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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8화 (175/225)


  • 〈 175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8화

    돌격대와 ‘그들’의 만남은 돌격대가 창설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빌뇌브의 귓속에 그들의 존재가 흘러들어갔을 무렵에 이루어졌다. 아마도  소식이 빌뇌브에게 알려지려면 지금으로부터 또  주의 시간이 흘러야 하겠지.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 칼디르는 범혁에게 특정 암호를 특정 방법으로 송신하면 ‘그들’을 정확히 어떤 곳에서 언제 만날 수 있는지를 교시해주었고, 평소처럼 돌격대원들과 함께 여러 가지 훈련을 하다가 가르침을 받게 된 범혁은 그녀가 하라고 한 것을 그대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런 이런, 아틀랜드 회랑 지역의 영웅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버트 리 기병대장님. 아니...  정확하게는... 잔학 무도한 유대-볼셰비즘의 위협이 날로 강해지는 시대에 뜻이 맞는 파시스트 동지들끼리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좋겠습니까?”


    “뜻대로 하시오,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의 부당수를 자처하는 이여.”

    아틀란티스 국방군 내에는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불문율이 존재했지만, 그 군대라고 할지라도 사람 사는 동네인지라 알음알음 정치적인 목적을 띄고 사사로이 만나는 이들은 있었다. 특히나 아틀라인 서기장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 감화된 좌익 그룹의 숫자는 아주 상당했다.

    하지만 국방군 내 사조직에 좌익 그룹만 있는 것은 아니요, 파시즘의 세례를 받은 이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그들’은 스스로 ‘흑십자회’라 칭하였고 흰색 바탕에 검은색 역 십자가를 그려 넣은 깃발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는데, 그들의 군세는 국민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아틀란티스 영내 기성 파시스트 조직 중에서는 으뜸이었다.

    범혁과 서로 ‘국방군 식 경례’를 주고받은 로버트 리 기병대장은 ‘흑십자회’의 대장이었다. 그는 사상적으로 칼디르 일당과 유사한 면이 있었기에 포섭 가능성은 컸지만, 다짜고짜 찾아가서 ‘당신네가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도 동류니 협업하자.’고 제안하면 의심을  수 있었으므로 칼디르는 그와 가장 먼저 접촉하는 대신 그로즈니와 카이프의 신임을 얻는 데 주력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급(기병 병과의 병과대장)은 한국군으로 치면 ‘겨우’ 중장밖에 되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원수씩이나 되시는 그로즈니, 카이프보다 존재감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칼디르가 그와의 만남을 주저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OKW 내부에 칼디르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을 어느 정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이상 그와의 만남을 더 미룰 이유는 없었기에 그녀는 직접 오늘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로버트는 기병 출신답게도 약속 장소에 자신의 애마를 이끌고 범혁을 만나러 왔다.

    그가 이끄는 흑십자회에는 범혁보다는 약할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보면 최상위권에 들 만한 초능력자, 그리고 하늘에 워프 엔진을 부착한 거대함선이 날아다니는 시대에 기병을 고집하는 상남자들이 그득했기에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면 상당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었다.

    “우리가 조금  일찍 만날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뭐, 서론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병대장님. 우리 파시스트당에 합류하시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파시스트당을 적대하시겠습니까? 수월한 선택을 위해 조언을 해드리자면, 기병대장님께 중립을 고수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흐음, 첫 만남부터 저돌적이시로군. 하지만 그 태도가 마음에 드오. 카이프 원수께서 그대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이해되오.”


    자기한테는 증조 할아버지뻘이 되는 노장, 로버트 기병대장에게 충성과 적대 둘 중 하나를 고를 것을 강요하는 범혁의 태도는 매우 오만불손하였지만, 로버트는  점을 따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호기가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는 범혁과 직접 만나기에 앞서 몇 차례 통신을 통해 그가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다치 않는 카이프 원수가 칼디르 일당과 깊은 관계를 형성했다거나, 칼디르가 제공한 뛰어난 무기와 정보들이 국방군에 아주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거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우리는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거나 하는 말을 들을  있었고다.

    이제 그는 잠시 눈을 감고는 범혁을 눈앞에 두고 선택을 하기에 앞서 지난 며칠 동안 나눈 통신의 내용을 되새겨보았다.

    범혁이 내뱉은 하고많은 말 중에서 로버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요, 카이프와 인연을 트는 데 성공했다는 부분이었다.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칼디르 일당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더라면 로버트가 칼디르 일당과 기꺼이 만나보겠노라고 제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귀족들이 평민과 천민들을 짓밟고 착취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나라에서 평민 출신으로 이등병에서 시작해서 원수까지 올라간 카이프는 역시 평민 출신이었던 로버트의 존경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병사 시절에 이미 국방군 최고의 영예인 황금 금강석 백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하고, 베테랑 전차병으로서 입대 몇  만에 원사까지 치고 올라가서 당시에도 육군원수를 지내고 있던 그로즈니로부터 직접 육사 입교 권유를 받고 마침내는 원수봉을 손에 거머쥔 남자, 카이프 베이론!

    평민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사내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때는 없었고, 로버트 역시  위대한 평민 출신 영웅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뒤를 쫓아 육군에 몸을 담은 바 있었다. 비록 그가 입대한 해가 바로 카이프의 기수가 육사를 졸업하는 해였기에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로버트는 하늘 같은 육사 선배 겸 상관을 언제나 사모해왔다.

    “으음, 다 좋소만... 이쪽에서는 흑십자회의 대표자인 내가 직접 나섰는데 그쪽에서는 당수를 자처하는 이가 나오지 않고 부당수를 칭하는 그대가 나왔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이오?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지는구려.”


    마침내 입을 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서는 여전히 고민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적어도 이 만남의 ‘격’이 맞으려면 양측의 대표끼리 만나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아, 저희 당수께서는 국방군의 전력을 재고하는 일에 매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제가 대신 나온 겁니다...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당수께서 파시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대놓고 드러내기에는 반 파시스트 진영의 시선이 우려되기에 이 자리에 나오시지 못한 겁니다.”


    “충성이든, 협조든 요구하려면 그대들의 당수가 직접 나와야 하는 법이 아니겠소? 부당수에게 일을 떠맡기고 자신은 얼굴을 숨기는 이를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로버트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거리감을 표했지만, 범혁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혹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칼디르가 도와줄 거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당의 당수는 기병대장께서도 이름을 들어보신 바 있는 사람일 겁니다. OKW에서 최근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무기들을 정식으로 채택하신 일을 알고 계시죠?”


    “OKW의 결정이라면... 아, 신진 공학자가 설계한 육군 병기를 전량 국방군의 보조 무기로 채택하기로 한 그 결정이라면 나 역시 인상 깊게 봐서 기억하고 있소. 말로는 보조 무기라고 했지만, 나는 사실상 OKW의 해당 결정이 보수파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없어 차세대 제식 무기에 보조 무기라는 표지를 붙여 도입한 것으로 보고 있소.”

    “기병대장님의 말씀대로, 어딜 가나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래도 육군에 이어 해공군도 순차적으로 신규 병기를 도입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병대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신진 공학자가 바로 우리 당의 당수이십니다.”


    “과연... 어쩐지 그대들이 들고 있는 무장과 OKW가 정식으로 채택했다는 무기가 흡사하다 했소. 칼디르 아스트라... 그 자가 그대들의 당수였소? 국방군에 신규 병기를 공급하는 동시에 뒤에서는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니, 그대들의 당수가 되는 자는 과연 그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소?”

    범혁은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섰고, 로버트가 그토록 대표  대표로서 만나고자 했던 칼디르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로버트는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들은 그녀를 직접 보는 순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높게 쳐줘도  손녀뻘밖에 되지 않을 사람이 카이프 원수님의 인정을 받고, 일개 당의 당수를 자처하다니!

    그는 자기한테는 손녀뻘 내지는 증손녀뻘이 되는 칼디르가 협상 대상으로 나섰다는 사실에 화를 낼 정도로 섣부른 인물은 아니었다. 칼디르를 부정하는 것은 곧 그녀를 인정한 카이프를 부정하는 일이요, 카이프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우상을 스스로 깨어버리는 일이었는데, 이는 로버트로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심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에 로버트의 눈동자는 순간적으로 동그래졌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반갑습니다, 로버트 대장님. 저를 직접 만나보고자 하시는 마음, 이해합니다. 제게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물어보셨나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파시스트당은 단지 아틀란티스를 ‘통치’하고자 할 뿐입니다.”


    “...우리 흑십자회의 생각은 황가를 중심으로  제국이 파시즘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데 그쳤는데, 이렇게 보니 그대의 포부가 우리보다 더 나은 것 같소.”


    로버트는 그동안 국방군 내에서 파시스트라는 정체성을 숨겨온 자신과는 다르게 대놓고 파시스트 인증을 하고 황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이 국가를 ‘통치’하고자 한다고 말하는 칼디르의 포부를 마음에 들어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 또한 아틀란티스 황가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을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저 처자는 아직 황가가 존재하는 시점에서 반역죄로 간주될 만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군. 그래, 저 정도 야심은 지니고 있어야 일개 당의 당수를 자처할 자격이 있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이후로 꽤 오랫동안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칼디르는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도 남을 만큼의 힘과 뜻을 함께할 동지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며 손아귀에 들어있는 힘이 향해야 할 방향을 정하는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었다.

    칼디르 일당이 싸우는 방식 역시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일단 설득과 외교를 중시한다고 말은 했지만, 수틀리면 범혁을 시켜서 집권에 방해될 만한 인물을 제거하고  목을 창에 매달고 행진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이는 적장의 수급에 집착하는 카이프, 그리고 카이프를 존경하는 로버트의 전투 방식과 닮아있었다. 끼리끼리 모여서 논다는 옛말대로, 로버트는  자리에서 그녀와 손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또라이와 또라이의 연합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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