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떠나기 전, 베를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물을 쥐여 줘도 소용이 없다. 돼지 목에 진주, 개발에 편자.
설령 책상 위에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제도지에 그려져 있는 낙서 같은 그림이 현재 최고 수준의 기밀을 요하며 설계․제작되고 있는 최신 스텔스 항공기의 기본골격이라 할지라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등의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드나들 만한 사람쯤 되면 적어도 이게 귀한 건지 헐한 건지는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좀 드는데 말이지요…….”
이거 빼돌려서 팔아치울 만한 데는 쓸어다 버릴 만큼 많이 있을 테고, 그렇게 팔아치우면 종적을 감추고 잠적해서 평생 놀고먹을 만한 자금이 생기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 제도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극비문서다.
비록 낙서 수준으로 괴발개발 그려 놓았고 글자도 무슨 암호처럼 휘갈겨 써 놓았지만, 이렇게 서재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닐 만한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 드나들 만한 사람쯤 되면 설령 우리 회사의 분식회계 장부를 본다 해도 별 걱정할 게 없지.”
책장 한 칸의 책들을 모두 꺼내어 정성들여 손질하고 있던 카일은 고개만 돌려서 정태의가 들고 있는 종잇장을 확인하더니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덜너덜하게 낡아서 금세라도 구멍이 뚫릴 것만 같은 가죽장정을 솜씨 좋게 때우며 콧노래까지 부르는 카일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믿어 주시니 고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막 굴리는 건 좀…….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걸 알아볼 만한 인물이면 도둑이나 하고 있지는 않겠지.”
카일은 가죽 모서리에 조그맣게 묻어 있는 티끌을 공들여 문지르다가 웃음 서린 눈으로 흘끔 정태의를 바라보았다.
“잘도 알아봤네. 그 그림. 제일 기초단계에서 잡아 놓은 거라서 한눈에 딱 보고 알 만한 물건은 아닌데.”
“여기 떡하니 RCS까지 써놓으시고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고 소리 내어 웃는 카일은 나사라도 하나 풀린 사람 같았다. 귀한 책을 손에 들고 있을 때는 언제나 저 모양이다. 정태의는 가끔 제임스가 몹시 밉살스럽게 이 서재의 책들을 노려보는 것도 익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 무슨 일이 나서 이 서재가 홀랑 불타 버리기라도 하면 춤을 출 거다.
정태의는 제도지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으며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게다가 늘 집에서 카일의 일을 거들다 보니 이제 이론만으로는 에어호크라도 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구요.”
여태 사소하게는 단총이나 장총을 비롯해 포탄에서 장갑차, 헬기에 이르기까지 정태의가 그 내부도를 대충이나마 안 본 게 없을 지경이었다. 늘 구조도가 이렇게 서재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으니까.
사관학교에 있을 때에도 기본적인 부분은 배웠지만, 이렇게 구조도까지 들여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그 전에, 사관학교를 전역할 때에는 자신이 다시 군수품을 건드리거나 그 비슷한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난한 직업을 찾아 화분에 물주는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갈 줄 알았는데. 아니, 지금도 페터를 도와 가끔 정원에 물을 뿌리면서 평온하게 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부 부탁이라도 받고 도둑이 들어서 낭패를 볼 수도 있잖아요. 적어도 서랍에 넣고 잠가 두신다든가…….”
“이 집에 들어올 정신 나간 도둑은 없다고 본다.”
“아아, 하긴…….”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문 옆에 경비실이 딸려 있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의 탈을 쓴 미치광이 맹수가 어슬렁거리는 이 집에 잘못 들어올 운 없고 가엾은 도둑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없잖아요.”
정태의는 끄덕이던 고개를 뚝 멈추며 중얼거렸다.
이 집에서 기거하고 있던 그 대형 맹수는 두 달 가량 전부터 종적을 감춘 채였다.
유난히 격렬한 폭우가 내린 뒤 비가 개고 나서 사뭇 처참해진 뜰을 페터가 망연하게 바라보았던 그 며칠 후, 일레이 리그로우는 훌쩍 집에서 나가 버렸다.
변변찮은 짐도 하나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그냥 나가길래 또 여느 때처럼 하루이틀이나 혹은 며칠쯤 있다 들어오려나 보다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이 없었다. 뭔지 몰라도 일이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대충 뭔가 불법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가는 일을 하는 것 같은 눈치이긴 하지만, 정태의는 일레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소식도 없이 종적이 묘연할 때면 불안한 마음마저 든단 말이죠.”
“불안해? 그놈이 사고라도 날까 봐?”
“사고라도 낼까 봐요.”
설마하니 그놈이 사고라도 날 만한 위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신이 그놈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놈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거나 다친다거나 하는 걱정은 여태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정보매체에서 테러나 학살 소식 따위가 들려오기라도 하면 불안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설마 그놈이 한 짓은 아니겠지. 이미 국제적으로 수배 중이겠다, 이왕 버린 몸 죄목이 한둘쯤 더 씌워진다고 해서 두려울 것도 없다며 막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정태의가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자, 그 속내를 익히 이해하겠는지 카일이 웃었다.
“뭘 걱정할 게 있어. 여태껏보다 더 크게 칠 사고가 뭐 있다고.”
“…….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정태의는 과거 일레이가 저질렀던 숱한 만행들을 떠올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칠 사고가 남아 있기나 한가 싶다.
사실 정태의의 입장에서는 일레이가 없으면 편하다고 할 수 있었다. 딱히 그가 집에 있다고 해서 정태의를 구박하거나 눈칫밥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생각이라도 난 듯이 불시에 들이닥쳐 육욕이라도 채우는 날엔 몸이 고되기 한량없다.
이렇게 오랫동안 느긋하게 지낸 건 얼마 만일까.
“하지만 이렇게 오래 안 오는 건 처음이네……. 언제 온대요?”
“한 달 정도만 더 있으면 올걸.”
카일은 뽑아 놓은 책들을 모두 손보았는지 한 권 한 권 살피며 대답했다. 만족스럽게 책을 꽂아넣다가 그는 불현듯 기억난 것처럼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지. 저녁에 창인이 올 거야.”
“헤? 삼촌이?”
“응. 그저께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왔다더군. UNHRDO 베를린 지부로 가서 볼일을 보고 오겠다기에 그러라고 했지. 내일 오전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오늘 저녁밖에 머무르지 못하겠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거지?”
“그렇네요.”
지난번에 만난 뒤로 2년 반 남짓, 몇 달 있으면 3년이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 그렇게 새삼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은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든다.
정태의는 카일을 도와 책을 모두 책장에 꽂았다. 개중에는 출간된 지 100년도 더 된 책들도 섞여 있는데도, 어찌나 관리를 잘했는지 몇 년쯤 굴린 헌책 수준으로 반딱거린다.
지나치게 익숙한 탓인지, 정태의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유수의 대기업 총수라기보다는 여느 동네 아저씨 정도로 보이는 카일은, 조기은퇴하고 나면 고서도서관을 차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과연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이 분명히 있다는 점은 부럽다.
책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지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한가득 묻어나는 카일을 바라보며, 정태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하고.
예전에 저 고서도서관이라는 카일의 꿈을 들은 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리타, 리타는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하는 일이지요.’
내리뜬 눈으로 정태의를 바라보면서 딱 부러지게 말하는 리타의 대답을 듣고 정태의는 아, 그렇지, 하고 생각했다. 리타는 이 집에서 일하며 이 집 식구들을 건사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지금 하는 일이라니, 행복한 인생이겠다고 생각했다.
‘페터, 페터는 나중에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움……? 나중에……? 글쎄……. 좀 더 나이 들면 한적하고 조용하게 숲지기를 해도 좋을 것 같구먼.’
어디선가 꽃씨가 날아와 집의 벽돌 사이에서 용케도 조그맣게 싹을 틔운 풀꽃을 고이 옮겨심던 페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숲을 돌보는 페터라. 아주 잘 맞을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숲 속에 쳐들어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버리는 미치광이만 만나지 않는다면 그는 행복한 숲지기가 될 터였다.
‘제임스는 나중에 어떤……, ……아니 됐어요.’
정태의가 말을 걸자, 고서박람회가 있다는 소식에 냉큼 선약을 펑크 내고 프랑스로 날아가 버린 카일 때문에 사죄용 선물을 잔뜩 마련해서 회식 자리에 대신 나가야 하는 처지였던 제임스는 귀신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나는 사표만 쓸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걸요.’라고 음침하게 말하는 그의 앞에서 냉큼 도망쳐 버렸다.
그런 여정을 거쳐 마지막으로 일레이에게 다다른 정태의는, 풀에서 한창 수영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일레이 리그로우의 장래희망. 어쩐지 상상이 안 간다. 그런 걸 정말로 물어봐도 되는가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정태의가 풀 옆의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풀을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를 그는 별반 힘든 빛도 없이 훌쩍 풀에서 나왔다. 이놈은 언제쯤 되면 알몸으로 풀에 들어가는 버릇을 고칠까, 하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짤막한 머리카락을 털면서 다가오는 일레이를 바라보았다.
‘너도 들어갔다 오지? 시원한데.’
‘음……아니 나중에.’
다른 사람이 벗고서 헤엄친 물에 기쁘게 들어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를 떠올리며 정태의는 애매하게 거절했다. 벤치 팔걸이에 걸쳐 놓았던 수건으로 아무렇게나 몸의 물기를 훔치며 옆에 앉는 묵직한 기척이 벤치를 통해 전해졌다.
‘그래, 뭘 물어보고 싶어서 고민 중이야?’
대충 몸을 다 닦았다 싶었는지, 일레이가 불쑥 물었다. 정태의는 속으로 움찔하면서도 태연한 척 아, 그거, 하고 슬쩍 시선을 그의 반대쪽으로 돌렸다. 가끔 이놈이 귀신인가 사람인가 싶다.
‘아니 그냥, 나중에 뭘 하면서 살고 싶은가 해서. 장래희망 조사를 좀.’
‘장래희망?’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지.
‘그래, 다른 데선 뭐라던가?’
‘뭐랬을 것 같아?’
‘흠……. 형이야 도서관이라도 지어서 책 끌어안고 싶어할 테고, 리타는 계속 지금처럼 지내고 싶어할 것 같고, 페터는 정원사나 농장 관리……숲 관리 같은 걸 하면 즐겁게 할걸. 제임스는 현실에 급급해서 장래를 생각할 여유도 없어 뵈고. ―또 누구에게 물어봤어?’
이런 귀신같은 놈…….
정태의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다시 픽하는 웃음소리가 난다. 그러나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는 듯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던 일레이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는 글쎄……,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제야 정태의는 일레이를 흘끔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유리 같은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왜? 하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이 남자가 뜻밖에 자신의 척진 인간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도 놀랐고, 그 흉흉한 인간관계 사이에서 늙어죽을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작정을 그다지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놀랐다.
그러나 그 전에 정태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입매를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로 듣기에 유쾌한 말은 아니군.’
옆에서 일레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와 의외가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모른 척했다.
‘어째서?’
재미있다는 듯한 한 마디가 날아온다. 역시 이놈은 아직 인간화가 덜 됐나 보다. 어째 반응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 같아서는 멱살이나 볼때기를 붙잡고 짤짤 흔들면서 고따위로 이야기하다니 주위사람들을 뭘로 생각하는 거냐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현실을 생각해서 정태의는 그에게 그냥 조용히 인간화 설명만 더해 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종종 오해를 하는 부분인데, 사람의 목숨은 사실은 온전히 그 본인의 몫인 게 아니란 말이지. 목숨은 그 주위 가까운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
그렇게 말을 꺼내던 정태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려다가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과연 자신이 가까운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레이의 목숨을 약간이나마 나눠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몹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짓눌려서 찌부러질 정도로.
‘……뭐 어쨌든, 자기 목숨을 쉽게 여기는 말은 옆에서 듣기엔 좀 거북하지.’
정태의는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더 자세히 늘어놓고 싶지는 않은 기분을 이해해 주기라도 했는지 일레이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곤 미묘하게 웃는다.
‘언제 죽든 별로 개의치는 않지만, 인위적으로 내 숨통을 끊어놓을 만한 놈이 과연 언제 나타날지는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정태의는 인간화 계획에 있어 전도다난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말 자체는 심히 공감 가는 바가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가 우스운지 일레이는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수건을 발치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그가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음……. 난 내 힘 닿는 대로 끝까지 살아남는 게 목표다.’
정태의는 부루퉁하게 대답하고 나서야 너무 유치한 답변이었나 반성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옆의 웃음소리가 한층 커지는 바람에 반성의 마음은 싹 가셔 버렸다.
애초에 이 남자에게 앞날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말을 꺼낸 게 잘못이었다.
“…….”
정태의는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잠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던 정태의의 귀에 카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권 비는데 뭐지……. 아, 구스타프 베네슈로군. 태이, 혹시 자네가 가져갔나?”
“예? 아? ―아. 베네슈요. 예, 제 방에 있어요. 지금 곧 가져다 드릴게요.”
“응? 아냐, 아냐, 안 보여서 물어본 것뿐이야. 다 본 뒤에 주게나.”
“아니에요. 어젯밤 자기 전에 다 읽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지금 가져오죠. 잠시만요.”
정태의는 가볍게 손을 저어 보이곤 서재에서 나갔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가며 한숨을 쉰다.
지금쯤 그 남자는 어딘가의 킬링필드에서 제 목숨을 깎아먹고 있으려나. 하긴 본인의 말마따나 인위적으로 그 남자의 숨통을 끊어 놓을 만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싶지만.
“어디 가서 박혔는지는 몰라도, 알아서 잘 하라지.”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까만 장갑에 까만 모자. 전체적으로 까만 빛이지만 견장이나 주머니, 단추 따위에 특색을 준 심플하고도 세련된 정복. 그 목깃에서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배지.
새삼스러운 감상이지만, 그 말끔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는 나태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서 모자와 장갑부터 벗어던지는 숙부에게 대단히 잘 어울리는 제복이었다.
예전에 기구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지겨울 만큼 보았으면서도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그 전까지 저 옷을 입고 나타난 숙부에게서 뭔가 좋은 소식을 들었던 적은 없다는 기억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세상사에 달관한 마음으로 찬찬히 보니까…….
“삼촌. 마니악한 취미를 가진 손님에게 잘 먹힐 만한 핸섬한 제비 같아요.”
정태의의 심상한 말에 장갑을 벗던 숙부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건 칭찬이냐?”
“그럼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제복이 몹시 눈부셔 보이는걸요. 목을 조여서 답답해 보이는 단추마저도 썩 잘 어울려요.”
정태의가 무심하게 감상을 말하자 숙부는 웃으며 단추 서너 개를 풀어 버렸다.
분명히 멋지기도 하고 숙부에게도 잘 어울리는 제복이지만 정식으로 흐트러짐 없이 갖춰 입고 있으면 아무래도 보는 사람마저 갑갑하게 느껴진다. 정태의는 마치 자신의 목을 조르던 단추가 풀린 듯이 숨을 내쉬며 물었다.
“먼 길 오시면서 좀 편하게 입으시지 왜 정복을 입고 오셨어요.”
“이렇게 옷이라도 입어서 내 신분을 주장하지 않으면 누가 나에게 퍼스트클래스 티켓과 특급호텔 객실 열쇠와 교통편과 여타 제반 출장비용을 주겠니?”
이번에는 정태의가 웃었다.
해를 뛰어넘어 오랜만에 만나도 숙부는 여전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형상들은 때로 마음에 위안을 주곤 한다.
“게다가 난 지금 베를린 지부에서 바로 온 길이라고. 공적인 볼일로 타 지부를 방문하는데 사복을 입고 어슬렁어슬렁 찾아갈 수는 없잖아.”
“여전히 일이 많은가 보죠, UNHRDO는.”
“아아, 얼마 있지 않아 유럽 지부와 합동훈련이 있거든. 이번에 로테이션에 변동이 있어서 그 점도 상의할 겸해서 갔었지.”
정태의는 약간 눈썹을 치켜올리며 하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 지부와 합동훈련이라……. 힘 좀 드시겠네요. 두 지부 사이는 아직도 분위기 여전해요?”
“아무렴, 전통적인 견원지간이 바뀔 리 있나. 그래도 손쓰기 힘든 미치광이가 하나 사라지고 났더니 훨씬 편해지더만.”
그 미치광이랑 같이 살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이 아니신데요, 삼촌, 하고 말하려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미치광이의 혈육이기까지 한 카일이 다이닝 쪽에서 손수 찻잔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얘기를 했기에 내가 오니까 딱 입을 다물어?”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은 카일은 숙부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카일이라면 면전에다 대고 ‘네 동생은 미쳤어’라고 소리쳐도 눈 하나 까딱 않고 긍정의 빛을 띠며 ‘성격이 좀 특이하긴 하지’라고 대답할 위인이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사람을 앞두고 그 가족을 욕할 만큼 정태의는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릭이 보이지 않는걸.”
“아, 일 때문에 외출 중. 다음 달 말쯤이나 되어야 돌아올걸.”
“그래?”
태의 너 심신이 평안하겠구나, 하고 숙부는 따사롭게 정태의를 바라보며 카일이 내어준 찻잔을 집어들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셋 다 밀크티였지만 리타의 밀크티는 일품이니 토를 달 이유도 없었다.
“꽤 오래 걸리는 일이군. ……아.”
심상하게 중얼거리던 숙부는 문득 짧게 중얼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달력을 보았다. 그 시선이 달력의 날짜를 훑는다.
“그러고 보니 타르텐은, 이제 곧 결정일일 텐데.”
숙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그제야 떠오른 듯 혼자서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흘끔 시선을 들어 카일을 보았다.
“차관 변제일도 다가오고 있군. 너네 쪽엔 지난 텀에 변제했었지?”
“응. 이번이 마지막 변제야. 이제 드디어 타르텐도 채무에서 벗어나는 거지.”
“채권자는 그대로 변함없고?”
“음.”
대화의 맥락을 잡을 수 없어 소외된 정태의를 사이에 두고, 그곳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차를 마시는 조용한 소리만 간간이 들렸을 뿐이다.
정태의는 어느 타이밍에서 끼어들까 싶어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정태의의 옆에서 카일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론은 이미 난 거나 마찬가지야. 리하르트보다 유력한 인물은 내가 알기론 없으니.”
“아하, 그자라면 확실히 경계해야 할 만한 인물이긴 하지.”
“그게 누군데요?”
정태의는 이 타이밍인가 하고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숙부가 대답해 준다.
“리하르트 타르텐.”
“…….”
정태의는 조금 더 기다렸지만 그 이상은 설명이 붙지 않았다.
당연히 그 인물의 풀네임을 물어본 게 아니었던 정태의는 미간을 찡그렸다.
리하르트 타르텐이라니, 그 인물이 누군지 알 게 뭐란 말인가. 무슨 유명 연예인 따위도 아닐 테고. ……아니 또 모르지. 카일의 인맥이라면 톱스타 정도는 알고 지낸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연예인이에요? ……아.”
그러나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물어본 정태의는, 자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간 것과 동시에 어떠한 사실을 떠올렸다.
리하르트 타르텐. ……타르텐. Tarten & Riegrow.
T&R에서 리그로우와 대칭을 이루는 또 다른 이름이다.
정태의는 밀크티를 단숨에 들이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면, 사명에 그렇게 이름이 나란히 있으면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을 법도 한데, 카일의 일을 거들거나 회사 소식을 듣는 동안 그 이름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타르텐이라. 그러고 보니 그 이름 잘 못 들어봤네. 공동출자한 곳 아니었어요?”
“음? 아, 처음에는 그랬지. 도중에 타르텐은 빠져나갔어. 여전히 T&R의 대주주이긴 하지만, 그 집안 자체는 따로 사업을 벌였지. 그때 한창 회사가 크고 있던 때라서 이름은 그대로 쓰는 데에 합의했지만.”
카일은 몰랐었냐는 듯 의외라는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헤에, 하고 중얼거리던 정태의는 다시 물었다.
“타르텐…….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사업을 하는데요.”
“정보업.”
“예?”
“사설 정보기관. 하잘것없는 정보에서 외부로 유출되면 사람 한둘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특급 기밀까지.”
정태의는 다시 헤에, 하고 중얼거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게 듣는 것만으로는 언뜻 감이 오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지면 오히려 활동하기 불편하다며 주로 기관 대상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내실 있는 정보기관은 드물지. ……아, 그래. 게이블도 한때 그곳에 소속되어 있었지. 국방부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이긴 했지만.”
그 익숙한 이름을 듣고 정태의는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분명히, 예전에 형의 행방을 몰라 고심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실마리를 짚어낸 사람이 게이블이었다.
그 정도로 유능한 인재를 키워낸 곳이라면 틀림없이 그만큼 유능한 기관이리라는 믿음도 가긴 하는데…….
“그럼 T&R과는 아예 분리된 거예요?”
“사업적인 면에서는. 하지만 분리되었다고는 해도 대대로 이어진 집안의 교류까지 끊어지지는 않아서 아직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나름대로 150년 넘게 이어져 온 관계이니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150년이라는 숫자에 정태의는 감탄하고 말았다. 말이 150년이지, 그 세월 동안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한쪽의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굉장하군요. 그런데 그 타르텐이 어딘가 빚이라도 졌나요?”
단순한 빚이 아니라, 정태의가 언어를 잘못 해석한 게 아니라면 분명 차관이라고 했다. 민간차관이라고 해도 정부의 보증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성격도, 금액도 일반적이지는 않을 게 뻔했다.
정태의가―저 스텔스 구조도와 마찬가지로 본의 아니게―보았던 T&R의 재정 장부에 따르면, T&R은 대단히 튼튼한 회사였다. 채무 비중도 타회사에 비해 단연 건실했다.
그러나 한때는 그 한 축을 담당했던 타르텐은 차관을 얻어와야 할 상황에 있었다니.
정태의가 별 뜻 없이 묻자 일순 카일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숙부는 잠자코 카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그건 일단은 대외비로 되어 있으니, 나중에 기회 닿으면 다시 얘기하자꾸나.”
“아, 예.”
정태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지나치게 파고들었던 모양이다. 어디든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일 한둘 정도는 가진 법이었다. 남의 회사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아, 그렇지. 재의 다음 달에 독일 올 거다.”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숙부가 불쑥 말했다.
숙부가 저렇게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확실히 대외비는 대외비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그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형이? 독일에? 왜요?”
정태의의 형인 정재의는 현재 UNHRDO 미주 본부에 연구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로 이름 높은 그는 2, 3년 전 그의 두뇌를 노린 납치 감금 사태에서 벗어난 직후, 비슷한 사태가 되풀이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UNHRDO에 소속되기로 했다. 그래서 현재 본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일이 바쁜지 혹은 그곳에서의 연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좀체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늘 연구실에만 박혀 있다는 소식을 숙부에게 전해들은 바 있었다.
그때 헤어진 뒤 형과 전화 연락이나마 한 것도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되던 차에, 드디어 그가 독일로 온단다.
정태의나 그의 형이나, 혈육에 대한 정이 그렇게 애틋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니 반갑고 기쁘다.
숙부는 몸을 내밀며 묻는 정태의를 보고 웃었다.
“다음 달에 국제 항공 기술 포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있거든.”
“……. 파일럿이라도 됐어요, 형?”
정태의가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해 묻자 숙부는 소리내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 녀석이 붙들고 있던, RCS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RAM기법의 연구가 거의 마무리됐어. 그 논문 발표 자리가 이번 포럼에 마련되어 있지.”
“……. ……그건 항공 기술 포럼이라기보다는 군수 기술 포럼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는데요. 재의 형 아직도 그쪽에 손대고 있었어요?”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또 수많은 군수업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납치극 같은 게 또 벌어지는 건 내키지 않는데, 하고 혀를 차는 정태의를 안심시키려는 듯 숙부가 걱정 말라고 고개를 젓는다.
“물샐 틈 없는 경비와 철통같은 보안을 보장하지. 침대 안과 욕실 빼고는 경호원과 경호차량이 줄줄이 붙어다니는 상황에서 그에게 해를 입힐 만한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존경해 주지. ……아니 그 전에, 경호가 없더라도 과연 재의가 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그 경호원들이 죄다 돌변해서 형에게 총격을 가하더라도 형은 멀쩡하게 살아남지 않을까요.”
그렇지? 하고 동의하는 숙부의 옆에서 카일도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좋다.
모처럼 형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런 기분일까, 하고 이산가족이 들으면 화낼 만큼 무덤덤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정태의는 프랑크푸르트까지 ICE를 타면 대충 다섯 시간 정도였지, 하고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좋겠군, 태이.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카일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정태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하고 정태의가 쑥스럽게 웃고 있는데, 그 다정한 모습을 옆에서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숙부는 문득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자네도 남 말 할 일이 아니야.”
숙부의 말에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카일은 응? 하고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후에 베를린 지부에서 이리로 출발하기 직전에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인데, 크리스틴이 돌아왔다더군.”
숙부는 스쳐가는 투로 대수롭잖게 말했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대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어 닦지도 않고 그대로 베어무는 와삭, 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 소리가 유난히 상쾌해 정태의도 덩달아 대바구니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달칵, 다소 거칠고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린 정태의는, 엉겁결에 찻잔을 내려놓아 차가 잔 밖으로 넘쳐 손을 적셨는데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뚫어져라 숙부를 쳐다보고 있는 카일의 모습을 발견했다.
기괴하게 눈을 부릅뜬 그 표정은,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크리스틴이…….”
순식간에 안색이 납빛으로 변하는 카일의 모습을 정태의는 신기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가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언제 또 봤던가 싶다.
“좋겠어,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카일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하며 숙부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영문을 모르는 정태의의 눈에마저 몹시 사악하게 비쳤다.
정태의는 잠깐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어 사과를 한 알 집어들어 옷에 문지르며 흘끔 숙부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누군데요.”
숙부는 카일의 그 반응이 흡족했는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크리스틴―크리스티나.”
낯선 이름이다. 다시 한번 세심하게 기억을 돌이켜 봐도 그 이름은 짚이는 데가 없었다. 그러나 카일의 저 범상찮은 반응이라니.
혹시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로 아는 사이―이를테면 10년 전 헤어진 옛 애인이라든가 몰래 숨겨둔 딸이라든가―인 걸까, 정태의는 더 물어도 될지 아닐지 고민하며 묵묵히 사과만 문질렀다.
그 즈음에서 화제가 대충 넘어가거나 뭔가 다른 말이 나오면 잠자코 있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침묵이 오래 갔다. 그래서 정태의는 할 수 없이 카일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분한테 뭔가 죄라도 지으셨어요?”
눈치를 본 것치고는 상당히 직선적인 물음이었지만, 그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카일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의 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죄를 지었다기보다는―그래, 리그로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따지고 보면 카일이 죄를 지어서 릭이 카일 동생으로 태어난 건 아니지. 어쩌다 보니 생긴 천형일 뿐.”
숙부는 이제 유들유들 웃고 있었다. 가느스름한 눈이 즐겁게 반짝이고 있다. 이럴 때면 정태의는 자신이 숙부와 동격의 친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자신이 아랫사람이니 망정이지, 친구였더라면 저 심술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숨겨둔 망나니 동생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소꿉친구지. 나이차는 제법 많이 나지만.”
“아하. 성격이 좀 안 맞는 친구인가 보죠.”
정태의는 ‘친구는 절대로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랑 김소위 같은 사이인가 보다. 미워죽겠지만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주쳤던 그 악연.’하고 생각하며, 옷자락에 뽀득거리며 문질러 반질반질 윤이 나는 사과를 엄지로 쓰다듬었다.
“말은 바로 하자……. 내 소꿉친구 아니다…….”
그러나 숙부의 말이 못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카일은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도 무섭게 눈을 빛내며 중얼중얼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레이의 소꿉친구지.”
툭.
카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정태의의 손안에서 뽀득거리고 있던 사과도 같이 떨어졌다.
카일과 소꿉친구라는 말도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레이와 소꿉친구라고 하면 그건 안 어울리는 걸 떠나서 단어의 의미마저 혼란스러워질 정도다.
“일레이한테……소꿉친구가 다 있단 말예요?”
“어릴 적부터 무슨 일이 있어서 집안들끼리 모일 일이 있으면 와르륵 몰려서 같이 어울리곤 했던 애들 중 하나니까……. 아, 그래, 크리스……그, 그 녀석은 일레이랑 같이 일하기도 했었다. T&R에 기동대가 있을 무렵에 거기서…….”
나름대로 진귀한 광경이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불안정하게 깍지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목소리만큼은 낮고 평온했다. 그 이름을 말할 때 잠깐 더듬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런 카일을 보면서 정태의도 머릿속 한구석이 해쓱해졌다.
일레이의 소꿉친구라는 말도 무섭지만, 그 뒤에 나온 말은 한 술 더 뜬다. T&R의 기동대라면 그 미친놈 소굴로 유명했던 거기 아닌가. 더블 임팩트다.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그 신분에, 정태의는 이름만 들어도 낯빛이 변하는 카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만있자, 그런데…….
“크리스티나라……. 하지만 전에 일레이가 리야드에서 테러했을 때, 그 테러범 목록에 그런 이름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때 크리스틴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랑 총질하고 있었거든.”
“…….”
굉장한 여자다.
같은 이름이라고 해서 그레타 가르보의 퀸 크리스티나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런 이름을 가진 여자는 아름답게 존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해 두는데 그 성질머리인 주제에, 퀸 크리스티나를 연기한 그레타 가르보의 전성기 때보다 더 예쁘다.”
수년도 더 전에 정태의와 정재의와 함께 나란히 명화극장을 보았던 숙부가 정태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끼어들었다.
“……의외성이 있어서 좋네요.”
“외면과 내면의 갭이 그렇게 큰 인간은, 난 크리스틴 말고는 못 봤어.”
그것도 나름대로 호러라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그런 뒤에야 천천히 사과를 다시 집어든다.
와삭, 사과를 베어물며 정태의는 다시금 카일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카일은 여전히 새하얀 얼굴로 손가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의아한 마음도 든다.
분명히 저 말만 들어도 굉장한 여자일 것 같긴 하지만, 일레이 리그로우라는 인물을 동생으로 둔 사람이 저렇게 새하얗게 질릴 것까지야.
정태의는 사과를 씹으며 지그시 카일을 살피다가 숙부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설마하니 일레이보다 대책 없는 인간이지는 않겠죠……?”
“아하하하, 그런 인간을 둘이나 알고 지내면 인생 막장이지.”
숙부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만 알고 지내는데도 종종 인생 막장인 기분이 드는 정태의는 우울하게 그렇죠, 하고 동의했다.
“지금이야 다르지만 크리스틴은 어릴 때 몸이 썩 건강하지 않았어. 대체로 집 서재에 들어앉아 있었지. 그리고 카일은 그에게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은 바 있지. 언어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데다, 암호 해독에 있어서는 그놈을 따라갈 인간이 없거든. 아마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재의보다 나을 거다. 분야가 다른 천재지.”
잘은 모르지만 형보다 낫다면 그건 분명히 굉장하죠, 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정태의는 다시 카일을 흘끔 보았다.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의 반응치고는 좀…….
그 의아함에 종지부를 찍어 주듯이 숙부가 덧붙였다.
“크리스틴도 고서를 좋아해. 특히나 취향이 딱 카일과 겹치지.”
그 말이 나온 순간 흠칫, 카일의 어깨가 조그맣게 떨리는 게 보였다. 아하.
갑자기 수수께끼 하나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 정태의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카일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왜……또 무슨 책을 가져가려고……!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제임스, 제임스! 은행에 금고 좀 비워 놓으라고 연락을……, 아냐, 저 책들이 다 들어갈 리가 없지.”
그 전에 제임스는 그 소식을 들으면 아주 기꺼이 책꾸러미를 묶어서 내놓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달라고 해도 안 주면 되잖아요?”
정태의가 조금 어이없이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숙부가 해답을 내놓는다.
“리그로우의 친구이자 옛 동료라니까.”
“…….”
그 말을 다시금 듣고서야 정태의는 카일이 놓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예전에 몇 번인가 도움을 받을 상대를 잘못 골랐던 모양이다. 가엾은 카일.
금세 사과 하나를 다 먹어치운 숙부는 빈 찻잔 안에 사과꼭지를 넣어두며―눈을 치켜뜰 리타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아아, 그럼 저녁 먹기 전에 좀 씻어야겠다. 여유롭게 밥 먹고 쉬어야지. 나도 내일 일찍 떠나야 하거든. 카일, 전에 썼던 그 손님방을 쓰면 되겠지?”
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렇게 묻는 숙부의 상큼한 미소를 보고 정태의는 할 말이 없어 사과만 갉작거렸다. 그러다가, 그래도 몇 년간 더부살이에게 눈치도 안 주고 잘 대해 주는 고마운 집주인을 거들어 줄 셈으로 슬쩍 숙부에게 핀잔을 줘 본다.
“너무 즐거워하시는데요, 삼촌.”
숙부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천만에. 난 친구가 불행을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도 빨리 최신 정보를 날라다 준 고마운 이웃이 아니겠니.”
“지금의 그 말씀에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들어 있지 않은걸요.”
맞아맞아, 라고 중얼거리며 카일도 시퍼런 눈길을 숙부에게 주었다. 원한이 다른 쪽으로 잠깐 옮겨간 모양이었다.
“어허……. 유비무환을 전하려 한 이 깊은 뜻을 몰라주다니.”
숙부는 혀를 찼다. 사뭇 섭섭한 척 미간까지 찌푸린다.
그러나 카일의 원망이 다소 방향을 잘못 찾아 숙부에게 날아간 것처럼, 숙부의 원망스런 눈빛도 정태의에게 날아왔다.
순간 아주 잠깐 정태의는 후회했지만 모른 척 눈을 깜빡이며 숙부를 쳐다보았다. 숙부는 뭔가 생각에 잠겨 정태의를 마주보았지만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웃음 지었다.
“내 태도가 오해를 샀다니 참 유감스럽구나. 그러나 모쪼록 카일, 귀한 책들 잘 지키게나. 크리스틴의 손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안 돌아오잖나. ……자, 그럼 난 씻고 나서 리타의 요리를 먹으러 가 볼까.”
숙부는 선뜻 일어서 침실―손님방―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숙부의 시선에 잠시 마음을 굳게 먹고 뒷말을 기다리던 정태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가는 숙부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내가 평화롭게 살다 보니 간이 좀 작아졌나 봐, 하고 심장께를 다독다독 두드린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태의야.”
그러나 바로 그때, 침실을 향해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아가던 숙부는 문득 생각난 듯이 발을 멈추더니 정태의를 돌아보았다.
정태의는 가슴 위를 다독거리던 손을 멈추고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숙부를 보았다.
숙부는 입끝을 약간 올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그 웃음을 보자 마음이 어두워졌다. 심상찮은 뭔가가 그 뒤에 담겨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독일어가 상당히 능숙해졌구나.”
“……? 그야 일단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까 싫든 좋든 익숙해질 수밖에요.”
“언어를 익힌다는 건 매우 유용한 일이지. 릭도 한국어를 익히는 모양이던데, 서로 가르쳐주면 되니 편하겠어.”
“예?”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불쑥, 기괴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일레이가 한국어? 금시초문이다. 한국어 공부는커녕, 그가 한국에 관련된 뭔가를 보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정태의가 편하도록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는 기특한―또한 대단히 비효율적인―생각을 했을 리는 없고.
“설마요.”
정태의가 딱 잘라 부정하자 숙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눈에 점점 더 짙은 웃음이 담기는 게 어쩐지 영 미심쩍다.
“요전에 릭과 통화할 일이 있었거든. 그러다가 전화를 끊기 전에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나한테 묻더구나. ‘Mang-Hal-Nom’이 무슨 뜻이냐고. 발음도 아주 정확했어.”
“하? 망……, ……?!”
정태의는 멍한 얼굴로 숙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잠시 이해가 안 가 하얗게 비었던 머리에 불현듯 뜨악하게 둔중한 아픔이 느껴졌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태풍처럼 엄습해 왔다.
일레이가 한국어를 궁금해할 까닭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한국어를 접할 만한 곳도 없었다. 정태의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정태의는, 이성적으로 기억하는 한 한국어든 독일어든 영어든 그의 면전에 대고 육두문자를 뱉은 적은 없었다. 그럴 만큼 배짱이 단련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요 한동안 한국어는 혼잣말이나 그에 비등한 상황에서만 가끔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제는 심지어 꿈도 간혹 영어로 꾸기까지 해, 가끔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영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도 있을 정도였다.
즉, 정태의가 이성을 잃다시피 한 상태로 저도 모르게 한국어로 욕설을 중얼거릴 만한 상황, 더욱이 일레이가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듣고 있을 상황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당장 정태의의 뇌리를 스치는 그런 상황이라면―.
“……그래서……뭐라고 하셨는데요……?”
정태의는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때 아닌 빈혈이라도 찾아왔는지 눈앞이 어지러운 게, 불시에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 허옇게 뜬 안색을 보았을 텐데도 숙부는 조카의 안위를 돌보는 일도 없이 매끄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칭찬해 주기엔 아직 부족하니 더 힘차게 노력하라는 뜻이라고 순화해서 일러줬지.”
육두문자라고 대놓고 알려주기는 좀 그렇잖아? 라고 덧붙이는 숙부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정말로 죽을병에 걸렸나 보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는 또 처음이었다.
숙부는 유쾌하게 돌아서 사뿐사뿐 침실 쪽으로 걸어갔고, 소파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지탱한 정태의는 그 가벼운 발소리에 엄청난 살의를 느꼈지만, 온몸에서 핏기와 함께 힘이 싹 빠져나가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시퍼런 얼굴로 넋을 놓고 있는 카일과 자신은 지금 똑같은 낯빛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
아무데나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샤워실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나오던 정태의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란 소식을 듣고 짧게 혀를 찼다.
원래부터 분란이 그치지 않는 지역이긴 하지만 요즘 부쩍 저런 소식이 많이 들린다. 이제는 사소한 분규 정도로는 관심도 안 갈 지경이었다.
저 지역에서도 특히나 분란이 잦은 곳이 있고, 동떨어진 듯이 안정된 곳이 있다. 어디나 골 아픈 곳만 더 골 아픈 법이다.
……하긴 평온한 나라에 갑자기 돌멩이를 던져 놓은 놈이 하나 있긴 했었지.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설마 저기 가서 날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태의는 라디오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겠다고 결론을 내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저런 류의 뉴스를 별 탈 없이 대충 알아듣는 걸 보니, 새삼스럽긴 하지만 독일어가 늘긴 한 모양이다.
그럼 이제, 괜히 자신을 위해 영어를 쓰는 카일이나 리타 및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볼까. 더 이상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리타는 어법에도 깐깐할 것 같으니 당장은 그냥 모른 척하자.
정태의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밤 열 시 시보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뉴스가 끝나며, 음악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수건을 내려놓고 눈을 감은 정태의는 목 위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않고 조용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합창 특집인지, 합창곡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잘 어우러진 사람들의 목소리란 악기보다도 사랑스럽다.
정태의는 편안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때였다. 아련하게 전화 소리가 울렸다.
“……. ……?”
정태의는 고개를 돌렸다. 들릴 듯 말 듯 흐릿하게 전해지는 그 전화 소리는 벽 하나 건너, 일레이의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분명히 그 방에는 전화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장식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전화는 울리는 일이 없었다. 일레이에게 연락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탓이다.
상당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정작 그 전화의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두 달 전부터. 이후로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전화 소리가 끊겼다. 그러나 정태의가 다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전화는 다시 울렸다.
희미하고 조그만 소리라서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지만, 정태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일어섰다.
한동안 부재중인 사람을 굳이 찾는 전화라는 게 의아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단순한 변덕도 조금은 작용했다.
주인 없는 방의 문을 열 때에는 잠시 망설였지만, 한 뼘쯤 열린 문 안에서 깜빡이는 전화의 램프를 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간 정태의는 액정에 뜬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래, 네가 받을 줄 알았어.’
“…….”
정태의는 액정 화면에 비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방 주인이 거기에 있었다.
어딘가의 방에 있는지, 아마도 침대에 기대어 있는 듯한 일레이의 뒤로는 벽을 장식한 큼직한 유화 액자가 보였다.
“여어……오랜만이야.”
‘잘 지내나 보군. 얼굴이 아주 생생한걸.’
“덕분에.”
네가 없는 덕분에, 라는 말에서 몇 글자만 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 생략을 잘도 알아채고 일레이는 웃었다.
“왜 이 번호로 전화했어, 받을 사람도 없는 방에.”
‘네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 전화 소리는 들릴 테니.’
“그럼 나한테 바로 전화를 하지 그랬어.”
‘그쪽은 화상전화가 아니니 보면서 통화할 수가 없잖아.’
“…….”
정태의는 화면에 비친 얼굴을 다시 한번 빤히 확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인물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태의를 보면서 피식 웃는 그 얼굴은 틀림없이 낯이 익었다.
“왜. 뭔가 화상으로 확인해야 할 서류나 물품 따위라도 있나?”
‘아아. 가만히 잘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지. 이때다 하고 어딜 간 건 아닌가 싶어서. ……샤워 중이었나? 옷이 젖었군.’
“가긴 어딜 가.”
정태의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목덜미며 어깨 언저리를 더듬었다. 제대로 닦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제법 많이 떨어졌다.
“무슨 일인데.”
‘앉아.’
일레이는 고갯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정태의는 미심쩍게 일레이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두 달 만에 전화해서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이러나.
“레바논 쪽이 시끄럽다는 뉴스가 지금 막 나와서 그쪽에 있지나 않은가 했는데, 아닌 모양이군.”
일레이가 비친 배경의 값비싸 보이는 장식품 따위를 보며 중얼거리자 그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어디야?”
‘베를린보다 남쪽에 있지. ……흠. 거긴 추운가?’
정태의는 그 뜬금없는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놈이 두어 달 떠나 있었다고 여기 날씨를 그새 잊었을 리도 없고.
“이 계절에 여기가 추울 리가 없잖아.”
‘그래? 젖꼭지가 서 있길래 나는 그새 기후변화라도 있었나 했더니.’
“…….”
정태의는 난감하게 액정을 노려보았다.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뒤 에어컨 바람을 맞은 탓인지 몸이 약간 긴장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왜 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면 심상하게 들리지가 않을까.
“냉방이 너무 잘 되었나 보지. 그쪽은 아열대이기라도 한가?”
정태의는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아열대라. 혼자 휴양이라도 왔을까 봐? 눈에 보양이라도 삼게 벗고 문지르지 왜 옷 위로 그래. 네 젖꼭지가 선 것 정도는 숱하게 봤는데 왜, 새삼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너는 오랜만에 전화해서는 한다는 말이 그저―. 에휴……. 그래, 봐라 봐.”
사내놈의 젖꼭지가 무슨 눈에 보양이 된다고, 정태의는 투덜투덜거리며 울컥한 마음 그대로 티셔츠를 훌렁 벗어 버렸다.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 무슨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두 달간 어디에 갔는지 연락 한 번 없던 남자다. 그런데 뜬금없이 전화해서 하는 말이라는 게 젖꼭지 타령이라니.
‘글쎄. 모처럼 안부 전화를 해 본 것뿐이야.’
“거짓말 마.”
요 며칠 희한한 말을 많이 듣는다. 얼마 전 숙부에게 들은 일레이와 소꿉친구라는 단어의 조합도 참 특이했는데, 이제는 일레이와 안부 전화라.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다니 너무 매정한걸. ……팔 옆으로 치워. 가려져서 눈에 보양이 안 되잖아.’
“……. 아무튼 요즘은 이상한 말만 들리는 것 같아. 나야말로 몸에 보양이 필요한가 보다.”
‘하아, 이상한 말이라. 왜, 누가 헛소리라도 하던가?’
“아니, 얼마 전에 네게 소꿉친구가 다 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아하……. 누가 그런 말을 해?’
아주 약간이었다. 매우 희미하게.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한 정도로, 일레이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아……, 이거구나. 이놈이 갑작스레 연락한 이유.
왜인지는 몰라도, 일레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거였다.
정태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일레이 역시 정태의가 낌새를 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궁금한 게 뭐야.”
‘별로 궁금한 것 없이 그냥 안부 전화를 해 봤는데……이제 좀 궁금한 게 생길 것 같군. 그래, 내게 소꿉친구가 있다고 누가 그래? 형인가? ……그 팔 치우라니까.’
기왕이면 아래까지 벗어 주면 좋겠군, 하고 덧붙이는 그의 입을 좀 쥐어뜯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우물쭈물 팔을 치웠다.
“삼촌이 왔다 갔어. 카일과 이야기하던 중에 크리스티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더군. 네 소꿉친구이자 동료라면서.”
‘하아……. 그자가 왔다 갔어? 오랜만에 가족과 만나 즐거운 시간 보냈겠군. 그래, 그는 잘 지낸다나?’
“아아, 잘 지내더군. 곧 유럽 지부와 합동훈련이 있다던데, 미치광이가 없어서 한결 편하다던걸.”
눈앞에 없으니까 마음속의 말이 거리낌 없이 편히 나와 좋다. 그러나 이제는 일레이도 정태의의 그 정도 말에는 끄덕도 않는 눈치였다.
‘하하, 그거 축하할 만한 일이군, 그래. 다른 놈들도 잘 있다고 하고?’
거기서 정태의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뭐가 궁금해. 그냥 확실하게 말해 봐. 어울리지도 않는 거 묻지 말고.”
‘글쎄 뭘까.’
일레이는 애매하게 말하며 고개를 옆으로 까닥했다. 뚜둑, 뼈마디 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다.
‘그보다 말야, 태이. 두 달이나 집에 혼자 있으려니 어때. 심심하진 않나? 몸이 뻐근하진 않아? 나는 오늘따라 묵직한데.’
‘오늘따라’라는 부분에서 정태의는 못 볼 걸 보고 말았다.
침대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는가 싶던 일레이가 잠옷 대신 입은 복서팬츠 위를 쓰다듬는 듯하더니, 어느 결에 불룩하게 솟아 있던 살덩이를 불쑥 꺼내었던 것이다.
“…….”
갑자기 모니터 아래를 그득하게 채운 그 물건을 보며 일순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그동안 좀 안 본다 싶었는데 이제는 (추정치) 수백수천 리는 떨어져 있을 그 물건을 화면을 통해서까지 봐야 하다니.
“그래서……, 뭐……. 폰섹이라도 하자고?”
정태의는 질린 얼굴로 농담을 했다. 비록 얼굴에 웃음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농담이었다.
이미 뻣뻣하게 서서 모니터에 바싹 가까워져 있는 그 흉물을 주무르는 일레이의 얼굴에는, 그 물건과는 대조적으로, 그리 흥분한 빛도 긴장된 기색도 없었다. 일레이야말로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슨한 표정으로 언뜻 웃었다.
‘왜. 안 내키나? 제법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거기까지 가면 좀……제대로 인생 막장인 것 같아서 싫은데.”
이대로 전화를 끊고 내 방으로 돌아가 버릴까. 아니, 아무리 지금 떨어져 있다 해도 후환이란 것도 생각해야지.
슬금슬금 화면에서 멀어져 가는 정태의를 바라보며 일레이는 흠, 하고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화면에 원근법이 좀 안 맞는 것 같아, 왜 유독 저기만 확대되어 보이지, 애써 화면을 외면하는 정태의의 귀에 이윽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태이. 잊었나? 넌 내 거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되어서 잊었다면 다시 말해 주지. 넌―.’
“아 뭘 바래, 뭘!”
사람을 골백번은 세뇌시킨 듯한 그 말을 또 들으려니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서, 정태의는 반사적으로 마지막 말을 가로막으며 외치고 말았다.
답은 간단히 나왔다.
‘아래도 벗어 봐.’
두어 달 편하다 싶었더니 이놈이…….
“어이, 일레이, 언제 돌아올 건지는 몰라도 말야, 내 생각에는 어차피 돌아오면 네 좋을 대로―.”
‘한 달.’
“응?”
‘한 달 있으면 돌아갈 거다. 그럼 태이, 아무래도 안 내켜하는 너를 위해 하나 깨우쳐 주겠는데, 총합 석 달 치의 고생을 하룻밤에 하는 거랑, 두 달 치를 미리 전화선 너머로 해결한 뒤 나머지 한 달 치만 하룻밤에 하는 것, 어느 게 더 네게 이득일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멍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정태의를 마주보며, 일레이는 다시 고갯짓했다.
‘벗어.’
젠장. 된통 걸렸구나. 이 상황을 적당히 무마하고 넘어가든가 전화를 끊어 버리든가 하면, 정말로 한 달 뒤에 초상 치르겠다.
정태의는 바지 허리춤에 손을 걸치며 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수십 초에 걸린 말없는 눈싸움 끝에 결국 포기하고 바지를 벗어 버렸다.
이놈의 전화, 받는 게 아니었는데. 라디오나 들으며 그냥 잘 걸.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갑자기 부아가 울컥 나서 벗은 바지를 모니터에 대고 냅다 집어던졌지만 힘없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진 바지 뒤에는 모니터 안에서 불량하게 웃고 있는 일레이의 얼굴만이 남았다.
“자. 이제 뭐. 속옷까지 벗어?”
‘물론.’
정태의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마구 풍기며 빽 소리를 질러도 눈썹 하나 까닥 않는 그 하얀 얼굴을 사납게 쳐다보며 속옷까지 벗어서 모니터에다 대고 던졌다. 모니터 모서리에 걸려서 화면이 가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꼭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와서 올 누드 정도가 별다를 이유도 없는데, 모니터 안쪽에서 물건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앞에 벗고 서 있으니 참 기분이 미묘하다. 미묘하달까, 불편하다.
‘도로 앉아. 그렇게 눈에 힘주고 서 있지 말고.’
저 태연자약한 태도 역시 몹시 거슬렸다. 하긴 원래 그런 인간이긴 했다.
정태의는 불편하고 울컥한 심경 그대로, 다시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그 김에 아예, 다리까지 의자 위에 걸터놓아 볼 테면 보라며 다 드러내어 버렸다.
“이러니 보기 좋나?”
‘아아, 대단히 보기 좋은데. 절경이야.’
모니터 하단을 가득 채우다시피 한 물건이 한층 두꺼워졌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 이상, 새삼스럽게 시선을 피하기도 뭣했다.
어쩐지 나는 이놈이랑 얘기하다 보면 가끔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꼴이 종종 벌어진단 말야…….
“사내놈 다리 사이가 그렇게 절경이야?”
한껏 비꼬아 줄 생각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자신의 물건을 문질러 대는 저 하얀 손 안에서는 물건이 더더욱 거세게 고개를 치켜세워 가고 있었다.
똑바로 정태의를 마주보며, 일레이가 웃었다. 얼음 같은 눈매에 웃음기가 돈다. 몇 년이나 봐 왔는데도 여전히 낯선 눈매다. 저 눈에 웃음이 담기면 왜 이렇게 낯설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럼, 절경이지.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어 버리고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목이라도 매달아 버리고 싶은데도 그런 내색 안 하고 태연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얼굴이 말이야.’
“……!”
이럴 때다. 이 남자의 고약한 성질이 피부에 닿도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좋냐?”
심보를 그렇게 쓰면 좋냐는 의미로 삐딱하게 물었다. 그 뜻을 분명히 알았을 텐데도 일레이는 엇나간 대답을 했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보니까 회가 동하는군. 두 달 내도록 머릿속으로만 본 것들을 이렇게 다시 보니 말이야. 심장이 저릿할 만큼 아랫도리가 당기거든.’
그 낮고 태연한 목소리와는 걸맞지 않게 바싹 일어선 물건이 슬슬 절정에 다다른 듯했다.
내쏘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과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 희미하게 쾌감을 담은 숨결, 성기를 주무르는 끈적한 손길,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정태의의 가슴을 찌른다. 그의 말마따나, 심장이 저릿하도록.
순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젠장, 이놈이랑 지내면서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됐어.
‘태이. 다리 더 벌려. ……태이.’
저런 말에 얌전히 다리를 더 벌려 주는 걸 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머리가 약간 맛이 가지 않았나 싶다.
제발 이 상황에서 자신마저 물건을 세우는 꼴은 보이지 않기만을 기원하며, 정태의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마저 감아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시선을 붙든 새카만 눈동자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태이, 다시 한번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부옇게, 화면에 흩뿌리는 끈적한 액체.
점점이 화면에 들러붙었다가 천천히 줄을 그으며 흘러내리는 그 흔적 뒤로, 여전히 이쪽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는 서늘한 눈이 보였다.
“…….”
‘……역시 실제로 같이 있는 게 아니어서야, 좋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욱하는 마음이 되살아났다.
이놈 자식이, 사람이 번연히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에다가 잔뜩 뿌려 놓은 게 바로 몇 초 전인데 좋지 않다는 말이 대체 어디서 나오냐.
그러나 정태의가 벌컥 외치기도 전에, 일레이는 손끝에 묻은 흔적을 모니터에 대고 스윽 그어내렸다. 정태의는 마치 그 손가락이 자신에게 직접 대고 그어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움칫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일레이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 네 욕구도 풀어 줘야 할 텐데, 떨어져 있으면 그게 안 되거든. 미안하게 됐군.’
“……천만에. 전혀 신경 써 줄 것 없어, 그 점은.”
이쪽은 도리어, 저쪽에서 욕구를 풀어 주겠다고 덤비면 그게 더 무섭다.
그러나 알량한 자존심으로 그 말을 삼킨 정태의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이제 하고 싶은 말 해 봐. 뭣 때문에 연락한 거야.”
다소나마 머리가 식고 나자 이 남자가 애매하게 어른거리던 주제가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일레이는 말없이 정태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로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한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안 하나 보군.’
“됐으니까 딴소리 말고 그만 말해 봐. 뭐야, 삼촌 소식이 궁금해? 아니면 UNHRDO 녀석들의 소식이라도 궁금해져서?”
안부 인사도 할 만한 놈이 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정태의가 묻자 일레이는 잠시 협탁을 톡, 톡 두드리다가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창인 교관이 거기 갔다니, 오랜만에 만났겠군. 아쉬워. 나도 오랜만에 봤으면 좋았을 걸.’
“하나도 안 아쉬운 얼굴로 무슨 소리야. 그렇게 아쉬우면 한 달 뒤에 보도록 해. 다시 올 모양이니까.”
‘흠……?’
“국제 항공 기술 포럼이란 게 다음 달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있는데, 그때 다시 올 거라더군. 아, 그렇지. 거기에 재의 형이 참석한다고 하니까 아마 나로서는 모처럼 가족 상봉의 날이 되겠지만 말야.”
이제 그만 다시 옷 입어도 될까, 아무리 그래도 속옷 정도는 챙겨 입고 싶은데, 그나저나 저놈도 욕구 다 풀었으면 그만 좀 집어넣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정태의는 슬그머니 옷가지를 끌어당겼다. 그러다가 문득 알아차렸다.
턱을 감싼 채로 정태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일레이가 짧게나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왜.”
‘그 말까지 하고 갔나……?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 가시겠다?’
말꼬리에 씁쓸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섞였다.
정태의는 옷가지를 잡아끌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몇 초쯤 아무 말도 없이.
“……. 그럴까 싶은데. 그때는 베를린에 들를 만큼 여유가 안 날 거라고 했거든. 삼촌도 그렇고, 아마도 재의 형도.”
‘그것 유감스럽군.’
“뭐가.”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도록 해.’
정태의는 다시금 침묵했다. 이번에는 그 침묵이 조금 전보다 좀 더 길어졌다.
정태의는 손에 쥐고 있던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모니터를 향해 바로앉았다.
“즉 요컨대, 가지 말라?”
‘그래.’
“내 가족을 보러 내가 간다는데도?”
‘다음에 봐.’
“…….”
‘…….’
잠시 어이없는 얼굴로 일레이를 바라보던 정태의의 눈매에 점차 못마땅한 빛이 서렸다. 그 못마땅한 빛은 이윽고 험악한 빛으로 번졌다.
“싫은데.”
‘괜히 나가지 말고 거기 얌전히 있어.’
“야, 너는 막 나가 놓고 나더러만 집에 박혀 있으라고……!”
‘나가지 마.’
“싫어!”
사실 그렇게까지 싫은 것도 아니었고,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숙부와 형을 반드시 만나야만 하겠다는 필사적인 각오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저렇게 냉담하게 딱 자르는 명령조의 말을 듣자 잊고 있던 욱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정태의가 딱 잘라 받아치자, 순식간에 일레이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정태의. 가지 마.’
한 마디 한 마디 또렷하게 발음하는 나직한 음성이 칼날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소심한 마음이 다시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소심한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자조에 가까운 한탄이 피어오른다.
내 인생, 어쩌다 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보는 신세가 됐다지.
“가면 안 되는 이유는.”
정태의가 못마땅하게 물었다. 저쪽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가면 안 되는 이유는 뭔데.”
‘내가 안 내키니까.’
으아……, 이놈이 정말.
정태의의 눈이 순식간에 세모꼴이 되었다.
‘정태의. 사람이 좋게 말로 하면 순순히 들어.’
한층 낮아진 목소리 역시, 더 이상 유쾌하지 않은 듯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그 말투에 명령조의 느낌이 한결 살아난다.
정태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일레이 역시 정태의를 마주본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어느 순간 속이 비꼬였다. 매우 충동적으로. 스스로도 예상치 못하도록 갑작스레.
정태의는 몸을 내밀었다. 액정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일레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한 달 뒤에 너 돌아오기 전에 확 먼저 떠 버릴 테다.”
‘정태―.’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세 배는 더 험악해진 목소리가 미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정태의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도중에 목소리가 뚝 끊기고 액정 화면이 시커멓게 꺼진 상황에서, 정태의는 전화기를 움켜쥐고 뚫어져라 액정을 노려보았다. 그 액정이 다시 번쩍 빛나며 사나운 얼굴을 비추기라도 할 듯이. 그러다가 화들짝, 전화선까지 뽑아 버렸다. 그런 뒤에도 다시 몇 초쯤 더 전화를 노려본다.
“……나…….”
이윽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정태의는 멈칫멈칫 전화기를 놓으면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배짱으로 이랬지…….”
망연히 중얼거리며 넋 나간 듯이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감싸쥐고 말았다.
내가 미쳤나 봐, 이걸 어떻게 감당하나, 중얼중얼 스스로를 타박하던 정태의는 바깥 멀찍이에서 복도를 오가는 인기척을 깨닫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주인 없는 컴컴한 방에서 알몸으로 앉아 있는 스스로를 그제야 돌이켜 보고, 얼른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워모았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백날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은, 부차적인 후회와 자책까지 끌어들이는 법이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어쩌자고 그렇게 해 버렸을까. 그런 후회를 하다 보니 뒤따라오는 한심한 마음이 가슴을 때린다.
가만히 곱씹어 보면 자신의 잘못은 그리 크지 않은데도 소심하게 후회의 염念을 중얼거려야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가엾다.
그렇게 후회와 신세 한탄을 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휘청이며 집에서 나온 정태의는, 지금 난감하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변덕스런 날씨인지.
그래도 요 두어 달 남짓 이제는 비도 거의 안 오고 하늘도 깨어질 듯 새파래서 제대로 여름 날씨가 찾아왔나 싶었다.
정태의가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 거뭇한 구름이 좀 깔려 있긴 했지만 그 사이사이로 파란 하늘빛이 선명하게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바깥에는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바람까지 몰아쳐 온 세상이 비로 뒤덮인 것 같았다.
“아주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퍼붓는구만…….”
정태의는 바깥을 내다보며 혀를 찼다.
여기에서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뛰어서 5분 남짓. 그러나 그 5분이면 충분히 생쥐 꼴이 될 수 있을 만큼 빗줄기는 굵었다.
사실 좀 젖는 건 상관없었지만, 굳이 지금 저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집으로 돌아갈 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 비가 그치거나 좀 잦아들길 기다린 지 한 시간 남짓.
그냥 갈까. 빗물로 샤워한다 치고.
정태의가 막 문고리를 잡았을 때, 어둑한 세상을 순식간에 불태울 듯한 번개가 번쩍였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확 뜨일 만큼 밝았다. 저도 모르게 멈칫 멈춰 서 있자 잠시 있다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이 웅장하게 천둥이 울렸다.
“……. 기왕 기다린 김에 뭐 좀 더…….”
정태의는 문고리에서 슬그머니 손을 떼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한 성당 안.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당 안에는 벽을 빙 둘러 간격을 두고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유리창.
성스럽고 경건해야 할 공간인데도, 요란한 천둥번개 속에서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탓인지 괴괴하게 느껴졌다.
정태의는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저만치 앞에 보이는 십자가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 가족 중에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도 없었고, 그 역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관생도 시절엔 바로 위의 직속교관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탓에 일요일이면 몇 번 잘못 걸려서 어거지로 끌려가곤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뭔가 감명을 받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여태 특별히 어떤 종교에 대해 호감이나 비호감을 가진 일은 없이 무관심하게 지내왔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정신이 각박해지면 어딘가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라고는 해도…….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입맛이 영 씁쓸하다.
억지로 웃음을 참던 카일의 조용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딜 가려고?’
아침,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회사에 가려고 막 제임스의 뒷자리에 타던 카일이, 대문 쪽으로 타달타달 걸어가는 정태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었다. 정태의는 우울한 마음 그대로 머릿속에 들어 있는 말을 대답했다.
‘전생의 업보를 참회하러 잠깐 성당에 좀…….’
자책의 마음이 깊어지다 못해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간 정태의의 심경을 그 뜻 그대로 이해한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카일은 묘한 얼굴을 했다. 그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을 정태의는 이내 읽어내었다. 웃음과 인내가 뒤섞인 얼굴이다.
조금 전 아침식사 자리에서 이미 말한 바 있었다.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꿈자리라도 안 좋았냐고 묻는 카일에게, 무심코 대답했던 것이다. 지난밤에 일레이가 전화를 했더라고.
샐러드의 파슬리를 찍던 포크를 멈추며 눈을 껌벅인 카일은 ‘그놈이 왜.’라고 물었고, 그 물음에도 정태의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웅얼웅얼 대답했다.
‘안부차 전화해 봤대요.’
그러자 카일은 몹시도 기괴한 얼굴을 했지만,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정태의의 표정을 살피더니 고맙게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런 뒤에 정태의의 ‘전생의 업보’ 운운하는 발언을 들었으니 그 원인을 능히 짐작할 수도 있었을 거다.
평소에도 어쩌다가 저놈에게 잘못 찍혔냐고 안타깝게 정태의를 바라보는 카일은 이번에도 사려 깊게 대놓고 웃지는 않았다. 도리어 몹시 가엾다는 듯이, 열심히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을 따름이다.
‘전생의 업보를 참회하러 성당에 가서 안식을 얻는다면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겠지만, 태이, 그 말에서 오류를 좀 잡아내도 괜찮을까……?’
‘나중에 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러나 정태의가 우울하게 대답하자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모쪼록 잘 다녀오라면서 성당 앞까지 태워 주겠다는 카일의 제의를 거절한 정태의는 침울한 마음 그대로 집에서 바로 몇 분 거리에 있는 성당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성당이 워낙 인적 드물고 조용했던 탓인지, 혹은 지난밤에 거의 잠을 못 자 피곤하고 졸렸던 탓인지, 혹은 자신도 모를 자신의 죄를 참회하느라 깜빡 정신을 놓았던 탓인지,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훌쩍 두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서 집으로 가려고 나서려다 보니까, 그새 바깥에서는 억수같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정태의는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오늘 영 안 따라주네. 날씨도 그렇고 기분도 그렇고.
성당 안에 앉은 채 지그시 조각상들을 올려다보면서 정태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깜빡 조느라고 정작 전생의 업보에 대한 참회는 못했다. 말로만 듣던 고해성사란 걸 해 볼까. 하지만 가톨릭도 아니고 성당에는 거의 온 적도 없는 사람도 해 주나.
그렇진 않겠지, 하고 고개를 젓다가 정태의는 문득 자신이 고해성사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제가요, 아무래도 전생에 죄를 크게 지었나 봐요, 테러리스트한테 잘못 걸려서 저까지 덩달아 수배범이 되었지 뭐예요. 심지어는 그 테러리스트한테 차마 말로 못 다 할 부끄러운 짓도 얼마나 지독하게 당하는지 몰라요. 지난밤만 해도 말이죠 글쎄…….
그런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스스로를 떠올려보다가,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도 참 헛짓을 잘 한다니까, 하고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을 때였다.
사람 하나 없어 고요한 적막만이 깔려 있던 성당 안에, 문득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폭우가 보였다. 아직도 비가 그치려면 멀었나 보다.
이렇게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그 빗속을 뚫고 성당을 찾아온 경건한 신도가 누구일까, 정태의는 별 뜻 없이 그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발끝까지 오는 후드형 비옷을 뒤집어 쓴 그 사람은 성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오다가 정태의를 보고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곧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후드를 벗었다. 후두둑 빗물이 옷자락을 따라 떨어졌다.
다음 순간 정태의는 말을 잃었다.
어둑어둑한 성당 안에서 은은하게 빛을 비추는 플라티나 블론드에 몇 방울 묻은 비를 털어내며 혀를 차는 그 청년은, 그 뒤에 배경처럼 어슴푸레하게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았다.
그림처럼 아름답다. 조각 같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곳이 다른 공간이 되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은 모두 그 청년을 위해 있는 말이었다.
잠시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정태의는, 그 시선을 느꼈는지 청년이 흘끔 쳐다보는 통에 정신을 차렸다. 빤히 쳐다보는 게 무례한 줄 알면서도 좀체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혼자야?”
그러나 그런 시선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청년은 정태의에게 대뜸 물었다. 목소리도 꼭 희고 곱게 구워낸 도자기 같다고 생각하며, 정태의는 헤? 하고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런 직후에야 어, 아니, 응, 예, 하고 더듬거렸다.
진정하자. 예상치 못하게 지나치게 뜻밖의 미모를 보았다고 해서 이렇게 당황할 건 없잖아.
가슴께를 두 번, 세 번, 조금 세게 두드렸다. 팡, 팡, 가슴 위를 두드리고 나자 좀 정신이 돌아온다.
청년은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정태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뒤에 다시 정태의에게 시선을 준다.
“그래서.”
“……?”
“너는 우연히 여기에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날 기다렸던 거야?”
“……. 난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정태의는 이 범상찮은 외모의 청년은, 말하는 것도 어딘지 범상찮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됐어.”
청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뭐랄까, 참 뜬금없고 영문을 모를 남자다.
정태의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요즘은 따라가기 힘든 대화들이 왜 이리 자주 들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 정도의 외모라면 영화배우나 유명 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고, 그렇다면 그가 가는 길마다 미리 극성 팬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다. 그래, 어쩌면 그런 류의 사람인지도 모르지.
정태의는 홀로 결론을 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그 청년의 외모를 보니 자신의 결론이 몹시 타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흐뭇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가 퍼붓는데도 기도를 하러 올 만큼 독실해 보이는 면상은 아닌데.”
한동안 성당 안을 찬찬히 바라보던 청년은 다시 대뜸 말을 꺼내었다. 어떻게 들으면 대단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실제로 전혀 독실하지 않은 정태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와서 잠깐 졸다가 일어났더니 비가 오더라고. 그래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던 참이지.”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데엔 왜 와?”
빗속을 뚫고 온 사람이 할 말이 아닌데……, 하고 혼자 사뭇 고민스럽게 혼잣말을 한 정태의는 흘끔 그를 보았다. 산만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시선을 느끼자 마주보았다.
뭐 상관없지. 고해성사까지는 안 되더라도, 이 애끓는 속을 누군가에게 토로라도 해 볼까. 또 누가 알아. 날 가엾게 여긴 저 하늘 위 어느 분이 나한테 사자를 보내 주셨는지.
“내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지금 인생이 이렇게 고달파졌나……, 뭐 그런 생각을 좀 하러. 인생 고달프게 만드는 인간이 떡하니 버티고 있질 않나…….”
“죄를 멍청하게 지었으니 그렇지. 똑똑하게 죄 지은 인간들은 고달프지 않게 인생 아주 잘 사는 놈 천지야.”
조금도 고민하는 빛 없이 즉시 튀어나오는 대답에 정태의는 일순 말을 잃었다.
뭐랄까, 이 남자, 얼굴은 아주 그림이나 조각상에서 튀어나온 천사 같은데 어쩐지 좀…….
“……그쪽은 이 빗속을 뚫고 여긴 왜 왔는데.”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청년은 알록달록, 어두운 곳에서 곱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스테인드글라스 안에서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었다. 몹시 사랑스럽게. 청년은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누가 쫓아와서.”
“응?”
“길을 가고 있는데 누가 자꾸 따라붙으면서 귀찮게 굴잖아. 그래서 대충 따돌릴 겸, 비도 피할 겸, 아무데나 들어왔지.”
청년의 말에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사정은 듣지 않아도 대충 납득이 갔다. 아까와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까지 탁월한 외모면 그런 번거로운 고생이 따라붙어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도 나름대로 인생 고달프겠군.”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자 그는 흘낏 정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다시 스테인드글라스로 시선을 돌린다. 그 성모의 형상이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성당문이 벌컥 열렸다.
싸늘한 빗소리와 축축한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 빗속에 또 사람이 드네, 하고 돌아본 정태의는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어쩐지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덩치가 큰 남자가 크게 숨을 헐떡이며 거기에 서 있었다.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정태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고 있던 청년을 발견하자 우레처럼 고함을 질렀다.
“이, 이 새끼 여기 있었구나!”
뭔가 소란의 전조가 보였다.
정태의는 흘끔 청년을 곁눈질했다. 그 우렁찬 고함소리가 안 들렸을 리는 없는데도 청년은 그쪽으로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스테인드글라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넋을 놓기라도 한 듯이.
남자는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닥을 울리는 무겁고 거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이제 보니 남자는 한쪽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핏발이 서 있는 정도가 아니라, 눈의 실핏줄이 죄다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흰자위가 온통 새빨갰다. 저 눈이 과연 멀쩡하게 보이기는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제법 멀끔하게 생긴 축에 드는 그 남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이성을 잃은 듯이 보였다. 움켜쥔 주먹은 금세라도 누군가의 얼굴을 박살낼 것 같았다.
혹시 이 남자가 그, 귀찮게 따라붙었다는 남자인가. 어째 분위기가 몹시 심상찮은데 이건 자리를 피해야 할까. 아니 이대로 두면 살인이라도 날 것 같다. 저 곱게 생긴 청년이 죽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야…….
정태의가 막 그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걸음을 떼려 했을 때, 청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동안 계속 갖고 싶어했던 걸 손에 넣어서 난 엄청나게 기분이 좋은 상태란 말이야……. 그래서 그냥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대로 돌아가는 게 좋을 성싶은데, 그렇게 말해 줘도 안 듣겠지, 응?”
엄청나게 기분이 좋은 상태라고 하기에는 청년의 눈이 지나치게 권태롭고 우울해 보인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이 꼭 넋 나간 사람 같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혹은 말하는 내용을 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우선되어야 할까, 정태의의 머릿속에서는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들이 오갔다.
“사람한테 갑자기 주먹질을 하고 달아난 놈이 무슨 헛소리야. 이게 반반해서 말 좀 붙여 줬더니, 너 오늘 좀 죽어 봐라.”
청년의 말에도 코웃음을 치며 저벅저벅 다가선 남자는 비에 흠뻑 젖은 소맷자락을 걷어올렸다. 억센 팔뚝이 드러난다. 저 팔뚝에 한 대 스치기라도 하면 저 아름다운 조각상 같은 청년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일단 눈앞에서 저 예술품 같은 얼굴에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꼴만은 좀 막아 놓고 봐야지.
정태의는 남자가 순식간에 몇 발짝 안으로 거리를 좁히자 다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할 겨를이 없이 일단 그 사이에 무작정 끼어들고 봤다.
거의 동시에 남자는 청년의 앞까지 다다랐고, 청년은 그제야 시선을 돌려 귀찮은 듯 남자를 보았다.
그때였다. 눈앞에서 뭔가 시퍼런 것이 번뜩였다.
정태의는 거의 충동적으로, 가슴속이 섬뜩할 만큼 빠른 속도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가장 위협적인 손 하나를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그 손이 어느 틈에 끼고 있던 너클이 상대의 몸통 어느 뼈를 박살내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
“어……?”
머리로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반사적으로 둘의 사이에 끼어들어 가장 위협적인 수를 가로막아 버린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쥐고 있는 늘씬한 손목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우람하고 억센 털투성이 팔뚝이 아니었다.
“어? ……어?”
그러나 그 늘씬한 손목 끝의 아름다운 손에는 틀림없이 둔탁하게 빛나는 철제 너클이 끼워져 있었고, 정태의의 눈앞에는 약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조각 같은 얼굴이 있었다.
정태의는 다시금 어……, 하고 중얼거리며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고, 자신이 흉수에서 감싸 뒤로 숨겨 준 곳에는 조금 전의 그 남자가 새빨갛게 터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쇠주먹에 박살날 뻔했다는 사실도 아직 깨닫지 못한 듯한 남자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정태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정태의가 쥐고 있는 청년의 손, 그 손 안에 꼭 맞게 파고들어 있는 너클을 본다.
정태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 라고 멍하니 중얼거리며 아연하게 청년을 돌아보았다.
그때 청년이 세차게 손을 뿌리쳤다. 마치 벌레를 떨궈내듯이 정태의의 손을 거칠게 떨쳐낸 뒤 손목을 툭툭 턴 청년은 차가운 눈으로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청년이 정태의에게 뭐라고 입을 열기 전에, 그제야 청년이 끼고 있는 너클로 시선을 준 남자는 상황을 다소나마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이 건방진 놈이……. 넌 뭐야, 비켜!”
남자는 청년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정태의를 아무렇게나 후려갈겼다. 뻑, 옆통수에서 불이 번쩍했다.
아야, 하고 반사적으로 외친 정태의는 억울하게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놈이 도와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그러나 남자는 한 발 비껴난 정태의를 본 척도 않고 청년에게 달려들려고 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주먹을 고쳐 쥐는 청년을 보며 미묘한 위화감과 함께 선명하게 다가오는 위기감에, 정태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다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우연히가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남자를 가로막아 뒤에 세우며 청년과 마주본다.
정작 위험한 건 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아니었다.
한 걸음 막 내디디려던 청년은 또 다시 앞을 막아선 정태의를 보곤 보일 듯 말 듯 눈살을 찌푸렸다. 눈빛이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너도 같은 꼴 나기 싫으면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구석에 박혀 있어, 누런 동양 원숭이. 다시는 안 봐준다.”
그런 차별 발언을 들은 것은 몹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온 것이 저 고운 입술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정태의는 턱 아래를 강타하는 아찔한 충격에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주 잠깐, 몇 초쯤,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태의는 정신을 잃었던 듯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사태는 종료되어 있었다.
분명히 청년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왜 내가 갑자기 누워 있지, 눈을 껌벅이며 일어나 앉은 정태의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바닥에 주욱 뻗어 있었다.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성당 바닥에 누운 남자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있었다. 그 입에서는 거품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
그 거품에 피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정태의는 황급히 일어섰다.
청년은 너클을 빼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대신 먼지 하나 없이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한 시선을 들어 다시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본다.
정태의는 경악스런 눈으로 청년을 쳐다본 뒤 남자를 살폈다. 쓰러져 있는 남자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헤친다.
“어디를 때렸길래…….”
“명치 옆. 안 죽어. 갈비뼈는 딱 한 대만.”
청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심상하게 말했다.
정태의는 뜨악한 얼굴로 청년을 쳐다보곤 남자의 드러난 배 위를 살폈다. 선명하게 흔적이 남아, 어디를 맞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구급차, 구급차를 불러야……. 젠장, 전화를 안 갖고 왔잖아. 이봐, 전화 좀 줘 봐.”
정태의는 혀를 차며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년은 그 손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다가 냉담하게 말했다.
“구급차를 왜 불러.”
“왜 부르냐니, 사람이 죽어가잖아!”
“그게 왜.”
“…….”
“아, 그게 아니지. 그 정도로는 안 죽어.”
그 정도로는 안 죽는다고 고쳐서 말하긴 했지만, 그 전에 ‘그게 왜.’라고 한 청년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죽든 말든, 그게 왜.
정태의는 멍하니 청년을 보았다. 얻어맞은 턱의 얼얼한 아픔도 싹 까먹었다.
“…….”
이 동네가 물이 안 좋은가, 일레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싶었더니 어디서 이렇게 살짝 정신 나간 놈이 나타났지.
정태의는 빗속을 뛰쳐나가서 구급차를 불러올까 하다가 우선 남자를 살폈다. 푸르스름하다 못해 시커멓게 흔적이 남은 피부 주위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려 본다. 기절해 있는 남자를 흘끔 보곤 천천히 그 근처를 눌러보았다. 남자의 입에서 뭔가 기괴한 신음이 새어나오는 듯도 했지만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시하기로 했다.
청년의 말마따나 늑골이 한 대쯤 부러진 것 같았다. 한동안 세심하게 주위를 쓰다듬었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이상하다 싶은 곳은 없었다.
흠, 한숨을 내쉬는 정태의의 몇 걸음 옆에서 비스듬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청년이 불쑥 물었다.
“의사인가?”
아냐, 의사치고는 손끝이 서툴러, 자기가 물어 놓고 자기가 대답한 청년은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아슬아슬하게 생명줄을 타고 살아가는 삶을 좀 영위했더니 본의 아니게 전천후 멀티형 인간이 되었습니다, 라고 속으로만 중얼거린 정태의는 남자의 배며 가슴 위를 쓰다듬던 손을 뗐다.
남자의 생명이 그렇게 급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정태의는 물끄러미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소매를 둘둘 걷어 남자의 이마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남자의 이마 정가운데를 조준해, 가운뎃손가락을 튀겼다.
딱, 몹시 호된 소리가 남자의 이마에서 울렸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남자가 웅얼웅얼 신음을 중얼거린다. 순식간에 벌게지는 이마에는 머지않아 시퍼렇게 멍이 들 터였다.
“사람이 기껏 도와주려고 했더니 막 때렸겠다?”
정태의는 아까 엉겁결에 남자에게 얻어맞은 옆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정작 남자보다 더 강렬한 어퍼컷을 날린 인간이, 바로 옆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정태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청년도 물끄러미 정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 내 이마도 때리고 싶어서?”
이윽고 청년이 물었다. 정태의는 고민스런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 정체 모를 청년의 이마에 과연 꿀밤을 먹일 수 있을 것인지는 제쳐 두고, 과연 저 단아한 이마에 멍이 들게 만들어도 괜찮을 것인지가 더 걱정이 되었다.
잔뜩 인상을 쓰고 그의 이마를 노려보는 정태의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청년의 눈매가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 다물고 있던 입매도 희미하게 느슨해졌다.
아. 웃는 거구나.
청년의 얼굴에는 웃음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미미한 변화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 번도 웃어 본 적 없고 어떻게 웃으면 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청년은 그런 웃음을 웃었다.
“내 몸을 건드리지 않고 때릴 수 있다면, 한 대쯤은 봐주지.”
그러나 크게 마음 썼다는 듯이 청년이 하는 말에 정태의는 다시 어벙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 말은 일단 전제조건부터가 성립이 안 되는데요……. 그러니까 결국 때릴 생각 말라는 거지?
정태의는 입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급박하게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다고 해도 구급차를 불러 주긴 해야 할 텐데, 하고 고민하며 발치의 남자를 내려다보던 정태의는 집으로 뛰어가서 응급실에 연락을 할까 싶어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비는 억수같이 오고 있었지만 그런 걸 개의할 상황은 아니었다.
“비도 어지간히 오는구만.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긴 것처럼.”
정태의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물바다 속에서 뛰어가기 편하도록 바지 아랫단을 접어올렸다.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바다 밑에 들어와 있는 것 같지.”
정태의는 바지를 접다 말고 옆을 보았다. 창 쪽으로 시선을 주면서 청년이 중얼거렸다.
“이런 날은 좋아. 소리가 안 들리거든.”
“소리가……?”
“음……. 비에 가로막힌 것처럼 말이지, 안 들려. 그래서 숨이 덜 막혀.”
정태의는 희한한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정태의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태의는 애매하게 얼굴을 찌푸리고 청년을 쳐다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뭔가 참 복잡다단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듣기 싫은 소리는 그냥 적당히 흘려들어……. 그거 뭐 좋다고 일일이 귀담아 듣나.”
그게 인생 복잡하게 사는 지름길이다, 하고 내뱉은 정태의는 신발끈도 고쳐 묶었다. 빗속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도와줄까?”
냉담한 목소리가 정태의를 붙잡았다.
도와주다니, 비라도 그치게 해 주려고?, 잠시 멍청한 생각을 하며 돌아본 정태의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을 마주보았다.
“네 인생 고달프게 만든다는 사람, 사라지면 좋겠어?”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어떻게 보면 심통난 어린애처럼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태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 그야 물론 사라지면 좋기야 하겠……, ……지는 않고.”
정태의는 머리를 긁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말을 하면서 생각해 본다.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는 사람이 사라지면 좋을지.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면, 단연 제일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건 역시 그놈이겠지. 일레이 리그로우.
그를 자신의 인생에서 없애 버린다면. ……없애 버린다면?
그렇게 상쾌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홀가분할지는 모르지만, 산뜻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막연하게…….
“……. 아냐. 역시 있는 게 낫겠다. 어차피 내가 선택하기도 했으니까.”
정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에야 갑자기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라지도록 도와줄까, 라니.
조금만 그 뜻을 생각해 보면 등줄기가 선뜩해지는 그 말을 곱씹으며, 정태의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정태의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고 중얼거리곤 어깨를 으쓱했다.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었는데 신통찮은 대답이 돌아온 건지, 입매가 살짝 찌푸려진다.
“이름은?”
막 돌아서려던 정태의를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붙잡았다.
“……. 태의. 정태의.”
알아듣기 편하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는데도 청년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말할까 하던 정태의는 다시 묻지도 않는데 굳이 또 말할 것 없을 듯해 관뒀다.
하지만 못 알아들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재수 없는 이름이군.”
청년이 낮게 중얼거리는 냉랭한 소리가 들렸다.
정태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상한 이름이라든가 어려운 이름이라는 말은 몇 번 들어봤어도 재수 없는 이름이라는 말은 또 처음이다.
정태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청년을 돌아보았다. 오늘 참 특이한 인종을 만나는구나.
그러나 청년을 본 순간, 인상을 펴고 말았다.
청년은 웃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웃는지 찡그리는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미묘하게 눈매가 굽어 있다.
그래도 역시 아름다웠다.
미인은 뭘 해도 미인이라더니, 하고 툴툴거리며 정태의는 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에는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없었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 속으로 뛰어나가 집을 향해 달리면서, 정태의는 순식간에 훌쩍 젖어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쓸어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귀가 먹은 듯이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곳이, 그 청년의 말마따나 바다 밑 같았다.
***
집의 현관문을 들어서기도 전부터 정태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두세 시간 전, 정태의가 아침에 집에서 나설 때 함께 나가 회사로 나갔던 카일의 차가 차고에 있었다.
콸콸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제임스는 정태의를 보자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 표정이 유난히 해맑아, 정태의는 의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
어쩐지 집안 공기가 이상했다.
심각한 얼굴로 서성거리던 리타는 정태의가 온몸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들어와도 잔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건성으로 ‘가서 샤워부터 하세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제일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연락부터 한 뒤 정태의는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젖은 머리를 툴툴 털며 나와도 여전히 집안 공기는 수상쩍었고, 정태의는 뭔가 심상찮은 리타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층의 서재 쪽에서 인기척이 나고 있었다.
“카일이 벌써 왔나 보네요. 나간 지 세 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뭐 잊은 거라도 있었나.”
그래도 마침 시간도 맞으니 온 김에 점심 먹고 나가면 되겠네요, 라고 리타에게 말했지만 리타는 여전히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영 이상하다.
정태의는 수건으로 머리를 문질거리며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카일,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집에 왔어요?”
그러나 정태의가 반갑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서재의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그 안에 있긴 한 모양인데, 하고 이상하게 여기며 계단을 올라간 정태의는 흘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나 문만 열어 두고 거기에 없나 싶었다.
그러나 카일은 거기 있었다.
서재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그러세요?”
석상처럼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카일을 보고 정태의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라도 잠겨 있는데 괜히 말을 거는 건 아닌가 생각하면서.
하지만 어지간히 깊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라도 누군가 말을 걸면 이내 대답을 하며 대응해 주는 카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기만 했다.
“……. ……카일?”
정태의는 카일의 등 뒤로 다가가며 그를 불렀다. 이 정도쯤 되면 결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는 아니었다.
정태의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아도, 카일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제야 정태의는 카일의 부릅뜬 시선을 깨닫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카일은 책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위에서 세 번째 단, 의자 바로 옆. 가장 손이 쉽게 가는 자리. 가장 자주 꺼내어 보며 자주 매만지는 책을 꽂아 두는 자리다. 이 서재 안에 있는 수많은 희귀한 책들 가운데서도 카일이 특히나 힘들여 손에 넣은, 목숨보다도 더 아낀다고 단언할 수 있는 책들을 꽂아 두는 자리.
그 자리의 한가운데에 텅 빈 공간이 생겨 있었다. 책 여남은 권쯤이 들어 있었을 법한 공간이.
어, 저 자리가 원래 저렇게 비어 있었나.
정태의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가끔 카일이 책을 손질하고 정리할 때가 아니면 저런 식으로 공간이 비는 일은 없었다. 한두 권씩 읽으려고 꺼낸 뒤의 빈 공간이라면 모를까.
“어라……, 여기 어쩐지…….”
정태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리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때.
돌조각처럼 꿈쩍도 않고 서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던 카일이 움찔, 몸을 떠는 듯했다. 손가락 끝부터 움칫 움츠린 몸은 이윽고 팔, 다리, 몸통 순서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추어 낯빛도 새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 ……리…….”
“예? ……카일? 괜찮아요?”
이까지 딱딱 부딪치며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카일을 보고 정태의는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여전히 카일은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얼어붙은 혀를 간신히 움직이듯이 중얼거렸다.
“리스……, 크리……, 크리스……, 이, 이……!!”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눈을 뜬 채로 기절해 있던 카일은 정말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카일!! 하고 외치는 정태의의 놀란 목소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예기치 않았던 손님이 찾아온 것은, 정태의와 카일이 집에서 나간 뒤 한 시간 남짓 지난 뒤였다고 한다.
결코 집에 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던 그 손님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응접실에 안내한 리타는 카일에게 곧바로 연락을 했고, 카일은 그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만사 다 팽개치고 집으로 허겁지겁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 발 늦었다.
카일이 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급박하게 집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그 손님은 리타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돌아가 버리고 없었다. 카일이 목숨처럼 여기는 책 몇 권과 함께.
“그건……손님이라기보다는 도둑인데요.”
정태의는 바로 며칠 전에 페터가 고쳐 놓은 헛간의 지붕 차양 아래에 페터와 나란히 앉아 과자를 집어먹으며, 페터의 대략적인 설명을 듣곤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숙부가 왔을 때 이와 유사한 대화를 들었던 것도 같다.
“크리스티나……였던가.”
버석버석 과자를 씹으며 중얼거려 보았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시퍼렇게 질리던 카일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미리 책들을 어디다 치워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올바른 양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설마 주인도 없는 집에 손님이 와서 책만 홀랑 가지고 사라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어쨌거나 그 덕분에 까무룩하게 기절을 한 카일은, 지금 침실에서 끙끙거리며 앓아누워 있었다. 리타가 만들어다 준 얼음주머니까지 이마에 얹고 있으니 그야말로 병자 같았다.
정태의는 혀를 찼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비어 있던 곳에 꽂혀 있던 책들이라면, 아마도 카일이 얼마 전에 겨우 손에 넣고선 ‘평생의 숙원을 풀었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아꼈던 물건이었을 거다.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도 아까워하며, 그 책들을 꽂아 놓은 모양만 쳐다보면서도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던 게 기억났다.
“그 책들이 아마 루헤른 슈타이너랑 에드몽 티에르상, 그리고……. ……. ……앓아누울 만도 하다.”
하나씩 기억을 되새기며 손꼽아보던 정태의는 구부린 손가락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 손가락 위로 똑,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차양에서 빗물이 새고 있었다. 몇 초쯤 뒤에 또 한 방울 떨어진다.
“어……. 페터, 또 새는데요.”
“응? 그렇군. 에잉, 쓰던 게 다 떨어져서 미제 방수재를 썼더니 그래. 하여간 방수재는 국산을 써야 된다니까.”
페터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정태의도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지금 고치려고요? 비가 아까보다는 훨씬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오는데, 그냥 갠 다음에 고치죠.”
“아니야, 내친 김에 얼른 해치워 버려야지. 차라리 비가 오는 편이 잘 됐어. 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으니.”
헛간 안으로 들어가 사다리며 공구 따위를 챙기기 시작하는 페터의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정태의는, 그 아래에 펼쳐 놓았던 과자봉지와 맥주캔 따위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헛간 옆에 붙어 있는 쓰레기통에 그것들을 집어넣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며, 정태의는 오전보다는 부쩍 약해진 빗줄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무사히 응급실로 옮겨졌을까. 설령 구급차가 안 갔다 하더라도 폐성당도 아니니 설마 누군가 발견했겠지.
어쩐지 오늘은 파란만장한 하루로구나,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집으로 들어가던 정태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성당에서 나온 뒤로 지금껏, 전생의 업보에 대해 한 번도 생각을 안 했다. 빗속을 뚫고 집으로 오자마자 응급실에 연락하고, 그 뒤에 바로 카일이 쓰러지고 해 생각을 떠올릴 틈도 없었다.
역시 사람은 눈앞에 당면한 문젯거리가 있으면 다른 걱정은 떠오르지 않는 법인가 보다.
하긴 카일이 자리보전하고 누운 상황에서 그놈이 뭐 그리 대수일까. ……대수이긴 하지만 당장 눈앞에는 없으니 뭐.
정태의는 방으로 갈까 하다가 걸음을 돌려 카일의 침실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상태를 살피고 좀 어떠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같은 집에 있는 사람이 앓고 있어서야 마음이 무겁다. 아직도 주변 사람이 안 보일 정도로 끙끙 앓고 있으면 나중에 다시 가 보고.
카일의 침실은 서재에서 내려와 바로 왼쪽, 복도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그 앞까지 다가간 정태의는 막 노크를 하려다가 문이 한 치만큼 열려 있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틈새로,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카일, 일어났어요?”
정태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며 방문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쪽으로 큼직한 침대와 그 위에 누운 사람이 보였다.
카일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일어나 앉은 걸 보고 다시 말을 걸려던 정태의는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전화기를 붙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가, 사람이 없는 사이에 왔다가 가는 법이 어딨어, 응? 내가 손님 대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잘 알면서 그런―, 아니 그건 아니지.”
수화기에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호소를 하는 카일의 대화 상대는, 아무래도 그 문제의 손님인 모양이었다.
정태의는 숨을 죽였다.
카일은 정태의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듯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신경 쓰는 빛도 보이지 않고 전화에만 온 신경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그 책들이 어떤 책들인지 알아?! ……아니 알면서 그걸 홀랑 그렇게……! 이봐, 크리스티나, ……헉, 잠깐! 끊지 마! 그렇게 안 부를게!! 내가 잠시 망발을 했다, 응. ……그러니까 말야, 크리스, 그 책들 좀…….”
완전히 사색이 되어 두 손으로 수화기를 꼭 붙들고 있는 카일을 바라보며 문턱에 기대어 선 정태의는, 카일이 아무래도 그 손님에게 뭔가 약점을 잡혀도 단단히 잡힌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책을 거의 도둑맞다시피 한 입장에서 어떻게 저렇게 약하게―.
“야! 태우지 마!!! 태우면 안 돼! 그거 태우면 나 죽어!!!”
……나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러고 보니 일레이의 소꿉친구라고 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과거에 같이 일했던 사이라고.
“이야……, 역시 일레이. 어디서 친구도 꼭 저 같은 걸…….”
찾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며 정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유유상종, 초록은 동색 등등을 생각하는 정태의의 옆에서, 카일의 표정은 점점 더 침중해지고 있었다.
“와서 찾아가라니, 내가 간다고 해서 호락호락 주지도 않을 거잖아. 고서박람회에서 돌아온 게 바로 엊그제인데, 지금 가면 제임스가 정말로 사표를 쓴단 말이다. ……야, 야!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직접은 못 가고…….”
금세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외치는 카일의 말을 드문드문 들으며 정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지금 딱 회사가 상반 결산 때문에 아주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갈 시기인데 이럴 때 카일이 자리를 비우면, 이번에야말로 제임스는 잠적하고 말 거다.
정태의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리타가 약인지 야채즙인지를 가져온 참이었다.
통화 끝나면 전해 주겠다고 입 모양으로 말하고 쟁반을 받아들며, 정태의는 리타에게 짐짓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카일은 멀쩡하게 일어나 앉아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심적으로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고 하나, 옆 사람들이 심각하게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리타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돌아간 뒤, 정태의는 쟁반을 들고 카일 쪽으로 돌아섰다.
카일은 그새 통화를 마쳤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단히 험악하고 심각한 얼굴이, 꼭 철천지원수를 눈앞에 둔 사람 같다.
“통화 다 마치셨어요?”
“…….”
정태의가 컵을 내밀며 물었지만 카일은 깊이 생각에 잠겨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코앞까지 들이민 컵을 받아들어 기계적으로 주욱 들이켠 다음에야 응, 고마워, 라고 한발 늦게 말한다.
“……뭐래요? 책은 돌려준대요?”
빈 컵을 도로 받아들며 정태의가 슬쩍 물었다.
시퍼런 얼굴로 묵묵히 전화를 노려보던 카일은, 갑자기 정태의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전화기 대신 정태의를 노려보았다. 정태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왜요.”
“태이. 자네, 무슨 책이 없어졌는지 알지.”
“예? 예, 뭐 그야……. 대충은요.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는데요.”
“정확히는 모른다 해도, 보면 알 것 아냐.”
“예, 보면 알겠죠.”
희귀한 책들 가운데서도 특히나 희귀한 책들이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보면 알 것 같았다.
빈 자리에 있던 책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턱을 긁적이던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갑자기 덥석 두 손을 모아쥐는 카일의 억센 손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태이. 자네가 가서 책 좀 빼 오게.”
“예, 예? 책? 제가요? 아니 어디서…….”
엉겁결에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카일은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정태의의 손을 꼭 움켜쥐고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달려가서 회수해 오고 싶지만, 내가 간다고 해서 호락호락 줄 인간이 아냐. 일주일, 아니 한 달은 고생 실컷 시킨 다음에야 줄락말락할걸. 그랬다간 진짜로 제임스가 그만둘 테고.”
“예, 그야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시면 제임스는 희희낙락 자기 책상을 자기가 빼 버리고 종적을 감추겠죠.”
“그러니까 말이지, 태이. 내가 자네에게 좀 맡기세.”
정태의는 어깨를 움츠린 채 껌벅껌벅 그를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농담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어깨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정태의는 움츠러들었던 몸을 폈다. 그 기색이 전해졌는지 정태의의 손을 움켜쥐고 있던 카일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제가 가는 건 상관없는데……, 카일에게도 책을 쉽게 안 줄 거라면서 저한테는 과연 줄까요?”
“그러니까 쉽지는 않을 거야. 여차하면 책을 찾아내서 그냥 냅다 들고튀어도 돼. 내가 그 녀석에게, 내 대신 다른 사람이 갈 거라고 미리 얘기는 해 둘 테니까.”
카일의 얼굴은 몹시 심각했다. 반나절 사이에 낯빛이 아주 시커멓게 죽었다. 기분 탓인지 해쓱하게 살까지 빠져 보인다.
정태의는 으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그 대신 가는 건 상관없었다. 설령 책을 쉽게 주지 않아 고생을 좀 한다 해도, 카일의 부탁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이 과연 그의 부탁을 무사히 이루어 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고, 또 하나…….
“시간이 많이 걸릴까요, 그거?”
“아마도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테지만…….”
정태의는 다시 으음, 하고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면 좀 거리껴진다.
다른 것보다도, 바로 어제 일레이와 험악하게 통화를 끊고 난 직후였다.
전화를 할 때에는 거의 울컥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그놈이 돌아오기 전에 확 나가 버리겠다고 반쯤 충동적으로 외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 선언을 반드시 현실화시키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집에서 나가게 되면 어제 외친 그 말이 그대로 진실이 되는 셈인데.
“……. ……. …….”
나 이렇게 목숨 내놔도 되는 걸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했으니 오히려 나가 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래 놓고 얌전히 집에서 그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그것도 꼴이 우습긴 하지.
정태의는 안락한 현실과 긍지 높은 자존심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론은, 여느 때였다면 안락한 현실 쪽으로 기울었을 터였다.
“태이. ……안 되겠나?”
그러나 그러기엔, 이렇게 눈앞에서 호소하는 카일에게 진 마음의 빚이 너무나 크다.
심지어 굳이 은혜갚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더라도 친한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럴 리가요. 과연 제가 부탁하는 바를 들어드릴 수 있을지는 걱정이 되지만, 힘닿는 대로 최대한 노력할게요.”
정태의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고맙네. 잘 부탁해.”
“뭘요. 제가 도움이 되면 좋겠는걸요.”
그래, 기왕 꺼낸 말이다. 나가지 말라고 하는 그놈에게, 나가 버리고 말겠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해 뒀는데. 이참에 자기주장을 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아주 길길이 뛸 게 보이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
……. ……. 좀 자신이 없었다.
정태의는 대단히 기꺼운 얼굴로 주소며 연락처 따위를 메모하기 시작하는 카일에게, 은근하게 말머리를 들이밀었다.
“저기 그런데 말이지요…….”
“응? 뭔가?”
“일레이가 말이죠……. 예전에 좀 일이 있었을 때, 제가 달아나기라도 하면 죽여서 먹어 버리겠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구요…….”
메모지에 뭔가를 적어 넣던 카일은 펜을 멈추고 정태의를 올려다보았다.
정태의는 완벽하게 당당해질 수 없는 스스로를 안타깝게 여기며, 우물우물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연락도 없이 나갔다고 오해라도 사면 저는 뼈밖에 안 남을 거예요…….”
“아아, 알았어.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내가 따로 이야기를 잘 해 둘 테니까. 뭐……설마하니 자네가 그놈을 피해서 멀찍이 달아났다는 생각은 그놈도 절대로 하지 않을 테지만.”
정태의가 말하는 바를 곧 알아차린 카일은 흔쾌히 정태의의 목숨을 장담해 주었다.
비록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면 일말의 불안이 남기는 하지만, 그래도 카일이 저렇듯 장담을 해 준다면 다소의 위안은 되었다.
어찌 되었든, 최악의 경우라도 목숨은 건지겠지.
재의님재의님, 제게 행운 좀 나눠주세요, 중얼중얼 입속으로 읊조리는 정태의가 못내 안되어 보였는지, 카일은 좀 더 위안을 줄 셈인 양 정태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 걱정이라면 붙들어 매게나. 그놈에게 연락이 오면 나도 꼭 따로 말해 두겠어.”
“잘 부탁드려요. 안 그러면 저 죽어요…….”
말을 하다 보니 아련한 슬픔이 몰려왔지만, 정태의는 지금은 그 슬픔을 잊기로 했다.
설마 자신의 주장이 이런 식으로 이행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잠시 동안은 이 집에서 떠나 있어야 할 모양이다.
수배범의 처지에 팔자 좋게 돌아다녀도 되나 하는 걱정이 스쳤지만 그런 부분은 카일이 손을 써 줄 터였다.
이 집에서 며칠 넘도록 나가서 지낸 지 얼마나 지났더라.
큰 아쉬움이나 불편은 느끼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이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약간 들떴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다시 일레이에게 연락이 오면 좋을 텐데.
카일이 일레이에게 말을 잘 전해 주는 것과는 별개로, 험악하게 전화를 끊은 채로 한동안 연락이 단절되면, 아무래도 마음은 계속 찜찜하다. 하지만 어제의 전화도 두어 달 만에 갑작스레 걸려왔으니, 떠나기 전의 며칠 안에 다시 연락이 오기를 바라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번개처럼 메모지를 채워나간 카일은, 다 적은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그 종이를 뜯어 정태의에게 주었다.
“그럼 좀 급하지만, 준비가 되는 대로 출발해 주게나.”
오늘 당장이라도 준비만 되면 가서 책을 찾아다 달라는 기색이 완연한 카일의 기세에 눌려, 정태의는 ‘출발 전에 일레이의 연락을 받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없겠군.’ 하고 생각하며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아마도 그 골치 아픈 손님의 집 주소인 듯한 목적지가 길게 적혀 있었다.
동네나 길목 이름까지는 알 도리가 없어, 정태의는 드레스덴이라고 적힌 지명까지만 확인하고 쪽지를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