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7화
범혁과 칼디르의 대련이 거듭될수록 칼디르 쪽에서도 방어 일변도로 나서지 않고 어느 정도 공격기를 섞어서 범혁과 어울려주었고, 덕분에 범혁의 실력은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범혁과 다른 초능력자 사이에 ‘조그마한’ 충돌이 일어난 것은 덤이었다.
“아니, 그동안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의 초능력으로 칼디르를 무시한 거냐?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하, 하지만... 범혁 대장...! 애초에 대장은 우리가 모두 달려들어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규격 외의 초능력자입니다...! 아마도... 외국에 나가서 찾아봐도 대장을 이길 수 있는 초능력자는 찾기 힘들 겁니...다...”
“에잇! 비겁한 변명이다! 이제 나는 다시 칼디르랑 대련하러 갈 테니 시시한 것들끼리 열심히 훈련해봐라!”
칼디르를 제외한 초능력자 중에서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범혁은 칼디르와의 대련을 계기로 초능력자들을 더더욱 빡세게 굴려야겠노라고 마음을 먹고도 혹여나 힘 조절을 잘못해서 사람을 죽이게 될까 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는데, 칼디르를 상대로 할 때면 자신의 실력을 가감 없이 꺼내 보이면서 개선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애초에 그는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난 가난한 평민이라는 한계에 부닥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졸로 끝난 것일 뿐, 기회만 주어졌다면 20살이 되기 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도 남았을 만큼 똑똑한 머리를 갖추고 있었기에 칼디르가 딱 한 번 보여준 공격기를 바로바로 습득하고 응용하는 식으로 그녀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 두 사람의 대련을 보게 된 이들은 하늘과 지상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전투 장면에 눈을 휘둥그러니 하게 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남기는 잔상을 겨우 따라갈 뿐 관람자 중에서 그들의 전투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는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전투 장면을 억지로나마 분석해보면 칼디르는 현 세계의 패권국이라는 카테스 제국에서 통용되는 전투법을 구사하되 범혁을 한참은 봐주고 있었지만, 범혁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비유하자면 19세기 대한제국군이 교관으로부터 21세기 미군 장비를 넘겨받고 네이비씰 같은 정예부대를 길러나는 방법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데, 제대로 훈련에 임하기는커녕 알파벳도 더듬거리는 다른 초능력자들과는 다르게 범혁은 저 혼자서 영 생소하지만, 혁신적인 그 훈련법을 아주 잘 따라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상남자라면 역시 능력치를 공격에 몰빵하고 검을 들어야지. 원거리 공격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법...”
뭐, 그 과정에서 범혁이 이상한 곳에 꽂히는 바람에 우주 전함을 만들 때 쓰면 딱일 아틀라늄을 가져다가 대검을 만들어주는 수고를 들여야 했지만, 칼디르는 범혁 정도의 전투원을 영입하는 대가로 대검을 ‘하사’하는 정도의 수고라면 감수할 만하다고 여겼다. (범혁은 날 길이만 2m에 이르는 이 대검에 ‘총통 하사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카더라.)
대검 제련 쪽으로 딱히 이름을 날린 적이 없는 칼디르가 아주 순수하고 강력한 초능력 에너지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아틀라늄으로 검을 제련하는 과정은 아주 간단했다. 애초에 칼디르는 아틀라늄 원석에서 원자를 하나하나 떼어내서 행성만 한 물건을 조립해본 경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대검 정도야 그냥 눈 깜작할 새에 따끈따끈한 거로 하나 뽑아낼 수 있었다.
범혁은 통상적인 주기율표로는 도저히 분류할 수 없는 아틀라늄이 어쩌고 하는 칼디르의 설명은 깡그리 무시한 다음에 그것을 ‘하사’받은 날에 바로 공격기 대련에 응용하려 들었고, 칼디르는 범혁이 든 것과 똑같은 검을 한 손으로 든 채로 이에 응해주었다.
칼디르는 ‘법사<검사’를 주장하며 검을 잡자마자 바로 자기한테 달려드는 범혁을 이해해주었다. 애초에 그녀도 그와 비슷한 부류로서, ‘대깨초(대가리가 깨져도 초중전차, 초중전함, 중형전차나 항공모함은 겁쟁이나 고르는 선택지라는 뜻ㅎ)’라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캉! 카앙! 맨주먹으로 싸워도 엄청난 장관을 연출할 수 있는 두 초능력자가 상남자들의 로망인 대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은 너무나도 휘황찬란했다. 한 쌍의 대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도저히 사람끼리 싸울 때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생겨나 행성의 대기를 흔들어 놓았고, 대지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산맥 하나가 통째로 잘려나가거나, 행성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강줄기가 틀어지고 대륙과 대양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아니,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여기서 힘을 더 싣는다면 검 하나 가지고 행성을 조각내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행성 보호막이야, 뭐... 그런 거 없어도 칼디르가 나중에 다 알아서 잘 고쳐놓지 않을까? 범혁은 ‘무대책이 곧 대책이다.’라는 말을 외며 뭐가 막 부서지든 말든 두 손으로 대검을 잡고서 마구 휘둘러댔고, 칼디르는 한 손으로 검을 맞대면서 실시간으로 대련 장소로 선택된 행성에 생겨난 흔적을 고쳐야만 했다.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범혁은 대검을 가지고 대련하며 똑똑한 놈이 이상한 데 꽂히면 더더욱 환장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오, 이거.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검기도 날려지잖아. 혹시나 싶어서 해본 건데, 완전 내 취향인걸.”
결정적으로, 그가 초능력 에너지를 실었다 하면 금세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다른 금속 재질의 검과는 다르게 아틀라늄 대검은 그가 주입하는 초능력 에너지를 버텨내어 검기를 날려 보내는 것이 가능했고 이는 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여 그의 대검 사랑 버릇이 고쳐질 가능성을 아주 없애버리고 말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단 몇 주 만에 단순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초능력자들을 후드려 패고 다니던 범혁을 고급 기술을 구사하며 팰 줄도 아는 전투원으로 길러내는 데 성공했으니,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어떻든 좋은 게 아닐까?
물론 그 몇 주 사이에 대검 가지고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범혁은 장차 게슈타포나 아프베어 등 정보기관의 총수가 되겠노라는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교육 역시 받을 수 있었다. 초능력으로 사람 마음을 읽어내지 않고도 ‘사회의 불순물’을 포착해내는 방법, 그들을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방법, 때로는 그들을 역으로 이용하여 일망타진하는 방법 등등...
“암살 작전? 그거 그냥 행성째로 날려버려서 애초에 목격자가 생길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작전상 필요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부총통님 말씀대로 할 수 있겠지만... 매번 그러면 우리 파시스트당이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런 문제를 가지고 파시스트당에 딴지를 걸 만한 놈을 죄다 숙청해버릴 계획이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지?”
지식 교육을 받을 때의 범혁은 초능력 전투 대련 시에 전력으로 임하는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뚱하게 굴었지만, 그는 기억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대강대강 흘려 들은 부분조차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도 범혁이 지식 교육 시간마다 뚱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범혁은 부활 혈청, 사망 백신, 만병 통치약, 우주간 탄도탄 등등 다른 이들은 설계도를 보고서도 감히 이해하지 못할 고오급 기술과 주요 열강의 가장 민감한 비밀 정보에 관해서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뛰어난 전투원 겸 대중 선동가일 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공작원 겸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길러낼 수 있었다.
그는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다. 범혁은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교수가 되어줄 수 있었다. 자기가 대장을 맡은 돌격대 대원들의 머릿속에 파시즘을 이식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파시즘이라는 이름의 화분 위에 전투법과 지식을 박아넣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칼디르가 범혁에게 가르쳐주는 것 중에서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되,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있을지 몰라도.
“교수님!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거나, 산 사람을 불사의 존재로 만들 기술이 있다면 왜 대중에는 공개하지 않는 거죠? 교수님께서 이 기술을 대중에 공개한다면 ‘신’으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파시스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속도도 지금보다 훨씬 빨라지겠지요!”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가 그런 기술들을 만들어낸 건 사실입니다만, 아직은 완벽하지 않은 데다 대중에 공개될 경우 대대적인 혼란이 일어날 것이 우려되는 기술들인지라...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부총통님께 여쭙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죠?”
칼디르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그리고 인류는 너무나도 위대한 종족이므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범혁의 제안을 가뿐히 거절해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파시스트당의 당수가 아니라 전 우주를 지배하는 사이비교의 교주가 될 수 있는 ‘기적’을 가지고도 ‘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자기가 국가원수로 우뚝 서는 그 날이 오면 바로 모든 종교를 불법으로 선포(그녀는 이것을 ‘종교로부터의 자유’라고 하였다.)해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신’이 되려 한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공산주의자들이 한 말 중에서도 맞는 말이 있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칼디르가 대중은 물론이고, 그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주는 아틀라인 서기장이나 케인스 위원장 등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정보를 오직 범혁에게만 말해주는 것은, 그에 대한 신뢰도와 기대가 그만큼이나 크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신’을 자처하지 않아도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내어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초절정 여주를 앞에 두고서 호감도 작을 해서 결혼 엔딩을 보는 게 아니라 신뢰도 작이나 해서 벼슬자리를 얻는 데 주력해야 하는 상황은 참으로 오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듣지 못할 고오급 정보를 유일무이하게 전수하게 된 범혁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칼디르와 한 배를 타게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