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5화
이것은 빌뇌브의 귓속에 돌격대에 관한 정보가 들어가기 전의 일이다. 이 당시에나, 돌격대의 정보가 빌뇌브에게 알려진 뒤나 다를 바 없이 범혁은 돌격대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열심히 뛰는 와중에 간혹 칼디르와 직접 대면할 일이 있으면 그 자신의 초능력을 시험해본다는 핑계로 대련을 신청하고는 했다.
“돌격대에 들어온 초능력자 중에서는 나와 맞붙어볼 만한 놈이 없어서 곤란하단 말이지. 우리 중에서 나보다 강한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는 게 참 신기해, 칼디르.”
“과찬이십니다, 부총통님. 부총통님도 충분히 강력한 초능력자이십니다.”
“그렇게 빈말 할 것도 없어. 자고로 인간이라는 생물은 1등만 기억하고, 2등 따위는 그 이름을 기억조차 해주지 않는 생물이지... 그런 의미에서 2등과는 압도적인 간극을 사이에 두고 있는 1등인 네가 나와 대련을 해주면 좋겠는데.”
“오늘도... 대련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요즈음 부총통님께서는 부쩍 커진 돌격대를 통제하느라 바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정 원하신다면야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대련이라고 해봐야 몇 시간 정도 몸을 놀리는 것뿐인데 그 사이에 큰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국제 표준 등급으로 따졌을 경우 칼디르가 최상위 등급에 속한다면 범혁은 바로 아래 단계에 속했으므로 굳이 단련하지 않더라도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일방적으로 적들을 썰고 다닐 수 있었지만, 똑같은 체격을 지닌 아마추어 파이터와 미국 네이비씰 대원의 실력이 대등할 수 없는 것처럼 이왕이면 그 강력한 힘을 단련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는 칼디르 외에 그 자신보다 더 강력한 초능력자들... 특히 외국인 중에서 그토록 강력한 초능력자를 본 일이 없었지만, 언젠가 그런 자들과 맞붙을 일이 있을 때 칼디르와의 대련 경험은 충분한 도움이 되어줄 터였다.
‘어차피 빌뇌브놈이나 수구꼴통 새끼들이나, 당장에 무슨 수를 쓰지는 못할 것이다. 적색 공포에 질린 나머지 흑색 공포(파시스트화에 대한 두려움)에는 눈을 뜨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 주어진 시간은 많을 테지. 그동안 내 힘을 단련하면 돼. 놈들은 결코 이 나라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내 손에 전부 죽게 될 것이야.’
범혁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모든 아틀란티스 인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빌뇌브의 목을 가져오는 일? 그건 호주머니 안에 넣어둔 1달러짜리 동전을 꺼내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다. 원한다면 대련이고 뭐고 간에 지금 당장에라도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있었다.
“후우우... 워프 제어장, 우주함대, 공격 위성, 대공포, 대공 미사일... 이 정도 방비 태세라면 그로즈니놈이나 제임스놈 둘 중 한 쪽의 병력이 들이닥친다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이번에 새로 총독이 된 클로세놈은 선대 총독이 싸질러놓은 똥을 치우고 휘하 병력을 알맞은 곳까지 이동시키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야만 한다...”
빌뇌브가 그토록 신뢰하는 워프 제어장(워프 엔진의 발동이나 초능력자의 순간 이동 능력을 방지하는 장치)이니 뭐니 하는 복잡한 장치들과 빌뇌브에 의해 고용된 저질 사병단원들은 감히 내 앞을 가로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지 않은가. 내가 차분히 힘을 길러나가는 과정에서 제 놈의 수족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는 공포에 질린 빌뇌브의 얼굴을 보고 싶다. 지금쯤 놈은 어떻게든 살아 나가보려고 빨갱이들부터 때려잡고 봐야 할 일이라는 식으로 수구꼴통 새끼들을 구워삶고 있겠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다.
놈은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경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일단 한 번 목표로 삼은 것은 성취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인지라, 설령 그놈이 국경 바깥으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우주 끝까지 놈을 쫓아가 죽이고 말 것이다.
놈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놈이 모든 수족을 잃고 난 다음에야 놈에게 예정된 운명을 집행할 것이다. 칼디르와 우리 파시스트당의 집권에 방해가 될 만한 수구세력을 위해 준비된 운명 역시 빌뇌브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을 집행하기에 앞서서 대련을 핑계로 여흥을 즐기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대련이 육체와 육체를 맞부딪히는 육박전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범혁의 신장은 190cm, 칼디르보다 무려 30cm나 크니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 보려면 초능력으로 공중에 떠야 하는 데다 몸무게는 5배나 차이가 나니 싸움이 소질이 없는 사람이 눈대중으로 봐도 이 싸움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 전차가 200t이나 나간다고? 엄청 가벼운데?”
“예. 200t이 맞습니다. 역시 제 예상대로 엄청나시군요, 부총통님.”
그리고 범혁은 대련에 앞서 칼디르의 야심작인 마우스 전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였다. 일반인 기준에서는 200kg짜리 역기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장사 취급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범혁은 200kg이 아니라 200t이나 나가는 초중전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그렇다. 그는 설령 초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웬만한 위기는 타개할 수 있는 남자였다. 여기에 더해 초능력을 쓰지 않고도 초음속으로 날아오는 총포탄의 공세를 피할 정도의 민첩성을 갖추고 있으니, 난다긴다하는 주먹패들과 초능력자들이 그의 아래에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뛰어난 연설 능력 덕분에 돌격대의 세력을 지금처럼 빠르게 키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돌격대의 급속 성장의 배경에는 범혁이 보유한 전투력도 끼어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에게 홧김에 어느 행성을 내리찍어 그 행성을 두 동강 내버리고, 항복을 거부하고 도망가려는 루시드 해군의 함대를 각력으로 쫓아가 종잇조각처럼 짓이겨놓을 정도의 초능력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디르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돌격대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커지기도 전에 외부 방해자들이 가한 압력에 의해 금방 수그러들고 말았을 터였다.
죄 없는 행성 두 동강 내기. ‘내가 생각해봤을 때 이 행성은 빌뇌브 같은 악질 친 루시드파 귀족들을 먹여 살리는 행성임. 아무튼 그럼!’이라는 기적의 논리와 함께 뒷정리는 칼디르가 알아서 해줄 거라는 생각으로 실행에 옮긴 그 행동은 돌격대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사실 범혁이 길 가다가 무심코 두 동강 내버린 그 행성은 문벌귀족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고 당사자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모든 정치단체가 갈망하는 대중의 관심을 한 방에 끌어모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수천 개가 넘어가는 행성계의 주민들로부터 주목받을 수 있었다.
(행성 복구는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칼디르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테라포밍 장치를 꺼내지 않고 맨손으로 잘도 부서진 행성을 원상태 그대로 붙이는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로부터 경외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칼디르는 초능력만 따졌을 경우 범혁보다 강력하기는 했으나, 초능력으로 신체를 강화하지 않으면 지구의 중력조차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신체가 허약했다. 무방비 상태로 지구에 방문했을 때 골절로 끝나면 다행이고, 심하면 중력에 짓눌려 죽게 될 수도 있다. (리빙 포인트: 그녀가 태어난 화성의 중력은 지구의 약 37.5%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대련해야만 한다면 초능력 대전의 형태로밖에 할 수 없었다. 때마침 칼디르의 머릿속에는 주요 열강이 정예부대원을 양성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었으니, 그를 초능력 전투 분야에서 최고의 전투원으로 길러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던지라 만날 때마다 자신과 대련해달라는 그의 뜻을 거부하지 않았다.
범혁은 오늘도 자신이 열강의 정예부대원들이 훈련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 그들보다 더 뛰어난 전투원으로 거듭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는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마우스 전차를 저 멀리 던져 버리고 바로 칼디르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칼디르가 가진 초능력이 나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대화를 나눠보고는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점을 느끼고는 칼디르의 뜻에 협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나이로 태어나서 나보다 강한 초능력자가 그 능력을 실제로 꺼내 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
칼디르는 그 날도 범혁이 대련을 해보자는 말을 끝으로 곧장 달려들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눈 하나 껌뻑이지 않고 정자세로 자신의 주변에 보호막을 둘러쳤다. 다만 따로 공격 기술을 쓰지는 않았다. 파시스트 정권 창출 이후에 범혁을 중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기서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이 나라 기준으로 하면 수준급의 지식인에 속하는 주제에 범혁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대련을 제안한 날부터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일단 닥치고 돌격하는 식의 전술만을 구사해왔고, 그의 무모한 시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보호막 앞에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신장 1cm당 1kg이라는 말도 안 되는 덩치를 자랑하는 떡대의 초능력 강화 펀치가 토종 지구인 기준으로 하면 해골바가지 수준인 색녀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그 앞에서 멈춰서는 광경은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범혁이 내지른 힘이 보호막에 부딪혀 되돌아 나오면서 주변에 지진과 폭풍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충격파를 일으켰고, 그는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사람이 살지 않는 행성을 찾아 왔으니 휘말린 사람은 없지만, 협곡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를 주먹에 실어서 내질렀는데 통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 논쟁에서도 이미 칼디르에게 밀린 바 있는데, 힘으로 맞붙는 싸움에서마저 칼디르에게 밀리는 것을 인정하고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공격을 계속 이어나가기보다는 일단 뒤로 물러서서 분위기를 읽어 보았다.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상황, 보통 신입 초능력자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전투원이 대련 상대로 나서서 압도적인 힘을 깨닫게 해줄 필요가 있을 때나 쓰이는 훈련법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세 번 연속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맞붙어서 세 번 다 막혔다면,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볼 때도 되긴 했지.”
범혁은 대강 분위기를 읽은 다음, 정면에서 들이받는 대신 사각을 노리며 재빠르게 기동하였으나 칼디르에게서는 사각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빈틈이 없군. 여태까지는 이쪽에서 우회를 시도하더라도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정면 승부를 걸어왔지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막힌 전법을 또다시 쓸 수는 없었기에 그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