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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6화 (173/225)



〈 173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6화

아무리 봐도 툭 치면 유리병보다 더  깨지게 생긴 겉모습과는 다르게, 칼디르가 둘러친 보호막은 아무리 공격해도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의 초능력을 공격 기술 쪽으로는 전혀 단련하지 않고 방어나 지원 계열 쪽으로만 단련했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답도 안 나오는 정면돌파 대신 우회전법을 구사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사각이 없는 칼디르를 상대로 우회를 시도하니 화력을 한군데 집중하지 못하는 역효과마저 났다. 화력을 집중한다 하더라도 그녀의 보호막을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범혁이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속하여 시간 인지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린다고 할지라도, 정신 없게 여기저기 순간이동을 계속할지라도 칼디르는 그의 움직임을  번도 놓치지 않았고 애초에 그녀의 보호막은 그녀가 잠시 범혁의 움직임을 놓친다고 해서 뚫려줄 만한 보호막도 아니었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로 눈동자를 조금도 굴리지 않고 있는 칼디르를 상대로 우회를 못하다니...! 우회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다른 초능력자들을 상대로는 주먹만으로 이겨왔는데, 칼디르를 상대로는 초능력의 힘을 개방하고도 생채기 하나  입혀? 범혁은 그 자신에게 실망했다.


이거, 우회 전법으로 선회해도 답이  나오는군. 이럴 바에는 계속 정면으로 들이받는 편이 낫겠어. 범혁이 또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조금 전보다  많은 힘을 실어 그녀의 보호막에 주먹을 내질렀다. 물론 통하지 않았다. 또... 또...! 실패하다니! 어디 가서 초능력 좀 쓴다고 자랑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겠어... 끄으응...



1시간을 쉬지 않고 공격해도 칼디르의 보호막에 조그마한 균열조차 일어나지 않자, 그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일그러졌다. 복잡한 그의 표정만큼이나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의 양도 많아 보였다. 물론 범혁도 이번 대련에서 전력을 다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칼디르의 표정은 범혁보다도 여유로웠다.



아마 칼디르는 여기서 그와 더불어  시간을 대련하더라도 전혀 지치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몇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범혁만 원한다면 한평생 동안 대련을 해도 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범혁이 먼저 지쳐서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내 힘을 더 끌어 올려야 하나? 으음, 애먼 행성 하나를 박살 내고 다시 붙여놓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한 데다 적군도 아니고 아군인 칼디르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는 것도 좀 웃긴  같은데... 아니야. 대련 중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건 상대방에 대한 실례이고, 겸사겸사 내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볼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칼디르, 내가 마음껏 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행성 전체에 보호막을 둘러쳐  수 있겠어?”


“가능합니다. 부총통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이 행성 전체에 보호막을 전개했습니다. 이제 이 행성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행성이 붕괴하거나 그 여파가 행성 바깥까지 퍼져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믿음직하군. 이제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어.  대련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범혁이 공중에 뜬 채로 지상에 서 있는 칼디르의 대답에 만족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정도로 지친 건 아니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힘을 끌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저번에 생각 없이 초능력을 내지른 것만으로도 행성을 두 동강 낼  있었는데, 이렇게 집중하여 힘을 모으면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지금은 행성에다 보호막을 둘둘 발라놨으니까 행성이 깨질 일은 없을 테고... 정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자. (칼디르에게 부탁하면 시험 장소 하나쯤은 마련해주겠지.)



지금까지는 근접 공격 일변도의 전술을 고집해왔는데, 이번에는 멀리서 굵직한 빔 같은 것을 수십 발을 쏴댄 다음 신체를 초능력으로 강화하여 두들겨 패는 식으로 혼합 전술을 구사해보도록 하자. 범혁은 본인이 준비를 끝마쳤을 때, 상대방인 칼디르를 향해 일말의 예고도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범혁이 서 있던 하늘 위에서 수십 개의 거대한 별 무리가 내려치는 듯하더니, 이내 보호막으로 코팅된 지표면에 맞닿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이 지표면에 유효한 타격을 입혔는지 어쨌는지 살펴볼 정신 같은 건 없었다.


곧이어 칼디르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는데, 빛으로 둘러싸인 그의 주먹이 칼디르의 보호막에 부딪혀 엄청난 섬광과 함께 충격파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넘실거리는 충격파의 물결은 대기 중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이 행성의 희박한 대기는 칼디르의 보호막에 의해 보호를 받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빛나는 주먹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빛나는 다리가 칼디르를 향해 날아가더니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이어지는 빛의 잔상이 생겨났다. 일반적인 초능력자를 상대로 한 대련이었더라면 여기까지 올 것도 없이 주먹과 발로 두들겨 치는 식의 폭력만으로도 간단히 제압할  있었겠지만, 칼디르가 상대라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  수 있었다.

부족해... 한참 부족해...! 범혁이 다시 칼디르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빛의 구를 여러 개 만들어냈고, 곧이어 칼디르를 구형으로 포위한 빛의 구들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빛의 구의 무차별 폭격의 뒤를 잇는  불의 구의 폭격이었다.

칼디르는 어떻게 됐지? 끄응... 칼디르의 기척이 원래 서 있던 곳에서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봐서는  모든 공격이 무용지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만들어낸 폭발광 때문에 한치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 이렇게 칼디르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녀가 나를 배려하여 일부로 기척을 노출해준 탓일지도 모른다.

칼디르로부터 반격을 받는 일은 없었지만, 범혁은 본능적으로 칼디르가 멀쩡하며 그녀가 자신을 한참은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제로 칼디르는 원한다면 언제라도 범혁이 자신의 기척을 느낄 수 없도록 그 존재를 완전히 감추거나, 그가 절대로 막을 수 없는 공격 기술로 그를 한칼에 베어죽일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적 2시간이 경과했다. 범혁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공격기를 사용했으나, 칼디르는 역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적 3시간이 지났다. 이제 그는 자기 머리로 생각해낼  있는 모든 공격 전술과 경우의 수를 꺼내 보인 상태다. 칼디르의 보호막은 그 기세를 조금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이어서 4시간, 5시간, 6시간... 범혁이 그 튼실한 근육이 뭉칠 정도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칼디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으나,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실패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기는커녕 그녀가  행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면과 성층권 쪽에 전개한 보호막을 흠집 내는 데도 실패했다.


여기서 나의 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폭주해버리는  하수다. 여기서 폭주하지 않고서도 칼디르를 이길 방법이 없지는 않을  같은데... 비겁한 수라도 써야 하나? 실전에서는 비겁이고 정당이고 안 따지니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이야, 네가 나보다 강할 거라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지난번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싸워보지는 않았지?”


“예. 저도 이렇게  분과 오랫동안 대면해보는  처음인  같군요.”




“좋은 경험이었어. 마음 놓고 공격기를 꺼내 보일 기회였으니까. 그렇지만 언젠가는 너도 나를 향해 공격 기술을 쓰면서 대련에 임해줬으면 좋겠어.”

범혁이 짐짓 패배를 인정하는 체하며, 빠르게 신체 강화를 해체한 뒤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칼디르도 자신의 몸을 지켜주던 보호막을 해제했다. 좋았어. 의도한 대로다. 여기서 악수한다는 핑계로 가까이 다가가서 치는 거다...!

범혁과 칼디르의 손이 잠시 맞물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칼디르의 시야 바깥에서 그의 공격이 날아왔다. 원래는 없었던 웜홀에서 튀어나온  빔은 사람 하나 머리보다 더 큰 정도로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일단 맞았다 하면 웬만큼 강력한 초능력자라도 즉사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빛의 줄기가 칼디르의 얼굴을 완전히 덮었으나, 빛의 줄기가 꺼졌을  놀랍게도 그녀의 머리는 그녀의 어깨 위에 여전히 달려 있었다. 칼디르는 범혁의 속셈쯤이야 굳이 미래 예지 능력을 꺼내 들 필요도 없이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신체 보호막을 덮어쓴 상태였다. 보호막을 해제하는 척하면서 신체 보호막을 발동한 것이었다.


아뿔싸. 그러고 보면 칼디르가 그와 악수하는 것으로 대련을 완전히 종료할 생각이었더라면 행성 보호막까지 해제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만약 칼디르가  적이었더라면 이쯤에서 반격이 날아왔을 테고, 이 거리에서 나는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겠지. 범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너를 상대로 이따위 얕은 수는 통하지 않네. 다른 초능력자들과 대련할 때는 나는 맨손에 초능력을 쓰지 않고 싸운다는 패널티를 가지고 싸워도 쉽게 이겼는데... 내가 과연 너를 이길 날이 올까?”




“저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부총통님이 강력한 초능력자라는 사실은 부정되지 않습니다. 제가 행성 보호막을 전개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오늘 적어도 행성계 하나는 날아가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말을 들으니 위로가 되는군. 막상  행성은  간 곳 하나 없이 멀쩡해서 네 말이 잘 실감 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가 칼디르의 말에 화답하면서 완전히 전투태세를 풀어버렸다. 숨겨둔 패 같은 건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칼디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와 몇 마디를  섞어준 뒤에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후우... 이제 칼디르도 보냈겠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쉬면서 근육에 쌓인 피로도 풀고, 오늘의 전과를 분석해봐야겠다.


비록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련에서도 그녀를 이기지 못한- 이번에는 비겁한 수까지 꺼내 들었는데도 그녀의 보호막을 깨기는커녕 반격을 끌어내지도 못했지- 범혁이었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우리 파시스트당이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뻗쳐 나가며, 그 모든 음해 시도를 철저히 분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강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간단히 스트레칭을 끝내고 바로 침대에 누워서 머리를 굴리던 범혁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래... 특히 지금의 내 힘만 믿고 수련을 게을리했다가 빨갱이놈들을 상대로 지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빨갱이놈들을 상대로 압도당하는 일이 없도록, 내일부터는  말고 다른 초능력자들도 지금보다 더 빡세게 굴려야겠다. 그는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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