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파시스트 돌격대(SA): 1화
한 차례 고비는 넘겠지만, 칼디르는 그 뒤로도 절대 평범한 꼴로 출근할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는 슈가가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온몸에 키스 마크를 새겨주고 그대로 출근할 것을 강요한 바 있었고, 또 하루는 공주님께서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슈가가 그랬던 것처럼 군데군데 키스 마크를 남긴 다음에야 보내주셨다.
“우움... 파하! 이게 마지막이야. 마키 너, 오늘 온종일 씻을 생각은 하지도 말고 내가 정성스럽게 새겨준 키스 마크를 지고 일해. 알았지? 하나라도 지워지면 한 개에 채찍질 100대씩이야.”
“땀 때문에라도 퇴근 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살려올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아이참, 불가능할 것 같더라도 일단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암캐의 도리지. 아니면 또 배빵이 마려운 거야?”
황급히 출근하는 칼디르의 모습을 살펴보니 공주님의 키스 마크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 뒤쪽, 쇄골, 젖꼭지 주변, 겨드랑이, 팔, 배꼽, 자궁 문신 주변, 등, 허리, 사타구니,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 할 것 없이 새겨졌고, 그나마 밖에 보일 수밖에 없는 얼굴과 손 정도만 별다른 흔적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과연 칼디르가 아침에 기껏 차려입은 옷을 무력하게 벗겨진 다음 범해지지 않고, 키스 마크를 각인 당하지 않고, 속옷은 압수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출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지금 하는 짓을 봐서는 영영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적어도 직장 안에서만큼은 꽤 오랫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랑의 개입으로 다 함께 합의를 본 뒤에는 적어도 안에 딜도를 꽂아 넣고 다니라는 명령만큼은 내려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네... 목 뒤쪽에 뭔가 불그스름한 것이 보이는데... 어디서 다치기라도 한 겐가?”
“예에에? 아, 이것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어디서 다친 건 아닙니다, 절대로요!”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건가. 흠흠, 어쨌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세.”
취소. 칼디르는 행정청에 출근하여 케인스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뒷목에 새겨져 있던 키스 마크를 들킬 뻔했으나, 별 거 아니라고 둘러대면서 속으로는 공주님께 채찍질 당할 각오를 하고 손으로 뒷목을 벅벅 문질러 닦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넘긴 거... 맞겠지...? (군복 카라로 가리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케인스로서는 그냥 한 번 해본 말이었을 뿐인데, 칼디르가 과민 반응하는 것을 보고는 따라서 당황했다가 이내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고는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갔다. 오늘 케인스가 가져온 일거리는 칼디르가 이전에 맡지 않았던 새로운 일이라기보다는 으레 하던 일에서 살을 덧붙이는 격의 일거리였다.
“내가 자네를 알게 되고, 자네에게 몇 가지 일을 맡긴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내 기준에 따르면 자네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주고 있네. 우리 정부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는 영역하에서 이루어지는 재건 사업에 속도가 붙은 거야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에는 언어 문제로 골치를 썩여 왔는데... 자네가 딱 좋을 때 와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케인스가 칼디르를 치하하면서 말하기를, ‘칼디르 플랜’은 하던 대로 계속하기만 해도 당초 목표의 몇 배를 초과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오늘은 ‘정부의 입’으로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라고 했다.
칼디르 개인적으로는 딱히 언어 때문에 곤란을 겪은 일이 없었지만, 실제로 구사할 줄 모르는 언어가 없는 칼디르가 와주기 전까지 아틀란티스 정부는 언어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골치를 썩여 온 바 있었다.
언젠가는 의무교육을 도입하고 전국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공용어를 보급해야겠지만, 루시드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의무교육 도입이나 공용어 보급 같은 어마어마한 돈이 깨질 일에 손을 대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돈 때문에 언어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반 루시드 저항운동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정부와 현지에서 실제로 루시드 군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다가 열악한 통신망까지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멀게는 수만 광년씩 떨어져 있는 정부와 현지 부대 사이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괴리가 생기는 것은 두고만 볼 수는 없었는데, 가문 땅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칼디르가 와준 덕분에 이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자네는 ‘정부의 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자네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네. 그러니 조만간 실행에 옮겨질 비스마르크 대공세에 앞서 사전 작업을 수행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는데... 아, 비스마르크 대공세에 관해서는 육군원수에게 들었을 테니 내 따로 설명해주지는 않겠네.”
처음에 공주님이 뒷목에 새기신 키스 마크를 들킬 뻔했을 때 잠시 목소리가 높아졌던 것만 빼면, 칼디르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체로 케인스가 하는 말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하면서 오늘은 또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만을 계산해 보았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케인스의 발언에는 약간의 오류였다. ‘정부의 입’이라고 할 만한 주필이나 대변인 따위의 자리에는 칼디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고, 그녀는 단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하고 ‘조언’을 해줄 뿐인 존재였다.
서기장과 케인스가 동시에 그녀를 총애해주다 보니 ‘사실상 정부의 입’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을 뿐. 하기야 그건 어디까지나 정치군인이라는 비판을 피하려고 취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좋을 소리다. 여기서는 잠자코 케인스가 떠먹어주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거다.
“예, 위원장님. 비스마르크 대공세에 관해서는 육군원수 각하와 이미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더 빠르겠군. 자네는 비스마르크 대공세의 실행에 앞서, 현지 국방군 부대 및 우리 아틀란티스 인민당 산하의 조직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해주면 되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장 해줬으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네.”
케인스는 그 나름대로 첩보 선을 움직여본 결과, 클로세 부총독이 여태까지 지배자로서 군림해온 발틱 총독을 상대로 일으킨 쿠데타의 내막에는 ‘총독이 아틀란티스 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으므로, 이 통신을 수신하는 부대는 즉시 지구로 집결하라.’는 거짓 군령이 내려진 사실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아틀란티스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아틀라인 서기장으로 대표되는 아틀란티스 인민당 내지는 인민당과 협력 관계에 있는 아틀란티스 공산당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정작 인민당에서는 휘하 조직에게 발틱 총독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일이 없었고 공산당에 물어보아도 모르겠다는 반응만이 돌아왔다.
“발틱 총독 암살이요...? 글쎄요. 현재 공산당의 여력으로는 총독부 접근은커녕 태양계 진입조차 버거운 형편입니다만... 총독 암살 건이라면 인민당 쪽 조직에서 행한 일이 아닌지요?”
총독 암살 건에 관한 정보를 수령한 공산당 관계자는 오히려 인민당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케인스에게 그렇게 반문하였다. 케인스도 혹시나 싶어서 아틀라인 서기장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그런 명령을 내린 일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현지 조직에서 중앙당의 명령을 받지도 않고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보기에는... 중앙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공산주의 조직의 말단에서 멋대로 총독 암살 같은 큰일을 벌렸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현지에서 멋대로 그런 짓을 벌이려고 들어도 중앙의 지원이 없다면 실행에 옮기기란 요원한 일일 터.
어쨌거나 이것은 아틀란티스 내 공산주의 세력에게는 호재임이 분명했다. ‘식민지배의 총책임자인 총독마저도 저항세력의 손아귀에 목숨을 잃을 정도’라면 저항세력을 억압해야 할 아틀란티스 총독부의 지배력은 한계까지 부닥친 상황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게 거짓이든 진실이든 간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총독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였으니 말이다.
모든 아틀란티스 인의 증오를 한몸에 받던 발틱 총독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소식(부총독 오피셜)을 현지 조직과 민간인들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인민당의 당세를 더더욱 굳건히 하고, 오랜 전쟁으로 지친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비스마르크 대공세의 실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저 더러운 루시드 놈들의 수괴이자 퇴폐한 자본-제국주의의 악마, 발틱 유니온 워싱턴은 우리 아틀란티스 인민당의 용맹한 전사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20여 년간 이어져 온 반 루시드 저항운동이 드디어, 마침내 마지막 장에 접어든 것이다! 인민당의 동지들이여, 그리고 아직도 저항운동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수많은 이들이여! 저 간악한 악마들에 맞서 궐기하라! 투쟁하라!’
대강 이러한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흩뿌린다면 못해도 수십조 명에 달하는 군세를 모아 아직도 총독부의 발아래 놓여 있는 지구를 해방하고 ‘아틀란티스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었다.
“위원장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저는 군인으로서 마땅히 따를 뿐입니다.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으음, 좋은 태도로군... 그러면... 그렇게 해주겠는가?”
오랜 전쟁으로 지친 이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 이는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칼디르로서는 자신의 이름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길이었으므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키스 마크를 들킬 뻔했던 일도 까맣게 잊고서.
그리고 앞으로는 경제 정책의 성공적 달성을 명목으로 진행해온 정치선전 및 행정 시스템 번역뿐만 아니라 현지 부대에 전달할 명령을 번역하는 역할까지 맡기로 했다. 아틀란티스 내에는 행성계 숫자만큼이나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바, 번역을 핑계로 하여 교묘하게 명령서 원본에는 없는 글귀를 적어놓음으로써 파시스트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을 법했다.
여기서는 케인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체하고, 뒤에서는 인민당의 당세를 흡수하여 향후에 나를 당수로 하여 창당될 예정인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의 것으로 만든다면 ‘아틀란티스 라이히(Atlantis Reich)’를 이루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었다.
한쪽은 아틀란티스의 공산화를, 또 다른 쪽은 파시스트화를 꿈꾸는 동상이몽의 현장. 하지만 두 사람은 일단 겉으로는 사이좋게 악수하며 결의를 다졌다. 그 방법은 다를지라도, ‘조국의 독립과 재건’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