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8화(END)
가지고 있는 기술 관련 자료들을 전송해주면서는 모든 공돌이의 꿈과 희망으로 추대받고, 지옥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면서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파시스트당의 모습을 꿈꾸던 칼디르는 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또다시 케인스에게 붙들려야만 했다.
집에 나온 지 벌써 일주일은 족히 되는 시간이 경과한 이상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하는 것은 영 좋지 못했지만, 내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 기술 이전 문제 정도로 부르는 거라면, 그들이 내가 만든 인공지능을 신뢰만 해준다면 인공지능 로봇에 짬 때릴 수도 있는 노릇인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다.
뭐, 저 사람들이 내게 의지해주면 의지해줄수록 내 영향력을 키우는 일도 수월해질 테니 영 손해만 보는 거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설마하니 정부의 공산주의자들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나중에 나와 저들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내치지는 못하겠지. 혹은 저들의 전체주의적 특성을 파고들어 아예 파시스트로 전향시키는 방법도 있고.
“칼디르, 쉴 새 없이 사람들을 구하고 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다시 부르게 되어 미안하네. 실은 자네가 맡아줬으면 하는 역할이 있어서 불렀네.”
케인스는 칼디르가 인민정부 청사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를 공순이로만 굴릴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불렀다.’는 식의 말을 했다. 물론 말의 형식은 그보다는 완화되었지만, 그 속에 감춰진 내용은 그러했다.
이미 칼디르 제 테라포밍 장치의 뛰어난 성능을 보았을 케인스가 칼디르에게 또 다른 기대를 품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그로즈니에게도 전달된 바로 그 정보- 총독 유고 사태-였다. 인민정부 내부에서도 지금 당장 대공세를 개시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었지만 말이다.
“자네가 어떻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따로 묻지 않겠네. 자네도 국방군의 일원으로서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하는 경로가 있겠지. 나는 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네에게 중책을 맡길 생각이네.”
“정부에서도 당장에 대공세에 나서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 부분은 조금 아쉽군요.”
“저쪽도 오랜 전쟁으로 지친 건 우리와 마찬가지라지만, 우리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들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니까. 뭐, 기다리다 보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두 번째로 케인스는 칼디르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언어 번역의 곤란을 겪지 않았다는 데 집중했다. 아틀란티스 제국에는 수천억 개에 달하는 항성이 존재하며, 그에 딸린 행성은 그보다도 많았다. 자연히 제국 내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가짓수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 여태까지 언어 번역 면에서 곤란을 겪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칼디르는 아카식레코드 능력자라는 아틀란티스 제국의 국민으로서 제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더불어 자신이 접촉하는 이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바 있었다.
당장 수만 광년이라는 간극을 두고 자란 아틀란티아 공주님과 슈가가 칼디르 자신을 놓고 다툴 때 말이 통하는 것만 봐도 그러했고, 병사들이 자기가 만든 무기를 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그 모든 언어로 교범, VR 훈련 프로그램 따위의 것들을 제작하여 병사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 보는 무기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운 바 있었다.
이에 관해서 칼디르는 높으신 분들에게 딱히 말한 적이 없었지만, 국방군 하층부에서는 고장도 아예 안 나고 정비병은 꿀 빨고 격파하지 못하는 적이 없으며 그 어떤 공세에도 끄덕하지 않는 칼디르 제 무기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는 교범과 VR 프로그램 등에 새겨져 있는 제작자 칼디르의 이름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일고 있었다.
공훈을 세워야 출세를 하는 장군들과는 다르게 병사들, 부사관들, 초급 장교들이야 하루라도 빠르게 전쟁이 끝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일 테니, 생존율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칼디르 제 무기를 거부하거나 그 제작자의 이름을 씹어댈 이유가 없었다.
국방군 하층부에서 칼디르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퍼져 나간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칼디르 역시 언젠가 창설될 무장 친위대의 인원을 인공지능 로봇만으로 채울 생각은 없었고, 사람으로 머릿수를 채우자면 신병보다는 베테랑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았는데 바로 그 베테랑들이 칼디르에게 호의적인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 아니던가.
이 모든 게 통역에 공을 들인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OKW의 보수파는 하층부에서 일어나는 이 바람이 나중에 어떤 식의 결말을 낳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부의 뜻을 알리고자 해도 통역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언어들이 많이 있어 곤란을 겪어왔네. 그뿐이 아니라네. 앞으로 재건 계획과 전쟁 수행을 동시에 밀어붙이면서 많은 사람을 고향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주시키는 등의 노력이 필요할 텐데, 자네가 도움을 주게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다, 위원장님? 저는 일개 군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개 군인에게 이렇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주셔도...”
“괜찮네. 혹시나 정치군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도록 군인들을 단속해둘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비록 퇴근 시간은 더 늦어지겠지만, 칼디르는 그 자리에서 정부의 정치선전과 행정 시스템 번역 등 굵직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정부의 입이 된다는 것은 피난민 무리를 하나씩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파시스트의 영향력을 키울 방법일 수밖에 없었고, 칼디르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했다.
국방에 관한 일이야 그로즈니가 칼디르와 합작하여 어련히 알아서 진행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건지, 이에 관해서는 추가 제안이 나오지 않았다.
케인스는 칼디르에게 비군사적인 분야의 일을 추가로 떠넘기는 겸, 오래전부터 추진해온 4개년 단위 개발 계획을 칼디르 제 테라포밍 장치를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계획의 이름을 ‘칼디르 플랜’으로 바꾸고 이것을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는데 보탬이 되어줬으면 한다고 했다.
부서진 행성은 다시 원래대로 붙여놓고, 오염된 행성은 정화한 뒤에 사람들이 거주할 도시와 일자리가 되어줄 공장을 짓고, 농장을 일구며, 수 경 개는 족히 될 법한 행성들을 그런 식으로 재건하는 와중에 시중에 너무 많은 돈이 풀려 하이퍼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4개년 단위의 개발 계획.
어유, 이유야 어쨌거나 그런 중요한 계획에 제 이름을 붙여주신다니... 제가 바라던 바기는 하지만, 참으로 과감하신 투자네요. 제가 가진 기술을 두 눈으로 보셨다고는 해도, 귀족 나으리께서 저 같은 평민에게 이런 중책을 맡겨주신다니... 경제 문제라면 자신 있지만, 그래도 바로 맡는다고 하기보다는 그 속내를 한 번 떠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제 제가 군인으로서 이 일을 맡아도 되느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위원장님과 만난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저를 높이 써주시려고 하는 겁니까?”
“자네는 조국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지.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는 실로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네. 오늘날과 같은 난세에는 자네와 같이 퇴폐한 자본-제국주의의 산물인 달러화를 거부하고 오로지 조국과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움직이는 프롤레타이트적인 과학자들이 필요하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칼디르를 초대하지 않고 아틀라인 서기장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그녀가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크게 감명을 받은 데다, 마법에 가까운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큰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재목이라고 평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지 그뿐이 아니었다. 케인스 위원장이 속한 아틀란티스 인민당이 추구하는 공산 혁명에는 아틀란티스의 수구꼴통스러운 가부장제 문화를 대대적으로 변혁하는 ‘여성 해방’도 포함되어있는바, 전통적으로 요구되어온 여성상에서 탈피하여 각종 유용한 정보와 기술을 들고 군문을 두드린 칼디르는 그들이 그토록 찾던 ‘모범적인 여성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경제 관련 정책 하나에 자본-제국주의의 산물 대신 조국과 인민을 선택한 프롤레타이트적인 과학자의 이름을 붙이는 정도는 오히려 너무나도 적은 포상이 아닌가 생각하네.”
‘프롤레타이트적인 과학자’에 ‘모범적인 여성 영웅’이라, 파시스트로서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흔하게 쓰이는 극찬이니 여기서 괜히 거북한 낯빛을 보였다가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흘려 듣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직 경제에 관련해서는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 제게 그런 기대를 품어주시다니...”
“뭐, 앞으로 엄청난 성과를 내주리라고 믿고 있네! 부디 칠흑과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이 나라의 경제를 견인하는 역할을 맡아주게나! 이를 위하여 정부의 입으로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관한 부분에는 간섭하지 않을 테니... 부탁하네!”
칼디르는 조금 고민하는 체하다가 결국, 그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경제 정책의 성공은 파시스트의 이름을 크게 떨칠 기회가 될 텐데, 정부의 입으로서 여론의 향방을 움직일 힘마저 얻게 된다면 일은 더더욱 쉬워질 것이었다.
실로, 작금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 지식, 부, 그리고 안정이었다. 어디 한 번, 당장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주의, 자유, 인권, 권리, 해방 따위의 말을 한 번 늘어놓아 보아라. 그 사람들이 퍽이나 귓구멍을 활짝 열고 들어주겠다.
칼디르는 오늘 얻게 된 권한을 통해 장차 아틀란티스 인들에게 ‘내일’을 약속하고 절망스러운 ‘오늘’을 이겨낼 힘을 제공하는 지도자가 되고자 했다. ‘오늘’보다도 절망스러운 ‘어제’를 떨쳐낼 힘을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다.
나를 그저 순진한 공순이 내지는 아주아주 뛰어나서 아틀란티스 과학계의 꿈과 희망이 되어줄 존재 정도로 여긴 이들은 언젠가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설혹 함정에 걸려든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정부의 입으로서 대중에 막대한 영향력을 구축한 다음일 테니 반대파로서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반대파가 위험을 무릅쓰고 뭔가 수를 쓰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움직임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일이 없도록, 칼디르는 케인스와 헤어지자마자 파시스트의 이념이 듬뿍 담긴 정치 선전물을 텔레파시, TV, 라디오, 전자신문, 인터넷 등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퍼뜨리기 시작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앞으로 이러저러한 정책을 펼칠 것이며, 정부의 전쟁수행과 재건 및 피난 계획에 국민이 협조해주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선전이었다.
이는 특히 적어도 파시즘이 뭐하는 사상인지는 알고 그것을 경계할 수 있는 지식인, 관료, 정치가보다는 쥐뿔도 모르는 노동자, 소작농, 천민들에게 효과적인 전법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이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10명 중 9명은 되었다.
같은 나라 사람을 상대로 차마 마컨은 못 쓰겠고... 세 치 혀로 그 10명 중 9명의 지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이미 천명이 다한 아틀란티스 황가의 깃발을 내리고 파시스트 독수리의 깃발을 내거는 것도 꿈만은 아닐 터였다.
이 꿈을 이루기에 앞서 내가 정부의 입이요, 또한 경제 정책의 한 축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게 되자 관료 중에서 나를 경계하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그거야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 (구)제정 시절부터 일해온 이들이라는 점을 들어 위원장과 서기장의 귀에 관료 계층의 ‘'반동성'’을 속삭임으로서 그들의 입을 아주 간단히 틀어막을 수 있었다.
“저들 관료 계층이 저를 더러 말들을 늘어놓고 있습니다만... 그들의 출신 성분이 무엇입니까? 퇴폐한 자본-제국주의에 물들기 쉬운 문벌귀족 출신이 아닙니까?”
귀족 출신이기는 하나 정확하게는 ‘몰락’귀족 출신이자 공산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케인스는 칼디르의 말이 대단히 옳다고 여겨 칼디르를 쳐내는 대신 그녀보다 더 오랫동안 함께 해온 관료들을 내치는 길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어떤 공산주의자가 말하기를,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할 사람이다’라고 했지...”
칼디르는 관료 계층을 향한 인민 정부 수뇌부의 짙은 의심을 이용하되,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말을 삼가고 혼자 있을 때 그렇게 읊조렸다. 굴러들어온 돌이 하는 말을 듣고 박힌 돌을 뽑아줄 줄이야... 어차피 그들도 나를 ‘모범적인 여성 영웅’의 표본으로 이용할 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라면 그들이 특별히 더 억울해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
그 뒤로도 칼디르는 그 두 사람을 만날 때마다 끊임없이 관료 계층의 ‘반혁명 음모’를 속삭였고, 개중 일부를 비밀리에 심문하여 실제로 그러한 음모를 품고 있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들의 신임을 얻고, 관료 계층의 '반동성'을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반대파를 솎아내기 위한 일련의 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칼디르는 재건 계획의 보충을 빌미로 사실상 경제 정책의 근간에 간섭함과 동시에 ‘빅 브라더’ 체계의 초안을 잡는 데 꼬박 일주일의 시간을 추가로 쓴 다음에야 겨우 퇴근할 각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이거... 일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2주일이나 집에 못 갔는데... 괜찮은 거 맞겠지...?
“위원장님, 저를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계시는데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서기장 동지를 통해서 공주님께서 자네에게 의지한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네. 그 외에도 손님이 몇 분 더 있다고도 하셨는데... 내가 너무 오랫동안 붙들어 놓은 것 같군. 2주일이나 고생해줬으니 하루나 이틀 정도는 쉬어도 좋네.”
쉬는 시간에 혼자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모유를 짜내며 점점 달아오르는 몸으로 혼자서 버티는 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짜내도 짜내도 계속해서 모유가 젖가슴 살 안에 고이면서 지방이 뭉치고 신경을 건드리는 판이니 사람들 앞에서 온전한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주일이나 섹스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더니 아랫배에 새겨진 자궁 문신이 큥큥거리면서 섹스가 마려워지는 것을 칼디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새로운 노예주, 아니, 고용주 되시는 케인스에게 허락을 받아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갔다.
칼디르는 가슴을 콩닥거리면서 자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바랐고, 자궁 문신은 그 와중에도 큥큥거리며 제 주인에게 섹스를 보채고 있었다. 하다못해 때와 장소라도 가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틈틈이 자위를 해줬는데도 이 지경이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