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10화(END)
특수 장비의 제약도 사라졌겠다, 흑십자회 무리는 오래간만에 몸을 풀 기회를 얻고는 판을 점점 더 키워나갔다. 어느 정도 움직여서 굳은 몸을 완전히 풀어버린 흑십자회 대원 하나의 손에 일개 행성에 주둔하고 있던 루시드 군이 모조리 쓸려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애초에 파시즘 사상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혼자서 행성 하나쯤은 간단히 불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초능력자가 아니라면 대원으로 받아주지도 않는 흑십자회였다. 그런 만큼 자신들의 몸을 억눌러오던 제약이 사라지게 되자 미친 듯이 날뛰며 이 행성이고 저 행성이고 죄다 가루로 만들어놓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하하하! 카이프 원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리 국방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의 목을 베어다가 바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겠지!”
로버트가 애마 위에 올라탄 채로 대검을 휘두르며 그렇게 말했다. 로버트의 애마도 이 시대에 총기병도, 창기병도 아닌 검기병으로 남기를 고집하는 마초적인 사내를 태운 말답게 그 인상이 범상치 않았다.
‘천국의 군세’도 아니고 무려 ‘사탄의 군세’를 자처하며 불길한 검은색 역 십자가를 자기네들의 상징으로 삼는 조직의 수장이 아끼는 말이다. 그런 말이 평범한 말일 리가 있겠는가?
비단 로버트가 탄 말뿐만 아니라, 흑십자회 무리가 탑승한 말들은 풀이나 뜯어 먹고 살던 지구의 말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이빨로 바닥에 널부러진 루시드 군의 시신을 으적으적 씹어먹으면서 하늘도 가로지를 줄 아는 사나운 동물들이었다. 이 사나운 동물을 어떻게든 제어하며 고삐를 틀어쥐는 흑십자회 무리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휘리릭, 휘릭-
로버트의 애마 역시 전투 중에 잠시 지표면에 머무르며 쉴 기회를 얻게 되면 풀떼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가 휘두른 대검에 목숨을 잃은 루시드 군 초능력자의 시신을 맛있게 먹었는데, 유독 두개골만큼은 제 주인의 몫으로 따로 남겨주었다. 제 주인이 적군의 두개골을 가공하여 와인잔으로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음을 말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 착하지... 다른 부위는 몰라도 두개골은 내 것이야. 특히 그동안 우리를 골탕먹여온 이놈들 대장의 두개골만큼은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와인잔 컬렉션에 넣어주고 말 것이야... 흐흐흐...”
이 악취미는 그가 그토록 존경하는 카이프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었다. 로버트는 눈앞에 떨어진 수급을 들어 올리면서도 하고많은 두개골 중에서도 감히 우리 제국을 침공해온 루시드 제국의 수괴, 루시드 유니온 워싱턴의 두개골에 와인을 담아 마시면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할지를 상상해보았다.
“대장님, 이번 행성의 정리도 모두 끝났습니다. 곧바로 다음 행성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 그래. 어차피 언젠가는 죽였어야 했을 놈들... 이제 곧 우리 국방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텐데, 남겨둘 이유도 없고, 모두 제거해두고 가면 나쁠 건 없겠지.”
돌격대원들 역시 ‘사탄의 군세’를 자처하는 흑십자회와의 승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대검을 놀렸다. 이번 일은 여태까지 돌격대가 벌여온 그 어떤 폭탄 테러 사건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 도움이 될 텐데, 혹여나 돌격대가 흑십자회의 노친네들에게 졌다는 소문이 함께 퍼지게 된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모조리 죽여 버려라! 우리 돌격대를 고용한 정부에서도 허가를 받지 않고 이번 일을 벌인 책임을 따로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이놈들을 포로로 살려 잡아간다고 할지라도 이놈들이 그동안 쌓아온 죄업이 있으니 재판정에서 사형을 면할 수 없을 터, 놈들을 죽이는 일을 망설이지 마라!”
“대장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루시드 놈들을 죽이는 걸 망설인 적은 없다고!”
처음에는 범혁이 이끄는 돌격대원들과 남자 대 남자로서 우열을 가리기 위한 승부로서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이게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이 지역 루시드 군의 전력을 깎아 먹는 전략적인 수였던지라 대검을 든 손에 여유를 둘 새가 없었다.
나중에 기성 정치가들이 오늘의 일을 가지고 아무리 적군이라도 너무 잔혹하게 죽인 것이 아니냐고 지랄할 가능성을 한 1초 정도는 생각해봤는데, 그치들이 생각하기에도 루시드 인들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존재일 테니 그쪽으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두 조직에 몸담은 초능력자들이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해, 혹은 전략적인 수를 생각해서 손 속에 여유를 두지 않고 계속해서 대검을 놀리니 적의 초능력에 제약을 거는 특수 장비의 도움을 받아 흑십자회와 전투를 벌이는 데 너무 익숙해진 루시드 군의 초능력자들의 어깨 위에서는 계속해서 목이 떨어져 내렸다.
칼디르가 번개의 창 형태로 날려 보낸 광역 EMP가 루시드 군의 대 초능력자용 장비뿐만 아니라 다른 기계 장치들까지 모조리 먹통으로 만들어버린 바람에, 지금 루시드 군 진영에는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자기네 초능력자들 대신 밀어 넣을 기계나 로봇도 없었다.
“이런 제기랄! 갑자기 도시 전체의 전기가 나가버리더니, 전투용 기계나 로봇까지 먹통이라는 말이냐? 네놈들, EMP 방호 처리에 배정된 예산까지 빼돌려 먹은 게냐?”
“아, 아니요...! 무, 물론... 저희가 예산을 빼돌려서 원래 로봇 공장에서 생산되었어야 했을 물량보다 훨씬 더 적은 물량이 나온 건 사실입니다만... EMP 방호 처리 예산을 빼돌린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대대장님도 거하게 해드셨으니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때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같이 나눠 먹으셨으면서, 이제 와서 발뺌하실 생각입니까?”
“뭐라고? 이런 미친놈들이...! 기계랑 로봇이 없으면 상관에게 책임을 물을 시간에 네놈들 몸뚱아리라도 날려서 놈들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란 말이다!”
그나마 흑십자회 무리의 기습 공세에도 겁을 집어먹지 않고 침착하게 반격 태세를 갖춘 이들조차 흑십자회 대원들보다 더욱 강력한 범혁에게 쓸려나갔고, 빽과 뇌물을 써서 높은 자리를 꿰차고 앉았을 뿐인 무능한 지휘관들의 한심한 지휘 때문에 그들이 쓸려나가는 속도가 배는 빨라진 것 같았다.
같은 초능력자끼리 맞붙었는데, 싸움이 성립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본 많은 이는 ‘옥쇄’하는 대신 ‘비국민’이라는 딱지가 붙게 될 것을 각오하고서 전장에서 도망가기를 선택했다. 물론 그들도 얼마 가지 못해 목숨을 잃게 됐지만.
혹시나 흑십자회나 돌격대가 루시드 군으로부터 반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칼디르가 안전한 곳으로 순간 이동시켜주거나, 절대 뚫리지 않을 신체 보호막의 가호를 내려주거나, 치명상을 눈 깜짝할 새에 치유하는 약물을 투여해주니, 그들은 전장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하! 적군과 싸우는 와중에 등을 보이다니! 네 이놈들! 등짝을 보자!”
“포로라고? 필요 없다! 포로를 관리할 시간에 한 행성이라도 더 터뜨려놔야지!”
가끔 항복하는 이들도 나왔는데 로버트는 거추장스러운 포로 따위는 필요 없다며 그 자리에서 목을 쳐버렸고, 범혁은 파시스트가 포로 같은 거 잡는 거 봤느냐며 사지를 찢어놓고 희생양이 된 자의 피로 그 주변에 하켄크로이츠를 그려놓은 다음에야 자리를 떴다.
파시스트가 적군을 포로로 잡는다고? 차라리 아우슈비츠 같은 절멸 수용소에 처넣었으면 처넣었지... 으흐흐, 이렇게 하켄크로이츠까지 그려놓으면 제아무리 무능한 경찰이라도 우리가 벌여놓은 짓거리라는 걸 단박에 깨닫게 되겠지.
“범혁 대장! 이런 식으로 증거를 남겨놓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 루시드 인들은 죄다 멍청이들뿐이니까. 우리가 이 동네에서 이 지랄로 놀아제꼈다는 소식이 놈들의 귀에 닿는 데 2~3주, 대책을 세우고 그 대책이 현지 부대에 내려오는 데 또 2~3주가 걸릴 텐데 걱정은 무슨 놈의?”
“역시나...! 범혁 대장이 그렇게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표식을 남겨놓고 다니지 않으면 우리도 이게 우리가 죽인 건지, 아니면 흑십자회 쪽에서 죽인 건지 구분할 도리가 없어서 승부를 가를 때 곤란할 거란 말이지. 일반 징집병은 몰라도 초능력자의 시체 옆에는 반드시 하켄크로이츠를 새겨놓고 다녀야겠어.
오늘 이 지역에서 루시드 군의 초능력자 부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할지라도 나머지 일반 병사의 수효 자체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겠지만, 우리 같은 규격 외의 초능력자를 상대로 싸움다운 싸움을 성립시킬 수 있는 이들의 목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나면 머나먼 은하에서 강제로 끌려온 징집병들 따위를 처리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그나마 흑십자회와의 전투에서 유능함을 증명해온 초능력자들이 이 지역에서 모조리 목숨을 잃게 되면 총독부 휘하에 남아있는 초능력자 부대는 테라랜드에 짱박혀서 나올 생각이 없는 놈들뿐이다. 이 지역에 있는 초능력자를 모조리 죽이고 나면 한동안은 아주 수월하게 전투를 치를 수 있을 터였다.
하루도, 한나절도 아니고, 7시간 반. 돌격대와 흑십자회가 합심하여 아틀랜드 회랑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루시드 군 초능력자 부대를 완전히 섬멸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7시간 반 동안 싸우면서 죽은 이는 없었다. 다친 이도 없었다. 부상을 입더라도 칼디르가 바로바로 치유해주었으니, 부상자가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판을 자처한 칼디르가 선언하기를, 미친 파시스트끼리의 승부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범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능력자로서 혼자서 대검을 휘두르고 다니는 것만으로 여러 행성을 쪼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그를 빼고 보면 돌격대에는 흑십자회보다 특별히 더 강력하다고 할 만한 초능력자가 없었다.
그에 반해 흑십자회는 평균적인 능력치로 봤을 때는 돌격대의 전력을 상회하는 조직이었고, 정규군으로서 돌격대원들에게는 없는 경험마저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다. 어느 일방의 승리도, 패배도 아닌 무승부가 양측 모두가 납득할 만한 판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로버트는 이 승부의 실질적인 패배자가 자신이 이끄는 흑십자회라는 것을 내심 깨달았다. 오늘의 싸움을 수월하게 만들어준 칼디르의 광역 EMP를 조금만 변형하면 그게 바로 광역 살상기였다. 흑십자회 중 그 누구도 수백 수천 개가 넘어가는 행성계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칼디르가 모두의 ‘주군’이 될 자격을 지닌 자인지 판단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 무력에 사람을 곧잘 죽이길 좋아하는 포악한 성격마저 지니고 있었다면 이 우주는 진작 피바람에 휩쓸리게 되었을 것을 로버트는 직감했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그 자신의 조직인 흑십자회를 칼디르의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에 그대로 가져다 바치기로 했다. 돌격대와는 대등한 위치에서 통합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