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파시스트 돌격대(SA): 5화
돌격대의 정보 전파 활동은 인민당의 하부조직이나 국방군 현지부대, 기타 민간인들에 그치지 않고 엄연한 적군인 루시드 군 진영에서도 이루어졌다. 아군에게 총독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달해줌으로써 사기를 올릴 수 있다면, 같은 정보를 적군에게 알려주면 사기 하락을 기대할 수 있을 터.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돌격대가 앞서 언급된 세 무리에는 ‘총독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비명횡사했다는 건 사실 부총독의 뻥카고, 실제로는 그놈이 총독을 쳤음.’이라고 진실을 알려준 데 반해, 루시드 군 장병들을 향해서는 처음부터 가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대신 ‘아틀란티스 영내 공산주의자들이 총독을 암살했다!’는 부총독 오피셜만을 말해주었다.
“너희 총독은 이미 우리의 손아래 목숨을 잃었다! 항복하라!”
범혁이 돌격대를 대표하여 오랫동안 굶주린 듯 피골이 상접하고 군복에 검은 때가 묻은 루시드 군 장병들을 향해 위엄차게 선언하였으나, 어차피 머나먼 안드로메다은하에 고향을 두고 온 루시드 군으로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기에 ‘좆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그 누구라도 이 근처 동네에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놈이 와서 ‘항복하라!’고 외치면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놈’이 범혁같은 엄청난 근육 떡대고, 자기네는 기아에 시달린 끝에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아... 진실을 말해주면 충격을 받을까봐 일부러 수위조절을 해준 것이거늘... 범혁은 속으로 항복하기를 거부하는 루시드 군을 비웃으며 부총독 겸 루시드 원정군 해군 부사령관이던 클로세가 사실은 루시드 육군에서 꽂아 넣은 스파이였으며, 그가 해군 출신인 발틱을 쓰러뜨리고 그걸 엉뚱한 놈들에게 뒤집어 씌웠노라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클로세 부총독님이... 망할 땅개놈들이 꽂아 넣은 스파이였다고요...?”
“아이고, 맙소사! 그러면 우리 당장 내일 먹을 식량은 어디서 보내준다냐! 이제 식량이 다 떨어져서 사람들끼리 잡아먹고 살아가야 할 판인데...!”
루시드 군 장병들은 돌격대가 물어다 주는 소식을 인민당원이나 국방군 장병들보다 더 잘 믿어주었는데, ‘아랫것’에 불과한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부총독이라면 총독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거기에다가 쿠데타의 중심에 서 있는 클로세가 루시드 해군과는 불구대천지원수인 육군 소속이었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으니, 뭐...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육군 부대를 찾는 대신 해군 육전대부터 찾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 망할 루시드 놈들의 머릿속에는 아무래도 ‘땅개 새끼들한테 고개를 숙이고 살 바에는 차라리 적군인 아틀란티스 국방군에 항복함. ㅅㄱ’라는 알고리즘이라도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직 이렇다 할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잘 믿어주면 오히려 우리가 당황스럽다, 얘들아? 루시드 군 장병들이 생각보다도 더 돌격대의 말을 잘 들어주어서 범혁은 잠깐 자신이 오히려 그들이 쳐둔 함정에 걸려들고 만 것이 아닌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그렇다, 제군! 클로세는 너희 나라 육군 수뇌부에서 해군에 심어놓은 비수였으며, 이제 그 비수는 발틱 총독을 향했다! 이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중 선동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범혁은 루시드 군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내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더욱 당당하게 외쳤다. 조금도 떨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와 과장된 퍼포먼스는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호소력이 깃들어 있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는 윗분들이 억지로 끌고 나와서 여기까지 온 것뿐입니다!”
“항복, 항복! 저도 그저 강제로 안드로메다은하에서 이 먼 곳까지 끌려 나온 죄밖에 없습니다! 전쟁범죄 같은 건... 저지르지도 않았으니 제발 제게 먹을 걸 주십시오...!”
“저, 저도...! 먹을 것만 주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불겠습니다!”
돌격대는 루시드 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아틀란티스 인인 그로즈니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고서 상당한 숫자의 루시드 군에게서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라고 병법에서도 일렀으니, 이는 고스란히 돌격대의 공훈이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파시스트당의 당세 확장으로까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받아들인 투항병들을 그대로 돌격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는 대신 고기방패...라고 하면 너무 노골적인 표현 같으니 형벌부대라고 부르자. 아무튼, 그들을 형벌부대로 전용한다면 돌격대가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인명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현재 아틀란티스 영내에 주둔 중인 루시드 군의 상태를 봐서는 머릿수를 채워주는 이상의 역할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들의 조국인 루시드 제국보다 더 좋은 조건을 내걸고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영양 상태와 무장을 개선해주면 몇 년 후쯤에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으로 키워낼 수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 키워낸 루시드 군 투항병 세력에게 돌격대가 통째로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돌격대 자체의 화력도 계속해서 키워나갈 필요는 있었다. 이를 위해서 범혁은 다수의 루시드 군부대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뒤부터 주먹질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깡패들보다는 머리가 좋은 놈들과 ‘인간 비대칭 전력’이라 부를 만한 초능력자들을 돌격대에 편입하는 데 열중했다.
초능력자‘들’이라고 해봐야 범혁 하나를 당해낼 수 없을 정도였기에 그의 호소력 있는 대중 연설 한 방에 넘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범혁은 칼디르의 도움을 구해 쓸 만한 초능력자들을 찾아가서 도저히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도 기어이 설득(물리)시킴으로써 칼디르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으응? 지금은 일개 군인에 지나지 않는 칼디르의 신임을 얻어서 어디에다 쓰냐고? 미래의 총통 겸 국민 파시스트당의 당수님께 미리미리 잘 보여 놔야 나중에 한자리 꿰차고 않지 않겠느냐? 아직도 칼디르 코인 안 산 흑우 쉑들 없제? 야, 나중에 떡상했을 때 사려고 들면 너무 비싸서 살 수도 없으니까 살 생각 있으면 지금 풀로 땡겨 놓는 게 좋을 거다!
“그, 금발벽안 빗치가 우리의 머리라니... 이건 인정할 수 없어!”
“맞아! 범혁 대장이라면 몰라도 저런 호리호리한 계집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어! 당장 꺼져버려!”
다만 범혁의 생각과는 다르게 모두가 그처럼 장기적으로 보고 투자할 줄 아는 건 아니었기에, 돌격대의 규모를 급격히 확장하면서 그런 말이 아예 안 나올 수는 없었다. 칼디르의 체중이 39kg, 범혁의 체중이 190kg... 약 4.871칼디르=1김범혁이라는 공식이 나오니 ‘호리호리한 계집’이라는 표현이 아주 틀린 건 아닌데...
니들이 지금 입고 있는 제복이랑 들고 있는 무기, 죄다 그 ‘호리호리한 계집’이 만든 물건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니? 아니, 당장에 칼디르의 도움이 없다면 같은 인간끼리 만나도 출신 행성이 다르면 말이 안 통해서 돌격대의 규모를 지금과 같은 속도로 키울 수 없다는 것 정도도 계산이 안 되나?
그래도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어찌 대응할지 궁금했던 범혁은 당수를 향한 일부 돌격대원들의 ‘주제넘은’ 도전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방관하기만 했다.
15년간 살아오면서 딜링 쪽으로는 스텟을 안 올리고(그야, 안 올려도 이미 MAX인걸?) 탱킹, 서폿 쪽으로만 스텟을 오지게 올렸다는 칼디르는 돌격대원들의 이 ‘발칙한’ 반항에 직접 손을 쓰...지는 않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튕겨 이 상황을 대신 해결해 줄 만한 존재들을 불러냈다.
“커, 커억... 이것들은... 또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정정당당하게 나와 직접 맞붙... 크아악!”
칼디르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신호였는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전투용 안드로이드들- 그녀의 작명법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와 ‘안드로이드’를 합하여 만든 단어인 ‘아틀레노이드’라고 불러야 하는 것들-이 돌격대 창설 첫날부터 소동을 일으킨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놓았다.
“어떠십니까... 이제 저를 당수로 인정하실 마음이 드십니까? 만일 그렇다고 하시면 치료해드리고, 오늘 일도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반항자들의 머리에 군홧발을 떡하니 올려놓고 나긋나긋한 투로 말하는 칼디르의 모습에서는 펨섭 암 노예의 기척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제삼자가 그 장면만 딱 떼놓고 보면 칼디르=펨돔이라고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진실은? 응~ 펨돔 그런 거 없고 그 두꺼운 군복 속에 속옷 하나 걸치지 않고 자궁 문신 큥큥거리면서 지금 당장에라도 섹스를 하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은 걸 겨우 가라앉히는 중인 마조 암퇘지야~
“본인 방금 칼디르가 초능력 잃고 마조 암퇘지라는 사실마저 발각당해서 떡대 좋은 돌격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윤간당하는 상상함 ㄷㄷ 특히 골수 나치인 범혁이한테 교정 강간 임신확정 강제 질내사정 당하는 내용의 망가 어디 없냐?”
칼디르와는 이해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아리아가 무대 뒷편에서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리고 칼디르로부터 부당수 겸 부총통 역할로 간택 당한 범혁은 ‘사정을 모르는 제삼자’에 해당했다. 이야, 나도 190cm면 작은 건 아닌데... 3m짜리 전투용 안드로이드에는 비교도 안 되는구나? 뭘로 만들었는지 총에 맞아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 로봇들에게 얻어맞았으니 놈들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겠지.
그래, 당수쯤 되면 체통을 지켜야 하니 반란자들을 직접 처단하기보다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처리하는 편이 낫지. 범혁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칼디르식 대응법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쨌거나, 칼디르가 그런 식으로 초반부터 소동을 확실하게 진압하고 나서준 덕분에 돌격대는 그 뒤로도 큰 탈 없이 수많은 행성에 영향력을 뻗쳐 나갈 수 있었다. 칼디르는 정치깡패 조직인 돌격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한 입장 상 소동을 진압한 뒤에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범혁의 뒤에 서서 배후에서 돌격대를 조종하는 길을 택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돌격대원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칼디르는 정부 쪽이랑 연락을 취하면서 윗대가리들이 시키는 일을 받아와서 그걸 파시스트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하니, 어느 순간부터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쪽으로 빠져서 무엇인가를 하면서 꼼지락대는 것을 범혁은 이해해주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