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적색공포, 그리고 파시즘: 3화
“아주 만족스럽군, 아주 만족스러워. 기대 이상이야. 이대로라면... 비스마르크 대공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 앞서 조만간 우리 인민당 조직에 총파업 지령을 내릴 수 있겠군.”
칼디르가 벌여놓은 일에 대한 아틀라인 서기장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돌격대 편성 문제는 인민당의 하부 조직인 좌익 전투 노동조합의 조합원을 보충한다는 핑계로 넘어갔고, 돌격대가 그들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기존 인민당원들과 일으킨 마찰은 당내 ‘반동분자’를 사전에 잡아낸 것으로 탈바꿈되어 보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도 칼디르의 보고를 받아보고는 때려잡아야 할 ‘반동분자(라고 쓰고 파시스트당의 집권에 방해될 만한 인물이라고 읽는다.)’가 뭐 이렇게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곧 그녀가 지속해서 내비친 애국심을 기억해내고는 한 점의 의심마저 지워버리고 말았다.
아틀란티스 국방군이 ‘비스마르크 대공세’라는 이름의 비장의 한 수를 품 안에 넣고 있다면, 인민당에는 ‘총파업 지령’이라는 카드가 있었다.
하지만 정체를 숨기고 다니던 이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조합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도록 하는 이 카드를 꺼내 들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을 쳐내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었고, 칼디르는 이 작업을 진두지휘하면서 서기장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동감입니다, 서기장 동지. 현 상황이 유지된다면 육군원수가 지휘하는 국방군 병력과는 별개로 우리 인민당의 충성스러운 전투원들도 아틀란티스의 자주독립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로군.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국방군의 작전과는 별개로 우리 인민당원들이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네. 육군원수는 결국 우리와는 달리 공산주의에 찬동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저 내가 황태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충성을 바치는 우파 인사니까 말이네.”
“예, 그 점은 저도 항상 주지하고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 지구는 반드시 우리 인민당의 손에 의해 해방될 것이며, 최후에 승리를 거머쥐게 되는 것은 반동적인 문벌귀족들이 아니라 위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를 대변하는 인민당이 될 것입니다.”
“으음, 마땅히 그래야지. 그 날이 올 때까지 어디 한 번 열심히 일해보세나.”
장관급 인사 중에서 칼디르를 직접 관리할 책임을 진 케인스가 그녀에게 내린 평가도 매한가지였다. 그녀의 행동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조금’ 있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만들어낸 놀라운 발명품들이 보여주는 기적에 눈이 멀어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기도 했다.
당장 떨어뜨리기만 하면 심각하게 오염된 행성을 정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도시 건설 사업까지 대신해주는 테라포밍 장치를 무료로 공급해준다는 데 거기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테라포밍 장치의 유용성은 단지 못 쓰게 된 행성을 고치는 데서 더 나아가 고향을 잃고 전전하던 수많은 이들의 사기를 돋우고, 기운을 차린 사람들을 공장에 투입하여 기술을 배우도록 하며, 얼마 전까지 제 이름도 쓰지 못하던 이들을 대거 기술자로 탈바꿈시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공업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효과마저 있었다.
굳이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인민정부는 독립 이후에 ‘우파 인사’로 분류되는 그로즈니 육군원수나 제임스 병부대신 등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될 것을 전제하고 있었기에 인민당의 당세를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칼디르의 기술을 거부하거나 그녀의 행동을 저지할 이유가 없었다.
제정복고주의 대 공산주의...! 이는 현재 아틀란티스 영내 반 루시드 저항운동의 쌍벽을 이루는 거대한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규모로만 따지면 공산주의 쪽의 세력이 훨씬 거대했지만,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틀란티스 황가를 따르는 제정복고주의 세력의 저력도 만만하게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고위층에 한정할 경우의 이야기였지만. 지난 대전쟁에서의 참혹한 패배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전부터 아틀란티스 황가의 통치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기에 민중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대안책을 제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서릴 수밖에 없었다.
인민당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통 보수파를 대변하는 제임스의 고민도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공산주의에 유보적인 견해를 내비쳐 제정복고주의를 표방하는 정통 보수파로부터는 ‘회색분자’ 내지는 ‘용공분자’,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는 ‘잠재적 반동분자’ 취급을 받는 그로즈니와는 다르게 그는 언제까지고 공산주의 세력에 머리를 숙이고 있을 인간이 못 되었다.
지금까지는 루시드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공산주의 세력과 소위 ‘적대적 공생’을 해왔으나, 사상이 영 의심스러운 칼디르가 가지고 온 혁신적인 기술들과 빌뇌브가 꽂아 넣은 스파이들의 공작이 그의 마음을 갈대밭처럼 흔들어놓고 있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했어도 협동농장이니,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 재분배 계획이니 하는 말들을 헛소리로 치부해왔는데, 이제는 칼디르의 기술을 활용한다면 공산주의자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잘 먹고 잘사는 유토피아’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빌뇌브가 파견한 스파이들의 속삭임은 불난 집에 기름과 가스통을 동시에 흩뿌리는 격의 일이 되고 말았다.
“크흠... 발틱 총독이 우리의 손이 아니라 인민당원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이대로라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이 나라의 정통성을 모조리 떠넘겨주게 생겼구만.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병부대신.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반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는 인민당과 갈라서는 것은 안될 말입니다.”
“인민당과 갈라서게 될 경우, 현재 휴전 중인 공산당과도 마찰을 빚게 되리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 공통의 적을 앞에 두고 우리끼리 빨갱이니, 반동분자니 욕을 주거니 받고 하면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안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가 공산주의 세력과 연대해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아틀란티스 황가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게 될 판이었기에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조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언젠가 아틀라인 1세 황태자가 서재에서 불온서적인 ‘자본론’을 탐독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도, 그가 마침내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친아버지인 시황제의 앞에서 급진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할 때도, 그가 ‘아틀란티스 인민정부’의 ‘서기장’을 자칭할 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황가를 향한 내 충심을 외면하지 않겠다.
‘붉은 황태자’ 아틀라인 1세가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결국 아틀란티스 황가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인류 문명을 집어삼키게 될 것이며, 황태자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이를 바로 잡는 것은 신하가 된 자의 도리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전쟁은 영토 야욕에 의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전 우주 차원의 성전이 될 것이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미리 대비는 해놔야 때가 무르익었을 때 우리의 뜻을 확실하게 내비칠 수 있겠지. 일단은 전과 마찬가지로 인민정부의 뜻에 따르되, 칼디르라는 처자가 만들어냈다는 신무기를 우리의 기술력만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게나. 그렇게 만들어진 무기들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칼이 될 것이니.”
제임스 애덤스 쿼크, 결국 그는 ‘붉은 황태자’를 끝까지 따르기보다는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사악한 사상에 물든 적장자를 몰아내고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아틀리노 1세 황자를 새 황제로 올리거나, 적어도 향후 새로 새워지게 될 나라에서 제정복고주의 세력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게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거사에 쓰이게 될 무기를 설계하고 제작한 자가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칼디르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좌우대합작’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제임스조차 칼디르의 등장을 계기로 위기감을 느끼고는 다른 마음을 먹을 지경이니, 전부터 루시드 인들보다 빨갱이들부터 때려잡고 보자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수구파들이 칼디르를 향해 보인 반응은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 처자가 가진 기술이 뛰어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처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평민, 어린 나이, 계집, 무학... 그녀가 가진 것들은 모두 그녀의 충성심을 의심해보기에 충분한 요소들이 아닌가? 육군원수는 도대체 그 처자의 무엇을 믿고 그러한 중책을 맡기고 있단 말인가? 안 될 말이다! 지금에라도 무모한 도박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빌뇌브는 스파이들로부터 저항운동 세력 내부 보수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졌다는 보고를 듣고는 자신이 공들여 진행해온 공작이 유효했음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빌뇌브는 친 루시드파의 거두. 반 루시드파 내부에 분란의 여지가 생겨났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로즈니놈은 우리가 벌이는 공작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고... 제임스놈은 우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군.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단 지금처럼 제임스놈만이라도 확실하게 구워삶을 수 있으면 되네.”
“예,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총리대신 대감!”
그로즈니놈은 예전부터 국방군 내부의 좌익세력들을 때려잡는 대신 ‘잘못된 길로 들어선 후배들’을 말로 타일러 달래는 것을 선호해왔지. 그로즈니가 침묵을 지킨다고 해도 이것으로 계속 걸고넘어진다면 놈의 지휘력에 어느 정도 타격은 갈 테고, 그보다 보수적인 제임스라면 꾀어내는 것이 더욱 쉬울 것이다.
‘붉은 황태자’가 인민‘정부’를 선포했음에도 그와 별개로 국내‘정부’를 선포함으로써 이 나라가 전제 군주국의 형태로 독립할 여지를 남겨둘 정도로 보수적인 제임스다. 도끼질을 한 번도 아니고 열 번, 백 번 넘게 하면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제임스여... 네놈은 결국 적색 공포(공산화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르치는 것은 물론, 네 아버지이자 전임 총리대신이었던 제임스 아틀라스 쿼크의 이름마저 더럽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놈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일을 터뜨리게 된다면 루시드 인들이 이 땅에서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내 목숨만은 건사하게 될 테니, 어디 한 번 내가 부리는 꼭두각시 인형 노릇을 열심히 해보려무나.
빌뇌브는 노련한 정치가로서 정치 공작을 유려하고도 폭넓게 구사하여 적 진영에 혼란을 일으킬 줄 알았고, 예지 능력자라던 칼디르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를 막아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