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파시스트 돌격대(SA): 3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이 있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칼디르는 그 자신의 조국을 위해 여러 가지 정보와 기술을 전수해주면서도 그로즈니와 서기장이 보는 앞에서 제4의 군종을 신설하고 그 명령권을 자기한테 달라고 한 것을 빼면 이렇다 할 요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는 그녀의 도움을 받는 많은 이에게 마음의 짐을 지워줌으로써 대놓고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동시에 앉은 자리에서 그 자신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길이었다.
“위원장님, 제가 검토해본 바로는 일전에 하명하신 대로 인민당의 하부조직과 민간인들에게 클로세 부총독이 발틱 총독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파하기에는 기존 첩보부의 ‘반동성’이 심히 의심되어...”
“그러한가? 그렇다면 자네 뜻대로 이 일에 적합한 인재를 선출하여 새로운 첩보부를 구성해보도록 하게나. 자네가 정말로 아카식레코드 능력자라면, 조국과 인민 모두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
그래... 사실 그녀가 군인 본연의 임무에만 집중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고, 다른 군인들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 고위 정치가들과 대화할 기회만 생겼다 하면 그들의 귓속에 끊임없이 반 칼디르 성향을 띤 이들에 관하여 음모와 불안을 속삭임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친위세력의 구축. 아직 기존 조직을 친 칼디르 성향의 인물들로 완전히 갈아치우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대로 몇 년 정도만 기다리다 보면 기존 조직을 어느 정도는 상당히 대체할 수는 있으리라.
뼛속까지 파시즘으로 물들어 있는 범혁을 데려다가 이 일을 맡긴다면 기존 조직을 사상적으로 감화시키는 작업만 할 때보다 더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겠지. 칼디르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위원장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만 기억하고, 지금처럼만 해주게.”
칼디르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모두 거짓부렁이었다면 오히려 그녀 자신의 신뢰도만 깎아 먹고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녀는 미륵을 자처하던 누군가와는 다르게 실제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초능력자였고, 자신의 발언을 입증해 줄 만한 증거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찾아낼 수 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도 한 세 번 정도 반복되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일진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와 함께 진실이 몇 번이고 제시되다 보면 나중에 가서는 개중에 거짓이 ‘조금’ 섞여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의심을 받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케인스를 비롯한 정부의 고위층은 이 수법에 그대로 넘어갔다.
뭐, 공산주의 성향을 짙게 띄고 있는 정부 고위층과는 다르게 실무진 라인에서는 반공주의가 주류인 것도, 몇몇 반공주의자들이 고위층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운 없이 함께 엮어 들어간 경우가 아니라면 억울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칼디르가 집권 후에 반 칼디르 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면 정부 고위층 선에서 내쳐진다고 하더라도 파면에서 끝날 테니 지금 내쳐지는 편이 그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기 생각과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범혁을 만나러 지구로 출장을 나섰다. 원래는 지구에서 만나야 할 사람(여자)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녀가 섹스 타임에 너무 시간을 쏟는 바람에 그 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에 우선 범혁이라도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칼디르, 이게 도대체 몇 주 만이냐? 하도 안 와서 그사이에 어디서 객사라도 한 줄 알았지 않냐!”
그녀는 지구로 출발하기에 앞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범혁만이 알아볼 수 있는 메시지를 남겨 접선 장소와 시간을 정하였고, 예정된 시각, 예정된 장소에 홀로 서 있던 범혁은 칼디르가 순간 이동 능력으로 지구로 넘어오자 오랫동안 보지 못한 절친을 상대하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그리고 실제로도 칼디르는 그와 처음 만난 뒤로 몇 주씩이나 그를 만나러 오지 않았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높으신 분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시간이 좀 소요된 것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섹스에 정신이 팔려서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소모했으니. 일단 사과부터 박고 시작해보실까.
“죄송합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이 있어서 찾아뵙지 못했던 것 같군요... 그러니까...”
“칼디르, 서로 나이도 같은데 꼭 그런 식으로 존댓말을 써야겠어? 이거, 굉장히 섭섭해지는걸... 뭐, 굳이 그렇게 내 앞에서 존댓말을 써야겠다면 상관은 않겠지만, ‘귀하’ 같은 오글거리는 호칭보다는 내게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직함을 붙여주면 좋겠는데.”
“...부총통님.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오늘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부총통, 부총통이라... 그러면 여기서 ‘미래의 총통’이 누가 될지는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네.”
범혁이 언급한 대로, 칼디르는 가부장제 문화라는 장벽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적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거나, 비선 실세 정도로 만족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기 몸 하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건사할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고 넘어갈 바에는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가부장제 문화라는 이름의 장벽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고, 한때 여성 영웅으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최후에는 조국의 칼날 앞에 쓰러진 잔 다르크와는 정반대로 그녀가 무리하게 정권을 장악하려 들 때 극심한 저항이 일어날 것은 명확한 바... 이것이 그녀가 대숙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향하는 사회는 단 한 명의 최고 지도자 내지는 소수 엘리트 그룹의 지도 하에 일치단결한 전체주의 사회였고, ‘반대파’란 그저 단결된 ‘전체’를 흐리는 ‘불순물’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히 반 칼디르파가 꼴 받게 했다는 이유로 숙청을 결심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칼디르는 높으신 분들과 함께 일하면서 있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으면서 언젠가 자신이 행할 대숙청의 당위성을 설파하였고, 범혁은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가끔 추임새를 넣기만 할 뿐 따로 말을 하지는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네가 만든 선전물을 읽어보면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만, 바쁘게 지내기는 했나 보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앞으로 제가 정부와 군부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대파의 도전을 받게 될 텐데, 저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범혁은 칼디르의 말이 끝난 뒤에야 생각에 잠긴 말투로 물어보았고, 이에 칼디르는 ‘네가 나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고, 겸사겸사 반대파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으면 한다.’는 식의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가급적 내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다’는 칼디르의 신념은 매우 모호한 것이어서, 그 자신의 초능력으로 누군가를 해치는 건 안 될지라도 대량 살상용 병기를 찍어내는 것은 되고, 다른 사람이 그 병기를 가지고 적군을 쓰러뜨리는 것도 되고, 자기 명령을 받는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되고... 아무튼 그랬기에 그토록 노골적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으음... 내 손에 피를 묻혀야만 파시스트당의 세력을 키울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네가 가지고 온 용건은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부총통님. 부총통님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뿐만 아니라, 그 피를 어느 정도 덜 수 있는 일까지 함께 가져왔습니다.”
범혁이 이 역할을 순순히 맡겠다고 나서자, 이에 칼디르는 그에게 좋은 역할까지 맡기기로 했다. 인민 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구하거나, 필수물자를 나누어주거나, 모두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루시드 인들 및 친 루시드파 문벌귀족 일당의 재산을 탈취하여 모두에게 뿌려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예부터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고,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식량을 베풀어주고, 죽을 위기에 구한 사람을 구해주는 것만큼 지지자를 확보하기 좋은 방법도 없었다. 다만 자기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미동도 하지 않던 범혁은 막상 칼디르의 입에서 의적단 제안이 흘러 나오자 쓴웃음을 지었다.
“의적질이라... 그동안은 의적단을 자칭하는 사람들을 보고 참 지지리도 할 짓도 없다고 비웃어 왔는데, 이제는 내가 의적질을 하게 생겼군.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구하려면 네가 말한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는 있으나 그 배움이 고등학교에 그쳐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데 도움이 될 법한 백신이나 치료제 따위의 개발에는 문외한이던 범혁은 그 자리에서 칼디르로부터 활동에 필요한 자료들을 넘겨받았다.
그래도 일단은 정부에 고용된 사람으로서 범혁은 케인스가 맡겨준 부총독의 쿠데타 건에 관해서도 정보를 받아볼 수 있었고, 이는 아직 일반 대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따끈따끈한 빅뉴스였다.
“아무리 총독이 마음에 들지 않기로서니, 자기가 그 자리에 올라간다고 없던 대책이 나올 리도 없는데 부총독씩이나 되는 놈이 쿠데타로 총독을 날려버렸다니, 그게 말이나 돼?”
여태까지는 칼디르가 무슨 말을 하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범혁이 처음으로 딴지를 거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장 오늘부터 제가 맡겨드린 일을 진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 그동안 사람들도 어느 정도 모아 놨으니까.”
결국,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적 대화는 하지 않고 일 얘기만 하다가 바로 일에 들어갔다. 범혁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칼디르도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제삼자가 보면 절로 답답해질 광경이었다.
「미연시에서 남캐로 시작했는데 초절정 여주에 레즈비언 설정이 붙어 있어 공략이 불가능한 건에 관하여」... 무슨 삼류 라노벨 제목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는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을 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