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새벽 어느 순간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한 비는 아침나절에 잠시 개는 듯했지만 오후에는 다시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고 내리는 비는 바람과 함께 몰아쳐, 창유리엔 빗방울이 끊임없이 후두둑 들러붙었다 흘러내렸다.
요 얼마간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기온이 떨어져, 봄이 거의 다 지나간 이 무렵에도 추울 지경이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또 하루이틀 정도는 춥겠다.
“오늘따라 유난하네…….”
안뜰로 이어진 거실의 유리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는 빗방울을 넋 놓고 바라보던 정태의는 문득 중얼거렸다. 며칠에 한 번씩 종종 비가 내리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거세다.
그러나 이것도 좋았다.
두꺼운 유리문의 바깥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이 안쪽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 없이 유리문을 일렁이며 흐리는 물살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세상이 물에 잠긴 것 같다.
그리고 그 아래 깊은 곳에서, 조용하고 나른하게, 정태의는 누워 있었다. 소파 뒤쪽으로 풍성하게 드리운 커튼 아래, 사람들 눈에 좀체 띄지 않는 곳에.
마침 화창했던 어제 빨아 보송하게 말려 놓았던 커튼에서는 희미하게 풋풋한 내음이 풍겨나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바삭바삭 기분 좋은 내음이다.
정태의가 곧잘 뒹굴거리는 곳이었다.
비록 이제는 집안사람들 가운데 정태의가 그곳에 즐겨 눕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 볕도 한가득 들어오고, 볕이 지나치다 싶으면 커튼을 당겨 그늘을 드리울 수도 있는 딱 좋은 자리였다.
처음에 리타에게 들켰을 때에는 그런 구석진 바닥에 누워 있지 말라고 두세 번 주의를 들었지만, 그 뒤로 그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 좁은 곳에서 몸을 구부리는 정태의의 모습을 한 번 목격하더니 나름대로 안쓰러웠는지 혹은 한심했는지,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실 소파 뒤 구석 자리는 정태의의 차지가 되었다.
만족스러웠다.
병아리처럼 폭신한 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유리문을 열어 두고 미미한 바람을 맞으며 커튼 그늘에서 짧은 낮잠을 청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혹은 지금처럼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 약간 서늘한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아련하게 들릴 듯 말 듯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았다.
가끔 서재나 제 방에 틀어박혀 뭔가를 하고 있던 일레이가 나와 소파에 앉아서 신문 따위를 넘기며, 모른 척 소파 너머로 팔을 늘어뜨려 정태의를 꾹꾹 눌러 대는 것만 아니면, 이 자리는 몹시 만족스러운 휴식 공간이었다.
“좋구나…….”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정태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딱 좋을 정도로 안정된 날’이었다.
화창한 날처럼 마음이 둥실거리지도 않았고 천둥번개가 휘몰아치는 불안스런 날도 아니다. 오늘따라 카일이 일찍 귀가한 터라 집에는 있어야 할 사람들이 모두 있어 빈자리가 없었다. 조급하게 해야 할 일도, 마음을 흐리는 사건이나 사고도 없었다.
“좋구나, 딱 좋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이렇게 팔자 좋은 더부살이가 또 있을까.
이제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더부살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이 집에서, 정태의는 태평하게 뒹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태의는 몇 년이나 이곳에서 이렇게 지내며 나날을 보냈다. 아주 가끔 맘먹고 휴가를 떠날 때가 아니면, 평소에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그나마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경계는 이 부근 얼마간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정태의는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국제수배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
이 집에 함께 머무르고 있는, 정작 악랄한 수배범은 오히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나다니곤 했다. 뭔지는 몰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간혹 제법 멀리까지 나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정태의는 세상사의 불공평을 느끼지만, 그 역시 그렇게까지 마음 상하는 일은 아니다. 원래부터가 집안에서만 있는다 해서 그렇게 답답해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카일이 도와달라며 떠넘기는 일거리들은, 카일의 숙련된 보조자 제임스 같은 사람은 반나절 만에 해치워 버리는 일이라도 정태의는 그 몇 배나 되는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카일의 회사는 나날이 번창하는지 그 일감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뻔뻔한 더부살이는 아니란 말야. 어쨌든 열심히 일을 돕고 있거든.
정태의는 어제도 밤늦게까지 처리해 오늘 아침에 제임스에게 건네어주었던 파일꾸러미를 떠올리며 뿌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때. 기나긴 인생, 한 몇 년쯤 감옥살이를 한들. 이렇게 안락하고 호사스러운 감옥이 또 어디 있을까. 보고 싶은 얼굴들을 보고 싶을 때에 만나러 가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바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아주 드물긴 해도 그 중 누군가가 정태의를 찾아와 줄 때도 있었다. ……2년 반 전에 와서 딱 하루 머물고 간 숙부라든가.
정태의는 ‘그러고 보니 슬슬 그쪽도 휴가철일 텐데, 이번에는 이쪽으로 안 오려나’ 하고 생각하며 몸을 뒤척였다. 뒤척였다고 해 봐야, 공간에서 몸을 약간 다른 방향으로 구겨넣었을 따름이었지만.
“고양이도 아니고.”
갑자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빗줄기가 물결무늬를 만드는 유리문 위에 그림자가 하나 희미하게 비쳤다.
고개만 비스듬히 돌리자, 점심 무렵부터 방에 틀어박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그 악랄한 수배범,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일레이 리그로우가 거기 있었다.
“보기만큼 그렇게 좁진 않아. 하긴 네가 눕기에는 좀……. 누울 수 있으면 누워 보든가.”
정태의는 자기 몸 하나 딱 붙일 그 공간에서 비척비척 몸을 뒤척여 자리를 좀 내어주는 시늉을 했다. 반 뼘도 채 안 될 그 구석진 자리로 무심한 시선이 말없이 내려왔다.
“…….”
“…….”
“그럼 어디 한 번 누워 볼―.”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무심한 얼굴 그대로 진짜로 누우려고 한 걸음 내딛는 일레이에게 정태의는 재빨리 말하며 얼른 몸을 원위치로 돌렸다.
애초에 정태의보다 키도 몸둘레도 훌쩍 큰 그가 혼자서 눕기도 빡빡할 공간이었다.
농담을 할 셈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말을 꺼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런 농담이 통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정태의가 잽싸게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깔고 누웠을 거다.
절대로 비켜 주지 않을 기세로 정태의가 드러눕자 일레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딱히 정태의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는지, 반시간쯤 전에 비닐로 포장되어 배달된 석간신문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흥미로운 소식은 있어?”
“별로.”
짤막한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정태의는 다시 몸을 굴려 바깥쪽을 향해 누웠다.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퍼붓고 있는 안뜰이 보였다. 바로 어제 페터가 곱게 다듬어 둔 키 작은 나무들이 안쓰럽다.
고풍스런 철창으로 낮게 담장을 두른 안뜰에서는 바깥 거리가 내다보였다. 한적하고 널찍한 주택가에서도 골목 깊숙이 위치한 이 집은 그 위치 때문에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안뜰이 보일 만한 곳까지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는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로 사람의 모습이라면, 두어 블록 떨어져 있는 저 앞의 조그만 교차로를 오가는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날씨 때문인지 길을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날엔 누구든 따뜻한 집 안에서 차를 마시고 싶을 거다.
“…….”
부침개라도 부쳐먹을까 싶지만 한두 시간만 더 있으면 저녁을 먹을 테니, 리타가 곱지 않게 쳐다볼 눈길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요전번에 공수해 두었던 동동주도 얼마 전에 다 떨어진 참이다. 부침개랑 맥주는 나쁘진 않지만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
정태의는 약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 즈음이었다.
담장 너머, 거리를 빈틈없이 적시고 있는 빗속에서 어른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저만치 골목 끝의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그 인영은 점차 가까워졌다.
까만 우산을 바싹 낮추어 쓰고 있어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는 훌쩍 키가 큰 남자였다. 세련되고 까만 양복에 까만 넥타이, 까만 구두. 아이보리색 드레스셔츠를 제외하면 온통 까만 복색인 그 남자는, 그럼에도 어둡거나 음산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렇듯 격렬한 폭우 속에서도 마치 산책이라도 즐기는 것처럼 여유롭게 걸어오는 발걸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구나.
정태의는 이유 없이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손님이 오는 모양인데.”
혼잣말처럼 불쑥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소파 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못 들은 듯이 팔락, 신문을 넘기는 소리만 대신 돌아왔을 뿐이다.
그때 거실 한쪽에 놓여 있는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느릿하게 추가 흔들리며 낯익은 소리가 천천히 다섯 번 울렸다.
그 느린 소리의 우웅, 하는 여운까지 모두 그쳤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부엌 쪽에서 리타가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경비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마도 그 손님은 곧 들어올 모양이었다.
손님이 왔으니 일어나는 편이 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태의는 계속 그 구석진 자리에 누운 채 미적거렸다.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지금은 딱 기분이 좋은 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집의 손님은 다른 집의 손님과는 달랐다. 워낙 매일같이 손님이라는 외부인이 들이닥쳐 머무르다 가는 게 일상생활이 된 집이라, 새삼스러운 마음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냐,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데 일어나야지.
정태의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막 배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얼굴 위로 신문이 날아왔다.
그새 석간을 다 읽었는지 일레이가 소파 뒤로 휙 집어던진 신문이 파스락거리며 얼굴을 덮었다.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종잇장이 훌훌 날려 머리에서 바닥까지 스르륵 미끄러지며 흩어졌다.
“뭐하자는―.”
“왔나?”
그러나 정태의가 부루퉁하게 불평을 늘어놓기 전에, 위층의 서재에서 카일이 내려오는 기척이 났다. 삐걱, 삐걱, 희미하게 나무 계단이 삐걱거린다.
그가 계단에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 1층에 내려섰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여전히 소파 뒤의 바닥에 신문을 덮고서 주저앉은 채, 정태의는 물씬 풍기는 비내음과 함께 들어온 그 남자를 보았다.
현관문 바깥쪽에 마련된 우산꽂이에 까만 우산을 꽂아넣고 들어온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일을 보았다. 뒤이어, 소파에 앉아 있는 일레이를.
담담했던 남자의 표정 위에 천천히 웃음기가 감돌았다. 눈매와 입가가 아주 약간 휘어진다. 그리고 그제야 정태의는 남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단단하다는 인상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차가운 돌처럼, 어디를 찔러도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갈 것 같다. 유일하게 조금 느슨해 보이는 것이 그 웃음 진 얼굴이었지만 그 역시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정태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카일의 친구나 그 외에 이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 가운데엔 저런 인간들이 가끔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녹록치 않겠다 싶은 인간.
저 남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다.
그래도 그나마 나은 거라면, 여태 보았던 다른 만만찮은 인간들에 비해 저 남자는 월등하게 인상이 좋았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나 걸맞을 법한 저 시커먼 복색도, 다른 사람이 입으면 음산해 보이기 십상인데 저 남자에게는 세련되고 멀끔하게 맞아들었다.
저런 심상찮은 분위기로 저렇게 인상이 좋기도 쉽지 않은데, 거참.
정태의는 감탄스럽기까지 한 심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비록 지금 정태의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는 화분이며 수석 따위로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정태의는 나갈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어서 오게. 오랜만이군. 빗길 오느라 힘들었겠어.”
“아닙니다. 비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서 일부러 저 앞 큰길가에 내려 걸어왔는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두 분 모두?”
“흠? 요 근래에는 비가 제법 자주 내렸던 것 같은데, 그쪽에는 비가 안 왔나?”
카일은 남자를 거실로 안내하며, 일레이가 앉아 있는 카우치에서 직각으로 놓여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는 그 건너편에 앉았다.
위치상 더 이상은 남자가 보이지 않게 된 정태의는 잠시 눈만 껌벅거리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두터운 소파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일레이와 등지고 앉아, 다시금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내다본다.
남자의 약간 느릿하고 독특한 말투에는 미묘하게 오스트리아 쪽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그 외모에 썩 잘 어울려 듣기 좋았다.
“독일 동쪽 구석이 그렇게 넓은지는 몰랐군. 이번 달 들어서 베를린에만 비가 네 차례 크게 쏟아졌는데 드레스덴에서는 비를 구경도 못했다……?”
일레이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하여간 고운 말 나오기 참 힘든 입이다.
정태의는 공연히 머리로 소파를 툭 두드렸다. 물론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 말마따나, 베를린에서 2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동안 한 번도 비 구경을 못했다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니, 3월부터 리야드에 있었거든. 며칠 전에 막 돌아온 참이지.”
남자는 일레이와도 아는 사이인 듯 편한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정태의는 하품을 하다가 입을 텁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린다.
리야드……. 그 뼈아픈 지명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바로 등 뒤에 앉은 남자가 국제수배 테러리스트로 승격되었던 사건이 발발한 곳이 거기 아니었던가.
“아하, 과연. 독일에 내린 비가 중동까지 가지는 않았을 테지.”
그러나 정작 테러범의 친형은 태연하게 말을 받으며 웃었고, 테러범 본인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리야드라. 그러고 보니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었지.”
카일이 새삼스러운 듯이 말하는 와중에 조그맣게 다기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약간 시간차를 두고 따뜻한 향기도 코끝을 스쳤다. 리타가 끓인 홍차다.
지금이라도 여기서 일어서서 리타한테 나도 한 잔 끓여 달라고 하면……관두자. 시선에 찔려 죽기 전에.
다들 동시에 차를 마시기라도 하는지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정태의는 아련한 홍차 향기만 한가득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때엔 카일에게 손님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일레이가 오늘은 어쩐 일로 그들과 차까지 함께 마시고 있다. 아니, 마시는지 아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니면 카일의 손님이 아니라 일레이의 손님인 건가.
그러나 정태의의 의문이 결론을 맺기도 전에, 누구의 손님이든 그 미적지근한 침묵을 깨뜨리며 일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승계 문제는?”
성가시니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남자는 그럼에도 어색한 빛은 보이지 않고 유유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정일까지 넉 달 조금 덜 남았어.”
“넉 달이라……. 이미 누가 될지는 결정이 난 것 같은데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뭐 그게 규정이니.”
약간 담담한 웃음이 섞인 이 목소리는 카일이다.
“글쎄요. 끝까지 가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남자의 목소리도 한결같이 담담하다.
그 공손하고 웃음 띤 말투에서 정태의는 이 알 수 없는 대화의 한 가닥만은 잡을 수 있었다.
뭔가 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남자는 우위에 있었다. 그것도 거의 절대적인.
원래부터 카일이 타인에게 호의 어린 말을 잘 하기는 하지만 그는 현실에 맞지 않는 과한 칭찬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분이 맡아 주실는지?”
이윽고 남자가 말했다.
아주 잠시,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 미묘한 침묵 속에서 정태의는 어쩐지 점점 나가기 힘들어졌다.
계속해서 이 구석자리에 있을 수도 없으니 적당히 틈 봐서 모른 척, 자다가 일어난 척 부스스 일어날까 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다. 이대로 앉아 있는 것도 왠지 뭐랄까, 꼭 엿듣는 기분이라서 그리 편치는 않은데.
……하긴 여기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걸, 적어도 이 뒷자리에 앉은 인간은 알고 있다. 그럼 그렇게까지 꺼림칙해할 필요는 없겠다.
정태의는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불쑥 튀어나가는 스스로를 상상하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묘한 정적이 흐르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두고두고 저 고운 말 나오기 힘든 입에 오르내릴 것 같았다.
“내가 하지.”
약간의 침묵 뒤에 선뜻 입을 연 사람은, 일레이였다.
“그쪽에서 개의치 않는다면 말이지만.”
일레이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카우치의 팔걸이를 톡, 톡, 손가락으로 느리게 두드렸다. 뭔가 생각에 잠겼을 때 흔히 그러듯.
살짝살짝 보이는 그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곁눈질하며 정태의는 한숨을 쉰다.
뭔가……이 단편적인 대화만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전개이지만 어찌 되었든 일레이는 뭔가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이렇게 순순히 다른 사람의 청을 들어주는 일은 대단히 보기 드물었다. 심지어는 ‘그쪽에서 개의치 않는다면 말이지만’이라는 친절한 말까지 덧붙이다니.
감개무량한 기분마저 든 정태의가 소파에 기대어 유리문에 연이어 새겨지는 물결무늬를 바라보는데, 그 유리에 비친 실내 모습 속에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그럼 잘 부탁하겠어.”
그리고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는 서슴없이 몸을 일으켰다. 일레이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그는 곧 카일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엉?
정태의는 유리문에 비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만 껌벅였다.
그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차 한 잔을 겨우 다 마실 만큼이 지났을 뿐이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이 몇 마디 가량을 나누고, 그는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무슨 보험설계사나 방문판매원이 왔다 가는 것보다 더 빠르다.
차라리 전화로 이야기를 하지, 거 참 희한하다……하고 정태의가 생각하는 사이에 남자는 현관 쪽으로 갔고, 그런 그의 태도에도 으레 그러리라고 생각한 듯 카일도 그를 배웅했다.
곧 현관 쪽에서 몇 마디 인사말이 들려왔고 그 뒤를 이어 달캉, 현관문이 닫혔다. 곧 있어 다시 유리문 너머, 안뜰 바깥쪽으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산을 써도 그 아래로 들이치는 거센 빗속을 유유히 걸어갔다. 담장을 따라 큰길 쪽을 향해 걸어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뭔가를 바라본다.
별 뜻 없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정태의도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가 보는 것은 담장을 따라 피어난 덩굴장미였다.
짙은 살구색과 선홍색이 섞인 꽃잎이 켜켜이 겹쳐진 그 작으면서도 화려한 장미송이들은 담장을 따라 자라나 있었다. 후둑후둑 몰아치는 비바람에 휘청이고 있다.
남자는 그 꽃송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는 그 조그맣고 화려한 꽃송이가 더없이 예쁘다는 듯, 눈가에 웃음이 진다.
꽃을 사랑하는 남자라. 그것도 낭만적이고 좋지.
정태의는 페터가 정성껏 심어 놓은 그 고운 꽃들을 즐기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듯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남자는 우산을 왼손에 바꿔쥐고 오른손으로 조심스레 꽃을 어루만졌다. 그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진다.
비 오는 날의 멋진 남자, 고운 장미, 따뜻한 손길, 그런 것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태의는 그 다음 순간 멈칫했다.
꽃잎을 쓰다듬던 남자의 손가락이 그 꽃잎을 짓뭉개고 있었다. 잔잔하게 웃음 띤 얼굴 그대로.
“……. 페터가…….”
페터가 마음 아파하겠다……, 당장은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태의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꽃잎 한 장을 짓눌러 배어나온 붉은 즙을 손가락으로 문지른 남자는, 귀엽다는 듯 꽃잎을 톡톡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입만 벌리고 있던 정태의는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서는 정태의를 보고, 현관에서 돌아오던 카일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거기 있었나?”
“아, 예. 일어서려고 했는데 좀 분위기가 그래서……, 친구분이랑 이야기하시는데 본의 아니게 엿들은 셈이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정태의는 카일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하지만 빈말로라도 그 남자를 만류하려고도 하지 않은 카일의 평소 같지 않은 태도를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저 남자는 카일의 친구가 아니라 사실은 은근히 사이가 나쁜데 사업 이야기를 하러 어쩔 수 없이 들렀을 뿐이라든가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인상은 참 좋았는데…….”
카일의 온건하고 건실한 친구라 해도 하등 손색이 없을 만큼 인상이 좋은 남자였다.
정태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그 앞의 소파에 앉아 있던 일레이가 흘낏 쳐다보았다.
“인상이 좋아? 조금 전 그놈이?”
“응, 좋던데. 조용조용한 말씨도 그렇고.”
“…….”
정태의는 자신이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일레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쳐다본 탓이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일레이는 나직이 혀를 찼다.
“그 중국 꼬맹이 때도 그랬고, 그 상변태를 두고 인상이 좋다라……, 이놈은 은근히 사람 보는 눈이 참…….”
생략된 뒷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문맥상 좋은 뜻이 아닐 것 같아서 정태의는 눈을 치켜뜨며 ‘내 사람 보는 눈이 뭘!’ 하고 외치려고 했지만, 이미 일레이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다시 팔걸이를 손끝으로 느리게 두드리면서.
상변태라니, 조금 전의 그 남자가? 아주 대단히 멀쩡하고 멀끔해 보이던데.
정태의는 몹시 미심쩍게 조금 전의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스치듯이 이 집을 찾았다가 떠나간 남자는 시종 예의바르고 다감했다. 어디 가서든 욕먹을 관상은 아니었다.
하긴 겉모습으로는 모르는 법이다. 지금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만 해도 꺼풀만 보자면 대단히 멀쩡하지 않은가.
정태의가 물끄러미 일레이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앞자리에 카일이 앉았다. 생각에 잠겨 팔걸이를 두드리는 일레이만큼이나 카일도 말이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 정태의는 제각기 생각에 잠긴 두 남자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나 보지. 카일의 친구인 줄 알았더니. ……일레이와 아는 사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 사이에 앉으며 정태의가 입을 뗐다. 생각에 잠겨 꼼짝도 하지 않는 자세 그대로, 일레이가 시선만 정태의에게 주었다.
“골치 아픈 손님이었어? 승계가 어쩌고 하더니. ……사우디에도 갔다 온 모양이고.”
정태의가 말을 잇자 일레이는 물끄러미 정태의를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 끝을 치켜올렸다.
“아하, 이젠 독일어도 제법 알아듣나 보지.”
응? 하고 되물으며 정태의는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아직 말하는 건 수월하지 않지만 듣기나 읽기 정도라면 그럭저럭. ……여기서 얼마를 지냈는데, 그 정도도 적응 못해서야 어쩌라고.”
“그래, 하긴 외국어에 둘러싸인 환경에서는 싫어도 능숙해질 수밖에 없겠지. 다만…….”
일레이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한 그 눈매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아, 정태의는 덩달아 눈매를 좁히며 입을 다물었다.
“집에선 다들 영어만 쓸 텐데,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유창한 것 같지 않아?”
그 미묘한 어투의 말을 듣고 정태의는 잠시 멍해졌다. 곧 눈썹을 치켜세우고 못마땅하게 그를 노려본다.
“갑자기 왜 안 하던 걸로 시비야. 내가 집에만 있나? 가끔은 근처에 산책도 나가잖아. 게다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모르는데, 당연히 독일어는 익혔지.”
“그래. 그럼 당분간은 나가지 마.”
“……. 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대화가 갑자기 딱 막혔다. 가, 나, 다, 라로 흘러가다가 갑자기 자가 튀어나온 느낌이다.
“뭐야, 그게.”
“한동안 나는 집에서 나가 있을 텐데, 그동안 집 잘 보고 있으란 뜻이지.”
“어? 어디 나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정작 파고들어야 할 건 ‘나가지 마’라는 부분이었는데, 정태의는 깜빡 앞말에 홀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레이는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라도 앞둔 듯, 무표정한 얼굴에 묘하게 빛이 감도는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톡, 톡, 기다란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아니 이놈은 얘기하다 말고…….
정태의는 손가락이라도 울려서 그의 주의를 끌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어차피 생각에 잠긴다고 해서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인간은 아니다.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도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지켜보고 있을 인간이었다.
즉 그 말은, 별로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내켜하지 않는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긴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보고하는 놈도 아니었다.
정태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앞날에 행운 있기를. 어지간한 불운은 저 흉흉한 손길 앞에서 다 달아나겠지만.
정태의는 시선을 돌려 바깥을 보았다. 비가 아주 조금 잦아든 듯도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갑자기 찾아왔다 갑자기 사라진 까만 옷의 손님이 남기고 간 흔적이 덩굴장미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