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4화
칼디르가 가라사대 이 행성은 앞으로 농업 행성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라 명령하시니 곧 노란색 물결이 일어나며 용암이 솟구쳐 오르던 지옥도가 벼와 밀이 자라라는 곡창지대로 그 옷을 갈아입었다.
칼디르가 행하는 기적은 지옥도에서 다시 풀이 돋아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루시드 군의 침공 이전에도 사람이 살 곳이 못 되었던 곳에 사람에게 먹일 수 있는 수많은 동물이 날뛰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평생 고기는 구경도 못 해보고 살아가는 많은 아틀란티스 인이 보면 눈이 뒤집히게 될 광경이었다.
이어서 칼디르가 한때 둥그런 행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루시드 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방사능 지옥이 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부서져 버려 소행성 지대가 되어버린 (구)행성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라 교시하니, 소행성의 조각들이 한 데 뭉치기 시작했고 이내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칼디르의 테라포밍 장치의 종류는 이렇게 네 가지였다. 아예 부서져 버린 행성은 마지막으로 소개된 포탄으로 복구시킨 다음 그 활용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최소한 형태라도 지키고 있는 곳들은 재건 계획을 잡아놓고 자연/공업 겸 도시/농업 행성으로 나누어 되살린 다음 저항운동의 기반으로 삼거나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으로 삼을 수 있다.
“이 테라포밍 장치의 유용성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을 무계획적으로 살포하기보다는 우선순위와 개별 행성의 용도를 설정해놓고 체계적으로 재건 사업에 동원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인민정부에서도 4개년 단위의 개발 계획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계획에 제 발명품을 반영해주시겠습니까?”
테라포밍 장치를 하나 떨어뜨릴 때마다 반드시 하나의 행성이 정화되고 복구되는 광경을 뒤로 한 채 태연자약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칼디르를 보며 일행은 그저 혀를 내둘렀다. 그 표정들을 보아하니 처음에는 아틀라인 서기장과 케인스 위원장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 나왔던 이들까지 칼디르를 다시 보게 된 모양이었다.
“케인스 동지, 칼디르의 말을 따라주게. 칼디르의 기술을 채택한다면 향후에 루시드 인들을 완전히 몰아낸 뒤에 우리가 4개년 개발 계획을 통해 이루고자 해온 바를 훨씬 일찍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당장 우리가 확고하게 지배하는 행성들만이라도 우선 복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 말씀입니까, 서기장 동지? 제가 이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걸 보고도 어찌 아니 채용할 수 있겠습니까?”
케인스는 서기장과 마찬가지로 이거 아주 제대로 된 공순이를 하나 낚게 되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군인의 신분으로 자칫 정치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남길까 봐 정부 관료의 소임까지 겸하는 것에 소극적인 칼디르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흠흠, 자네가 정 무관과 문관을 겸하기를 거부한다면 내 강요는 하지 않을 것이나, 무릇 무관도 이 나라 관료체제의 일원인 법. 그러니 군인의 신분으로 어디까지나 민간 정치가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식의 형식을 갖추면 되지 않겠나?”
말인즉슨 칼디르가 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군대에서 썩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 형식상으로는 순수한 군인으로 남기되 민간 정치가들이 군사적인 분야의 조언을 핑계로 호출할 때 비군사적인 조언까지 함께 듣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칼디르가 직접 정책을 설정하고 집행한다면 정치군인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단지 ‘조언’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이러한 형식을 갖춘다면 칼디르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으리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칼디르는 처음에는 거절하는 척하다가 못 이기는 척 자신에게 맡겨지는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으레 사회생활이라는 게, 누군가가 뭔가를 준다고 했을 때 넙죽넙죽 받아먹기보다는 짐짓 거절하는 척도 해줘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좋아, 아주 좋아! 내 위원장의 직함을 걸고 자네의 후원자가 되어주겠네!”
“하하, 감사한 말이지만... 군인의 몸으로 특정 정치가의 독점적인 후원을 받는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자네는 아무 걱정하지 말게. 본래 사람은 그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지위에 앉아야 하는 법, 자네와 같은 사람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네가 평민이라고 막 내칠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닐세.”
케인스 위원장, 이 사람은 그로즈니와 같은 고위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오직 귀족만이 중간이름을 쓸 수 있다는 이 나라의 법도에 따르면 ‘케인스 폰 도플러’라는 이름을 쓰는 이 남자는 일단 귀족 가문 출신이기는 했다. 또한,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평민에 지나지 않는 칼디르와 악수할 정도로 열려있는 사람이었다.
“자아... 자네 입으로 정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겠노라고 했으니 나와 다른 위원장들이 데리고 온 과학자들에게 당장 자네의 기술을 전수해줄 수도 있겠지?”
“예? 바로 이 자리에서요? 하지만... 여기에 서기장님, 그리고 위원장님들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었습니까?”
“실은 여러 부서에 소속된 과학자들이 우리가 탑승하기 전부터 자네를 만나보기 위해서 화물칸에 숨에 있었다네. 부디 이 자리를 거부하지 말아 주게.”
그리고 그는 그로즈니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천민이든 유능한 사람이라면 바로 국익을 위해서 갈아 넣을 준비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칼디르는 일단 내뱉은 말이 있었으니 함선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갑자기 우르르 달려 나온 과학자들의 무수한 질문 세례를 일일이 받아들여 줬다.
그저 ‘운이 좋아’ 비상한 머리와 여러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과 다르게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온 과학자들은 칼디르의 존재에 자극받아 오래간만에 열의를 불태우며 신기술을 습득하려 들었고, 지식을 갈구하는 자들의 질문 세례는 끊임이 없었다.
덕분에 신혼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들이고 뭐고 그 순간부터 한 며칠은 퇴근하지 못하고 거기에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겨우 일차적인 대화를 끝낸 뒤에는 바로 퇴근...하지는 못하고 소식을 접한 그로즈니에게 또다시 붙들려 갈려나가게 되었다.
이거... 솔직하게 분신 능력자라고 털어놓는 편이 더 나았을까? 아니, 아니다. 그랬다가는 n명*n시간만큼 갈려나가게 될 테니 거기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닫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미 충분히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신나게 일만 하다가 너무 늦었다가는 슈가한테 엉덩이에 불이 날 정도로 채찍질을 당하게 될 거라고...!
“그런가... 벌써 여러 위원장님과 일면식을 트게 되었나. 시기상조라고 여겨 자네와 원수급 사이의 접촉을 미뤄온 내가 속 좁은 인간이 된 것 같군.”
그로즈니는 칼디르가 자신이 주재하는 대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어깨 위에 번쩍거리는 별을 다섯 개나 이고 있는- 포스타 이하는 아예 이 자리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육군 수뇌부를 돌아가며 소개해준 다음 칼디르가 제공해준 무기를 국방군의 제식 무기로 채택하는 문제에 관해 논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전장에서 돌아와 차상석을 꿰차고 앉은 카이프가 ‘칼디르가 만들었다는 무기 성능 존나 좋음. 내가 써봐서 앎. 못 믿겠으면 늬들도 직접 전차 몰고 나가보던가? 혹시 쫄림?'이라는 식으로 어그로를 팍팍 끌어준 덕분에 칼디르는 이 문제에 시큰둥했던 일부 참석자들의 관심까지 모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케인스 위원장과 관련된 일을 끝내자마자 원수씩이나 되시는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는 이곳으로 달려와서- 대중연설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가녀린 목소리에 군인답지 않은- 오히려 대중 선동가처럼 보이는- 제스쳐를 섞어가며 열띠게 설득한 결과, 최소한 육군 병기만큼은 국방군의 제식...까지는 아니고 보조 무기로 채택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카이프와는 다르게 육군 수뇌부의 다른 원수들은 섣불리 신규 무기를 도입했다가 보급선이 곱창 나버리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비췄으나, 그들로서도 칼디르로부터 단 며칠 만에 10여 개 사단을 신규로 편성할 수 있을 만큼의 물자를 공짜로 양도받은 일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그런 식의 타협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헉, 헉... 아무튼 요 며칠 새 열심히 뛰어서 그로즈니 외에도 케인스와 같은 든든한 뒷배를 가지게 된 것만큼은 좋은 징조였다. 파시스트당이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대신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으로 기성 정치가 및 고위 장성들과 인연을 맺어두는 편이 나았으니.
아틀라인 서기장, 케인스 위원장... 두 사람 모두 나 같은 파시스트와는 상극일 공산주의자이지만, 아틀란티스 파시즘과 아틀란티스 공산주의 사이에는 생각 이상으로 공통점이 많으니 혹여나 극렬 반공주의자들이 이를 빌미로 내게 공세를 퍼붓는다고 하더라도 대응책은 있다. 그러니 당장 그 점을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초능력으로, 하다못해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인공지능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닥치는 대로 루시드 인들과 아틀란티스 내부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린다는 선택지를 고른다면 지금처럼 그들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거나 반대파의 정치적 공세를 우려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 손에 같은 아틀란티스 인의 피를 묻히는 일은 정말이지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두고 싶었다.
“폭력을 앞세우는 대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고, 기성 정치가들마저 감화시켜 분리주의의 역사를 종식하고 국가를 진정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 그리고 파시스트당의 당수 자리에는 내가 있겠지... 이 얼마나 대단한 위업이 될까...”
칼디르는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에 나와서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벌써 ‘친 칼디르 파벌’과 ‘반 칼디르 파벌’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반 칼디르 파벌’중 일부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명확한바 향후 국가 장악을 위한 ‘대숙청(Great Purge)’은 필수불가결한 일이 될 것 같지만, 지금 이렇게 뛰어다니며 말로 해서 일이 잘 풀리면 피를 조금이라도 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읏... 위업이고 뭐고, 나는 왜 이렇게 야한 몸을 타고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걸까...”
좀 깨는 이유지만, 칼디르가 일과 중간중간에 나와서 휴식을 취하는 이유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놈의 체질이 말썽을 부린 것이 더 컸다. 슈가가 많이 짜준 덕분에 첫날에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둘째 날부터는 젖가슴에 모유가 쏠려서 최소한 몇 시간마다 한 번씩 몰래 나와서 스스로 젖을 짜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으로, 머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죽어라고 따라와 주지 않는 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