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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9화 (176/225)



〈 176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9화

부국이라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지만(부국이라고 할지라도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착취당하는 빈자들이 존재하는 한, 골수까지 빨간 맛으로 물들인 엘리트들이 어디선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질병은 대체로 가난한 이들이 많은 나라에서 훨씬 빠르게 번져 나간다.


그리고 이 질병이 끝없이 번져나가 겉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이 땅에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파시스트 쪽에서 선수를 쳐서 ‘유대-볼셰비즘에 맞서 싸우는 장벽’을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돌격대와 흑십자회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 두 조직의 연합이 양자 간 대등한 자격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에서는 말이 엇갈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론 다툼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자, 결국 두 조직은 서로 실력을 내비치는 것으로 우열을 가리기로 했다.

“흐음!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자니. 기다리던 바입니다. 역시 사내 된 자라면 가타부타 말을 길게 늘리기보다는 한 합에 모든 것을 걸고 승부를 걸어야 하는 법.”


“허, 이런 점에서 그대와 생각이 일치하게  줄은 몰랐소이다, 부당수.  비록 나이는 그대보다  곱절이나 많으나, 젊은 시절의 실력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번에 보여주고야 말겠소.”

실력 행사를 싫어하고 독서와 대중연설 같은 좀  평화로운 취미를 즐겨왔다는 범혁의 말은 거짓말인 것만 같았다. 그는 실력을 겨뤄보자는 로버트의 제안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나섰고, 실력을 가리는 방법 역시 한발 앞서 제안했다.




현재 로버트가 이끄는 흑십자회가 주둔 중인 아틀랜드 회랑 지역은 요충지 중의 요충지라  수 있었다. 그로즈니가 이끄는 정예병이 있는 노스랜드와 베스트랜드, 아틀라인 서기장이 이끄는 인민정부가 위치한 아틀랜드, 제임스를 따르는 이들이 포진해있는 테라랜드 지역과 모두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이 흑십자회의 손아귀에 완전히 떨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루시드 총독부나  루시드파의 입장에서는 아주 재미없는 일이었고, 특히 발틱 (전)총독보다는 좀  무능한 클로세 (현)총독은 세계구급의 초능력자가 뭉친 흑십자회가 제멋대로 설치게 두어 이 지역을 빼앗기게 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틀랜드 회랑 지역이 반 루시드 저항운동 세력에게 넘어가는 날에는 그동안 수천수만 광년에 달하는 물리적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던 각 조직이 물리적으로도 맞닿게 되고, 총독부가 있는 테라랜드라는 명확한 목표 하나만을 향해 화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따라서 클로세는 총독부가 부릴 수 있는 (그나마 멀쩡한) 병력 중에서 강력한 초능력자를 추리고 추려 아틀랜드 회랑에 보내는 것으로 흑십자회의 움직임을 막고자 했고, 클로세의 이와 같은 조치가 없었더라면 진작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불태우며 진군했을 흑십자회의 움직임에 실제로 제동이 걸린 것을 보면 아주 무의미한 조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범혁의 제안인즉슨,  같이 그로즈니가 있는 곳으로 가기에 앞서서 클로세가 이 지역에 짱박아 놓은 초능력자를 누가 누가  많이 죽이나 하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었고 이는 로버트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클로세놈이 그래도 머리는 굴릴  알아서 강력한 초능력자들을  지역에 보내면서 우리의 초능력을 제약하는 기계 장치까지 덧붙여주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는 기회요. 이번 승부가 어느 쪽의 승패로 결정 나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이 지역의 루시드 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할 수 있다면, 총독부의 대 초능력자 전력을 못해도 절반은 날려버리는 셈이 될 것이오.”

“기병대장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을 시간은 없겠군요! 승부를 더 미룰 것 없이 이 자리에서 준비하고,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바로 자웅을 겨뤄봅시다!”




자고로 승부는 공평해야 하는 법, 흑십자회의 소속원들에게 돌격대원들이 들고 있는 것과 동일한 무장이 지급되었고, 규격 외의 초능력자인 칼디르는  승부에 끼어드는 대신 심판을 자처하고 나섰다.


칼디르가 한 발자국 물러서거나 말거나, 흑십자회 무리는 그녀로부터 지급 받은 무기 중에서 범혁이 등 뒤에 메고 다니는 ‘총통 하사검’과 똑같은 대검을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원래도 크고 아름다운 명검이라면 사족을  쓰는 군인 무리에게 검기를 날릴 수 있는 대검을 쥐여 주었으니, 곳곳에서 ‘군침이 싸악 도노!’같은 말이 울려 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검기를 실어 보낼 수 있는 검이라...  일찍이 이런 검을 들어본 적이 없소만, 이왕에 받게 되었으니 감사히 받겠소, 당수.”



흑십자회의 대장으로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로버트조차 뜻밖의 선물을 눈앞에 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국방군의 군복 색깔과 엇비슷한 검은 빛깔, 국방군 장교들이 사관학교를 나설 적에 하사받는 군도처럼 멋들어진 디자인...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검기까지 날려 보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남자는  커서도 애라고 돌격대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흑십자회 무리까지도 단체로 이 위험한 대검을 빨리 실험해보고 싶어서 루시드 군이 기다리고 있는 행성들로 튀어나가려 했는데, 그들을 뜯어말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심판을 자처하며 이번 승부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했던 칼디르였다.




“이 지역의 루시드 군은 아군의 초능력을 억제하는 고급 장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기병대장님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오. 요즘 따라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모처럼 젊은이들과 함께 자웅을 겨룰 기회를 얻게 되니 피가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는 것을 내 주체하지 못했소.”


“...그런 장치를 이대로 내버려둔 채로 승부를 가리게 된다면 아군이 피해를 당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전력을 발휘하지 못해 즐거운 승부가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니 제가 판을 깔아놓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칼디르가 드디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격기를 보여주려는 건가? 자기 손으로 사람들을 직접 죽이기는 싫다고 했으면서? 범혁이 흥미진진한 눈길로 칼디르가 어떻게 나오나 살펴보는 사이, 그녀는 어느샌가 투창 자세를 잡고 있었다.

파지직, 지직, 지지직... 비어있던 그녀의 오른손에서 전기가 이는 듯하더니, 곧 창 모양이 되었는데 그것을 잡고 선 폼이 꼭 하늘 위에서 내려친 벼락을 창으로 벼려 한 손에 쥔 것처럼 보였다. 번개의 창. 대강 그런 이름을 붙여줄  있을  같았다.




몇 분간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여 번개의 창을 완성한 칼디르가 이내 하늘을 향해서 그것을 던지자, 온 하늘에서 우르르 쾅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는 천둥·번개 따위에 쫄아서 숨을 겁쟁이는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자, 이것으로 판은 마련되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부디 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시면서 실력을 겨루어주십시오.”



“으음...? 조금 전에 그것으로 끝난 것이오?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오?”




너무나도 순식간에 끝난 일이라 정말 이걸로 끝난 건가 싶었던 로버트가 칼디르에게 질문하였고 범혁 역시 눈빛으로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하였으나, 그녀는 그동안 흑십자회의 걸음에 훼방을 놓던 루시드 군 초능력자 부대의 주둔지로 가보면 알게  것이라고만 말할 뿐 어떠한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로버트는 일단 속는  치고 그녀가 선물한 대검을  손에 들고 자신의 애마 위에 올라탄 채로 흑십자회 무리를 이끌고 목표로 삼은 행성으로 나아갔고 범혁을 비롯한 돌격대원들은 그들이 향한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될 것이라는 칼디르의 말에는  점의 거짓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환하게 빛나고 있었을 대도시들이 통째로 정전이라도 된 것처럼 빛을 잃은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동안 흑십자회의 움직임을 제약해온 대 초능력자용 장비들은  기척조차 느낄  없었다.




혼자서 행성 하나를 노릇노릇하게 구워줄 수 있는 엄청난 초능력자가 즐비한 흑십자회였지만, 대 초능력자용 장비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는 행성과 행성을 오가는 순간이동조차 쉽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흑십자회는 언제 그런 중압감을 느꼈냐는 듯, 그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로버트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초능력자용 장비는 물론이고 루시드 군이 주둔 중인 도시 행성의 전기가 통째로 나간  봐서는 칼디르가 허공을 향해 쏘아 올린 번개의 창이 사실은 광역 EMP였던 것이다...!


그것도 여러 행성계에 넓게 퍼져 주둔 중인 적군의 기계 장비만 고장 내고 아군의 장비에는 손상을 입히지 않는 초광역 지향성 EMP. 이거... 어째 이 승부는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우리 흑십자회의 패배로 끝난 것만 같은데...



그래도 칼디르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으니 벌써 주눅들 필요는 없겠지. 마음을 다잡은 로버트가 뒤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온 흑십자회 무리를 향해 엄숙히 선언했다.



“제군! 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아오던 사슬이 풀렸으니 이제 우리의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없다! 빌어 처먹을 루시드 총독부를 수호하는 초능력자 부대 중 절반은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것이다! 제군은 우리 흑십자회가 어째서 그 앞을 가로막는 적군에 ‘사탄의 군세’라 불리는지를 놈들의 뼛속 깊이 새겨주어라!”




와아아아! 대장의 외침에 따라 흑십자회 무리가 거대한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도 평소 자기네를 알게 모르게 옥죄어오던 보이지 않는 힘이 사라진 것을 느낀 것이었다.

‘사탄의 군세’는 함성이 잦아들자마자 행성 상공에서 지면을 향해 냅다 들이박았고,  행성에 주둔 중이던 루시드 군은 급작스러운 대규모 정전 사태에 우왕좌왕하다가 요즘 시대에 총도 아니고 대검 하나만 들고 날뛰는 미치광이들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었다.



‘사탄의 군세’가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여러 갈래의 검기가 흘러나와 루시드 군의 목을 베었고, 그들의 대검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행성의 지표면에 거대한 협곡이 생겨났다. 졸지에 사탄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된 루시드 군은 춤을 추듯이, 물이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검기를 그저 보기만 할 뿐,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흑십자회에게 가장 먼저 노려지게 된 행성이 그 안에 품고 있던 루시드 군 초능력자 부대와 함께 완전히 썰려 나가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다. 단 5분 만에 최소 수천만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행성이 도시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없는 폐허가 되고  것이었다. 하지만 ‘사탄의 군세’는 행성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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