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암캐 재사회화: 6화
칼디르와의 이야기를 끝마친 뒤 방문을 닫고 다시 자기 집무실로 돌아가려던 그로즈니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으음... 어딘가 이상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렇다고 쉬기로 한 날에 와준 사람을 다시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도 없고...
군 생활 106년을 날로 처먹은 건 아닌지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칼디르에게서 수상한 기운을 느꼈지만, 설마하니 칼디르가 바지를 벗고 애널 플러그를 꽂은 상태라서 그랬던 것이라는 추측은 감히 하지 못했다.
“분명 평소 상태 그대로였던 것 같은데... 왜 이질감이 느껴진 걸까...”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그래, 역시 기분 탓이겠지. 나이가 드니까 나도 감각이 흐려지는 게야. 그는 결국,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집무실에 가는 동안에 그는 오늘 칼디르와 나눈 대화에 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미래 예지 능력으로 엿보았다는 루시드 군의 행보, 그리고 아카식레코드 능력으로 알아냈다는 루시드 군의 현 상태. 칼디르의 이야기나 맞나 틀리나 알아보기 위해서 모르모트를 자처하여 전장에 뛰쳐나간 카이프에게 떡밥을 던져준 바로는 칼디르가 알려준 것들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 모를 위험을 고려하여 칼디르의 정보를 비교적 소규모의 작전에만 활용했는데, 점점 큰 건에 적용해나가기 시작해도 딱딱 들어맞는 것이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계속해서 맞아 들어가니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사는 탓에 미신에 홀리기 쉬운 하급 장교, 부사관,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 정도였다.
“예언자다, 예언자가 나타났어! 10여년 만에 드디어...! 신께서 정말로 우리나라를 저버리신 건 아닌 모양이야...! 우린 이제 이긴 거나 다름없어!”
“예언자라니... 그러면 그 소문의 칼디르라는 처자가 바로 그 예언자라는 말인가?”
“아니, 이 사람도. 신께서 하시는 일이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어쨌거나 신께서도 우리의 편에 서셨으니, 이번에는 저 더러운 루시드 놈들을 국경 바깥으로 밀어붙일 수 있겠지?”
“그래, 그 말이 맞네. 신께서는 성별을 가지지 않으시고, 신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사랑하시니 여인의 형태로 예언자를 내려보내신 걸 수도 있지.”
“제발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네. 나는 이제 고향 행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전쟁이 빨리 끝나야 집에서 나를 기다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군 상층부는 칼디르의 호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경계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면, 하층부에서는 이미 ‘신께서 드디어 우리 제국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예언자를 보내셨다!’는 소문이 돈다나 뭐라나... 이러한 소문에 대하여 그로즈니는 국방군의 최선임자로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자신도 놀라움을 아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언젠가 그로즈니는 어떤 작전을 세울 때는 반드시 칼디르의 정보부터 검토하고, 어느 부대의 무기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칼디르가 제작한 무기부터 우선적으로 공급해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OKW 내부 보수파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칼디르는 차근차근 아틀란티스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느 하루는 평소처럼 칼디르가 제공해준 정보를 검토하다가 문뜩 ‘적군에 관해 이토록 상세하게 알고 있다면 아군에 대해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에게 장차 실전 부대를 맡길지 말지 떠보는 겸 오늘 이렇게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비스마르크 대공세.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재 아틀란티스 국방군 내의 수많은 기밀 정보 중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이 작전 계획에 관해 칼디르 앞에서 털어놓은 기억이 없었고, 최선임자가 그렇게 말을 아끼는데 다른 사람이 주제넘게 나서서 떠벌리고 다녔을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면 칼디르 그 자신의 말대로 그녀는 정말로 아카식레코드 능력자이거나, 적어도 국방군의 최고급 기밀 정보를 간단히 입수할 수 있는 첩보 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뭐, 그녀가 스스로 아카식레코드 능력자라고 소개한 말을 영 허황한 말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가 놓치게 된다면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내 곁에 두고 중용해야겠어.”
그는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마르크 대공세 계획에 관해 말해준 적도 없는데 세세한 부분까지 꿰고 있는 걸 봐서는 실전 부대를 맡길지 말지 정하는 문제도 조금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당장에 칼디르도 조국을 위해 공헌하는 대가로 금전을 요구하는 대신 ‘제4의 군종’을 신설하고 그 명령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던 바 있으니, 실전 부대를 맡기면 그 부탁의 절반은 들어주는 셈이 된다.
그로즈니는 추후에 기존 대공세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겸 그녀에게 실전 부대를 맡겨보고 그때 가서도 일이 잘 풀리면 아예 새로운 군종을 신설하고 그 명령권을 달라는 그녀의 바람까지도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칼디르를 아군으로 붙잡아 둘 수 있다면 값싼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국방군 장교단의 시선이 칼디르에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니, 한 개 집단군을 구성할 정도의 인력은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요새 칼디르가 케인스 위원장을 비롯한 정치가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군인 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개입하고, 때때로 정치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는 소문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칙대로 하자면 군인이 지나칠 정도로 정치가와 빈번하게 접촉하고,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국방군도 결국은 사람 사는 동네다. 어느 정도 유도오-리 있게 처리할 줄도 알아야지,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니 뭐니 너무 깍듯하게 적용하려고 들면 괜히 아까운 인재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정치가들과 너무 자주 만나는 것 같다는 말도 잘 생각해보면 홍일점이다 보니 눈에 띄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고, 정치가들이 보기에도 칼디르는 군바리로 썩혀 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라 자주 호출하면서 이것저것 조언을 구하다 보니 그녀가 정치에 개입하려 든다는 이야기가 돌게 된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원리원칙대로 살아온 내가 유도리 있게 일을 처리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자. 그로즈니가 그렇게 칼디르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도 넘어가 준 덕분에 그녀에게도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그로즈니를 돌려보낸 뒤에 찾아오는 군인들과 과학자들이 물어보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은근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기회 말이다. 오늘 그와 대화하면서 조만간 자신이 실전 부대를 맡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칼디르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최대한 양성함으로써 자신이 맡게 될 수도 있는 실전 부대에 꽂아 넣고자 했다.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적대적인 말투로 쏘아붙이던 이들도 이제는 나를 앞두고 부드럽게 대해주니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인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내게 적대적인 자들이야 나중에 가서도 나와 척지게 될 자들이니, 그런 자들이야 굳이 거두어들이려고 공을 들일 필요도 없고 나중에 죄를 뒤집어씌워서 한꺼번에 숙청해버리면 될 일이다.
다만 지금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내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들이 유용하기에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것일 뿐이지, 나를 ‘주군’으로 여기고 충성을 바치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실전 부대를 구축하고 한솥밥을 먹으면서 진정한 친위 세력으로 길러낼 필요가 있었다.
“으으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바지를 벗은 채로 가죽 의자에 앉아 애액을 내뿜으면서 할 법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마키야. 다 좋은데,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안 그러니?”
어느덧 찾아온 사람들을 다 쳐내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칼디르를 향해 화면 너머의 공주님께서 비웃음을 보내셨다.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애써 진지한 얼굴을 연기하다가 혼자 남게 되었을 때는 애널 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묘한 감각에 금세 풀어져 버리는 칼디르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대강 일 다 끝냈으면 이만 퇴근하지 그러니? 오늘은 어차피 쉬기로 한 날인데 그렇게 빡세게 일할 필요 있어? 아니면 끝끝내 일하기를 고집하다가 나한테 더 심한 짓 당하고 싶은 거야?”
“아, 아니에요, 공주님... 지, 지금 퇴근할게요... 지, 지금... 간다구요...!”
물론 칼디르의 한심한 작태에 비웃음을 날려주는 것과 화면 너머 칼디르의 보지를 보고 꼴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에, 공주님께서는 칼디르에게 조기 퇴근 명령을 내리셨고 그녀는 이에 따라 순순히 바지를 갖춰 입고 자리를 나섰다.
“아, 우리 마키... 빨리 보고 싶어. 빨리 우리 마키랑 보지 끈적하게 비벼대고 싶어... 이제는 늦게라도 퇴근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겠지?”
“네에, 공주님... 앞으로는 몇 주씩 직장에만 있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며 방을 나서는 칼디르를 보며 공주님께서는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 문뜩 기가 막힌 생각을 한 가지 해냈다. 그래, 우리 마키는 투명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기껏 차려입은 옷을 또 벗고 알몸으로 다니면서 OKW 내부를 소개하되 투명화 능력을 쓸 수 있게 해주면... 엄청 꼴릴 것 같은데?
이미 남자 화장실과 집무실 안에서 파렴치한 짓거리를 벌인 칼디르가 알몸으로 OKW 건물 안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 악명이 더 해질 일은 없으니, 공주님께서는 마음먹은 대로 말을 내뱉으셨다.
“그 옷, 다시 벗어. 완전한 알몸 상태로 건물 안을 돌아다니면서 내게 OKW가 어떻게 생겼나 구경시켜줘. 투명화 능력은 쓰게 해줄게. 할 수 있겠지?”
“네에에...? 그, 그러면... 집에 가는 시간도 더 늦어지게 될 텐데...”
“아이 씻팔... 그거 잠깐 한다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아주 늦어질 것도 아닌데, 투명화 상태로 ‘방어의 사자’ 얼굴 앞에서 자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순순히 내 말을 따르는 편이 좋을걸?”
공주님의 협박 효과는 아주 대단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 탈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칼디르는 결국 또다시 옷을 벗고 완전한 나신이 되어 심판대 앞에 서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