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애 딸린 유부녀한테도 따먹힘: 5화
몇 시간에 걸친 초호화 쇼핑.
“음, 이 드레스, 마음에 드네. 저거랑 세트로 사자. 검은색이랑 흰색이라... 왠지 대비되어 보여서 좋은 느낌이야. 우리 칼디르한테도 한 벌 입혀줘야지.”
“보석 목걸이 하나에 겨우 천억 달러? 이 매장은 형편없네.”
“역시 이 정도쯤은 되어야 나 같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지.”
“이 매장은 종업원들도 싹싹하고, 물건들도 모두 값어치 있는 것들뿐이네. 좋아. 마음에 들었어. 이 매장은 매장째로 사들이는 거로 할게.”
들르는 곳마다 단 하나의 물건이라도 한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아예 해당 매장을 통째로 사들이고, 단 하나라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버리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 이런 비싼 물건을... 정말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게 선물해주시는 겁니까? 저는... 일개 외국 군인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이런 건... 어울리지 않을...”
“이게 비싸다고? 겨우 이게? 하아, 칼디르. 장난치지 마. 이 정도면 결코 비싸지 않아. 그리고 비싸다고 하더라도 너처럼 예쁜 아이에게 줄 선물이라면, 나는 기꺼이 값을 치를 수 있어. 제발, 내가 주는 선물을 받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마. 나를 실망시킬 셈이야?”
“그,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칼디르는 등이 파이고 윗가슴 부위도 대놓고 드러내는 야릇한 디자인의 하얀색 드레스(아무리 살펴봐도 웨딩드레스처럼 보였다.), 여러 가지 빛깔의 보석 장신구들과 향수 등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인 옷(검은색 여성용 정장)을 입은 칼디르와는 다르게 한나는 백화점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공공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채로 사람들과 만나고 다니는데도, 매장 하나를 통째로 사들일 수 있는 구매력 덕분인지 딱히 터치하는 이가 없었다.
한나의 바로 옆을 바싹 붙어 다니면서 그 어떤 향수보다도 진한 향기를 곳곳에 뿌리고 다니는 칼디르의 존재를 생각하면, 당장에 여성 종업원들과 고객들은 죄다 이성을 잃고 이쪽으로 달려올 법도 한데...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터치를 하고 싶어도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한나를 목격하고는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같은 심정으로 그녀를 멀리 피해서 걸어가는 고객들도 보인다.
‘백화점 쪽에서도 변태 고객이라고 내치기에는... 그 뒤에 있는 카우디요가 너무 두렵기도 하겠지. 백화점 사장이라고 해봐야... 대주주님(테티스)이 채워주신 목줄에 꽉 묶여 있는 신세일 테고.’
대외적으로는 그저 패권국 실권자의 아내로 알려진 여자. 그러나 실상은 서큐버스에게 순결을 강탈당해 노예로 전락한 뒤에 잘난 남자를 하나 붙들어놓고 원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손에 넣고 보는 악녀.
칼디르는 그녀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는 동안 참으로 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또 지워버렸으나, 그러한 사실을 한나의 앞에서 털어놓지는 않았다.
입으로 뭔가를 내뱉기에는... 쇼핑이 취미도 아닌데 몇 시간씩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으려니 다리도 머리도 다 지쳐서 그럴 기운도 없었다. 과연. 귀부인 중에서도 쇼핑 시간이 유난히 길기로 소문이 난 한나다운 쇼핑 시간이다.
이 백화점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내 풍만한 엉덩이를 대놓고 주물럭거리면서 거기에 정신이 다 팔린 눈치를 보이길래, 평소보다 쇼핑 시간이 좀 줄어드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한나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하지도 않은 데다, 초능력으로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살펴보는 데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칼디르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었고, 한나와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이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넋 놓고 있다 보니 8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는데, 그쯤에서 한나가 쇼핑을 끝마치고 백화점 밖으로 나가려는 기미를 보이자 종업원들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가시는 걸 보니, 오늘 누가 실례라도 끼친 것이 아니냐. 기분이 나쁘셔서 이렇게 빠르게 돌아가시는 것 아니냐.’고 떠들어댄 것이다.
종업원들과 매점 사장들, 그리고 백화점 입장에서는 한나가 조금 괴상하고 피곤한 고객일지 몰라도, 일단 비위만 잘 맞춰주면 한 방 거하게 쏴주고 가는 최우수 고객이기도 할 텐데 확실히 평소보다 일찍 돌아서 버리면 자기네 수입도 그만큼 줄어들뿐더러, 뭔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기네가 뭐 잘못했나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한나의 쇼핑 습관도, 종업원들의 반응도 모두 칼디르가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 아득히 벗어난 것들뿐이었다.
이야... 이게 평소보다 짧게 끝난 거라고? 내가 여태까지 다른 공간에 임시 저장해둔 것만 해도 수 톤짜리 군용 트럭을 몇 대씩은 채우고도 남을 만큼인데... 역시 부자 나라 부자들의 사치는 거지 나라 부자들의 사치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나야 얼음이랑 눈밖에 없는 행성 칼디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까...’
그런 나의 머리로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이해하려 드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겠지. 아니, 어쩌면 나름대로 화려한 삶을 살아오셨을 공주님이 와셔 보셔도 이해하지 못하실 수도...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누군가가 읽어본다면, 아카식레코드 능력으로 이처럼 ‘진짜’ 부자들만 상대하는 사치품 판매장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법.
칼디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호화 쇼핑 타임을 거쳐, 한나 기준으로는 굉장히 생략된 해피 타임- 3시간 짜리 로맨스 영화 관람, 다 먹는 데 2시간 넘게 걸리는 코스 요리, 그에 못지않게 길었던 카페에서의 이야기 타임 등등- 내내 제 뜻과는 배치되더라도 한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말들만을 했다.
칼디르의 판단은 지극히 올바른 것이어서, 한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녀는 칼디르가 좋아하니 자기도 힘이 난다면서 휘발유를 동력원 삼아 돌아가는 구형 고급 스포츠카를 기사도 쓰지 않고 몇 시간이고 잘도 운전하면서 이곳저곳에 칼디르를 데려가서 재밌게 놀았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운명의 순간이 돌아왔다.
데이트에는 역시 빠질 수 없는 클라이맥스, 섹스 타임. 오늘 하루 동안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을 뿌리고 다니던 한나라면 7성급 호텔 같은 곳을 통째로 사들여서 거기에 칼디르를 데려가서 질펀하게 해댈 것 같았지만, 의외로 한나가 칼디르와 더불어 잘 지내기 위해 찾은 곳은 조금 후진 모텔이었다.
물론 이 ‘후지다’는 기준은 한나와 같은 ‘진짜’ 부자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나 그렇다는 것이고, 일반적인 서민의 감성을 가진 칼디르가 보기에는 그조차도 호화 스위트룸으로 보였다.
방 하나에 200평이나 되는 스위트룸이 ‘후진 모텔’이라니.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이제 한나가 데이트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소로 굳이 수도 행성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행성에 위치한 이 모텔을 선택한 이유를 한 번 들어보자.
“가끔은 서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생각해보고는 해. 그리고 오늘처럼 직접 둘러보고 다니기도 하지. 어떤 느낌이냐고? 서민들의 세계는 정말 놀랍더라. 몇 억 달러도 안 되는 값에 보석 장신구를 주고 사면서 그걸 ‘사치품’이라고 부르던데...”
아, 아니요... ‘진짜’ 서민들은 이런 곳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서민 출신 칼디르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으나, 겨우 삼키는 데 성공했다.
“언젠가는 서민들이 해피 타임을 보내기 위해 애용한다는 모텔을 이용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에야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된 거야.”
저기요... 아무래도 ‘서민’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 여기까지 온 이상 더 망설일 이유가 뭐 있겠니? 어서 벗어. 설마... 그 야릇한 몸을 가지고 여기가 뭘 하는 장소인지 모른다는 식으로 말할 건 아니지...?”
무, 물론... 여기가 무엇을 위해 준비된 장소인지는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저돌적으로 달려오시면... 흡, 흐읍...
한나는 칼디르더러 알아서 옷을 벗으라는 식으로 말해놓고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넥타이조차 다 풀어헤치지 못한 칼디르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그녀의 손을 강하게 짓눌러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기나긴 데이트 타임 동안 알게 모르게 칼디르의 가슴과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를 매만지며 성욕을 충족해왔다고는 하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빌드업을 쌓아오느라고 섹스를 참 길게도 참아왔을 텐데 고작 그런 거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머... 나는 그래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네가 최소한 저항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내 눈을 피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구나...?”
“읏... 어, 어차피... 제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하실 거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일은 많이 겪어보기도 해서...”
“강제로 덮쳐진 적이 많다고 어필하는 거야? 요망한 것... 자, 눈감아. 키스해줄게.”
칼디르가 그녀의 ‘명령’에 따라 눈을 꼭 감자, 한나가 농염한 빨간색 입술을 그녀의 분홍색 입술에 살짝 가져다 대는 듯하더니 곧이어 추잡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 우움... 츕, 츕, 쯉, 쭈우웁...
한나는 애까지 낳은 유부녀답게 매우 현란한 키스 테크닉을 선보였는데, 그녀의 기술은 섹스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서큐버스의 피를 타고 태어나 칼디르와 함께 숱한 단련을 거듭한 아틀란티아 공주님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했다.
“하아앙... 왜, 왜 이렇게... 키스를 잘하시는 건가요... 가, 가볍게... 가버리고 말았... 하으아앗...♥”
한나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키스를 끝내고 입술을 떼주자... 칼디르는 자기가 한 말대로 키스만으로 가볍게 가버린 모양인지, 완전히 풀어진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한나에게 보여주고 말았다.
“그렇게 약한 모습을 나한테 보여주면... 정말이지, 잔뜩 예뻐해 주고 싶어지잖아.”
한나의 입술이 다시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