한 번 경련을 한다. 어쩌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표정은 다른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데, 입술만 가늘게 간헐적으로 떨린다.
“크리스!”
정태의는 조금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바로 귓가에서 그의 이름을 외치자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태의를 보았다. 그의 입술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시끄러워.”
“나 배고파.”
정태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기운이 없어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풀이 죽었다.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정태의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프는 갑자기 튀어나온 정태의의 말이 몹시 뜻밖이었는지, 순간 다른 것을 모두 다 잊어버린 얼굴로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 뜬금없는 표정이 저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얹혀 있는 게 갑자기 우스워져서,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푹 웃고 말았다. 정태의가 웃자 크리스토프는 다시 사나운 빛을 띠었다.
“식당에 가면 되잖아.”
그렇게 내쏘며 혀를 찬 크리스토프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 하고 정태의는 난간을 붙잡고서 그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씻은 뒤에.”
“별로 더럽지도 않은데 뭐 어때.”
크리스토프는 층계참에서 돌아서며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찌푸린 얼굴로 정태의를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보다가, 정태의는 그가 입고 있는 승마복을 보았다.
“……. 그래. 씻고 와. 난 먼저 먹고 있을 테니까.”
승마복을 입고서 밥을 먹으면 뭐 어떨까 싶었지만, 크리스토프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마다 옷장 안을 노려보는 데에―좀 과장해서―한 시간을 허비하는 인간이다.
계단 위를 올라간 크리스토프의 기척이 사라진 뒤에야 정태의는 식당으로 향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배가 고팠다. 오후 내내 책 짐을 날랐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하다.
“이렇게 미리 근력을 길러서 나중에 여차하면 이삿짐센터에라도 나가서 일하면 되겠다…….”
정태의는 요 얼마간 계속 중노동을 했더니 이제 더 이상은 근육통도 생기지 않는 팔을 주물렀다. 근육도 좀 더 단단하게 붙은 것 같아서 슬쩍 흐뭇하기도 하다.
“그래, 멋진 몸매를 만들어서 뭇사람의 인기를 한 몸에…….”
팔을 주무르고 허벅지도 괜히 한 번 두드려 보면서 식당에 막 들어서던 정태의는, 어쩐지 평소와 다른 공기가 감돌아 ‘오늘은 어째 좀 조용한걸.’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사람이 별로 없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식당을 적당히 채우고 있었다. 날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거의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어제와 비슷비슷한 자리에 앉아 있다.
비어 있는 자리라고 해 봐야, 본인이 있지 않은 한 어느 경우에라도 비어 있는 크리스토프의 자리와 리하르트의 자리 정도…….
정태의는 오늘따라 유달리 조용하고 온건한 식사가 진행되고 있는 식당을 주욱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제일 앞쪽의 비어 있는 자리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팔을 주무르던 손이 툭 떨어졌다.
리하르트가 있었다.
비어 있는 크리스토프의 자리 건너편, 그가 늘 앉는 그 자리에 앉아 그는 옆에 앉은 사람과 간간이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태의에게는 리하르트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태의의 눈에는 그 옆에서 같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만이 들어왔다.
역시나 다시 봐도 익숙하지 않은 멋들어진 양복 차림 때문에 그냥 모르고 넘길 뻔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끼고 있는 그 장갑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일레이.
그가 거기 있었다.
정태의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깜박거리며 계속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신의 자리로 가다가 두어 번 의자나 화분 따위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결국 화분 하나를 쓰러뜨리고 나서야 좀 정신을 되찾고서 자리에 앉은 정태의는, 일레이가 얼핏 자신 쪽을 본 것 같았지만 애써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며 자기 접시만 노려보았다.
“오늘은 크리스토프의 서재를 아예 배치를 바꿨다며. 거기 책 무지하게 많았을 텐데 고생했겠군.”
이미 먼저 와 옆자리에 앉아서 접시를 반쯤 비우고 있던 요한이 딱하다는 듯 인사 대신 말했다.
아니 덕분에 운동 돼서 나름대로 괜찮아……라고 주절주절거리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참 동안 접시를 노려보다가, 포크로 콩알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앞, 리하르트 옆에 앉은 거…….”
“어, 아. 미치광이 릭.”
마치 그 이름을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듯 잠시 사이를 두고서 대답한 요한은 낯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부터 저녁은 여기에서 먹겠다던데.”
정태의는 반쪽으로 갈라진 콩을 다시 포크로 콱 찍으며 죄 없는 요한을 노려보았다.
“아니 귀한 손님께서 마땅히 동익에서 밥을 먹어야지, 왜 여기 와서 사람들의 단란한 식사 분위기를 방해하는 거냐고!”
조금 더 진정된 마음으로 이 말을 돌이켜 본다면 ‘단란한 식사 분위기’라는 부분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스스로 반성하겠지만, 지금 정태의는 그런 걸 짚어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거야 무슨 바늘방석이다. 가시밭길이다.
차라리 당장 정태의의 방으로 들이닥쳐서 ‘집에 가만히 있으랬더니 아주 당차게도 나갔겠다?!’ 하고 을러대기라도 하면 그나마 각오하던 일이니 마음 굳게 먹고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선뜩하게 눈만 빛낼 뿐 정태의에게 뭐라고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모른 척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게 도리어 더 무서웠다.
이건 뭐, 사람 피를 말려 보자는 심산도 아니고. ……아니 어쩌면 그럴 심산인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심각한 얼굴로 콩을 으깨며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아까 미묘하게 웃으며 했던 말이 이런 의미였나.
“차라리 오늘 밤에라도 저놈 방에 숨어들어가서 담판을 지어 버릴까…….”
죽이려면 죽이라고 고개를 들이미는 편이 차라리 장래를 위해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죄 지은 마음으로 움찔거리느니, 먼저 고개를 들이밀어 죗값을 치르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갑자기 서글퍼져서 포크를 댕강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옆에서 고기를 뜯으면서 뚫어져라 정태의를 관찰하고 있던 요한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콩은 도대체 무슨 죽을죄를 지었는데?”
“이건 이미 죽었잖아!”
정태의는 원형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다져진 익힌 콩을 두들기며 외쳤다. 요한은 뼈에 붙은 살점까지 샅샅이 발라먹으면서 혀를 찼다.
“죽을죄를 지었다 해도 사체는 온전히 보전해 주는 게 생명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아닐까.”
“네 입에 들어가는 고기부터 토해 낸 다음에 그 말을 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꾸를 하면서 정태의는 요한의 입 안을 드나드는 큼직한 뼈를 쳐다보았다.
여차하면 죽여서 그 시체를 먹어 버리겠다고 저 앞에 앉은 누군가가 말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고 보자 요한이 빠득빠득 씹고 있는 저 뼈가 심상찮아 보였다.
1, 2주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거닐고 있었을 짐승에게 애도의 염을 품고서, 정태의는 나이프를 들었다.
“그런데 너도 릭을 아는 걸 보니, 확실히 저 작자가 유명하긴 유명famous하구나.”
“아무렴, 유명notorious하지.”
정태의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요한은 마구 웃기 시작했다. 또 뭐가 그렇게 웃긴지 뼈를 문 채 정신없이 웃어 댄다. 이놈은 가끔 이렇게 실없는 걸로 미친 듯이 웃곤 했다.
“야, 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거 많이 인간 된 거야. 집안끼리의 관계가 있으니까, 좀 크게 축하하거나 위로할 일이 있다 하면 종종 찾아오거나 찾아가곤 했었거든. 저거 어릴 적에는 말도 못했지……. 지금은 봐, 그냥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잖아.”
요한은 낄낄대면서 정태의에게 몸을 기울였다. 뼈 끝으로 일레이를 가리키며 말하던 그는 갑자기 암울한 과거가 생각났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릴 때엔 왜, 이마에 ‘나는 위험인물’ 하고 적어 놓고 다녔나? ……차라리 그게 나았겠다. 딱 보기에 미친놈처럼 보이는 미친놈은 그나마 낫지. 알아보고 피할 수나 있잖아.”
정태의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딱 보고 미리 알아볼 수 있었더라면 애초에, 이 모든 상황의 시초에, 숙부의 방에 있을 때 저놈에게서 걸려왔던 전화를 받지도 않았을 거다. 아니, 받고서 저 하얀 손의 심상찮음을 알아봤더라면 당장 끊고서 숙부의 방에는 얼씬도 안 했을 거다.
이제는 얘기해 봐야 늦은 일이지만.
(그러나 저런 요지로 때늦은 후회를 읊조리자, 숙부는 코웃음 치며 정태의의 후회를 일축했다. ‘너는 합동훈련 첫날 식당에서 릭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순간에 이미 끝장난 거야. 그땐 이미 미친놈이란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랬어.’라고. 반박할 말이 없어 속이 쓰렸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니, 내가 기억하기로 저놈이 아직 나이가 적어서 잘 조절을 못했을 때에는 늘 피묻은 옷을 입고 살았어. 그래서 딱 보기에도 위험인물처럼 보였지. 그러다가 철 좀 들고 스킬이 더 악랄하게 발전하면서는 옷에 피 안 튀게 잘 처리하더라.”
“…….”
정태의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으깬 콩을 떠올리던 포크를 도중에 멈추었다.
그 악랄한 스킬이 발전해서 장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나 보다. 확실히 매일같이 옷을 버리는 것보다는 장갑을 버리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어쨌거나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가는 사람들만 가엾게 된 거지.”
“음…….”
정태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수프만 삼켰다. 그 옆에서 요한은 새 고깃덩이를 집어들며 중얼거렸다.
“독성이 강할수록 화려하고 눈에 띈다더니 정말인가 봐. 저렇게 잘 차려입고 앉아 있으니 여자들이 줄줄 따를 면상이잖아.”
요즘 사람들이 말야, 얼굴을 보고 사귀려고 하면 안 된단 말이지, 저런 놈이 걸릴지 어떻게 알겠어?! 하고 질투 어린 목소리로 호소하는 요한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면서, 정태의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남자가 저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림새에 신경 쓴 것 같은 모습이어서야 오히려 좀 꺼려지지 않으려나.”
“아니야, 내가 내 여자 친구 세 명을 대상으로 국지적인 앙케트 조사를 해 봤는데, 100%의 확률로 옷 잘 입는 남자를 좋아했다고. 놀라운 확률 아니냐?!”
“세 명으로 100%를 논하는 네가 놀랍다…….”
정태의는 반쯤은 어이없게, 반쯤은 감탄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요한은 전혀 아랑곳 않았다.
기분 탓인지 아까부터 자꾸 따갑게 시선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어쩐지 무서워서 차마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몹시 확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젠장, 정말 오늘 밤에 당장이라도 저놈의 방으로 들이닥쳐서 날 잡아 잡수라고 들이대기라도 해야지 원…….
유서 대신 카일에게 전화를 한 통 하고 나서―카일에게 원망의 말을 잔뜩 늘어놓고 나서―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토마토 수프를 아예 접시째 들고 마셔 버렸다.
재수 좋게 목숨을 건지고 살아나더라도 한 사나흘은 멀쩡히 걸어다니질 못하겠구나, 그 생각을 하자 정태의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게다가 말이야, 또한 100%의 확률로, 그녀들은 듬직한 걸 좋아한다는 결론이 났어.”
아직도 뭔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던 요한은 갑자기 이건 너한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라고 소리를 낮추어 수군거렸다.
“66.6%는 크고 실한 게 좋다고 했고, 33.3%는 크기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지만 그래도 초라한 것보다는 듬직한 게 좋다고 했어. 즉 실질적으로는 100%인 거지.”
그러니까, 세 명으로 100%를 논하지 말라니까……라고 타박을 주기 전에 먼저, 잠시 동안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던 정태의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눈을 껌벅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는 답답한 듯 혀를 차며 다시 말했다.
“거시기 말이야, 거시기!”
엄지로 국부를 가리키는 그의 손짓을 보고서야 정태의는 겨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다.
“아, 그거……. 그래, 대체적인 인식이 그런 것 같긴 하더라만. 그런데 그게 왜.”
어쩌다가 여자에게 인기 있는 남자의 조건으로 화제가 옮겨갔는지 몰라 되물은 정태의는, 요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통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자기방어에 나섰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나 안 작다.”
가끔 외국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편견을 마주하게 된다.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왜소해.
정태의가 보았던 바로 볼 때 평균적으로 완전히 그릇된 말인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남자로서 ‘너 작지?’ 하는 시선을 받으면 울컥하는 건 할 수 없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아니, 그게 아냐, 하며 손을 내젓는다.
“저놈 말이야. 릭. 여자들이 줄줄 따를 만한 게 면상만이 아니라고. 거시기 말야.”
“…….”
갑자기 화제의 방향이 잡히자, 이번에야말로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하필이면 그때 송이구이를 집어들고 있던 정태의는 말없이 송이를 노려보았다. 아주 사납게.
“저놈 거시기, 엄청 크대. 아주 굉장하다더라. 이게 또 확실한 소문인 게, 내 이종사촌 중에 UNHRDO 유럽 지부에 있는 놈이 있거든. 릭이 몇 년 전까지 거기 있었는데, 거기가 욕실이 공동이잖아. 내 사촌이 직접 봤다던데, 거의 무슨 팔뚝 같다지, 아마. 지부 안에 소문이 전설적으로 남았다더라. ……야, 근데 너 그 버섯 되게 큼직하니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 ……. 너 먹어.”
정태의는 아예 포크째로 송이구이를 요한에게 넘겨주었다. 한 손에 고깃덩이를 들고 뜯고 있던 요한은 어, 정말? 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웃으며 넙죽 받아들었다.
아무런 사심도 없이 즐겁게 송이구이를 베어먹는 요한을 부럽게 쳐다보며, 정태의는 물만 마셨다.
그러니까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성격을 보고 사귀어야 해, 성격을, 아니면 인생 순식간에 종치지 말란 법 없다고, 라며 매우 타당한 말을 매우 질시 섞인 어조로 늘어놓는 요한은, 바로 엊그제 그 입으로 ‘애인을 사귈 때엔 뭐니뭐니 해도 첫째도 얼굴, 둘째도 얼굴, 셋째도 얼굴이지.’라고 당당히 지껄였다가 근처에 앉아 있던 여자들에게 칼 맞을 뻔한 전적이 있었다.
이야, 역시 잘 구운 송이구이는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다니까, 하고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는 요한을 보다가 정태의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 난 그만 올라가서 쉬어야겠다.”
밥맛도 떨어졌겠다, 갑자기 며칠치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겠다, 아무래도 올라가서 눕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흐느적흐느적 자리를 떴다.
왜 인간은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능력이 없나 모르겠다. 이를테면 반드시 일을 마쳐야 하는 기일이 다가올 때, 어서 성실하게 그 일을 마쳐 두지 않으면 나중에 괴로워진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괴로움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나중에 막상 닥쳐서야 이를 갈며 슬피 울면서 일에 쫓기게 되는 것처럼.
오늘 밤 일레이를 찾아가서 얼른 결판을 내자고 그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밀면 몹시 괴로워지리라고 뻔히 알면서도, 또한 그 괴로움을 알면서도, 정태의는 그것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괴로운지’ 떠올리지를 못하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다.
아냐, 그래도 나름대로 익숙해졌잖아. 이젠 컨디션이 좋을 때에 하면 영 그렇게 죽을 것 같지만은 않기도 하고.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한동안 안 했다.
정태의는 기왕 저놈이 모르는 척하는 김에 한동안 좀 더 개개어 보자고 결심했다.
“오늘따라 송이가 크고 신선하니 물이 좋은데. 아주 혀에 착착 감긴다.”
“…….”
“왜 이 맛있는 걸 안 먹냐? 어? 벌써 가려고?”
정태의는 요한에게서 등을 돌렸다.
타이밍의 문제였지만, 지금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했다간 정신적인 고문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휘청휘청, 식당에 들어와 자리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툭툭 부딪히면서 문 쪽으로 가던 정태의는 그때 문득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급사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던 리하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전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벌써 식사를 마쳤나요?”
그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었다. 주위사람에게 저렇게 세세하게 신경을 쓰니 인덕이 좋을 수밖에, 라고 감탄하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 옆에서, 그제야 정태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이 무심한 시선을 주는 그 남자 때문에 반의 반도 못 먹었지만.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가서 쉬어요.”
걱정까지 해 주는 친절한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정태의는 슬금슬금 그 뒤를 스쳐 문 쪽으로 갔다.
바로 일레이의 뒤를 스칠 때였다.
“확실히 안색이 안 좋군. 요한과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그에게 좀 부축해 달라고 하지 그러나?”
그 목소리가 마치 손처럼 주욱 뻗어나와서 목덜미를 덜컥 잡는 것 같았다.
정태의는 일레이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너……아니 댁이 요한을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일레이가 어이없는 눈으로 정태의에게 흘끔 시선을 던졌다.
“이 남자가 내 가족구성원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나는 타르텐의 가족구성원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 게다가 요한과는 어릴 적에도 몇 번쯤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어. 한 20년 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알고 보면 이 식당 안에 있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넓은 의미로는 다들 친구였다. 개중에는 ‘나는 저놈이랑은 절대로 친구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주장할 사람도 몇 있겠다.
“하긴 크리스토프도 드물게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군.”
일레이는 건너편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 옆에서 리하르트는 희한하다는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며 미묘한 웃음을 웃었다.
“네가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너도 드물게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였나?”
일레이는 하, 하고 웃었다.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짧게 내뱉는 웃음이 차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태의를 보았다.
“글쎄……, 이 집에 동양인이 머무르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긴 하군. 집에 두고 온 녀석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말을 타인의 입장에서 정태의가 들었더라면 당장에 ‘거짓말 마! 네가 그런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말을 할 리가 없어!’라고 소리쳤겠지만, 남 일이 아니다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리하르트는 희한한 일을 다 본다는 듯 슬쩍 눈을 크게 뜨며 신기하다는 웃음을 띠고 일레이를 보았지만, ‘너도 몇 년이나 못 본 사이에 좀 바뀌었군.’ 하고 말하며 납득하는 눈치였다.
그들이 대화를 하는 동안, 그 대화의 중심에 있어서 본의 아니게 어중간하게 멈춰 서 있던 정태의는 이윽고 조용히 한숨을 쉬며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얘기 다 끝났으면 난 이만.”
이번에도 또 붙잡으면 다시 한번 상을 뒤엎어 버리려는 생각마저 하면서―알타의 말이 맞았다. 처음에만 어려웠다―정태의가 말했지만, 리하르트가 가서 쉬라는 인사를 했을 뿐 일레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