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사악한 동맹의 가능성: 4화(END)
테티스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칼디르가 깽판을 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하며, 그녀가 값을 더 올려 부른다고 해도 그 값을 순순히 치를 용의가 있었다. 사실 아틀란티스 제국의 수십 년 치 예산이라고 해봐야 테티스가 가진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기도 했고.
‘사실 칼디르가 자기 멋대로 날뛰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 와중에 우리나라와 내 재산이 휘말려 피해를 입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 혹여나 내게 이익이 된다면야 오히려 칼디르가 날뛰는 것을 지원할 뜻이 있다만... 아직은 잘 모르겠단 말이지.’
테티스가 시가를 천천히 태우며 그 특유의 향취를 음미하는 사이, 칼디르는 짐짓 고민하는 체하다가 궐련 담배를 책상 위의 재떨이에 비벼서 끄며 우선은 거절하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카우디요께서 저를 긍정적으로 보고 계신다는 점은 알겠지만, 저는 아직 ‘총통’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을뿐더러... 일개 군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가 간에 어떠한 약속을 맺는 일을 주선하거나,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주거니 받거니 할 처지가 못 된다, 이 말씀입니다.”
“역시.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거절할 줄 알았소. 총통께서 첫 번째 제안을 좋다고 냉큼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이런 제안은 어떻겠소?”
테티스는 기존의 제안을 고치기를, 국가를 운영하면서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자금을 이자도 없고 되갚을 필요도 없는 완전 무상원조 형태로 내어주는 동시에 아틀란티스 영내에 카테스 제국군을 증파하고 아틀란티스에 명백히 유리한 조건으로 여러 가지 계약을 맺어 칼디르에게 외교적인 공훈을 안겨주겠노라고 했다.
외교적인 공훈은 칼디르가 장차 정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기성 외교관들이 죽을 쑤는 사이, 칼디르는 엄청난 액수의 무상원조를 땡겨 오는 동시에 대규모 지원군과 우리 측에 유리한 계약을 선물로 가져왔다...!
현 세계의 패권국이 칼디르를 이토록 대놓고 지원한다면 아틀란티스 내부의 반 칼디르파 세력에게도 분명한 메시지가 될 터였다. 원래부터 그녀를 좋게 보던 이들이야 그녀에 대한 평가를 더더욱 높여줄 것이고.
테티스는 칼디르가 언급한 대로 현재의 그녀는 ‘총통’이기는커녕 외교관조차 아님을 선선히 인정하면서도, 때마침 그녀가 국가 간의 약속을 공식화할 만한 권한을 가진 케인스와 함께 왔으니만큼 형식상 그를 끼워 넣으면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을 거라는 논리를 펴며 그녀를 설득했다.
“...어쩔 수 없군요. 카우디요께서 이토록 우리나라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이상, 마냥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잘 생각하셨소, 총통. 이는 양국의 이익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칼디르는 몇 번 곤란한 척하다가도 테티스가 내던진 떡밥을 덥썩 물었다.
그의 제안을 좀 더 노골적으로 묘사하자면, ‘너랑 내가 똑같은 타브급 초능력자인 건 인정하겠는데, 아무튼 내가 차지한 일인자 자리를 넘볼 생각은 하지 말고 이인자 정도로 만족한다면 내가 너를 팍팍 밀어주겠다.’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제안은 명백히 칼디르 개인에게나, 그녀의 조국 아틀란티스에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선보인 ‘최소한의 성의’는 워커 사령관이 책임지고 총통의 국가로 운송해줄 것이니, 총통께서 걱정하실 것은 없소. 후... 이것으로 오늘 우리가 만난 목적은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구려... 으음, 나는 총통께서 이 조약문의 빈자리에 서명하게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하오.”
테티스는 그 자신의 이권을 해칠 우려가 있는 또 다른 타브급 초능력자, 칼디르의 탄생을 막을 수 없다면 그녀를 아군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 속이 후련해졌는지, 시가의 연기를 허파 깊숙한 곳까지 쑤셔 넣었다가 다시 내뱉으며 크게 숨을 쉬었다.
칼디르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한편으로 그가 꺼내 든 조약문 형태의 문건을 넘겨받았다. 해당 문건의 최하단부에는 ‘카테스 제국의 황제, 카테스 26세’, 그리고 ‘카테스 제국의 카우디요, 테티스 유니온 워싱턴’이라는 서명이 깃든 가운데 빈칸이 하나 마련되어 있었다.
그 빈칸은 바로 칼디르를 위한 서명란이었으나, 그 서명란에 ‘아틀란티스 국의 총통, 칼디르 아스트라’라는 서명이 들어가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할 것이었다. 뭐... 지금의 내게 조약을 선뜻 체결할 권한은 없다지만, 그냥 글귀를 읽어만 보는 건 상관없는 부분 인정하냐?
테티스가 제시한 조약문에는 대강 이러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현실의 한미동맹이나 나토가 연상될 법한 상호방위조약, 테티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제시한 것보다 더욱 거대한 규모의 지원과 투자, ‘완전한 타임머신’ 같은 위험한 전략무기는 서로 개발도 하지 말고 배치하지도 말 것 등등...
으음, 해당 문건에 기재된 내용은 아무리 봐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흔하게 맺고 다니는 불평등조약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두 국가가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서 맺는 조약. 솔직히 양국의 국력 차이를 고려하면 오히려 카테스 제국에 손해가 된다고 할 수 있는 조약이었다.
아틀란티스가 양보해야 할 사항이라고 해봐야 ‘서로 안 만들면 그만’일 타임머신의 개발 금지(‘완전한’ 타임머신의 개발만 금지했으니까, ‘불완전한’ 타임머신의 개발이나 ‘완전한’ 타임머신의 개념 구상은 대놓고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실효 지배해본 적 없는 센트럴랜드(우리 은하 중심부) 등에 대한 영유권 주장 철회 정도뿐이었다.
테티스가 제시한 조약문은 칼디르에게는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 정도로 유리한 조약을 이 자리에서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금으로써는 다른 누구에게 이 공훈을 자랑할 수도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뭐, 워커 사령관이 책임지고 운송해주겠다고 한 자금의 액수나 오늘 이 자리에서 받아낼 수 있었던 다른 것들만 따져도 국내 정치계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 정도는 되니까, 아쉬움은 접어두고 조약문을 고스란히 책상 위에 놓아둔다.
“잘 봤습니다. 언젠가 이 조약문의 공란에 서명을 새겨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지위에 앉아서 다시 카우디요를 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거야 나 또한 원하는 바요, 총통. 총통도 알고 있다시피, 현재 아틀란티스의 혼란상은 평범한 이들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것이오. 오직 총통과 같은 선택 받은 이들만이 통제할 수 있는 혼란이란 말이지. 아틀란티스의 국민들도 현재의 혼란상을 잠재워줄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테니, 부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오.”
테티스가 겉으로 하는 말만 들어서는 칼디르에게 거는 기대가 그녀 스스로 거는 기대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이제 일대일 대담을 끝내고 뒤돌아서려는 그녀를 잠깐 멈춰 세우고 지나가는 투로 덧붙인 말만 들어봐도 그랬다.
“아, 그러고 보니... 총통께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로 한 시기가 참으로 절묘한 것 같단 말이오. 올해나... 늦어도 아마 내년쯤에는 세 번째 타브급 초능력자가 총통과 같은 아틀란티스에서 나타날 텐데, 부디 그녀가 폭주하는 일이 없도록 총통께서 잘 통제해주시기를 바라오.”
“그에 관해서는 저 또한 알고 있으니, 카우디요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녀가 귀국에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총통의 말씀을 들으니 더더욱 안심이 되는구려... 으음, 내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랫동안 붙들어놓은 것 같아서 미안해지는데... 이만 가보셔도 좋소이다. 밖에 나가시면 워커 사령관과... 아틀란티스에서 총통보다 먼저 건너온 손님이 한 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칼디르 역시 지나가는 투로 그의 말에 어울려주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나섰다. 테티스는 딱 방문 앞까지 배웅해주었고,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자기 일을 했다. 방문 바깥에는 앞으로 테티스를 대변하여 칼디르를 지원할 워커... 그리고 칼디르처럼 아틀란티스 제국에서 건너온 여자 손님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아, 총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제국에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귀국에 머무르며 총통을 지원할 것입니다.”
워커의 말만 들어도 저절로 속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같은 아틀란티스 인끼리 대화라도 나누라는 뜻에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덕분에 칼디르는 제 손으로 만든 고오급 인공지능 플랑처럼 찰랑이는 은색 장발에, 은색 눈동자와 오렌지색 눈동자라는 조합의 오드아이, 자기보다는 작지만 아주 무시해버릴 수는 없는 풍만함이 깃든 C컵 가슴을 가진 고풍스러운 아가씨와 단둘이 서 있을 수 있게 됐다.
칼디르는 이 아가씨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르민 데이지 아포네. 검은색 정장과 넥타이가 아주 잘 어울리는 이 중소 귀족 가문 출신의 아가씨는 자신에게는 띠동갑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이가 27살이라는 소리다.
‘대학 진학률이 소수점 수준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여성 박사 학위 소유자... 그리고 부총통님과 동일한 등급의 초능력자. 원래대로라면 부총통님과 함께 지구에서 뵈어야 했을 분이지만, 중간에 공주님이랑 슈가와 함께 노느라고 시간을 너무 소비해버리는 바람에...’
칼디르가 끈적한 레즈비언 보빔 섹스에 너무 몰두하지만 않았어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진작에 저 멀리 지구에서 이루어졌겠지만, 아무튼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조국이 아닌 낯선 외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칼디르가 같은 여자들에게 신나게 보지를 따먹히는 사이에 아틀란티스 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여성 박사 학위 소유자라는 타이틀답게도 세계정세를 읽는 눈이 좀 있던 아르민이 견문을 넓히는 목적으로 평소 선망해온 카테스 제국에 건너와 버린 바람에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매우 어색하게 이루어졌다.
‘...어떻게 한다지... 너무 면목이 없어서 기껏 단둘이 남아놓고도 아무 말도 못 하겠는데, 그냥 뒤돌아서버릴까...’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잊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서 공주님의 앞에 오늘 세운 공훈을 말씀드리고 ‘포상’을 받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 공주님께 ‘포상’을 받는 일은 없었다. 칼디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굉장히 불안해하던 아르민이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만 칼디르의 아랫배에 배빵을 쳐서 기절시켜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