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7화
기술 전수 문제로 칼디르는 육군 수뇌부->공군 수뇌부->해군 수뇌부 순으로 돌아가며 시달린 뒤, 한 개 기갑군단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간 카이프의 뒤를 따라갔다. 지난번 전장에서도 멀쩡히 살아돌아온 바 있는 그였지만, 파시즘 정권을 이룩한 뒤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장수가 혹여나 여기서 상하게 되면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광경은...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군요...”
그녀는 카이프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지는 않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카이프의 군세가 움직이는 광경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버서커’라는 이명과는 다르게 카이프는 어떨 때는 기갑군단 전체를 루시드 군의 진영에 들이받고, 또 다른 때는 사단 단위로 쪼개어 여러 행성을 동시에 구출하는 등 능수능란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규모 기갑 세력을 동원한 우주 규모의 전격전 교리, 이른바 ‘우주 전격전’은 OKW 전반에서 그다지 좋게 받아들여지는 교리는 아니었으나 칼디르 개인적으로는 숭상하던 교리였기에 그 교리를 실제 전장에서 선보이는 카이프의 모습에 절로 심장이 뜨거워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걱정되어서 찾아와봤더니 다치기는커녕 적들의 뚝배기를 깨고 다니는 국방군의 최고 명장이 자신이 만든 전차를 타고 위풍당당이 제국의 수도인 지구에 입성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치사율의 국뽕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자아, 안심하십시오, 여러분! 국방군 최고의 명장 카이프 베이론 원수가 직접 여러분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뭣이! ‘버서커’ 카이프가 이 행성에 왔다고! 이제 우리는 살았어! 살았다고!”
“아틀란티스 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국방군 만세!”
“아이고, 이제라도 국방군이 우리를 구하러 온 걸 보면 나라님이라는 게 정말로 있기는 있었나보구만...”
“한 분씩, 질서를 지켜서 탑승해주십시오! 먼저 타겠다고 줄을 흩트리시면 오히려 구조가 늦어집니다!”
특히나 카이프가 군인의 본분은 민간인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적들을 깨부수는 데만 집중하는 대신 루프트바페의 협조를 얻어 전장에 갇혀있던 민간인들을 구조해주는 모습에서는 엄청난 감동의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루프트바페가 살아남은 민간인들을 태워다가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는 데 이용하는 기체는 칼디르 본인이 제작한 그라이프. 저것을 국방군에 넘겨준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잘 써주는 모습을 보니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 양반 거, 자기 병사 시절에 꼴 받게 하던 중대장을 나중에 출세하고 난 뒤에 직접 찾아가서 야전삽으로 대갈통을 깨버렸다는 소문이 도는 것치고는 그래도 민간인을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나 보구만?”
“그러게나 말이야. 작전 목표 달성에 방해될 것 같으면 민간인 구출은 가차 없이 포기해버린다는 소문이 아주 자자한데 말이지.”
“어유,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그 양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백성도, 제 가족도, 아군 부대도 작전 수행에 방해될 것 같으면 내버리고도 남을 냉혈한...”
그라이프에 탑승하여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이들이 자기네를 구해준 카이프의 뒷담을 까는 대목에서 감동이 조금 깨져 버렸지만, 보람만은 여전했다. 그래, 너무 많이 죽어서 아예 뒷담을 까줄 사람도 남아나지 않는 것보다는 힘들게 구해놓은 민간인들에게 뒷담을 까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그러면 카이프 원수님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나도 국방군의 일원으로서 적군을 해치지는 못할망정, 민간인을 구조하는 작업에는 힘을 써야 하지 않겠나? 칼디르는 두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일은 최대한 미루고 싶다는 신조에 따라 카이프가 날뛰는 행성에서 시선을 떼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본래 대규모 순간이동이라는 능력을 순간이동 중에 실종되거나 다치는 사람이 나올까 봐 사람들 상대로는 실험해본 일이 없었는데,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앞두고 이래서 어렵다 저래서 안 된다 떠들어대는 건 안 될 일이지.
칼디르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사람들을 구원하러 나서자, 처음에는 웬 어린년이 육군 장교 정복을 입고 다가오길래 경계하던 이들도 국방군 총사령관 그로즈니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보여주자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그로즈니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신뢰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모여야 정권 교체를 꿈꿔볼 수 있는데... 피바람 없이 정권 교체의 꿈을 이룩하는 일은 아직은 먼일만 같았다. 그러한 상념을 뒤로하고, 칼디르는 수백에서 수천만은 되는 피난민의 대열을 국방군이 통제하는 영역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렸다.
칼디르의 테라포밍 장치가 본격적으로 4개년 개발 계획의 일원으로 포함되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 넉넉한 공간이 생겨난바, 사람들을 어디로 빼내면 좋을지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이, 이보게... 내 딸보다 처자가 더 어려 보이는데... 지금 저 위험한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게야? 그러지 말게! 함부로 그런데 갔다가는 곱게 죽지 못하네!”
“음, 저를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악랄한 루시드 군의 무기는 감히 제 몸을 꿰뚫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 그렇게 되나...? 그러면... 가기 전에 처자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가게!”
“장교의 옷을 입었으나 별다른 계급도, 직함도 가지지 않은 제 이름을 기억해두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칼디르 아스트라,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사실 대규모 순간이동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출할 때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굳이 그렇게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었다. 칼디르는 지금 인명 구출 작업과 동시에 선거운동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아~ 님들~ 제가 언젠가 선거에 나오면 제 이름과 얼굴을 딱! 기억해두셨다가 저를 찍어주십시오! 우리나라는 전제 군주제인데 무슨 놈의 선거냐구요? 그건 두고 보시면 압니다! 무슨 선거에 나올 거냐구요? 구의원이나 군수 같은 시시한 선거는 아니고, 대통령... 으흠, 흠, 제 입으로 이걸 말하는 좀 그러네요. 아무튼, 저를 꼭 기억해주십시오! 꼭입니다!
인명을 구출하면서 대중 영향력도 넓히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란 것이다. 정권을 잡으려면 기성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는 것과는 별개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역시 필요한바, 칼디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얼굴도장만 팍팍 찍어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해주었다.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 높으신 분들에게 영혼 밑바닥까지 털려가며 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칼디르의 성미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놈의 대통령 선거인지, 총통 선거인지 모를 놈의 것에 당선되어 이 나라의 정점에 오르게 되는 날에는 영락없이 집무실에 콕 박혀 있어야 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거야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사람 한 명이라도 더 구하자. 지금까지 내가 대규모 순간이동 능력을 구사하면서 오차가 일어나거나 뭐가 크게 틀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 될 것 같다.
신혼집에서 아내들과 함께 뒹굴고 있을 플랑이 아틀란티스 총독부에서 일어난 변고에 관해 칼디르에게 전해준 것은 그녀가 한참 사람들을 구해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높으신 분들이랑 말도 섞고, 과학자들 호기심도 풀어주고, 사람들도 구해주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클로세 부총독이 발틱 총독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역시 인공지능 하나 잘 만들어두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컴퓨터를 해킹해서 정보를 물어다준다니까...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벌써 집에서 떠나온 지 일주일은 넘게 시간이 흐른 데다 총독부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칼디르라고 항상 아카식레코드나 미래 예지 능력을 켜놓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기에, 플랑이 무선 연락 장치를 통해 전해준 소식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플랑이나 특수 능력 외도 칼디르가 정보를 수집하는 경로는 몇 가지가 더 있었지만, 높으신 분들에게 시달리느라 한동안 그 경로를 제대로 돌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여보세요... 그래, 플랑! 총독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주인님. 저도 어이가 없는데, 이건 그쪽 네트워크를 해킹해서 알아낸 팩트에요. 원래도 루시드 제국 육군 소속인 부총독과 해군 소속인 총독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는데...”
사람들을 구하다 말고 급하게 플랑에게 연락을 취해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니, 부총독은 꽤 오래 전부터 총독을 언제든지 해치우고 자기가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음모를 꾸며왔었는데 칼디르의 유혹 페로몬을 인공적으로 제조하여 만들어진 마약, ‘칼디르 칵테일’을 둘러싼 갈등이 부총독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없었다고 해도 부총독은 언젠가 총독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겠지만, 칼디르 칵테일의 존재로 인해 그 시기가 조금 더 앞당겨지고 쿠데타의 형태 역시 총독을 죽이는 대신 그를 마조 암컷으로 TS 시켜버리는 식으로 변형되었다고 하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당장에 루시드 제국 본국 정부도 육군과 해군이 상대방 조직 출신의 총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격해버리는 일이 빈번했고, 육군 부대와 해군 육전대가 시가지에서 개막장 내전을 벌이는 일도 허다한 판에 본국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진 총독부라고 사정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그 방식이 하필이면 TS라는 게 꺼림칙했다. 보통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최고 목표물은 확실하게 제거하지 않나?
“주인님, 지금 바로 관련 자료를 전송해드릴게요!”
“뭐? 지금 전화 받는 거 칼, 칼디르야? 야 이 시발년아! 너 왜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도 안 준 거야! 이제야 연락을 준다면서 한다는 소리가...! 집에 돌아오면 그날로 바로 궁디 팡팡...! 읍으으읍!”
“야, 너 왜 그래? 나도 우리 마키를 떠올리며 자위하면서 버티고 있잖아!”
“우리 슈가 언니 입부터 틀어막아 주세요, 공주님! 진정제 가져와!”
플랑과의 연락은 오래지 않아 뭔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끊어져 버렸다. 왠지 뒷골에 서늘한 감각이 스며들었지만, 당장 이 급보를 그로즈니에게 전해주는 게 더 급하다. 아무리 무능하다고 할지라도 적군의 장이 갑자기 유고 상태가 되었는데, 이보다 호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아틀란티스 총독의 유고 사태는 칼디르가 의도한 일이 아니요,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었다. 내가 공주님의 손에 이끌려 많은 사람의 앞에서 내 알몸을 함부로 드러낸 결과 내 패시브 능력인 페로몬에 이목이 쏠리고, 그것을 본떠 만든 마약을 가지고 다투다가 사건이 터지도록 모든 것을 조작해둘 이유가 있겠는가?
단순히 총독을 암살하여 적진에 혼란을 유발하고자 했다면 그보다 더 쉬운 방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는 법, 이는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이게 그 미인계인가 뭔가 그거냐?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는 몰라도 결과만 좋으면 다 괜찮겠지, 뭐.
“클로세 부총독이... 발틱 총독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고, 빌뇌브는 사전에 징후를 알고도 방관했다고?”
자신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인명 구출 작업에 나섰던 칼디르가 급하게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전달해준 소식을 듣고 그로즈니도 상당히 놀랐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칼디르 칵테일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부분은 부끄러워서 빼고 말해줬는데도 적진에 혼란이 일었다는 소식은 명장의 마음속에도 파문이 일어나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진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전면적 공세의 기회가 될 것이고, 거짓이라면 칼디르에 대한 신임을 재고해볼 시기가 왔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으음, 일단 알겠네. 우리 쪽에서도 따로 첩보 선을 가동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해볼 테니, 자네는 현장으로 돌아가 봐도 좋네. 구원을 기다리는 민간인이 많지 않나?”
그로즈니는 그렇게 말하며 칼디르를 다시 구출 현장에 보내주어 본의 아니게 그녀가 선거 운동을 하고 돌아다닐 시간을 벌어주게 되었고, 그 사이에 삼대 저항운동 세력 중에서는 총독부 지배 영역에 가장 가깝게 붙어있는 제임스의 국내정부 쪽에 연락을 취해 급보를 전달해주었다.
거기서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제임스가 펼쳐놓은 첩보 선을 통해 칼디르가 전해준 대로 총독부 내부의 권력구조가 발틱 중심에서 클로세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칼디르로서도 ‘그냥 어쩌다 보니까’ 알게 된 정보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조금은 달라졌다.
OKW에서는 그러나, 혼란 상태에 빠진 총독부를 상대로 곧바로 전면 공세를 감행한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클로세나 발틱이나 똑같이 무능한 놈인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총독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기본 전략 전술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해야 할 정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무능한 놈이 더 유능한 놈으로 바뀐다면 악재요, 그 반대라면 호재였으나, 이번 경우는... 글쎄... 좀 애매했다.
OKW에서는 또한 칼디르를 채용함으로서 국방군의 여력을 보충할 기회를 얻었으나, 오랜 전쟁으로 아군 병력 역시 상당히 지친 상태이므로 곧바로 전면 공세에 나서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리라 판단했다.
따라서 OKW는 저쪽에서 머리를 잃고 방황하는 동안, 아군은 힘을 보충할 시간을 벌고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가 한 번에 전체 전선에서 밀어붙이는 대공세를 감행하기로 하였다. 그 시기와 방법에 관한 한, 아틀라늄제 기갑 세력의 유용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금도 고군분투하는 카이프가 돌아오는 대로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안건에 올리기로 했다.
발틱... 그놈만큼은 내 직접 처형대에 올리고자 해왔는데,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렸나? 발틱과 오랫동안 싸워온 그로즈니는 사람들을 물리고 난 뒤에 자신의 적이 지금쯤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얕은 잠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피로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