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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6화 (145/225)


  • 〈 145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6화

    ‘스캐퍼플로우에서의 굴욕’, 이는 테라 마리네의 장병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루시드 제국과의 ‘대전쟁’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던 시점까지도 전장 수십 km짜리 초중전함 등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테라 마리네가 한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스캐퍼플로우 아틀란티스 제국 전투함대 집단 자침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은 테라 마리네가 그 당시 재무대신이었던 빌뇌브가 황제로부터 위임도 받지 않고 루시드 인들과 저 혼자 쎄쎄쎄하여 무단으로 체결해버린 종전협정을 진짜 황제의 명령으로 오인한 데서 출발했다.

    종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항전을 외치며 끝끝내 백기를 들어 올리기를 거부한 그로즈니와는 다르게 테라 마리네는- 빌뇌브에 의해 위조된- 황명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테라 마리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제 와서 보면 그토록 멍청한 선택일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에 소위 ‘연합국’이라 이름하는 민주주의 열강들이 테라 마리네가 종전협정에 따라 순순히 항복할 경우 아틀란티스 제국과 루시드 제국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선 것도 테라 마리네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민주주의 열강은 겉으로는 민주주의, 평화, 자유, 도덕, 윤리, 인권 따위의 입에 발린 말을 하며 테라 마리네를 안심시킨 끝에 총 한  쏘지 않고 위협적인 거함들을 양도받아 ‘스캐퍼플로우 행성계’에 억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황명에 따른 질서정연한 항복’을 원했던 테라 마리네가 일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구마저 루시드 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기 전에 간신히 탈출한 병부대신 제임스에 의해 애당초 테라 마리네가 백기를 들어 올리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황명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루시드 제국의 선제 침공으로 시작된 ‘대전쟁’을 기꺼이 중재하겠다고 나섰던 민주주의 열강은 실제로는 루시드 제국과 상호 협조하는 관계에 있었고, 스캐퍼플로우에 테라 마리네를 억류한 것은 평화 교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함선들을 꿀꺽하기 위한 술책이었음이 드러났다.

    테라 마리네의 제독과 함장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사기를 당했음을 깨달았으나, 그때쯤에는 주요 함선의 무장이 대부분 해체된 데다 함선 재무장을 위해 필요한 인력 역시 다수 억류되어 있어 뭘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루시드 제국 역시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점, 민주주의 열강들은 겉으로는 착한 척해도 루시드 제국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인류 지배층이 식민지의 수많은 외계인을 끊임없이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위선적인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평화교섭을 주선해주겠노라는 제안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비단 테라 마리네뿐만 아니라 많은 아틀란티스 인이 그 당시 국제정세에 눈에 어두웠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고, 스캐퍼플로우에 갇혀 퇴로마저 차단당한 그들이 고를 수 있었던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집단 자침. 테라 마리네는 분루를 삼키며 육중한 함포들이 조국을 향하는 일이 없도록 수백 척 이상의 대함대를 블랙홀에 몰아넣는 등의 방식으로 집단 자침하였고,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연합국이 급하게 달려왔을 때는 우주 역사에 기록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대함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래... 여기까지였다면 단지 우리가 ‘멍청했기에’ 일어날  있었던 일이라고 할  있다. 국제정세 파악에 소홀했다는 건 빼도 박도 못할 변명이었으므로. 하지만 집단 자침 사건 이후에 이어진 민주주의 열강의 선택은 많은 아틀란티스 인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심각하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루시드 제국은 자신들의 새로운 식민 영토를 통치하는  들어가는 부담을 덜기 위해 연합국 일동에 아틀란티스 제국의 영토 일부를 떼어 주었고, 민주주의 열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테라 아틀레노스’라 명명된  지역은 아틀란티스 영토의 약 8~10%에 달하는 거대한 영역이었다.


    단지 영토를 빼앗아가기만 했다면 또 모르되, 그들은 뻔뻔하게도 사기를 쳐서 영토를 빼앗아간 주제에 해당 지역에 ‘복음을 전파한다.’, ‘문명을 일으킨다.’ 따위의 핑계를 대며 이것은 절대로 식민지를 추가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평화교섭을 주선하겠다고 사람을 속여서 함대를 억류해놓고는 뒤에서 장난질을 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의 정당한 영토마저 빼앗아 갔다...?  소식을 전해 듣고 격분하지 않은 아틀란티스 인은 없었고,   가지 대사건은 이 나라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라는 물건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민주주의 진영의 든든한 축이  수도 있었던 아틀란티스 제국은 민주주의 열강으로부터 배신당한 경험으로 인해 ‘자유 민주주의’에서 완전히 등을 돌려 버리고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극단주의에 빠져들어 장기적으로 보면 민주주의 열강들이 그렇게도 수호하고자 했던 세계평화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제 아틀란티스가 ‘대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옛날의 국력을 되찾게 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할 가능성은 영영 제거되고  셈이었고, 이제 민주주의 열강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정당한 배상을 하는 것만으로는 아틀란티스 인들의 분노를 잠재울  없을 터였다.

     모든 사건의 원흉인 루시드 제국과의 ‘대전쟁’이 아틀란티스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면 또 모르되, 아틀란티스는 선전포고도 받지 못한 채로 침공당해 루시드 군의 총칼 앞에 40%에 달하는 인구를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행성이 초토화되고 자유마저 침탈당한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아틀란티스 영내에서 ‘자유 민주주의자’란 곧 ‘우리의 아버지, 형, 아들을 강제로 징용하거나 묶어놓고 총검으로 목을 썰어버렸으며, 우리의 어머니, 누나, 딸을 성노예로 삼아 겁간하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마저 꺼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루시드 인들을 옹호한 비열한 자본-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을 뜻하게 되었다.

    연합국의 맹주였던 카테스 제국만큼은 유일무이하게 아틀란티스를 지지하여 UN 안보리에 상정된 분할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고, 루시드 제국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하며, 아틀란티스에 집단군 규모의 의용병을 파병해주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여 이러한 분노에서 빗겨나갈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특히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테라 마리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르러, 루시드 제국은 물론이고 카테스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국 모두를 상대로 보복하기 위한 대규모 함대 재건 계획, 이른바 ‘Z계획’이 탄생하게 되었다.

    분노로 인해 눈이 돌아간 테라 마리네가 내놓은 ‘Z계획’에는 지구보다 더 큰 행성급 전함 등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실제로 이행할 수만 있다면 연합국 모두에 보복한다는 목표를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터였으나... 예산과 물자의 태부족으로 인해 대부분이 실행되지 못하고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육군의 총수 그로즈니의 고손자이자 사성 제독인 오토는 테라 마리네의 일원으로서 어쩌면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해군원수보다도 절망적인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대사건에 대해 분노는 하되 현실을 철저히 이성적으로 해석할 머리가 있었기에 정확히 30살이 되던 해에 제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올해로 34살. 사성 제독이 된 지  년 동안은 현실적으로 ‘Z계획’에서 상정한 목표를 달성하지도, 비열한 짓거리를 일삼은 연합국에 보복할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올해로써, 기나긴 오욕의 세월은 드디어 끝날 것처럼 보였다.

    “칼디르라는 처자가 만들었다는 함선들... 도대체 어떻게 Z계획에서 상정한 설계와 동일하게 제작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그 많은 함선이 그 처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는 나중에 따져도 되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해군 소속의 공학자들과 설계 담당 장교들은 모조리 신규 함선 검증 작업에 투입하게!”


    쾅! 오토는 칼디르가 ‘초등학교도 안 나온 평민 출신 계집’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일삼던 해군 장교들의 작태에 더 참지 못하고 책장을 내리치며 선언했다.


    그는 스스로 내뱉은 말대로 칼디르의 출신 성분이나, 불과 얼마 전에 입대하기 전에는 테라 마리네 입장에서는 제삼자에 지나지 않았던 칼디르가 아군의 기밀 계획을 어떻게 간파하고 그와 동일한 설계대로 실제 함선을 뽑아낸 문제 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닌 말로, 단  척의 함선이라도 급한 처지에 이거저거 다 따져 가며 검증 작업을 수행할 여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검증 작업에 투입된 공학자들이 칼디르가 설계한 함선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해왔다는 사실, 오토에게는 할아버지도 아니고 고조할아버지가 되시는 그로즈니가 그녀를 인정했다는 사실 외에도 그가 서두를 이유는 충분했다.


    “하... 하지만... 제독 각하...! 검증받지 않은 사람이 설계한 함선을 검증하는 데 지나치게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자칫 기존 Z계획 수행에 차질을 빚을 염려가...!”


    “우리의 눈앞에 바로 그놈의 Z계획이 떡하니 있는데, 무엇을 고민한단 말이던가? 해군원수 각하는  직접 책임을 지고 설득할 테니, 자네들은 군말 없이 따르게! 이 문제에 관해서 이 이상 왈가왈부하면 총사령관 각하의 권위에 대적하는 것으로 알고 정식으로 군법재판에 회부하겠네!”


    총사령관(그로즈니)의 권위에 대적한 것으로 간주하고 군법재판에 회부하겠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철저히 중시하는 군 조직에서 이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고, 아무리 그래도 이는 오토가 너무 지나친 것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개기려 들던 해군 장교들은 일시에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오토는 그 길로 해군원수의 집무실로 달려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누는 등 소동을 벌였다. 평소에 해군 내에서 이성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아온 그가 사상 처음으로 벌여놓은 지랄의 파급력은 강력했고, 대놓고 칼디르를 지지하기에는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였던 몇몇 제독과 함장들이 조심스럽게 오토의 뜻에 찬동함으로써 칼디르에게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결국, 칼디르의 ‘미천한’ 출신 성분에 근거로 든 테라 마리네 내부 보수파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력이 칼디르  함선의 성능을 검증하고, 이후 그것을 실제로 운용하기 위하여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후우... 이걸로 고조할아버님의 낯을  수 있게 되겠군...”


    친 칼디르 성향의 제독, 함장과 공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든 자기 뜻을 관철하는 데 성공한 오토는 집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설득에 걸린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자살소동을 벌이면서 소리를 꽥꽥 내지르느라 힘을 써서 그날 하루는 도저히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테라 마리네의 여론이 칼디르를 수용하자는 데 모이게 되자, 이번에는 그로스 테라급을 위시한 신규 거함들을 어느 함대에 배치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는 칼디르를 수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게 해결되었다.

    그로스 테라급이 단  대밖에 없었더라면 일전에 칼디르가 우려한 대로 관할권 논란으로 인해 콜로세움이 열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원자 단위로 조립하느라 그로스 테라급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그로스 테라급을 단 한 대만 만들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무슨 츤데레도 아니고 막상 칼디르를 수용하기로 한 뒤에는 서로 함선을 가지려고 옥신각신 다투던 전투함대, 항공함대, 여기에 더해 칼디르가 육군 소속임을 들어 꼽사리  육군과 왠지는 모르겠지만 끼어든 공군이 모두 사이좋게 그로스 테라급을  대씩 넘겨받는 것으로 관활권 분쟁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일을 막을  있었다.

    공군은 몰라도 육군에서 도대체 왜 전함을 필요로 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필요하다니까 이야기는 그렇게 풀렸다.


    “거대 주포와 미사일 사일로를 중심으로 한 버전은 전투함대에, 함선 격납 기능에 방점을 둔 버전은 항공함대에, 상륙 기능을 중시한 버전은 육군에, 함재기 사출 기능을 강화한 버전은 공군에 납품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구보다 더 큰 함체... 달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주포... 안드로메다은하까지는 앞마당에 돌을 던지는 듯이 날아갈 수 있는 수많은 워프 탄도 미사일 사일로... 아, 이건 관활권 분쟁에 끼어들지 않고는 도저히 못 참지.

    이거 하나 넘겨받으면 장군/제독/함장 자리가 도대체 몇 개나 생겨나는 거냐...? OKW에 불려 나간 칼디르도 수뇌부의 의중을 읽어내고는 싸움을 중재하면서 ‘저를 지지해주신다면 이 함선들을 직접 설계, 제작한 책임자로서 장군/제독/함장니뮤가  함선을 지휘할  있도록 건의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어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좀  나중 일이지만, 이 당시의 일에 대해 오토는 꼭 이렇게 논평하였다: 아니 시발... 어떻게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하다만... 나이를 처먹을 때로 처먹은 장군, 제독들이 신무기를 어디에 배치하느냐 하는 문제로 증손녀 내지는 고손녀뻘 밖에 안 되는 처자가 보는 앞에서 싸우다니... 정말 부끄럽지도 않은가...?


    내 딸 로렐라이의 나이가 올해로 14살, 칼디르라는 처자의 나이가 15살... 내 고조할아버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처자는 고손녀도 아니고 증고손녀뻘이 되는 셈인데... 그 처자를 내치려고 할 때는 언제고 그 처자의 발명품을 서로 차지하려고 쌈박질을 벌이다가 당사자의 중재를 받아들여 겨우 타협책을 마련하는 꼴이라니!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오토는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생각을 억지로 눌러둔 채로 신규 함선을 검증하고 이를 실제로 운용할  있도록 운용 인원으로 차출된 이들을 훈련하는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물꼬를 트긴 했지만, 일은 이제 시작되었다  수 있었다.


    카이프가 총대 메고 밀어붙여 칼디르  무기를 가장 먼저 정식으로 채택한 육군, 에이스 파일럿들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육군에 이어서 결단을 내린 공군과 다르게 해군 수뇌부가 칼디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이처럼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천만 다행히도 어떻게든 시작된 일이 거꾸러지는 사태만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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