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사악한 동맹의 가능성: 2화
테티스와 엇비슷하게 강력한 초능력자인 칼디르가 멱살 잡고 캐리한다고 해도 아틀란티스가 저 혼자서 세계 GDP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카테스 제국을 따라잡기까지는 어마어마한 세월이 걸릴 테지만, 이 나라에 벌써 10여 년 이상 머무른 외국인으로서 이와 같은 변화를 포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저번에 했던 말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 칼디르라는 자가 가진 기술이라면... 이 나라가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수백 년은커녕 수십 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십수 년 내로 모든 피해를 복구할 수 있겠지.
오늘날 카테스 제국이 세계 기술의 선도국이라 여겨질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는 데는 희대의 천재 테티스의 공이 지대했는데, 워커의 눈썰미로 보기에 칼디르가 가진 것은 바로 그 테티스가 가진 것과 비교했을 때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
칼디르에 관해서 그 혼자서만 이러한 판단을 내렸다면 또 모르되, 그녀에 대해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서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었다: 아틀란티스 고위층 역시 워커와 마찬가지로 칼디르에게 높은 점수를 매기고 있었던 것.
‘그동안은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찍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는데, 올해는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기대할 수 있을 것’, 인민정부의 이인자라는 케인스가 칼디르에 대해 내린 이 짧디짧은 평가가 그녀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었다. 칼디르를 향한 아틀란티스 현지인들의 긍정적인 평가는 그녀를 알아보려는 워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나 역시 케인스 장관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아틀란티스 정부가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칼디르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면 한 해 50% 이상의 성장률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칼디르는 아틀란티스 고위층으로부터 두루두루 높은 평가를 받으며 그 나이에 벌써 사령관이나 차관 등등 여러 직책을 겸직하는 등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틀란티스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여왔던 여러 가지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해 보임으로서 서서히 지지층을 키워나가기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친 칼디르 파벌보다는 반 칼디르 파벌의 세력이 훨씬 터 크다지만, 현재의 친 칼디르 파벌은 세력의 규모가 적은 만큼 오히려 자기네끼리 더더욱 단단히 뭉치는 경향을 보였다. 그 나이에 조그마하게나마 일개 파벌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했다. 칼디르에 관해 주목할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는데...
“제가 가진 기술에 관해서 특허를 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까? 기술이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활용되는 것이 마땅하며, 애초에 제가 가진 모든 지식은 저의 노력으로 인해 축적된 것이 아니라 단지 운 좋게 아카식레코드라는 능력을 타고 태어난 덕분에 알게 된 것이니 애초부터 저만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칼디르가 아틀란티스 정부에 매일 같이 놀라운 기술과 정보를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것에 관해 의문을 가진 이들이 질문을 던졌을 때, 칼디르가 내놨다는 대답이었다. 이러니까 고위층 사이에서의 평판이 높을 수밖에 없기는 할 것이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면서, 혹여나 정부를 위해 봉사한 대가를 받게 되더라도 그것을 개인적으로 쓰기보다는 참전용사들이나 가난한 시민들에게 기부하는 등의 선한 행보를 보이니, 대대손손 평생 먹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을 가지고도 단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고 드는 귀족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어 그녀의 존재가 더더욱 부각되어 보이는 효과마저 있었다.
‘15살의 나이에 벌써 대선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인 행보를 밟아나가고 있다니, 과연 카우디요께서 눈여겨볼 만한 사람이로군.’
만일 칼디르가 먼 훗날 대선을 치를 적에 갑자기 그러한 기부 활동을 벌였을 경우, 정적으로부터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겠지만... 지금부터 꾸준히 그러한 기부 활동을 펼쳐나간다면 그 누구도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때부터 꾸준히 기부를 해왔다는 사실이 부각되어 대선 출마 시에 이점으로 작용할 터.
설마하니 15살짜리가 그런 정치적인 행보를 밟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상상한 적이 없었던 워커는 그녀의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워커는 칼디르가 정치적 행보를 밟아나가는 사이, 제재앙... 아니, 제임스 등 기성 정치가들은 자기네의 특권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드는 모습에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네처럼 지체 높은 귀족은 칼디르 같은 미천한 평민과 똑같아질 수는 없다고 굳게 믿고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보수적인 가부장제 문화를 믿고 있는 건가? 쯧쯧... 일반 국민들이야 지도자가 정치를 잘해서 자기네를 배불리 먹여주기만 하면 그게 100살 넘은 노친네든, 20살도 안 된 미소녀든 별로 상관하지 않는 법이거늘...
하지만 칼디르가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인 행보를 밟아나가고 있다고 해도 가까운 미래에 치러지게 될 초대 대선에 후보로 나서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것도 사실. 워커는 일단 그녀를 신정권의 지도자로 보기보다는 한 명의 고위 참모로 간주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녀가 지금 고위 참모의 자격으로 벌이는 일만 보더라도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워커는 반대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OKW에 제출한 비스마르크 대공세 계획의 수정 작전안은 결국 그대로 채택되리라 전망하였다.
‘칼디르의 수정 작전안이 그대로 채택된다면, 이는 비스마르크 대공세 계획이라고 불러주기보다는 칼디르 대공세 계획이라고 불러줘야 할 정도의 대변혁이겠지만...’
칼디르와 본격적으로 손을 잡기에 앞서서 굳이 마음에 걸리는 점을 언급한다면, 그녀가 세계적으로 배척받는 동성애 성향에 마조히스트 끼까지 지니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우리 유대인이 언제부터 투자를 통해 얻게 될 이익보다 그런 ‘사소한’ 결점을 우선시했나 싶기도 하고...
“세계인들은 말하지. 우리 유대인은 값만 비싸게 쳐준다면 악마에게 제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작자들이라고. 그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악마들 따위가 이몸 어르신께서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핵심은, 우리에게 확실히 이익이 될 만한 자라면 그가 어떠한 형태의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네.”
워커는 칼디르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직접 만나보기보다는, 자체 첩보망을 가동하여 그녀에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아틀란티스 고위층을 통해 소식을 건네받는 식으로 그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온 바 있었다.
하지만 ‘카우디요’ 테티스로부터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하라는 취지의 지침이 떨어진 이상, 워커는 더 망설이지 않고 이쯤에서 그녀에게 힘을 실어줄 겸 테티스가 직접 작성하여 보내준 초청장을 꺼내 보이기로 했다.
그것도 바로 아틀라인 1세, 케인스를 비롯한 아틀란티스 고위층이 전부 모여 칼디르가 제출한 수정 작전안에 관해 논의하던 자리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잠자코 관찰하던 와중에.
“케인스 장관님, 귀국에 요청할 사항이 한 가지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아, 워커 사령관. 그대가 요청하는 사항이라면야... 귀국이 그동안 우리나라를 위해 도와준 것을 생각한다면... 그 무엇이든지 들어줄 수 있소이다. 무엇을 원하시오?”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국제정세에 관해서는 해박한 케인스는 신나게 말하다가 워커에게 말을 걸려 하던 말이 끊긴 상황에서도 해맑은 영업용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대답했다. 워커 역시 케인스의 속내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이를 모른 척하면서 자기 할 말을 했다.
“아틀란티스 파견 카테스 제국 의용군 사령관 겸 주 아틀란티스 카테스 제국 임시 대사의 자격으로 칼디르 사령관을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워커가 꺼내 보인 초청장에는 과연, ‘칼디르 아스트라’를 대놓고 지명하여 방문을 권유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고... 맨 밑에는 카테스 제국의 실권자인 테티스, 그리고 명목상 최고 지도자인 카테스 26세 황제의 서명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테티스쯤 되는 사람이 칼디르 한 명만 초청하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아틀란티스 외교부의 수장인 케인스 등등을 초청 대상으로 포함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품은 뜻을 고려하면 사실상 칼디르가 주객이고 나머지는 다 쩌리라고 보는 게 맞았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중학생 2학년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 소녀를 눈여겨보다가(그것도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백악관으로 초청하는 격의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이들을 모두 물리고 패권국의 지도자와 일대일로 면담할 엄청난 기회. 칼디르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다.
이번 초청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케인스로서는 이를 거부할 만한 명분도 없었고, 오래간만에 양국의 고위층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뭔가를 받아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역시 없지 않아서 워커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카우디요의 초청장이라니... 수락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케인스의 출석 요구를 받고 아틀란티아 공주님에게 시달리다가 급하게 란제리 속옷 위에 제복을 껴입고서 달려온 주객 칼디르(본체)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전까지는 테티스와 대면하기에는 ‘끕’이 맞지 않아서 만나러 가고 싶어도 가기가 뭐했는데, 이제는 정부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하기도 했겠다... 슬슬 둘이서 만날 때가 되긴 했지.
그 길로 수정 작전안에 관해 논의하던 자리는 얼떨결에 양국의 고위급 회담을 준비하는 자리로 바뀌게 되었고, 원활한 합의를 거쳐 얼마 후에 곧 카테스 제국을 향해 케인스 이하 아틀란티스 인민 정부의 고위층이 탑승한 수송함이 닻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자네 나이에 카우디요와 일대일로 면담할 기회를 얻게 되다니... 카우디요 역시 자네를 주목하고 있나 보구만. 카우디요가 자네와 단둘이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국을 위해 부디 면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와주게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위원장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틀란티스 고위층 일행은 카테스 제국의 황궁 앞에 도달하자마자 두 갈래로 갈라서서 각자 갈 길을 갔는데, 칼디르는 곧장 테티스가 기다리는 카테스 제국 기사단 사령부 건물로 향했고 그녀를 제외한 일행은 외교부 건물로 걸어갔다. 표면적으로는 케인스 일행 쪽이 아틀란티스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실속을 따져보면 칼디르 쪽이 ‘진짜’라고 할 수 있었다.
“어서오시오, 총통. 그동안 여기서 기다리느라고 숨넘어가는 줄 알았소. 하지만... 이렇게 같은 타브급 초능력자끼리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니, 기쁨을 금할 수 없구려.”
테티스는 칼디르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대놓고 ‘총통’이라고 불러주면서 역사적인 첫마디를 건넸다. 현재 아틀란티스의 정통성 있는 지도자로서 아틀라인 1세가 엄연히 생존 중이니만큼 그의 발언은 부적절했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도 없겠다 눈치를 볼 이유는 없다는 심정인 것 같았다.
칼디르는 일단 ‘총통’ 어쩌고 하는 부분은 건너뛰고,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첫 번째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