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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르텐 (3/34)

2. 타르텐

그곳에는 문패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담장 어딘가에 문패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담장을 빙 둘러보면서 문패를 찾아보기엔 그 담장이 너무도 길었다.

“내로라하는 집들도 제법 많이 봤고, 카일의 집도 결코 소담하지는 않은데…….”

정태의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담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마따나, 어릴 적부터 고관대작의 집에 종종 초대를 받았던 천재적인 형 덕분에 정태의도 덩달아 내로라하는 집들을 숱하게 본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저택은 그 가운데서도 각별했다.

“이런 궁궐에는 누가 사시나……. 우와. 건물도 안 보이네.”

난생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하는 시골구석 아낙네처럼, 정태의는 담장 앞에서 눈을 껌벅이며 감탄했다. 육중한 철창살로 된 커다란 정문의 창살 틈새로 저만치 멀찍이 건물이 보이긴 했지만 과연 저것이 이 집의 본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태의는 손에 쥔 쪽지를 노려보았다. 카일의 달필로 적힌 주소는 이미 몇 번이나 보는 사이에 외웠다.

그러나 과연 이 집의 주소가 쪽지의 주소와 일치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문패를 보고 이름이라도 확인하려고 했더니 그나마 보이지 않았다.

철창문 바로 옆에는 조그만 경비실이 딸려 있었다. 제복을 입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두 명의 경비가 수상쩍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웬 낯선 동양인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문패가 어디 있나―유심히 살펴서야 수상쩍을 만도 했다.

“물어보는 것보다 확실한 건 없겠지.”

정태의는 쪽지를 주머니에 넣곤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경비 중 하나가 일어서 경비실 밖으로 나왔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마주서자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철창 밖에 있으니 별로 미묘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따져봤을 때 철창 안에 갇혀 있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닌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경비가 공손하나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빛이 그뿐만 아니라 경비실 안쪽에서도 날아오고 있었다.

“아―크리스티나 타르텐을 찾아왔는데요.”

“크리스티나 타르텐?”

경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태의가 말한 이름을 되풀이하는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경비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경비실 안에 있던 경비도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전혀 없다는 듯한 그 몸짓에 어리둥절해진 것은 정태의였다.

비록 문패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나, 십중팔구는 이 집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일은 워낙 큰 집이니 이쪽 근처로 가면 바로 눈에 띌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눈에 띌 만큼 큰 집은 이 집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집이 단연 눈에 띄게 컸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경비는 경비실 안의 다른 경비와 몇 마디 나누고 돌아오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동안 경비와 멀거니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가 타르텐 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 크리스티나 타르텐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시작부터 영 꼬인다. 어디에서 뭐가 꼬인 걸까.

혹시나 싶어 이 근처에 다른 타르텐 가가 있냐고 물어봤지만 경비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곤란하네…….”

정태의는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카일에게 연락을 해 봐야 할 모양이다.

타르텐.

요 근래에 들어 여러 번 들은 이름이었다.

크리스티나라는 사람의 성이 타르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정태의는 그제야 그녀가 함부로 내치기 힘든 손님인 이유를 깨달았다. 백수십 년 동안 교분을 맺어온 집안의 인물이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일레이에게 소꿉친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제야 겨우 이해가 갔다.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그 인물을 만나 호되게 고생할 것은 각오하고 왔는데, 설마 만나기도 전부터 일이 어긋날 줄은 몰랐다.

그럼 일단은 카일에게 연락해서 다시 확인을 해 보고…….

정태의가 막 철창에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아마도 이 저택을 방문한 듯한 진청색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문 앞에 섰다. 경비는 그 차를 보자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확인하곤 문을 열기 시작했다.

경비가 문을 여는 동안,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낯선 동양인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는지 차창이 열렸다. 차 안에는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젊은이 세 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장난이라도 치는 말투로 가볍게 정태의에게 말을 건네었다.

“누굴 찾아왔어요?”

조금씩 닮은 구석이 있는 걸로 보아 그 젊은이들은 가족이나 친척인 성싶었다. 그런 관계들이 떼지어 찾아왔다면 아무래도 이 집안의 혈연일 가능성이 높을 거다.

어쩌면 경비는 모를 수도 있는 먼 친척의 이름을 그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크리스티나 타르텐을 찾아왔는데요.”

정태의는 기대를 품고서 대답하며 최대한 붙임성 있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크리스티나?, 하고 되풀이하는 젊은이의 표정은 조금 전에 경비가 보여 주었던 표정과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정태의는 속으로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카일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보다.

그러나 정태의가 한 걸음 물러서려 했던 바로 그때,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던 조수석의 젊은이가 별안간 더럭 표정을 굳혔다.

……아하. 빙고.

정태의는 물러서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 젊은이뿐 아니라, 차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차는 있지만 하나씩 그 이름이 기억난 듯이 표정이 바뀌어 갔다.

그런데……, 빙고인 것까지는 좋은데, 어째 좀 표정들이…….

정태의는 흘끔 차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은 의외라든가 놀람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명백한 경계와 적의를 담고서 정태의를 사납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밟았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게 뭔지를 알 수 없어서 정태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 뭇매라도 놓을 분위기다.

“댁은 누구야?”

말투까지 순식간에 험악해진다.

“아……, 그냥 심부름꾼인데요.”

“뭐 하러 왔어!”

“아는 분 부탁으로, 빌려드린 물건을 도로 찾으러 왔지요.”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대답을 하면서 찬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적의가 노골적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청년들은 크리스티나와 퍽이나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일레이와 친구 내지는 동료로 지낼 만한 인간이라면 누구랑 사이가 좋을 수 있을까. 초록색끼리 놀지 않으면 어림도 없지.

그런 점에서 이 젊은이들은 그 과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했다. 그들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크리스티나는 지금 집에 있나요?”

정태의가 묻자 짧은 침묵 뒤에 거친 고함소리가 돌아왔다.

“그런 사람 없어!”

실컷 물어봐 놓고서 이제 와서 그런 사람 없다고 하면 어쩌라고.

그러나 정태의가 어이없는 얼굴을 지우고 다시 뭐라고 말을 걸기도 전에, 그 젊은이들은 창밖으로 침을 뱉고 정태의를 노려보더니 재차 질문을 던졌다.

“누구 심부름으로 왔어! 빌려준 물건이란 건 또 뭐야?”

……. 없다는 사람에 대해 참 궁금한 것도 많다.

정태의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들과 이야기해서 더 나아질 것도 없겠다. 그냥 빨리 보내 버리고 다른 수를 찾는 게 나을 성싶었다.

“없으면 됐어요.”

정태의는 차에서 물러서 얼른 가 보라고 손짓을 했다. 이미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쪽에서 경비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쪽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가만있자…….

경비는 그녀를 몰랐다. 그리고 이자들도, 분명히 그녀를 알고 있을 테지만 처음에 그 이름을 말했을 때에는 잠시 동안 기억해내지 못했다. 카일은 그녀의 주소로 여기를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상황을 하나씩 그러모았다. 그러나 딱하게 맞아들어가는 결론이 나오지 않아 으음,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험상궂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 젊은이들은 들어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게다가 정태의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가만히 놔두지도 않을 눈치였다.

이런 옘병. 초장부터 뭐가 이래.

“야! 누구 심부름으로 왔냐니까! 제대로 말 안 해?!”

크리스티나에게 무슨 원한이 그렇게 많은지, 그들은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정태의를 그냥 두지 않을 기세였다. 그 중 한 명은 아예 뒷자리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불리한 입장에서 싸우는 걸 결코 내켜하지 않는 정태의는 결국 그에게 멱살까지 내어주었다.

책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은 이미 들었지만, 책 찾는 과정 중에 크리스티나를 만나기 전단계도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인간을 왜 찾는데, 엉?!”

정태의의 멱살을 쥔 젊은이가 험악하게 윽박을 질렀다. 저쪽에서 경비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오지 않는 걸 보니 끝까지 구경만 할 모양이다. 그럼 이 상황은 본인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걸 한 대 때리고 도망을 가 버리면 차후에 곤란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제법 있겠지, 하고 정태의는 멱살을 잡혀 흔들리면서 고민했다.

그때였다.

정문 앞에서 버티고 선 그들의 차 뒤로, 다른 차 한 대가 다가왔다.

소리 없이 뒤에 선 까만 세단은 클랙슨 한 번 울리지 않고 멈추었다. 뒷자리의 차창이 내려갔다.

“무슨 일이야, 문 앞에서.”

부드러우나 엄준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정태의를 둘러싸고 있던 젊은이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정태의는 어쩐지 낯익은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단의 뒷자리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그 남자를, 정태의는 본 적이 있었다.

그 남자다. 요전에 카일을―혹은 일레이를―찾아왔던 남자. 담담하게 웃는 얼굴이 인상 좋았던. 그래, 일레이에게 뭔가 일을 의뢰했던 남자였다.

그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그러나 정태의의 의문은 알지도 못한 채, 남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의아한 빛을 띠며 고개를 기울였다.

“손님이 오셨나?”

남자가 조용히 묻자 그때까지 정태의의 멱살을 쥐고 있던 젊은이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리곤 스스로의 태도에 항변이라도 하듯 얼른 외쳤다.

“손님이 아니에요! 이 따위…….”

남자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인 게 멋쩍은지 젊은이는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고, 정태의는 말없이 멱살 근처를 툭툭 털어낸 뒤에 다시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찬찬히 정태의를 살피다가 예의바르게 물었다.

“누구를 찾아오셨는지?”

정태의는 대답 대신 잠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비는 그 이름을 몰랐고, 이 젊은이들은 그 이름에 적의를 드러내었다. 그러면 이 남자는, ……설마하니 다짜고짜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겠지.

“크리스티나 타르텐.”

정태의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세 번째로 그 이름을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지도록 정태의를 바라볼 뿐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는 않아 기분이 상하진 않을 정도로.

이윽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타르텐. 그에게 직접 그 이름을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분의 소개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 나는 오늘 드레스덴에 처음 왔습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정태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늠해 보려는 시선이 약간 가늘어진다.

“내가 찾아온 곳이 여기가 맞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크리스티나도 만나 본 적이 없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며, 누구와 어떤 인간관계를 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즉 당신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라는 뜻이 담긴 그 말을 남자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정태의를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안내해 드리지요. 타르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남자는 살짝 굽어진 눈웃음에 환영의 빛을 담아 말했다.

이 남자는 저들과 달리 크리스티나와 척을 지지 않은 인물인 모양이었다. 하긴 일레이도 UNHRDO에 있는 만인과 척을 지지는 않았었다.

정태의는 남자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걸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돌아가 냉큼 차에 올라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젊은이들 중 하나가 낯빛을 찌푸리며 외친다.

“리하르트! 그놈은 그 작자를 찾아온 놈이라고요!”

그 외침에 정태의는 젊은이에게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하르트.

리하르트 타르텐.

예전 숙부와 카일의 대화에서 잠시 나왔던 이름이다. 뭔가 유망하다고 했었던.

“타르텐의 손님이다.”

그 남자는 정태의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 젊은이에게 담담히 말했다. 반박을 허락지 않는 단호한 음색에, 정태의는 이 남자가 가진 것이 온유함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남자의 옆에 앉아 젊은이에게 화사하게 웃어 준 정태의는, 울컥하는 그들을 스쳐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나도 철창 안에 갇힌 신세군, 하고 생각하면서 차창 밖을 보았다.

드넓은 부지였다. 조금 더 달리자 멀찍이 저택이 보였다. ㄷ자로 생긴 그 암백색 저택은 멀리서 봐도 질릴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그 뒤로는 야트막한 구릉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 울창하지는 않으나 푸르게 자라난 숲은 사람의 손과 자연의 손이 어우러져 이룬 빛이 감돌았다. 제법 넓어 보이는 그 숲은, 산책이나 삼림욕 따위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쪽으로는 승마 코스가 잘 갖추어져 있지요. 그 뒤로는 산맥과 맞닿아 있어, 한가할 때에는 날을 잡아서 사냥을 가기도 합니다.”

정태의의 시선을 좇아가 보았는지 옆에서 남자가 설명해 주었다.

“저택은, 붙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별개의 세 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택 본관을 등지고 오른쪽이 동익, 왼쪽이 서익이지요.”

정태의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낯선 환경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해 주는 그는, 다시 봐도 역시 인상이 좋았다. 분위기도 온유하고 다정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를 두고 일레이가 그랬었지. 상변태라고.

정태의는 눈을 좁혀 뜨며 다시 남자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가까이에서 봐도 듬직한 인상의 호남형인 이 남자는, 어딜 봐도 상변태라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일레이도 미친놈이라고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놈은 입을 열면 티가 나는데, 이 남자는 낮고 부드러운 말투도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감쪽같이 아닌 것 같은 인간이 더 무서운 법이긴 하지만…….”

그럼 세상사람 다 경계하고 다녀야 하는데, 그래서야 못할 짓이다.

정태의가 저도 모르게 중얼중얼하자, 그 말이 들렸는지 남자가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황급히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잘 단장된 가로수길을 따라 얼마간 나아간 차는 곧 저택 앞에 이르렀다.

바로 앞에서 보자 도리어 규모가 가늠이 안 되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차에서 먼저 내려 저택의 외관을 주욱 둘러보고 있는 정태의의 옆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저택의 정문 앞에 서 있던 급사 같은 사람이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엄숙하고 딱딱한 얼굴을 보자 정태의는 갑자기 리타가 그리워졌다.

어쨌거나 책만 얼른 찾아서 돌아가면 끝이다.

정태의는 바로 옆까지 다가와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난하게 여기까지 들어오는 데에 지대한 도움을 준 이 고마운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들어왔네요. 그런데, 크리스티나 타르텐 씨는 어디로 가면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남자는 정태의의 얼굴에서 뭔가 감춰진 거짓이라도 파헤치려는 것처럼 묵묵히 구석구석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 정태의가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적거리자,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연다.

“본관으로 들어가셔서 집사에게 방문 사실을 알리시면 그에게도 기별이 갈 겁니다. 친분이 있으시다면 곧바로 서익으로 가셔도 됩니다만.”

정태의는 잠깐 고민했다.

자신은 크리스티나와 일면식도 없으니 원래라면 본관으로 가서 먼저 집사를 만나 봐야 하겠지만, 카일이 크리스티나에게 미리 연락을 해 둔다고 했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카일은 크리스티나와 제법 친분이 있을 거다. 그러면 곧바로 서익으로 가서 카일의 이름을 대고 그녀를 찾는 편이 옳을까.

그러나, 본관으로 가서 거창하게 집사를 찾아 방문 사실을 알리고 따로 기별을 넣는다는 그 과정이 몹시 번거롭고 귀찮게 느껴졌다. 이미 연락을 해 두었을 테니 서익으로 바로 간다 한들 무례는 아닐 것 같다.

“……서익으로 가겠습니다. 저 건물이 서익이라고 하셨죠?”

정태의가 본관의 왼쪽에 간이탑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본관 문 앞에 서 있던 급사가 다가와 남자에게 짐 따위를 받아들었고, 남자는 그에게 몇 마디 짤막하게 의례적인 지시를 내린 뒤 다시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가뿐한 걸음으로 서익을 향해 막 발걸음을 내디디던 정태의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발을 멈추었다.

그렇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사를 하고…….

그러나 정태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찾아 주신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예? 아아. ……그러고 보니 저도 아직 소개를 받지 못했군요. 크리스티나의 친척분 되십니까?”

이미 남자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식으로 그가 밝힌 건 아니다. 정태의는 빙긋 웃으며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짐짓 당황한 빛을 띠더니 그 손을 맞잡았다.

“아. 그렇군요. 저는 리하르트 타르텐이라고 합니다. 그의 사촌이지요.”

그렇군요, 사촌, 하고 중얼거리다가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 집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카일이 단연 유망하다고 평가한 이 남자의 사촌이라면 그리 먼 친척은 아닐 거다. 그런데도 그녀에 대해 묻자 처음에 기억을 못 떠올리던 그들은―.

정태의가 애매한 의문을 품은 채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시야 한쪽 끝에서, 뭔가가 무서운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

말이었다.

뽀얗게 흙먼지를 날리며, 하얀 말 한 마리가 서익 뒤편으로 이어진 숲 쪽에서 본관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뭐든 밟아 뭉개고 지나갈 듯 거침없는 그 질주는, 정확하게 그들 쪽을 향하고 있었다.

“……!”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정태의는 아연하게 그 말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집이 넓다곤 하지만 차와 사람이 오가는 이 본관 앞이 승마 코스일 리는 없을 텐데.

정태의의 앞에서 남자, 리하르트는 그쪽으로 흘끗 시선을 주더니 별반 놀란 빛도 보이지 않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정태의도 그를 따라 물러났다.

말은,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말이 질주하는 길 가운데에 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비키든 말든 아랑곳 않고 그 길을 스쳐갈 듯, 속도도 떨어뜨리지 않은 그 말이 가까이까지 다가왔을 때, 정태의는 그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만큼이나 새하얀 승마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를 보고, 리하르트가 그리 크지 않으나 분명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리스토프. 너를 찾아온 손님이다.”

“에?”

정태의는 ‘나?’ 하고 엄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는 말 위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앞까지 닥쳐들고 있던 말은, 바로 그 다음 순간, 크게 몸을 솟구쳤다.

거의 거리를 두지 않은 감속.

어지간히 단련된 기수라도 결코 쉽지 않을 그 급격한 감속이, 마치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바로 눈앞에서.

승마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한 정태의도 감탄할 만한 마술馬術을 선보인 기수는, 그들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좀체 보기 힘들 만큼 훌륭한 백마가 언제 그렇게 질주했냐는 듯 태연하게 그들 앞에서 몇 걸음 움직였다. 숨결이 거칠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달린 줄도 모를 것 같았다.

낯선 얼굴을 경계하며 살피는 백마의 새카만 눈을 마주보는 정태의의 머리 위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내려왔다.

“날 찾아……?”

그 목소리와 함께 기수는 고삐를 옆으로 두어 번 털었다. 말이 약간 몸을 틀었다. 그제야 정태의는 말 위에 앉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플라티나 블론드. 우울과 권태가 깃든 새파란 눈. 후리후리하고 늘씬한 몸.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결코 잊을 수가 없이 선명한 인상을 가진 그 청년을, 정태의는 알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 보았다. 이곳 드레스덴에서 20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베를린. 폭우 속에 갇혀 있던 그 적막한 성당에서.

청년 역시 정태의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 권태로운 눈에 약간 이채로운 빛이 감돌았다.

“어……, 너는…….”

청년은 말 위에서 몸을 내밀어 정태의를 구석구석 살폈다. 뭔가 잘못 보지는 않았나 확인하듯이.

“만난 적이 없다고 하신 것 같은데, 이미 면식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그 옆에서 리하르트가 말했다. 눈동자만 돌려 그를 쳐다보는 청년에게서 고개를 돌려 정태의는 애매하게 웃었다.

“예, 얼마 전에 잠시 마주친 적이 있……, ……는데, 크리스티나 타르텐이, 혹시…….”

정태의는 의외의 인물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잠시 예의조차 잊어버리고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정태의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자기 청년의 표정이 돌변했다.

무심하고 따분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식었다. 섬뜩한 무표정이 정태의를 내려다본다.

순간 정태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 실수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청년은 유령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그래……, 그래……,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어. 과연, 그렇단 거지. 그래서…….”

그러나 몇 번이고 곱씹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혼잣말을 들으며, 정태의는 성당에서도 목격했던 바 있는 이 청년의 이상성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책 찾으러 왔지?”

청년이 갑자기 불쑥 말했다. 정태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 그런데 크리스티―.”

“내가 가져간 거야.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거라고 하더니, 너였군.”

정태의는 멍하니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모든 정황은 이 청년이 그 문제의 책도둑, 크리스티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이 걸맞을 만한 성별이 아니었고, 또한 이곳에서는 크리스토프라고 불리고 있었다.

“……? 네가?”

정태의는 미심쩍게 물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자 이 상황 자체에 대한 신빙성이 몹시 떨어졌다.

이 남자가 정말로 내가 찾아온 사람이 맞는 걸까. 카일이 크리스티나라는 인물에 대해 뭐라고 했냐면 분명히―.

정태의가 막 기억을 되새김질하려 했을 때였다.

저택 본관의 정문 계단 바로 아래에 서 있던 세단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대신 차 한 대가 뒤따라 섰다. 조금 전 바깥 담장의 철창문 앞에서 보았던 그 젊은이들이었다.

차 열쇠를 급사에게 넘겨주고 우르르 내린 그들은, 대치하듯이 마주선 정태의와 청년, 그리고 리하르트를 보더니 약간 의아한 얼굴을 하고서도 험악하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돌아오더니 승마 코스가 어딘지도 까먹었나 보지.”

“정 모르겠으면 이런 데서 길 막고 방해하지 말고 마구간에나 가서 놀아.”

더 이상 그들의 적의가 향하는 대상은 정태의가 아니었다. 말 위에 곧은 자세로 앉은 청년을 올려다보며 비아냥 섞어 말했다.

말없이 그 분위기를 지켜보고 있는 정태의의 옆에서 리하르트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둬.”

“하지만 봐, 이놈이 돌아온 뒤로 분위기가 엉망이라고. 더 이상 상관도 없는 놈이 왜 기어들어와서.”

젊은이 중 하나가 나섰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자였다. 아마도 그들의 맏형쯤 되는 모양이다.

여기도 어째 분위기가 영 좋지 않군. 안 좋은데, 안 좋아.

정태의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면서 그 불구덩이가 모쪼록 자신에게 다가오지는 않기를 바랐다. 시비를 거는 저 모습들이, 하루이틀 사이에 형성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젊은이들 가운데 어린 축에 속하는 남자 하나가 다가가 가볍게 말을 걷어찼다. 흘끔 그 시선이 정태의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뭐랬더라? 크리스티나? 하, 그래, 겉껍데기는 반반하니 크리스티나라고 해도 되겠군. 크리스티나―.”

그때였다.

말 위에 앉아 차갑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청년이 그 젊은이를 빤히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너희들이야말로, 오랜만에 돌아왔더니 내가 누군지 까먹었나 보다.”

그는 그리 화난 눈치도 없이 심상하게 말을 맺었다.

동시에, 사악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소리가 선뜩하게 울렸다.

짝!! ―메마른 소리가 뒤이었다.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명조차 없이, 말채찍에 살점이 찢어진 젊은이조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듯 망연히 얼굴을 더듬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건조한 타격음은 두 번 연달아 울렸다. 이번에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반격할 겨를도 없이 얼굴의 살점이 찢겨져 나간 젊은이들은 순식간에 목을 타고 흘러 웃옷을 적시는 피를 쳐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잊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 내가 이 집에서 나갔던 때가 10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그래서야 그 머리 어디다 써. 그래, 다시 한번 그 이름으로 불러 보시지 그래. 누구라고?”

청년은 격앙되지도 않고 그저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약간 느릿한 말투가, 따분한 것도 같다.

헉……, 정태의는 뒤늦게 슬쩍 자기 입을 움켜쥐었다. 저 이름이 금구였나 보다.

카일, 그런 건 미리 말해 줬어야죠! 하마터면 채찍에 살점 날아갈 뻔했잖아요!

그러나 다행히 이 시점에서 정태의까지 ‘그러고 보니 너도 아까 그렇게 불렀지?’라며 응징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 청년은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땅을 딛고 섰다. 손에 쥐고 있던 채찍을 안장에 대충 묶어 놓는 손짓이 익숙하다.

그때 아마도 젊은이 중 누군가가 반격을 했던 것 같다. 왜 ‘같다’냐면, 반격을 하려고 시도는 했던 것 같은데 청년이 어렵잖게 몸을 비켜서 그의 주먹이 허공만 갈랐기 때문이다.

“못 써먹을 건 머리만이 아니었네. ……내 참.”

청년은 어이없이 한숨을 쉬었다. 아예 전의조차 상실한 듯 손을 주머니에 넣어 버린 청년은, 승마부츠를 신은 그 발로 젊은이의 무릎을 거침없이 후려찼다.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눈앞에서 사람의 골격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지는 걸 고스란히 바라보며,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청년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였다.

그랬다. 카일이 말했다. 그 인물에 대해, 카일은 이렇게 말했었다.

일레이의 소꿉친구. 옛 T&R 기동대 시절의 동료.

문득 깨달았다.

바로 얼마 전 성당에서 만났던 때. 그때 이 청년은 카일의 집에 들렀다가 책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인생이 한 편의 장애물달리기다.

손톱만큼도 흥분하지 않고 사람을 반죽음시켜 놓는 게 정말로 누구 친구답구나, 하고 생각하며 넋을 빼놓고 있던 정태의는, 다시 한번 거친 비명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남의 집안 일이라지만 그래도 일단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본관 정문 바로 앞에서 반살육의 현장이 벌어지고 있는데 왜 아무도 안 나오나.

당혹스런 심경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던 정태의는, 그러나 곧 걸음을 멈추었다.

끼어들기도 어려울 만큼 연이어 타격을 먹이고 있던 청년을, 등 뒤로 다가간 리하르트가 붙잡았던 것이다.

팔뚝을 붙잡힌 청년은 움찔하고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젊은이들을 그렇게 두들겨 패면서도 심드렁한 빛이던 청년의 눈이 시퍼렇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안 놔?”

리하르트를 돌아보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금세라도 상대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맹수 같다.

리하르트는 순순히 손을 놓았다. 그리고 정말로 맹수를 상대하기라도 하는 듯,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두어 걸음 물러선다.

청년은 무시무시하게 그를 노려보며 붙잡혔던 팔뚝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마치 팔뚝의 그 살점을 쥐어뜯어내기라도 하고 싶은 듯 마구 문지르다가 급기야는 욕설을 내뱉고 만다.

“나를 말리기 전에 네 밑에 있는 놈들은 네가 관리를 잘 해, 리하르트. 그렇지 않으면 이 멍청이들이 나한테 얼간이 짓을 하는 족족 죽여 버릴 테니까.”

“잘 기억해 두지.”

리하르트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그를 거칠게 노려보곤 휙 돌아섰다. 서익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태의에게 외친다.

“거기 너. 너는 따라와.”

정태의는 피투성이로 바닥에 누운 사람들을 쳐다보며 혀를 차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리하르트의 앞을 스치며 까닥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크리스토프 타르텐.

크리스티나든 크리스토프든 뭐든 이제 이름은 아무래도 좋았다.

정태의는 일레이와 긴밀하게 지낸다는 그 수수께끼의 위험인물에 대해, 한 번도 저 청년 같은 인간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비범한 인물일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딱 보기부터가 비범할 줄은 몰랐다. 아니, 비범한 외모라 해도 차라리 어느 깊은 산 속에서 늑대 젖을 먹고 자랐을 것 같은 집채만 한 남자였더라면 좀 더 쉽게 납득했을 것도 같다.

저 얼굴에 저 외모로 일레이과라니, 이거야 무슨 사기 같다.

“……본관에는 집무실이나 응접실, 홀 같은 게 있어. 동익에는 노인네들이 머무르고 있고,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내어주는 객실도 거기 있지. 서익에 머무르는 사람은 내 항렬 이하의 혈족. 혹은 그들의 손님. 어차피 너는 본관이나 동익에 갈 일은 없을 테니 서익 구조만 알아 두면 돼. 1층에는……. ……듣고 있어?”

한숨도 쉬지 않고 줄줄줄 읊조리던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음, 하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듣고 있는데……그보다 말야. 꼭 여기 이렇게 서 있어야 돼? 좀 들어가면 안 되나?”

“네가 내 침실에 들어올 만큼 나와 허물없는 관계였던가?”

“활짝 열어 놓은 침실 문 앞에 서서, 네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볼 만큼은 허물없는 관계지.”

크리스토프는 옷장에서 새 셔츠를 꺼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지 말라면서 침실 문턱 앞에서 정태의를 가로막은 크리스토프는, 그대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정태의에게 설명을 늘어놓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셔츠를 걸치며 정태의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살갗 위에 바로 걸친 셔츠의 단추를 톡톡 잠그며 그는 그래, 하고 말을 꺼내었다.

“먼저 말해 둬야 하는 걸 잊었군. 보는 거나 말 거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건드리는 건 안 돼.”

“뭐?”

“건드리지 말라고. 나를. 내 물건도 내가 따로 말하지 않는 한 건드리지 마.”

“……. 결벽증인가?”

“천만에. 더럽거나 지저분한 걸 못 견뎌하지는 않으니까. 그저 남과 접촉하는 걸 싫어할 뿐이지.”

“용케도 기동대에 있었군. 인간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했을 텐데.”

“부대껴야 할 일은 애초에 맡지 않았거든. ……기동대라. 그것 말고는 나에 대해 얼마나 들었어, 카일에게?”

“글쎄……. 일레이의 친구라는 정도?”

정태의가 살짝 낯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리스토프도 낯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런 미친놈이랑 친구를 해.”

“…….”

일레이를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나중에 일레이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놈한테도 한 번 말해 봐야겠다. 네 친구 크리스토프를 만났다고. 어쩐지 그놈이라면 친구라는 단어 따위에는 애초부터 신경도 쓰지 않고 어쩌다 그놈을 만났냐고 물을 것 같았지만.

“그런데 말이지. 책만 받으면 금방 돌아갈 내가 이 집 구조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설명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정태의는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몹시 이상하다는 눈으로 정태의를 빤히 쳐다보면서, 옷장 안에 설치되어 있는 바지걸이를 보지도 않고 끌어당겼다. 말끔하게 줄지어 걸려 있는 바지들 가운데 제일 앞쪽에 있는 바지를, 역시나 보지도 않고 꺼낸다.

“그러면 말이다. 책을 받을 때까지 너는 이 집 구조도 모른 채, 어디서 자고 어디서 밥 먹고 어디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지?”

크리스토프가 반문했다.

과연, 이래서 카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구나.

“언제쯤 돌려줄 건데.”

“질리면.”

“……. 그래서, 서익 1층에 뭐가 있다고?”

정태의는 체념하고 다시 물었다. 크리스토프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는 그제야 바지를 살피더니 끝단에 묻어 있는 조그만 티끌을 떼어낸 뒤 다리를 꿰어 넣었다.

“서익 1층에 식당과 홀. 응접실. 지하에도 홀이 있는데 거기엔 체스나 당구대 따위의 게임류가 갖추어져 있지만, 멍청이들이 많으니까 안 가는 편이 좋아. 사우나도 마찬가지. 2층엔 개인 서재. 3, 4층이 보다시피 침실 등 사공간.”

바지를 다 입은 다음에는 타이. 벨트. 니트 베스트. 마지막으로 손목시계.

크리스토프는 모두를 갖춰 입은 뒤 고개를 들었다. 감탄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정태의의 시선을 깨닫곤 왜 그러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아니, 그렇게 입으니 꼭 어느 귀한 집 도련님 같아서.”

정태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 뒤에야 헛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귀한 집 도련님 맞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또 하나 등장이다. 다이아몬드 숟가락에 편견을 심어 줄 만한 인물.

크리스토프는 문득 정태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크리스토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에 짐가방만 내려놓고 바로 이리로 와서 서 있던 정태의는, 당연히 베를린에서 출발하던 그대로의 차림이었다.

“……. 왜. 나도 옷 갈아입고 오라고?”

“아니……, 릭의 비뚤어진 심미안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지.”

칭찬으로는 들리지 않는 그 미묘한 어감에 정태의는 ‘그러게 말이다……’라고 부루퉁하게 맞장구쳤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은 일곱 시.”

크리스토프는 침실에서 문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의 뒤, 정태의의 정면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정확하게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태의의 옆을 스쳐 복도를 나아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뭐랄까, 아직 뭔가 가닥이 잡히지 않은 기분이다.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움직이는 기분이란, 언제나 막연한 불안감을 동반했다. 어떠한 환경에 아직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

낯선 곳에 내던져진 게 한두 번도 아니지만, 이곳은 유난히 개운치 않았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 미묘하게 교차하는 공기들이 느껴졌다. 친밀감과 적대감이 양분되어 있는, 한 집안 내에 공존한다는 게 특이한 공기다.

지금도 그렇다. 복도를 나아가면서 가끔씩 드문드문 사람들과 스쳤다. 그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내 편, 혹은 네 편.

“무슨 패싸움이라도 했나, 분위기가 왜 이래.”

정태의는 크리스토프를 비롯해 그 뒤를 따르는 자신까지 사납게 노려보고 지나가는 한 청년을 스쳐 보내고 중얼거렸다.

몇 걸음 앞서가던 크리스토프가 약간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카일이 얘기 안 해 주던가?”

“? 뭘.”

“타르텐은 항시 패싸움 상태라고.”

“엉?”

정태의는 기괴한 얼굴로 되물었다. 크리스토프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 나서며 심상하게 말을 이었다.

“타르텐은 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승계자가 될 후보를 어릴 적에 미리 정해 둬. 혈족의 아이들 가운데 엄밀한 심사를 거쳐서 그중 가장 빼어난 아이를 서너 명쯤 고르지. 그들은 그때부터 경쟁 체제에 들어서는 거야. 그리고 후보가 되지 못한 아이들은 장래를 위해 유망주에게 줄을 서서, 자기가 뽑은 마권이 당첨되기를 열렬히 응원하는 거지.”

그 말투는 저녁 식사 메뉴에 대해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가 곧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쉬었다.

“경쟁이라는 게 사람의 능력을 보다 이끌어내기 쉽게 도와주기도 하는데……, 정확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어째 외부인의 귀로 듣기엔 좀 비인간적으로 들리는군.”

크리스토프는 흘끔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잠시 사이를 둔 뒤에 혼잣말처럼 말한다.

“원래부터 비인간적이었던 인간은 경쟁에서 물러서도 비인간적인 법이지.”

“글쎄, 그런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뭐 그건 논의할 만한 문제가 아니긴 하군. 그런데 경쟁이라니, 그거 꼭 해야 하나?”

“승계자 후보로 선택된 아이들만. 나머지는 종래에 그들 중 누군가가 선택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직접적으로는 경쟁할 것 없지. ……아, 다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이기길 기원하니까 그런 경쟁 심리라면 있겠지만.”

“그럼 그 선택된 아이들은. 선택되면 무조건 경쟁을 해야 하는 건가? 거부권은?”

크리스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못 들은 것처럼. 그러나 조용한 복도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못 들었을 리는 없다.

계단 위층의 마지막 단을 내려가 층계참에 이르렀을 때에야 조금 뒤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있지.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기회도 있어. 나도 그랬으니까.”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에서 나아가는 크리스토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태의는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너도 승계 후보자 중 하나였단 말야?”

후보자를 선정한 너네 집안 어른들은, 인성이나 교우 관계는 안 봤다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그래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차마 그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 하고 중얼거린다.

리하르트 타르텐이 가장 유력하다는 둥 했었던 숙부와 카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게 이거였던 모양이다. 타르텐을 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 중 가장 유망한 자.

그들이 계단을 다 내려가 1층에 다다를 무렵, 또 한 명의 청년이 옆을 스쳤다. 그 청년 역시 크리스토프를 경계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지나갔다. 짧은 욕설도 들렸다.

그 소리가 번연히 들렸을 텐데도 별 반응 없이 걸어가는 크리스토프를 보며, 이런 점은 그나마 일레이보다 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태의는 푹 한숨을 쉬었다. 뭔가 영 갑갑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팔을 벅벅 긁으면서 물었다.

“거부했으면 더 이상은 경쟁 상대도 아닐 건데, 저놈들은 왜 저래? 경쟁에서 물러서면 더 경계하거나 적대할 필요도 없는 거 아냐?”

“그러니까 얼간이들이란 거지. 제놈들 멋대로 잡생각이나 하려 들고…….”

크리스토프는 알 듯 말 듯 중얼거리며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정태의도 그를 따라 혀를 찼다.

집안 분위기가 이래서야, 여기에 머무르는 동안 자칫하면 살얼음판이겠다.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정태의를 크리스토프와 더불어 사납게 노려보고들 가는 실정인데,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어쩐지 비율로 보니, 크리스토프의 아군보다는 리하르트의 아군이 훨씬 많은 듯했다.

전도다난하다고 해야 할지, 줄을 잘못 섰다고 해야 할지.

“아……, 편 갈라서 싸우는 건 성미에 안 맞는데…….”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란 말야, 저쪽이 머릿수도 더 많지, 인덕도 더 있어 뵈지, 심지어 유망 승계 후보자라지……하고 중얼중얼 손가락을 꼽고 있던 정태의는 하마터면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토프와 부딪힐 뻔했다.

“리하르트 쪽으로 가려면 가든가.”

평연하게 말하는 그에게 응? 하고 반문하면서 정태의는 손가락에서 시선을 뗐다. 곧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눈살을 찌푸린다.

“여기 있으나 저리로 가나 어차피 편가르기는 마찬가지잖아. 둘 다 싫다, 나는. 게다가 잊었나 본데, 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란 말이지. 책 줘, 책.”

크리스토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지그시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불쑥 중얼거린다.

“너 UNHRDO에 있었다면서.”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가 그랬던 것처럼, 지그시 그를 바라본다.

“……카일이 그런 말까지 했나?”

“아니, 카일은 그저 대신 사람을 보내겠다고만 했지.”

정태의는 묵묵히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카일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접점은 하나밖에 없다.

그 생각대로, 크리스토프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뻔히 귀찮아질 걸 알면서도 릭이 그 수고를 한 이유가 뭘까. 적어도 기동대 놈들 가운데에는 모르는 놈이 없을걸.”

“하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정태의는 뜻 없이 중얼거리기만 했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기울였다. 비스듬한 각도로 정태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한숨을 쉰다.

“나는 도무지 그 수고를 한 이유를 알 수가 없어졌지만 말이지…….”

“차라리 그냥 대놓고 욕을 하지 왜.”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쉰 크리스토프는 부루퉁하게 투덜거리는 정태의를 보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아주 약간만.

“그러는 편이 좋아? 둘러서 욕하는 것보단 대놓고 욕하는 편이 좋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다른 선택지는 없나요…….”

정태의는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세상 이렇게 각박해서 어떻게 살아.”

투덜투덜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흠, 하고 조그맣게 숨을 내쉬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크리스토프가 정태의를 보고 있었다.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입매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또다.

정태의는 그 입매를 쳐다보았다.

어떤 표정을 하면 될지 모르겠다는 듯 막막하게 헤매는 것 같은 그 입가를 보다가, 머쓱하게 목을 긁적인다.

뭐랄까, 기분이 좀…….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고, 뭔가 딱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크리스토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뒤돌아섰고, 정태의는 다시 그 뒤를 따랐다.

식당이 어딘지는 곧 알 수 있었다.

1층 복도를 죽 나아가 홀을 지나친 끝에, 큼직한 문이 열려 있는 곳이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냄새와 함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그곳이 저만치 보이자, 그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걸어가던 크리스토프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네 이름 말인데.”

“응?”

“재수 없는 이름이다. 다르게 부르도록 해.”

“…….”

정태의는 세모꼴로 치뜬 눈으로 뚫어지게 그를 보았다.

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전에 마주쳤을 때도 저런 말을 들었었다. 재수 없는 이름이라고.

“아니, 내 이름이 뭐가―.”

우리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 좋기만 한데,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정태의의 입을 크리스토프는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덮어서 밀어 버렸다.

“내 생각엔 그 이름이 아무래도 이 지역과 안 맞을 것 같아. 아마도 횡액수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달리 불러.”

눈 하나 까딱 않고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정태의는 매우 뜨악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미신의 영역으로 훌쩍 넘어간 주제에 아무런 의문도 느끼지 않는 얼굴로 크리스토프는 말을 이었다.

“다른 한국 이름도 많잖아. 음……, 요전에 보스니아에 갔을 때 거기서도 한국 기자를 만났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아, 그래. 영수. 그 이름도 괜찮겠군. 한국엔 김이란 성이 제일 흔하지? 김영수. 그래도 되겠어.”

“……. 혹시 일레이한테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

응? 릭? 하고 되묻는 얼굴이, 영문을 몰라 하는 빛이다.

일부러 흔한 이름으로 고르긴 했었지만 정말로 흔하긴 흔한 모양이다, 아니면 인연이 있든가.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굳이 이름을 달리 불러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건히 이름을 지키겠다고 낯붉히며 주장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어차피 이름이야 부르는 사람의 편의를 위함이지.

“정 그렇다면 여기선 김영수 하지 뭐…….”

정태의는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프는 무표정하게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그 말을 듣곤 고개를 돌렸다.

식당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발걸음이 어쩐지 만족스러워 보였다.

*

타르텐 내의 젊은 층의 관계가 패싸움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이미 들은 바가 있긴 하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루어진 분위기일 테니 이제는 그런 공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게다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눈치였으니, 이 집에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할 만한 외부인이라면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도 이해할 법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나만 바보 되긴 싫단 말이지.”

정태의는 군감자를 포크만으로 솜씨 좋게 네 조각을 내며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했어?”

바로 옆에서, 반대쪽 자리의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웃이 고개를 돌렸다. 정태의는 감자를 우물거리며 포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다정한 이웃은 그럼 됐고, 라며 자기 몫의 접시에 포크를 댄다.

식당의 분위기는, 그래도 각오했던 것만큼 험악하지는 않았다.

서익에 머무르는 젊은층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곳이라고 해서 나름대로 험한 꼴을 볼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제각각 조금씩 식사 시간이 달라서 그렇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도 밥을 먹으면서까지 주먹다짐을 하고 싶지는 않은 듯, 사나운 눈길은 오갔지만 딱히 대대적으로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분위기 온건하네.”

정태의는 입술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닦아 낼름 핥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과거를 추억으로 되새겨보았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정태의가 숙부의 흉계에 빠져―랄까 협박을 받고 끌려갔달까―UNHRDO 아시아 지부에 몸담고 있었을 때, 석 달에 한 번씩 타지부와 돌아가면서 합동 훈련을 했었다.

정태의가 그곳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맞아들인 곳이 유럽 지부였다. 아시아 지부와는 아주 견원지간이라고 소문이 난 곳이었다.

그때는 맘 편히 식사하기도 힘들었다.

물론 자기네 지부 사람들끼리 앉아서 먹기는 했지만, 바로 옆 테이블에 타 지부 놈들이 앉아 있기라도 하면 식사하는 동안 내내 포크며 나이프가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큰 싸움으로 번져 테이블을 뒤엎는 놈도 속속들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누구였더라……. 걸핏하면 유럽 놈을 붙잡고 접시에 처박아 버리면서 온갖 난장을 다 부렸던 게. 비슷한 놈들이 워낙 많아서 언뜻 구별이 안 가네. 가만있자…….

“아, 그래그래, 알타였다, 알타.”

그래서 생활담당 교호한테 잔소리는 도맡아 들었지. 심지어 막판에는 식사 때마다 교호가 알타를 붙잡아 앉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이놈은 아까부터 뭘 혼자서 중얼중얼……. 어이, 괜찮냐?”

옆자리의 이웃은 아까부터 정태의를 흘끔거리다가 보다 못해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래, 이런 경우에도 이 말을 한 게 유럽 지부 놈이라면 사단이 나는 거지. 아니,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다.

정태의가 대련 중에 팔을 약간 삐끗해서 식사하다가 음식을 두어 번 흘리자, 바로 옆 테이블에서 유럽 놈 하나가 비아냥거렸다. 수전증으로 고생 많을 텐데 밥 잘 먹으라고.

정태의가 무심하게 ‘응, 걱정 고마워.’라고 대답하며 태연하게 밥을 먹는 옆에서 카를로가 이놈에게 접시를 냅다 집어던졌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싸움판으로 번져 접시뿐 아니라 포크, 나이프까지 공중을 날아다니는 가운데 밥을 먹느라 퍽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정태의는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어 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 섞어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걱정해 준 고마운 이웃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응,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맙다.”

“어, 그래. 낯설어서 힘든 점도 많겠지만 힘내라.”

말 그대로 걱정을 해 준 착한 옆자리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정태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옆자리는 크리스토프를 지지하는―정확히는 리하르트를 달가워하지 않는―소수 중 하나였다.

비록 크리스토프는 저만치 앞쪽, 크리스토프의 지정석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상석에 앉아 있는 등 사람들 대부분은 암암리에 잘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가만히 보면 편을 갈라 앉아 있는 양상을 엿볼 수 있었다.

어느 쪽도 아닌 정태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적당히 아무데나 빈곳에 앉았다. 다행히도, 우연히 옆자리가 이렇게 친절한―아군 격인―인물이었다.

“그런데 넌 어쩌다가 크리스토프한테 걸려서 여기 눌러앉게 됐어? 어디서 왔는데?”

친절한 이웃은 손바닥만 한 생선구이를 두 입 만에 다 먹어치우면서 물었다.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힌 이 쾌활한 이웃은 크리스토프의 사촌이라고 했다. 리하르트도 사촌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대체 사촌이 몇이냐고 했더니, 친가 쪽에서 정식으로 호적에 오른 사촌만 거의 스물에 가깝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힘을 키워나가는 데에 머릿수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이 집안 어른들은 알고 있었나 보다.

외척이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자손들까지 치면 그 배도 더 된다는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는 요한의 건너편에 있는 남자도, 호적상으로는 이 집안과 상관이 없는 사촌이란다.

여기도 참 분위기 애매하네,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흘끔, 저만치 떨어져 앉은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로 바로 옆자리나 앞자리 사람 한둘 정도와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곳에서, 크리스토프는 묵묵히 홀로 은식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귀부인에게는 은식기도 식사 때의 액세서리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들리더니, 저놈도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저 옆 어딘가에서 촬영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정태의는 문득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냅킨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가끔 좀 뜨악하고 당혹스러운 면모가 엿보이긴 해도, 그래도 저 정도면 그냥 성질이 더럽다는 말쯤으로 해결이 될 만도 한데……, 저렇게 따돌림당할 만한 짓이라도 했나?”

“음? 누구?”

요한은 포크를 입에 문 채 정태의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러다가 그 끝에 있는 크리스토프를 확인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크리스토프?! 저놈이 따돌림당할 위인이기나 하냐. 미친놈이니까 아무도 근처에 안 가는 거지. 나만 해도, 리하르트 옆을 둘러싼 놈들이 워낙 싫어서 차라리 크리스가 주위는 조용하니까 낫겠다 싶은 거지, 저놈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흠. 별로 그렇게까지 미친놈 같지는 않은데.”

정태의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했다. 그러나 굳이 그 점에 대해 주장을 펴지는 않았다. 요 한동안 일레이도 집에서는 정상치에 가까운 모습으로 지냈다는 걸 생각하면, 정태의가 틀렸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정태의는 옆에서 크리스토프 광인설을 열심히 주장하는 요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적당히 분위기는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흡족하거나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충 분위기는 알겠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위협하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걸로 표현하지만―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호감이나 적의를 넘어서, 그를 저어한다. 저 남자가 거의 사교성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도 한 몫 하겠지만.

“뭐 본인이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것도 상관없지.”

정태의는 샐러드와 함께 말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태에 있든 어떻게 살아가든 주위에서 어떻게 바라보든, 정작 본인이 그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바가 못 된다. 그저 그 사람이 현실을 비관하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

그래, 생각해 보면 일레이 같은 놈도 잘 살고 있다.

만인의 지탄을 받으며, 멀쩡하게 식당에서 밥 먹다가도 총탄 세례를 받을 만큼 원한도 많이 샀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인간이 결코 흔하진 않을 거다.

그런 인간도 현실을 비관하거나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었다.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그런 증세를 보인다면 몰라도 그 당사자는 거칠 것 없이 잘 산다. 그렇다고 수십 년 지난 뒤에 어느 날 갑자기 그가 회개해서 과거를 참회하며 고통스러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로우와 같이 일하기도 했다는데, 그럼 말 다 한 거지.”

그때 문득 익숙한 이름이 들린 것 같아 정태의는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태의가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계속해서 크리스토프 광인설을 주장하고 있었던 모양인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를 구하듯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정태의의 표정이 멍청한 걸 보곤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 미치광이 릭을?”

“응? 아……아니, 일레이 리그로우를 말하는 거잖아.”

“그래. ……어차피 여기 있는 놈들, 다 따지고 보면 어릴 때는 그놈이랑 같이 뛰어다녔으니 어릴 적 친구라면 친구랄 수도 있지만―미친 듯이 부정할 놈도 여럿 있지만―, 그래도 그놈이랑 같이 일할 생각은 아무도 안 했다고.”

요한은 파슬리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다 비운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냅킨을 집어들었다. 쾌활한 편이지만 성격 자체는 개인적인 면이 엿보이는 그는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는 그래도, 미친놈이긴 해도 나쁜 놈은 아니거든. 어쨌거나 자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먼저 해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저거 머리도 좋아. 늘 표정만 보면 맛간 놈 같지만, 타고난 두뇌에 영재 교육까지 제대로 받았거든. 그런데 굳이 그런 위험한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도대체 어디에―하긴 그러니까 미친놈이란 거지.”

혼자 얘기하다가 혼자 결론을 낸 요한은 냅킨으로 입을 북북 닦았다.

이렇게까지 확고한 악평을 심어 놓다니 일레이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어쩐지 조금 우울해진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정태의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직 접시에는 야채 몇 점이 남아 있었지만 배가 다 찼다.

적당히 밥도 다 먹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 뭐 그리 분위기가 좋지도 않고,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배를 쓰다듬으며 크리스토프 쪽을 보았다. 그쪽은 아직 접시에 음식이 제법 남아 있었지만 거의 다 먹은 듯한 분위기였다.

그만 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아주 잠깐,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열려 있는 문 안쪽으로 리하르트가 들어오고 있었다.

몇몇 시선은 리하르트를 확인하자 크리스토프에게 옮겨간다. 기대, 걱정, 호기심 따위가 섞인 시선들이다.

정태의는 좀 더 빨리 나갈 걸, 하고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마침 뒤를 지나가던 급사에게 부탁해서 받은 맥주캔의 풀탭을 뜯으며 무심하게 그들을 보았다.

어딘가 나갔다가 곧바로 식당으로 온 길인 듯 “아, 점심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라며 웃으며 들어온 그는 양복 웃옷을 벗어 급사에게 건네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크리스토프에게 가서 멎었다.

크리스토프 역시 굳이 그 시선을 못 본 척하지 않고 흘끔 눈길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크리스토프는 원래부터 웃음기가 없었지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네들끼리라도 뭔가 수군거리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침묵을 스스로도 어색하게 여겼는지 다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지만 그 목소리는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다.

리하르트는 이내 태연하게 근처 사람들에게 ‘오늘 별 일 없었나?’ 하고 인사를 건네면서 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토프의 맞은편 자리였다.

“사이도 좋지 않은 인간들이 꼭 저렇게 앉더라…….”

정태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맥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니, 고정석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략 종종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근처에 몇 자리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저 자리에 앉은 걸 보면 저 둘도 저곳이 나름대로의 지정석인 모양이었다.

하긴, 처음 그들이 식당에 들어왔을 때도 저기 크리스토프가 앉은 자리는 유독 거기만 달랑 띄어, 좀 부자연스럽게 비어 있었다.

정태의의 생각을 옆에서 요한이 뒷받침해 주었다.

“어, 하지만 늘 저 자리니까.”

“그야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앉으면 상대를 의식한다는 느낌이 너무 드니까 것도 싫긴 하겠다.”

“그렇지, 너라도 그러겠지?”

“아니.”

나 같으면 꺼림칙한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무조건 제일 먼 자리로 갈 걸, 하며 단칼에 고개를 젓는다. 어찌 되었든 마음 편히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이를테면 일레이 같은 인간이 앉아 있기라도 하면, 필히 거기서 제일 먼 자리를 차지할 거다. 그 자리가 차 있다면 거기 미리 앉아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서라도 거기 앉을 성싶었다.

그렇게 피해 다니려고 노력했던 기억도 아련하게 남아 있는데 결국은 이런 상황이 됐지만.

사람 앞일이란 모르는 법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정태의는 맥주캔 모서리를 잘근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태의는 지그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바로 건너편에 앉은 크리스토프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옆자리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언뜻 웃음을 짓는 그 인상 좋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가 뭔가 일레이에게 일을 맡겼던 것 같은데.

어느 날 훌쩍 집을 나가 두어 달 동안 소식도 없었던 일레이를 떠올리며, 저 남자에게 가서 무슨 일을 맡긴 거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맡긴 일을 두고 어떤 일을 의뢰했냐고 묻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언어도단이었지만, 그런 걸 물어보려면 그 전에 먼저, 그때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 했다.

그때 소파 뒤쪽에 누워서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일레이가 하는 일을 캐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말야.”

정태의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비스듬히 앉아 맥주를 입에 부어넣는 방탕한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옆에서, 정태의가 마시는 걸 보자 시원해 보였는지 자기도 맥주를 하나 받아온 요한이 돌아보았다.

“탁월하게 공기가 험악한 저 부근 말야. 그런데 꼭 저렇게까지 사이가 나빠야 하나?”

“음? 아……. 리하르트가 있잖아.”

그러니까 사이 나쁜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요한에게 정태의는 눈살을 찌푸려보였다.

“어차피 크리스토프는 그 무슨 경쟁도 이제 안 한다며.”

“아니, 그 경쟁을 떠나서 원래가 리하르트는 크리스토프를 아주 대단히 싫어하거든. 크리스토프도 마찬가지고.”

“흠……?”

정태의는 눈동자만 굴려서 요한을 쳐다보다가 의외로운 소리를 내며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주위에서 눈치챌 만큼 특정한 인물을 아주 대단히 싫어할 만한―혹은 그렇다고 티를 낼 만한―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사람 참 선량해 보이는데.”

“선량해. 정확히 말하자면 성실하고 믿음직해서 사람들이 많이 따를 만한 인격자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런 인격자가 어쩌다가―라고 말하려다 정태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쩐지 그것도 일종의 편견에 찬 발언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들 좋고 싫은 인간 한둘이 없을까. 제 아무리 인격자라 해도 만인을 다 끌어안을 수는 없다. 싫은 인간을 앞두고 표현을 과하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할 수 있다.

“꼭 무슨 선악 대결 구도 같군.”

정태의가 중얼거리자 요한이 푹 맥주를 뿜으며 웃었다. 정태의는 움찔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더럽다는 생각과 동시에 맥주가 아깝다는 생각이 가슴을 친다. 차라리 물을 뿜지.

그 말이 그렇게 웃겼는지 한참 동안 뒤로 넘어갈 듯이 웃던 요한은 눈꼬리에 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뭐 원래 성격이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자주 마주치며 함께 자라다시피 했으니까. 그런 세월 속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

“흐음.”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캔을 한 바퀴 흔들었다. 찰랑, 얼마 남지 않은 맥주가 캔 안에서 부딪힌다.

시간 속에서 관계는 쌓여 간다. 한결같이 매끄럽기만 한 관계는 없었다. 그런 게 있다면, 그건 필경 정상적인 관계일 수는 없을 거다.

그렇다고 저렇게 거칠거칠하기만 한 관계도 생기기 쉽지 않다. 특히나 지난 시간이 오래 되었다면 더욱.

“미운 정이라는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정태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머지 맥주를 훌쩍 다 마셨을 때였다.

잠시 넋 놓고 있는 사이에 뭔가 시끄럽다 싶었더니, 어느 결엔가 저 앞쪽에서 사소한 시비가 벌어져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옆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와 그 대각선 위치에 앉아 있던 남자가 험한 공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저긴 또 왜 저래.”

“발 몇 번 부딪혔다고 냅다 걷어찬 거 아닐까.”

“……. 그렇게 유치하게 싸울 리……. ……도 있겠군.”

정태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맥주 한 캔쯤 더 마시려고 했는데 욕설이 오가기 시작한 식당 안에서는 술맛도 안 날 것 같았다.

저 다툼이 곱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고, 그냥 이 즈음에서 맥주 한 두어 캔 따로 챙겨서 방으로 돌아갈까.

정태의는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의자를 뒤로 뺐다. 그리고 모른 척 문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하필 그때 그 앞길을 가로막기라도 하듯이 테이블 너머에서 욕설을 퍼붓고 있던 남자가 울컥한 듯 일어서 이쪽으로 빙 둘러서 다가왔다.

좀 떨어져 있는 자리이니 여기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만, 문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 버렸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이미 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 멱살까지 움켜쥐었는데, 제대로 말리려는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싸움 구경이나 하면서 길이 트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려나 보다, 하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그 건너편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만둬. 이곳에는 사람들도 많으니 차라리 자리를 따로 잡도록 해라.”

친구에게 권유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는 분명한 힘이 실려 있었다.

상대의 멱살을 움켜쥐고서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귄터.” 하고 리하르트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자 혀를 차더니 그 멱살을 내팽개치듯이 떠밀며 놓아 버렸다.

“흥. 쥐새끼 같은 놈.”

그러나 얌전히 돌아가지는 못하고 끝내 욕설을 남기는 그에게, 상대 남자는 욱한 듯 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뭐가 어째?!”

“이 새끼가―….”

어깨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그 남자가 막 몸을 틀었을 때였다.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두어 걸음 나서다가 상반신을 휙 틀며 돌아본 남자의 팔꿈치가, 그 옆에 있던 의자와 함께 거기 앉아 있던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았다.

“앗…….”

“…….”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벌렸다. 그와 비슷한 사람이 몇이나 더 있었다.

주위가 싸늘해졌다.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막 일어서려고 의자를 뒤로 밀다가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 크리스토프는, 잠시 굳은 듯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팔꿈치로 때린 남자는 그가 누군지 확인하고 낯을 확 굳혔다. 어깨를 붙잡은 손을 뿌리치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 손도, 순간 힘을 잃은 듯이 스르륵 풀어졌다.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길이 남자를 쏘아본다.

남자는, 거기서 사과하면 좋았을 그는―사과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선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그의 시선만으로 몸을 떨며 물러섰다는 걸 인식하고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더니, 도리어 가슴을 펴며 그쪽으로 다가섰다.

“뭐야, 다 먹었으면 얼른 비키지 않고 꾸물거리니까 그렇지. 어차피 접시도 다 식었는데 뭘 더 먹겠다고 굶주린 생쥐처럼 그러고 있어. 어서 꺼져.”

남자는 턱을 당기며 고개를 치켜들고 으르렁거렸다. 크리스토프를 내려다보는 가느다란 눈매가 사납게 번뜩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공포에 가까운 흥분의 빛이 그 눈에 감도는 걸 보면서, 정태의는 혀를 찼다.

“……. 접시도 다 식었어?”

크리스토프는 조용히 말했다.

여전히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정태의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경고를 외치기 전에, 그 일은 벌어졌다.

마치 친구의 손을 잡듯이 아무렇지 않게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은 크리스토프는, 자기 몫의 고기를 올려두었던 뜨겁게 달군 철반에 남자의 손을 가져다 지그시 눌렀다.

매우 순간적인 일이었다.

“아, 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짐승의 포효처럼 터져 나왔다.

그나마 처음 막 테이블 위에 내어왔을 때보다는 식어 있다고 하나 여전히 고깃점 아래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울리고 있는 철반이었다.

생살이 타는 소리가 테이블 끝자락까지 들렸다.

“네 입으로 다 식었다고 말한 접시에 손 좀 닿았을 뿐인데 웬 엄살이야.”

무심하게 말한 크리스토프는, 그를 뿌리치려고 요동치는 남자의 거센 힘에도 꿈쩍 않고 그의 손을 철반에 누른 채, 다른 손으로 옆에 굴러다니던 나이프를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버터나이프다.

“야, 차라리 그거 말고 그냥 칼을―.”

그러나 이번에도 덜컥 앞일을 예측한 정태의가 소리를 치기 전에, 버터나이프가 철반에 얹힌 남자의 손 위로 수직으로 날아들었다.

“……!!”

날카로운 데라곤 없이 뭉툭한 날이 손등을 크게 헤집으며 살을 파고들었다. 뼈와 뼈 사이로, 근육들을 가르며, 쇳날이 손에 박힌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지만 그 손에는 포크가 박혔다.

그 뒤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처 입은 야수처럼 미친 듯이 날뛰는 남자, 낯빛을 바꾸며 그 남자를 도우려 몰려드는 다른 남자들, 그들과 식사 내내 크고 작은 신경전을 벌였던 남자들, 그런 자들이 얽히고설켜 식당 안이 혼란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덤벼드는 남자들에게 차례로 피맛을 보여 주는 무심한 크리스토프를 멀리서 바라보며, 또한 자신에게 덤벼드는 남자들을 깔끔하게 한 방에 기절시키는 리하르트를 보며, 정태의는 아득한 기시감을 느꼈다.

사소한 다툼이 패싸움으로 번지는 모습을 예전에도 봤던 것 같다. 사관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런 일이 딱 한 번 있었고―그 뒤에 단체로 지옥 구경을 했다―, UNHRDO에서는 좀 더 자주 있었다.

이제는 평화롭게 살면서 이 꼴 좀 안 보나 했더니.

그리움마저 드는 이 정경 속에서, 정태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거의 이런 상황이었단 말이야, 그 녀석이 주로 활약했던 건.

정태의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옛 동료를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젖었다.

“젠장, 조용히 밥 잘 먹고 뭐하는 짓들이야. 좀 진정들 하지.”

옆에서, 나름대로 중립의 입장에 서 있는 요한이 혀를 차며 반사적으로 포크를 움켜쥐었다. 정태의가 한 뼘쯤 몸을 피하며 그 포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요한이 그 손을 마구 젓는다.

“아냐, 아냐, 이건 그냥 방어 도구. 불똥이 언제 튀어올지 모르잖아. ―옌장, 이거 좀 진정시킬 수 없나. 한두 놈이면 몰라도 단체로 저 모양이면 그것도 힘들단 말야.”

“이 상황을 진정시키는 방법이라…….”

정태의는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쯤은 뭐하고 있으려나, 알타. 아직도 아시아 지부에서, 유럽 지부와 합동 훈련을 할 때마다 그러고 있으려나.

나중에 숙부와 연락이 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예전에 알던 놈이 곧잘 하던 짓인데……. 어이, 거기 잠깐 옆으로, 옆으로.”

정태의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남자들에게 설레설레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식당 안의 모든 소란들을 다 덮을 만큼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육중한 마호가니 테이블이 쓰러지며 그 위에 있던 온갖 식기와 음식, 유리병 따위가 바닥 위로 와장창 쏟아졌다. 챙강, 챙강, 챙강,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산산이 흩어진다.

저 앞쪽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있던 남자들까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았다.

이윽고 쏟아질 만한 것이 다 쏟아지고 깨어질 것도 다 깨어진 뒤, 식당 안에는 스테인리스제 조그만 꽃병이 도르르르 반 바퀴쯤 구르다 멈추었다.

쥐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정태의는 어깨를 으쓱하며 요한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일단은 조용해지더라고. 수시로 이 짓을 하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그러더군. 상 엎어 버리는 거, 처음에만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쉽다고.”

*

뒤엎은 다음에야, 알타가 그 뒤에 덧붙였던 말이 떠올랐다.

뒤엎는 데 3초, 치우는 데 세 시간, 감당하는 데 석 달.

하지만 석 달만이 아니라 그 뒤에도 식당에 갈 때마다 배식처에서 무시무시한 시선과 구박을 함께 받았던 알타를 생각하면, 3년은 족히 뒷감당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게 부인이라도 된다면 평생 두고두고 그 소리를 들으며 타박받을 각오는 해야 한다고, 지부 내에서 찾아보기 드문 유부남이었던 체이슨이 그랬었지.

식당에서 급사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조금 전까지 청소며 뒷정리를 돕다 온 정태의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그 요란한 소리로 난투가 벌어지기 시작하던 분위기에는 찬물을 끼얹었지만, 뒷감당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갑자기 공공의 적이 된 듯 ‘저건 또 뭐야’ 하고 삭막하게 중얼거리며 노려보는 남자들의 관심 하며,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급사들의 창백한 시선 하며,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식당에서 급사들과 함께 정적 속에서 그곳을 정리하면서 등줄기에 무수히 꽂혔던 보이지 않는 칼날 하며.

두 번 겪기는 싫었다. 결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하고 또 하다니, 이제 보니 알타, 엄청나게 대담한 놈이었구나…….”

정태의는 피폐하게 중얼거렸다.

가장 마음에 상처가 되었던 것은, 정태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식당 청소를 다 할 때까지 식당 문 앞에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던 크리스토프가, 정태의가 청소를 마치고 나갈 때에 불쑥 던진 말이었지만.

‘망가진 비품 값은 카일에게 빚으로 지우면 되는 거지? ……너 책 돌려받기 좀 힘들겠는걸.’

딱 하루―하루도 아니다, 반나절이다―이 집에 있었을 뿐인데도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정태의는, 결코 책을 곱게 돌려받지는 못할 것임을 예고하는 그 말에 녹다운되었다.

그래도 상을 뒤엎기까지 약간의 시간은 걸렸는데도 그 난투 속에서 상처 하나 없이 말짱하게 살아남은 크리스토프는, 정태의가 식당 문에 머리를 박고 주루룩 미끄러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걸음을 돌려 사라졌다.

흐느적흐느적, 겨우 몸을 일으켜 방까지 돌아온 정태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납덩이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물먹은 솜이 된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은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 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 바깥세상과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거 아냐……?”

정태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렸다.

처진 대大자로 침대에 엎어지자마자 이불이 몸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 안에 녹아서 빨려드는 것 같다.

얼마나 피곤한지, 베개와 이불의 경계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숨이 답답해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는데 그조차 움직일 힘이 없었다.

이렇게 피곤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사실 몇 시간에 걸친 청소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가끔 휴일이면 페터를 도와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 정원 일을 하곤 했고, 때로는 이웃집 지붕 고치는 걸 도와주러 갔다가 대대적인 수리를 떠맡기도 했다.

그런 데에 비하면 청소 몇 시간쯤 하는 거야 대수도 아니었지만―.

“역시 사람은 몸보다 정신이야, 정신…….”

원치 않게 움직이며 온 사방에 신경을 쓰다 보니, 머릿속에 근육통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목한 가정을 방문했다 해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를 지내면 심적으로 피로해질 판에, 심지어 오자마자 험상궂은 패싸움판에 끼어들게 되다니. 게다가 이제는 본의 아니게 만인에게 아예 크리스토프의 아군으로 찍힌 모양이었다.

책을 찾아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라고 카일이 말했을 때, 그건 단순히 그 책을 가져간 인간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혹시 이 상황까지 포함해서 했던 말인 걸까.

“……. 아니지……. 이 상황도 결국은 그놈의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잖아.”

정태의는 꾸물꾸물 고개를 돌렸다. 푹신한 베개자락에서 헤어난 코가 그제야 시원하게 공기를 들이켠다.

요한이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먼저 해치지는 않는다고. 아마도 요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그러게 왜 먼저 건드려……. 알면서 건드린 놈이 바보지.”

정태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문득 크리스토프의 그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무심하다고 할까, 심드렁한 얼굴이다. 정확히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어디에도 관심이 없고 지겹기만 한 무표정.

그 얼굴은, 남자의 손을 달군 철반에 올려놓고 버터나이프로 찍는 순간에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람을 해치는 데에 서슴지도 않고, 또한 그런 행위를 혐오하거나 혹은 즐기지도 않는다. 비웃음이나 혹은 쾌락이라도 섞이면 차라리 나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전도다난하다……. 하긴 카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한 일이, 쉬운 일일 리 없지.”

정태의는 다시 한번 침대가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카일, 이거 너무 고달파요, 나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아. 카일에게 전화해야지.”

그러고 보니 아까 언뜻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연락하지 않았다.

별 탈 없이 도착해서 크리스토프를 만났다고, 카일에게 기별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혹시라도 일레이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는지―왔다면 말은 잘 해 줬는지―도 마음에 걸렸다.

전화를 해야지, 하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도 침대가 온몸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대로 까무룩 잠들어 버린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었다.

침대 바로 옆의 협탁에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 손이 닿으려면 일어나서 반걸음만큼만 몸을 내밀면 되는데도, 그것이 마치 철인3종 달성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

언제였더라.

페터와 함께 뒷뜰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나서 하루 종일 새로 단장한 뒤 끙끙거리며 누워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꼼짝도 않고 누워서, 전화할 데가 있다고 전화 좀 집어 달라고 일레이에게 말했더니 그놈은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정태의를 질질 끌어다가 전화 앞에 놓아줬었다.

그때는 왜 사람을 번거롭게 하냐고 투덜거렸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그놈은 지금 어디서 뭘 하나 몰라.”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았었는데, 불쑥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놈과 같이 살기 시작한 뒤로 달포가 넘도록 떨어진 적은 없었다.

“……. 그놈이 그리워지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다 말고, 정태의는 약간 낯을 찌푸렸다.

그놈보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집에 돌아갔을 때 그놈이 현관에서 떡하니 버티고 서서 맞아 주기라도 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그리운 마음이다.

“그놈의 책 어디다 뒀을까……. 역시 카일의 말마따나 싹 훔쳐서 냅다 튀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정태의는 고뇌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베를린의 지역번호가 뭐더라, 가물가물한데, 하고 고개를 삐딱하게 갸웃거리면서 더듬더듬 누른 번호는, 다행히 맞는 번호인 모양이었다. 수화기 안쪽에서 카일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이?’

“예. 어떻게 아셨―아, 번호 떴겠구나.”

정태의는 수화기의 코드를 잡아당기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벌렁 드러누운 채 다른 쪽 손으로 신발을 한 짝씩 벗어낸다.

‘크리스틴은 잘 만났어?’

“아, 예, 다행히 큰 탈 없이―아니 잠깐, 그 호칭 말인데요.”

정태의는 그제야 따져봐야 할 문제가 하나 떠올라서 미간에 내천川자를 그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려면 채찍에 살점 날아갈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거,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잠시 사이를 둔 뒤에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정태의는 그러잖아도 기운 없는 몸에 힘이 더 빠졌다.

“카일……. 카일만은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정태의가 우울하게 중얼거리자 수화기 안에서 카일이 다급하게 변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아냐! 나는 어릴 적부터 그 녀석이랑 알고 지내서 그래! 그 녀석이 어릴 때엔 정말로 여자애처럼 예뻤다고. 그러니, 크리스를 크리스티나의 약칭이라고 잘못 착각했다 해도 그렇게 내 탓만 할 건 못 된단 말야. 이미 그렇게 기억하고 그 이름이 입에 붙은 다음에야 난 그 녀석의 이름이 크리스토프란 걸 알았는데, 비단 나만의 잘못이었겠어?! 그렇지, 창인도 처음에 그 녀석과 인사를 나눈 뒤에 나한테 그랬다고. 크리스토프보다는 크리스틴이 더 어울린다고!’

“그렇다고 제가 그 변명을 크리스토프에게 할 수는 없잖아요. ‘네가 생겨먹은 게 그래서 크리스티나라고 불렀을 뿐이야, 미안해’……. 이렇게 말하라구요?”

‘……. 내 책들을 부디 성한 몸으로 무사히 찾아다오…….’

“그렇죠?”

정태의는 도끼눈을 뜨고 전화기를 노려보다가 이내 힘이 빠져 푹,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래서……, 혹시 그새 일레이에겐 연락이 왔었나요.”

어차피 베를린을 떠났던 게 오늘 아침이다. 거의 기별도 안 하는 인간이 하필이면 오늘, 낮 동안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아. 맞아. 그래, 왔었지.’

“…….”

기왕이면 자신이 책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자신이 나간 줄도 몰라주길 바랐는데. 하긴 그렇게 당차게 나가 버리겠다고 외치고 난 뒤인데 그것도 무리인가.

“뭐라던가요……. 어떻게, 잘 말씀해 주셨어요?”

정태의는 두근거리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물었다. 사실 아무리 잘 말했다 해도 차후가 걱정되긴 할 테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탈 없이 살아남고 싶었다.

‘아……, 그게 말이야…….’

애매하게 말을 흐리는 카일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떨어진다.

“설마 제가 나갔다는 말만 듣고 그냥 끊어 버린 건 아니겠죠!”

오해만 하고서 그 오해를 풀지도 않았다면, 심각하게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 지난번의 언젠가처럼, 이쪽에서 변명을 하기도 전에 입부터 틀어막고 사단을 내지 말란 법이 없었다.

‘아냐, 그건 아니고, 그 녀석이 전화를 했는데 내가 못 받았어.’

카일이 난처한 투로 하는 말에 정태의는 전화를 툭 떨어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손아귀에서 힘을 놓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 오해만 하고 연락두절되는 것보다는 낫잖아. 아예 내가 집에서 나갔다는 사실도 모르는 셈이니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어.

정태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연락이 안 됐다는 거죠?”

‘음. 그렇지. 그런데……부재중 메시지가 남아 있더라. 너한테 전하는 메시지로.’

그런데, 하고 약간 말꼬리를 길게 끌며 망설이던 카일이 이어 한 말에 다시 불길한 느낌이 몰아쳤다.

“뭐라고요.”

‘나가면 죽는다.’

“…….”

‘…….’

카일의 전언에 일레이의 목소리가 겹쳐져 들렸다. 마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이 귓가에서 목덜미로, 등줄기로 타고 내린다.

‘……다시 전화 오면 내가 잘 말해 줄게.’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그놈을 피해서 도망갔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을 테니까.’

“부디 그러길 바라야죠.”

‘아니야, 내 말을 믿으라니까.’

카일은 풀죽어 중얼거리는 정태의가 가엾었는지, 묘하게 힘이 들어간 어조로 딱 부러지게 단언했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카일은 분명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영 못 미덥다.

그래도 요 한동안을 돌이켜 보면 일레이는 대단히 조용히 살았다. 어쩌면 그동안 성격이 많이 나아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많이 인간화되었는지도 몰라.

정태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신으로 카일과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그런 뒤에도 한참 동안 수화기를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몸을 홱 뒤척이며 베개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아―몰라, 몰라, 몰라, 하고 중얼거리며 베개를 꾹 누른다.

숨이 막히는 줄도 모르고 한동안 그러고 있던 정태의는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냐. 좋게 생각하자. 아직 내가 그 집에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잖아. 그렇지, 한 달 뒤에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내가 먼저 책을 찾아서 가 버리면 장땡이야. ……그래. 카일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차하면 책이고 뭐고, 한 달 채우기 전에 돌아가 버려야지.”

심장 위쪽을 텅텅 두드리며 정태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간덩이로,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놈한테 나가 버리겠다고 했을까. 그 주장만 안 했더라도 지금 마음이 실낱만큼은 더 가벼웠을 텐데.

그러나 늘 그렇듯,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

가끔 꿈을 꾸면서 ‘아, 이건 꿈이구나.’라고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꿈에서 깨려고 하면 어렵잖게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악몽을 꾸면서 그 상황이 꿈이란 걸 알게 되면 그래서 좋았다.

하지만 악몽이 아닌 경우는 꿈속에서 꿈임을 깨달아도 굳이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꿈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주어진 상황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기묘한 기분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지금이 그렇다.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 ‘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눈앞에는 새파랗고 아득한 하늘이 있고, 풋풋하게 자란 풀내음이 싱그럽게 풍겨오고, 딱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고, 마음에 그늘도 없다.

이렇게 생생하면서도 평화로운 꿈에서 굳이 깨어날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고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다가 문득 깨달았다.

예전에 언젠가 이랬던 적이 있었다. 딱 이렇게 좋은 날씨에, 뒤뜰의 나무그늘에 누워서 평온하게 뒤척이며 그 한가로운 시간을 즐겼던 적이 있다.

이 꿈은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비추어 주고 있었다.

‘아……, 정말 돌 던지면 쨍하고 깨어질 것 같은 하늘이다.’

그때 나른하고 기분 좋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그래, 그랬지, 그랬어. 그런 다음엔 뭘 했더라.

예전에 있었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사소한 일들은 굳이 기억에서 꺼내지 않고 잊어 가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잊어 가던 대수롭잖은 일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되니 그 또한 희한한 기분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동안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고, 훌쩍 일어났다. 목도 마르거니와 그렇게 누워 있는 데에도 이제 슬슬 질렸다.

마침 방에 둔 미니바에는 비축해 두었던 맥주가 다 떨어졌으니, 주방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캔을 하나 꺼내어 방으로 갈까 싶었다.

오랜만에 할 일이 없이 한가한 오후, 맥주를 마시면서 창가에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좋아하는 화가의 화집이라도 천천히 넘기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고 잠시 고민하다가 맥주캔을 둘 꺼내었다. 그리고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처리해야 할 일거리가 쌓였던 듯, 일레이는 어젯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부스스하게 방에서 나왔을 때에도 그는 밤을 꼬박 새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세수를 하고 적당히 정신을 차릴 무렵에야 겨우 그는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 화창한 오후의 여유를 즐기려고 뒤뜰로 나올 때에도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선 지금도 자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일어나 있으면 그에게도 건네어 줄 맥주를 한 캔. 안 일어나 있으면 ‘내’가 두 캔 다 마시고.

‘나’는 큼직한 맥주캔 두 개를 끌어안은 채 사뿐히 발소리를 죽여 방 쪽으로 향했다. 어쨌거나 아직도 잠들어 있다면 일부러 깨울 생각은 없었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그의 방, 왼쪽으로 돌아서면 ‘내’ 방이다. 어차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고 대체로 그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되어 있다.

복도 끝에 이르러 오른쪽을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려 있었다. 일어났나 보다.

잠 깨기에 딱 좋은 차가운 맥주라도 배달해 줄까,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침실 맞은편에 있는 서재의 문도 한 뼘쯤 열려 있었다.

일어나서 서재에 가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아침까지 일을 다 마치고 잠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일이 남아 있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그리로 다가갔다. 혹여 일을 하고 있으면 거기다 대고 맥주를 들이밀기는 좀 그렇……겠지만 그래도 그냥 들이밀어야지. 잠깨기 위한 맥주가 아니라 일하던 도중의 휴식을 위한 맥주도 좋지 않은가.

‘나’는 서재로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 열려 있는 그 문에다 대고 ‘들어간다’ 하고 말을 걸려다가 멈칫했다.

그 안에서 낮은 말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듯했다.

‘나’는 서재 문을 밀었다. 한 뼘만큼 열려 있던 문이 세 뼘만큼 밀렸다. 그 기척을 느꼈는지 책상 앞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던 그가 돌아보았다.

신경 쓰지 말고 통화 계속하라고 손을 약간 들어 보인 뒤 서재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맥주캔을 옆에 내려놓고 책장에 기대어 적당히 손에 닿는 책을 하나 꺼내었다. 사진작품 모음집이다.

흑백과 컬러가 섞여 있는 그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나’는 한 손으로 맥주캔을 땄다. 탄산 거품이 터지는 조그맣고 알싸한 소리가 듣기 좋다.

‘내’가 맥주를 마시며 사진집을 넘기는 동안 그는 통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 나쁘지는 않겠군. 상당히 좋은 조건이야. ……아아, 그래. 일의 내용에 비해서는 파격적인 보수라고 못할 것도 없겠어. 그래서, 기간은?’

그의 시선이 ‘내’ 정수리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충 추측하기로는 뭔가 일의 의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는 종종 그렇게 어디선가 일이 들어왔다. 그것이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집에서 처리할 만한 일이면 오가며 보이니까 무슨 일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하지만 외부로 나가야 하는 일이면 알 도리가 없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다. 알면 알수록 어두운 세계가 보일 것만 같은 느낌이 얼핏 든 탓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의뢰는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일인 모양이었다.

이번에 나가면 얼마나 있다가 오려나.

보통은 며칠, 길어지면 몇 주이지만 몇 주씩이나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지간하면 일주일 안에 돌아오곤 했다.

수배범이 저렇게 거침없이 돌아다니다니, 대체 경찰들은 뭘 하는 거야…….

‘나’ 자신의 처지는 제쳐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안 해.’

그 짧은 대답에, 나는 사진집에서 시선을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카락이 몇 가닥 뻗쳐 있었다. 그런 상태로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좀 웃겼다. 잠투정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좋은 조건에 파격적인 보수라며 흡족한 빛을 보이더니, 무슨 말이 덧붙었길래 저렇게 딱 잘라 안 한다는 거야.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분명 그 조건은 버리기 아쉽지만’ 하고 말하면서도 별반 아쉬운 빛도 보이지 않으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잘라 말했다. 그래도 안 해, 라고.

수화기 너머에서는 상대가 뭐라고 토로하는 눈치였다. 희미하게 들릴락말락 들려오는 상대의 목소리는, 대충 이렇게 좋은 조건의 일은 흔치 않다 운운하는 말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다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는 혀를 찼다.

‘너무 길어. 한 달씩이나 나가 있을 생각 없어. 그 조건이 좋긴 하다만, 그렇게나 나가 있을 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아.’

아하. 하긴 서너 주 남짓 나가 있다가 들어온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쉬고 싶을 만도 하지.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맥주캔 모서리를 씹었다.

그때였다.

‘집에 무슨 꿀단지라도 묻어 놨냐! 이 좋은 일을 왜 안 하겠다는 거야!!’

울컥 부아라도 난 듯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내’ 귀에까지 상대의 말이 들려왔다. 저 말투로 봐선 가끔 그에게 전화를 하는 수상쩍은 옛 동료인 것 같았다. 본 적은 없지만, 미친놈 소굴을 공유하는 사이였던 옛 동료 중 하나…….

그 우렁찬 소리에 나도 모르게 사진집에서 시선을 들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보았다. 우연인지, 흘끔 내 쪽으로 시선을 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돌리며 무뚝뚝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두 번 말 시키지 마. 안 해.’

그리곤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

‘나’는 맥주캔을 입에 문 채 바닥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쯧, 혀를 차곤 ‘내’ 옆에 있는 맥주캔을 집어들었다. 처음부터 자기 몫이었다는 걸 다 안다는 듯이.

‘그렇게 조건이 좋은 일이면 그냥 하지 그래?’

‘안 해.’

‘흠……. 하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당분간은 쉬어도 되겠지, 그렇게 아등바등 일해야 할 것 아니면. 그래도 요 얼마간 외부로 일 자주 나갔었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곤 다시 사진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 1952년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 이 사진 마음에 들더라…….

흑백사진 한 장을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쳐다보던 ‘내’ 귀에 그가 조금 다가오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벌이는 별로 안 돼. 불경기라 그런지 박봉이라서.’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구부린 그는 ‘내’가 보고 있던 사진을 거꾸로 내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

요전에 밤중에 물주전자에 물이 떨어져서 자다 말고 나와서 물 마시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열려 있는 서재 문틈으로 이놈이 수백만 유로의 보수가 어쩌고 하던 말을 들었다고 이야기할까 말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사진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태연히 ‘나’를 마주보는 그의 뻔뻔스런 입을 쳐다보다가, 나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 내가 열심히 벌어서 책임지고 먹여 살리마…….’

아무래도 카일에게 그의 일을 도와주는 보수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한숨 섞어 대답했다. 그리고 도로 사진집에 시선을 못박았다.

정수리에 아주 희미하게 바람이 스쳤다. 그가 웃은 모양이다.

웃어라, 이 악덕 갈취꾼아.

‘그래. 나도 틈나는 대로 일해서 가세에 보태기로 하지.’

‘그러려면 이번 일을 맡든가. 보수 좋다며.’

‘…….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나가기에 한 달은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사진집을 넘겼다.

그때 문득 뭘 봤는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귀를 스쳐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그 손길에 움칫,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뜰에 누워 있다 왔나? 어디서 풀을 붙이고 왔어. ……등에는 풀물이 들었는데. 갈아입어야겠어.’

‘어, 그래? 점심 때 샤워하고 막 갈아입은 옷인데.’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 옷자락을 끌어당겨 등 쪽을 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푸르스름하게 풀물이 들어 있었다.

‘어차피 땀도 났으니까, 다시 샤워하고 갈아입지 뭐.’

‘그래, 그럼 같이 들어갈까.’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그 대답에 풀물 든 셔츠를 벗으려던 ‘나’는 일순 멈칫했다.

‘……. 어딜?’

‘욕실에. 나도 지금 막 일어나서 씻으려던 참이거든.’

‘……. ……먼저 씻어. 아니지, 어차피 네 방에도 내 방에도 욕실은 따로 있잖아.’

‘한동안 계속 일이 있어서 별로 이야기도 못했잖아. 모처럼 한가해졌으니 천천히 씻으면서 근황 이야기나 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을 맺은 그는,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망연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더니 가뿐히 들어올려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정태의는 번뜩 깨달았다.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새겨 보여 주는 이 꿈은, 바야흐로 악몽으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험한 꼴 보기 전에 얼른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꿈이란 걸 인식은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깨어난 뒤까지 꿈자리가 뒤숭숭할 뻔했다.

정태의는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건 꿈이야. 일어나야 해. 얼른 일어나야 해. 얼른.

초조한 마음으로 그렇게 외치며 현실 속에서 잠들어 있는 스스로를 마구 흔들어 대던 정태의는,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질질 끌려 서재에서 나가는 시점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

정태의는 눈을 깜빡였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눈앞에는 높다랗게 떨어져 있는 천장.

그는 어느새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서 천천히 힘을 풀었다. 한숨을 내쉰다.

잊어 가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이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정태의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옆으로 손을 더듬어 협탁 위의 물주전자를 집어들었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아직 시원함을 유지하고 있던 물이 목을 넘어가자, 그제야 꿈에서 완전히 깨어났다는 실감이 좀 들었다.

그래, 기억난다.

그때, 한 달이나 집을 또 비우긴 너무 길다면서 거절했던 일레이는 몇 달쯤 집에서만 일을 한 뒤에야 겨우 일주일가량 나갔다 왔었다. 그때도 괜히 동네 바깥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갔던 듯도 하다.

―나가면 죽는다.

문득 카일이 전해 준 일레이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고……,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정태의는 주전자와 물컵을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게 누가 두 달이나 자리 비우래…….”

슬쩍 책임을 밀어낸 정태의는 다시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머리맡의 모서리에 이마를 찍어 어으, 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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