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사악한 동맹의 가능성: 3화
했고, 그러한 감정을 자기보다 한참 나중에야 태어난 칼디르와 결부시켰다.
테티스 역시 칼디르와 같은 예지 능력자로서 그녀의 출생을 예견한 바 있었고, 그녀가 실제로 태어났을 때는 그 존재를 단박에 파악하기도 했다. 자신과 같은 타브급 초능력자, 칼디르가 진짜로 세상 밖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테티스가 느낀 감정은... 기쁨...? 경악...? 그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인 오묘한 무엇인가였다.
칼디르의 출생을 계기로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이는 드디어 자신과 이야기가 통할 만한 사람이 태어난 것에 대한 ‘기쁨’일 테고, ‘경악’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처럼 강력한 초능력자가 한 명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일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뭐, 내가 영영 내가 가진 힘을 감추고 살기로 작정했다면,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올라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기껏 해봐야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기업을 더 크게 번창시켜 국제정세를 배후에서 주무르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오.”
천애고아, 신분제 사회 속의 평민,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초능력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칼디르와는 다르게 사실 테티스는 초능력을 빼더라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 칼디르한테는 섹스와 임신에 최적화된 몸뚱아리도 있던가?)
테티스로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바탕으로 무대의 뒤에서 국제정세를 멋대로 조종하는 역할 역시 매력적이었겠지만, 패권국의 실권자로 떠오른 오늘날의 그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것은 사실.
그는 마침내 힘을 감추고 평범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어 가 평화롭게 살아가기로 했던 결심을 깨버리고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오늘날과 같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게 해준 ‘그 사건’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총통께서도 알고 있다시피 인류가 우주 곳곳에 뻗쳐 나간 지는 오래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유대인은 어디서나 미움받는 존재라고 할 수 있소. 자신들을 ‘국가사회주의의 진정한 후예’라고 주장하는 과거의 망령이 고개를 쳐드는 순간,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소. 침묵하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
테티스를 ‘힘숨찐’에서 ‘패권국의 실권자’로 탈바꿈시켜준 ‘그 사건’이란, 나치즘을 앞세운 ‘대 게르만국’이 수많은 은하계를 장악하고 ‘유대인 문제에 관한 최종 해결책’을 실햄에 옮긴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 우주적인 혼란 속에서 유대인 세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테티스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나치즘을 숭상하는 망령들의 표적이 되었으나 그가 가진 힘이 그의 육신을 지켜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실 사태가 여기에서 그쳤다면 테티스가 영영 자신의 힘을 개방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어릴 적의 테티스는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어차피 자기는 타브급 초능력자라 잡혀 죽을 일도 없겠다 나머지 유대인이 죽어 나가는 건 남의 일로 치부해버린 탓도 있었다.
‘유대인끼리는 뭉쳐 살아야 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오히려 이번 사태를 통해 나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이 모두 죽어준다면, 나로서는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기반을 닦는 셈이 될 것이다.’
아니, 그는 동족 유대인들의 죽음을 그저 지켜만 보는 데서 더 나아가, 일련의 사건을 ‘차도살인’이라고 평가하며 이유를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인간은 자기처럼 강력한 초능력자라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수많은 생명을 살상할 수 있는, 참으로 위대한 종족이구나...하는 점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 파시즘의 광기가 만들어낸 전 우주적인 혼란, 유대인 학살극을 인상 깊게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와 같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식의 전체주의적인 사고관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그는 나치즘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크게 싫지는 않았고, 때문에 칼디르가 파시즘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나 그녀의 꼬붕(?)이라는 범혁이 골수 나치를 자처하는 것에 대해 이렇다고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나치의 후예를 주장하던 ‘대 게르만국’이 전 우주적인 유대인 학살극을 벌이다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려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던 사자를 자극하고야 말았으니, 바로 테티스의 약혼녀인 한나를 ‘유대인과 통혼한 혐의’로 붙잡아 수용소에 가두어버린 것이었다.
동족 유대인이 떼로 죽어 나가는 광경은 무덤덤하게 관망하던 테티스는 자신이 방심하던 사이 약혼녀가 잡혀간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힘을 개방해버렸는데, 그날 밤 테티스의 손에 의해 우리 은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은하들이 동시에 몇 번이고 멸망하고 복원되고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무엄하게도’ 그의 약혼녀를 잡아가둔 ‘대 게르만국’과 그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인 ‘추축 동맹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이었으며, 그들은 기껏 한나를 가둔 보람도 없이 테티스가 한나를 데리고 불타오르는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만 했다.
당시 추축 동맹국은 제대로 된 전투 훈련도 받지 않은 초능력자- 테티스- 단 한 명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처절하게 밀려났으며, 그들이 가진 그 어떠한 무기로도 테티스에게 통렬한 반격을 날려주기는커녕 생채기 하나조차 낼 수 없었다.
그날, 테티스는 추축 동맹국에 소속된 모든 국가를 완전히, 영구히 멸망시킬 수 있음에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자비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단 철천지원수의 목숨줄은 붙여놓고 두고두고 괴롭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추축 동맹국을 홑몸으로 신나게 두들겨 패준 다음에는 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많은 은하계가 개판이 나 있길래 그걸 자기 손으로 어떻게든 정리해놓고 허수아비로 세워놓을 만한 호구 하나를 어디서 하나 섭외해와서 우리 은하 중심부의 퀘이사에 도읍하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카테스 제국이었다.
지금의 테티스는 자신과 말이 통할 만한 칼디르의 존재를 반기는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는 자기가 벌여놓은 짓거리가 있으니만큼, 자신과 엇비슷한 수준의 초능력자인 칼디르가 다시금 전 우주를 뜨겁게 불태울 사달을 내지는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 은하계고, 저 은하계고... 화난 김에 모조리 쓸어버리는 거, 혼돈의 시대에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할 법한 짓거리일지는 몰라도... 이성을 되찾은 상태에서 그 짓거리를 제삼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마에서 저절로 식은땀이 솟아났다.
그때 내가 싸질러놓은 똥을 내 손으로 치우고 그나마 그때보다는 안정된 국제정세를 구축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칼디르가 나와 손을 잡기를 거부하고 깽판을 치고 다니면 좀 많이 슬플 것 같다.
...여기까지, 수십 년 전 과거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에 관한 이야기를 끝마친 테티스가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시가에 불을 붙이며 본론을 말했다.
“총통,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카테스와 아틀란티스 사이에 동맹 조약을 체결합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쉽게 말하면 이런 이야기다. 나와 엇비슷한 수준의 초능력자인 네가 깽판을 치고 다니면 나로서도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막아낼 수 있다 해도 공연히 피해를 입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 나와 함께 손을 잡자.
“흐음, 카우디요의 이야기는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부탁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겠다니, 제가 무엇을 요구할지 아시고 그런 말씀을 내뱉으시는 겁니까?”
“총통의 조국인 아틀란티스의 번영과 안정, 大 아틀란티스의 회복과 지난날 원한을 진 연합국에 대한 보복, 이를 위한 카테스 제국과의 동맹 조약 체결 내지는 최소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할 것... 어디, 내 말이 틀리오?”
바로 `YES`나 ‘NO’라고 하는 대신 말꼬리를 빙빙 돌리는 칼디르를 향해 테티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칼디르는 그의 날카로운 말에 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조국의 번영을 목표로 하는 그녀로서도 테티스와 척을 져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단 게 사실이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이런, 내가 실수를... 최우방국의 지도자가 되실 분께 이번 거래의 대가도 제시하지 않고... 내 경황이 없었구려. 부디 용서해주시오, 총통. 그... 일단은... 이 자리에서 장차 동맹이 될 사이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겠소이다.”
테티스는 그 자리에서 아틀란티스 제국 한해 예산의 수십 배는 될 만한 돈을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 여태까지 상대해온 그 어떤 적보다도 골치 아픈 상대가 될 칼디르와 동맹을 맺기 위한 ‘최소한도’의 대가로 제시하였다. 그것도 현찰 박치기로.
전 우주적인 기축통화이자 절대적인 신용도를 자랑하는 화폐인 카테스 제국 달러. 연금술을 부려 그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칼디르조차 만들어낼 수 없는 바로 그 물건. 테티스와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이 아니라면 만들려는 시도조차 해서도 안 되는 바로 그 물건.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으나,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필요한 물건. 칼디르는 자신의 눈앞에서 바로 그것이 어른거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