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3화
회담에서 나온 말은 많았지만, 결국 한 줄로 요약해보자면 이런 이야기가 되었다: 최근 우리 공학자들이 자네의 작품을 열심히 뜯어보고 있다고 하던데, 우리 앞에서도 자네의 작품이 작동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군바리들이 바라는 것은 무기, 무기, 오직 살상용 무기뿐이지... 하지만 우리와 같은 정치가나 관료들이 자네에게 바라는 기술은 다른 분야의 것이네.”
케인스 위원장은 칼디르의 하고많은 발명품 중에서 테라포밍 장치를 콕 집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인즉슨,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아틀란티스를 재건하는 책임을 진 ‘인민 생활 위원회’의 위원장 자리를 그가 겸하고 있는바, 칼디르의 발명품이 도무지 진척이 없는 재건 사업에 보탬이 될까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육군원수가 육군 군적을 내려주었다는 이 칼디르라는 소녀를 육군에 넘기는 대신 그가 담당하는 정부 내지는 관료 조직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육군원수가 직접 나서서 편의를 봐줄 정도라면 분명히 뭔가가 있을 터, 유능한 인재는 언제나 부족한 법인지라 기회가 있을 때 얼른얼른 스카웃 제의를 해두어야지.
“위원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군대에 몸을 담기로 한지라... 정부 관료의 소임까지 맡게 된다면 정치군인이라는 비판을 듣게 될까 두렵습니다.”
“저런... 자네와 같은 청춘에 어째서 칙칙하기 그지없는 군 조직에 몸을 담아 보수적인 자들의 음해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 뻔한 길을 걷게 되었나? 안타깝군. 정부 조직으로 건너온다면 필시 크게 될 인물인데.”
칼디르가 케인스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해버리자, 그는 이제 노골적으로 아쉬운 감정을 표출했다. 사실 칼디르의 기술을 직접 보고 싶다는 건 핑계고, 스카웃 제의가 본론이 아니었을까? 이에 칼디르는 그로서도 더 말을 붙이지 못할 만한 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애국심과 국뽕이 넘쳐흐르는 대답.
“모름지기 국방의 의무는 모든 국민이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며, 그것은 여성 또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병역의 수행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는 없고,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스스로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병역을 수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케인스가 혹여나 여기에 딴지를 걸었다가는 칼디르의 애국심을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지라, 그로서도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해보니 병역의 의무, 본래 그 의무가 없는 여성의 병역 수행, 권리를 가지지 못한 여성의 권리 획득... 이 모든 것이 퍼즐처럼 끼워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뭐, 원래 유교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조선이나 이슬람 광신도들처럼 여자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던 아틀란티스 제국 정부도 막상 급해지니까 여자들까지 전투병으로 징집한다는 징병령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행정력이 개판이 되어버려서 여자들을 징병하고 말고 할 처지도 못 되었고, 여자들을 대규모로 징병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루시드 제국과의 대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이었던지라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그 당시 정부의 여성 징병 결정이 별 의미가 없었던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전투병으로 뽑힌 여자들이 같은 국방군 병사들의 성범죄 표적이 되어버리거나 대놓고 위안소를 운영하는 등의 흑역사로 발전해 나갔다는 데까지 이르게 될 터였다. 그리고 여자의 몸인 칼디르의 앞에서 아틀란티스 국방군의 병사들이 적국도 아니고 자국의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일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케인스 동지,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 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나.”
서기장 역시도 그러한 점을 느꼈는지 칼디르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디르가 등판하여 조국의 독립을 되찾는 데 공헌하는 겸 그동안 정부로부터 무시당해왔던 여성이라는 계층을 대표하여 권리 획득의 정당성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말에 뭐라고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이야기를 더 끌어봐야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아쉽군, 아쉬워. 내 자네의 뜻은 존중해줌세. 하지만 내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게. 그리고 혹여나 자네가 군인과 정부 관료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본래 문관과 무관을 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오로지 관료로서의 소임만 다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으니 한 번 생각은 해보게.”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위원장님께서 저를 긍정적으로 봐주신다면 저로서는 다행인 일이나, 제안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케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한 발짝 물러나 주기로 했고, 군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정치 부문에도 관심이 많은 칼디르에게는 다행이었다. 정치관을 대놓고 드러내고 다니기에는 아직은 이르지...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이다.
사실 칼디르가 입대를 선택한 데는 케인스에게 털어놓은 이유 외에도 향후 파시스트들만의 군 조직을 창설하고 기존의 국방군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미치려면 군인의 신분인 편이 낫다는 것과, 전체주의 성향을 가진 칼디르에게 최고 사령관 한 명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 조직은 매우 흥미로웠다는 것 등등의 이유가 있었으나... 뭐, 거기까지는 캐묻지 않았으니 굳이 그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로써 첫 번째 스카웃 제의가 불발탄이 되어버린 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케인스와 그 일행은 다시 칼디르의 발명품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테라포밍 장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실 기술 시연이라면 굳이 칼디르에게 직접 부탁할 필요 없이 칼디르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의 도움을 구해도 되었는데 칼디르를 회담장에 호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네가 만들었다는 인공지능의 우수성은 인정할 만하지만, 본래 인공지능이란 그 충성심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네. 자네 기술을 못 믿겠다는 소리는 아니네. 그저 정부와 군부 내에 인공지능, 그것도 인간을 뛰어넘는 수준의 초고도 인공지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기에 자네에게 직접 기술 시연을 부탁하게 된 것이네. 가능하겠나?”
케인스는 인공지능 로봇에게 기술 시연을 펼쳐 달라고 부탁하자니, 영 못 믿을 놈에게 전 재산을 맡기는 기분이 들어서 싫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하긴 그로즈니로 대표되는 군부도 사정은 마찬가지라서 무인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전차와 항공기에 굳이 조종 인원을 밀어 넣고 있으니, 케인스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인공지능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가 그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빚어지게 될 것이나... 반란 문제라면 인공지능보다는 신뢰받는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문제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뒤통수를 찔려 쓰러진 일이 인류 역사상 몇 번이나 있었더라?
그리고 외계인의 침공이니 인공지능의 반란이니 뭐니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결국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무기는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잔인하고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사실. 하지만 괜히 이러한 이야기를 이들의 앞에서 털어놓았다가는 자칫 비웃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수 있으니 칼디르는 내색하지 않았다.
“예, 저로서는 직접 기술을 펼쳐 보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저 행성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실 수 있도록 함선에 탑승하시면 회담장에서 못다 한 나머지 설명을 이어서 해드리겠습니다.”
케인스와 일행이 칼디르를 앞세워 미리 정박해 있던 함선에 올라탔고, 함교 쪽으로 나아가자 원뿔형 포탄처럼 생긴 테라포밍 장치 몇 대가 보였다. 더 가까이 다가서니 그 크기가 200mm 전차 포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과연 이걸로 지구만 한 크기의 불모지 행성을 정화할 수 있을까?
탑승객을 모두 태운 함선이 목적지를 향해 닻을 올린 뒤, 일행은 칼디르가 만든 테라포밍 장치를 바라보면서 걱정 반 기대 반이 섞인 감정을 품었다.
칼디르가 만든 무기들의 성능은 카이프와 그 아래에 자기 사령관처럼 반쯤 미쳐있는 베테랑들이 몸소 검증해주었으나, 사람들의 삶에 보탬이 되지는 못한다. 무기를 많이 소비한다고 삶이 윤택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테라포밍 장치와 같은 비군사적인 기술은 사람들의 삶에 충분히 보탬이 될 수 있었고, 그 성능이 이 자리에서 입증된다면 정식으로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일행은 칼디르의 도구가 아틀란티스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인 방사능 오염 행성의 정화 및 완파된 행성의 재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줄 수 있을지 두고 보기로 했다.
칼디르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일행에게 저마다 용도가 다른 테라포밍 장치들에 관해 블라블라 설명해주었고, 루시드 군의 핵 폭격에 당해 방사능에 찌들어버린 행성으로서 사람이 살지 않아 실험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뽑힌 목적지에 당도한 뒤에는 설명을 멈추고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칼디르가 함선 한 편에 있는 투하구에다가 냅다 포탄처럼 생긴 그 물건을 넣고 떨어뜨리니, 잠시 뒤 행성 표면에 초록색 물결이 일어났고 곧이어 아무도 살지 않던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초록색 숲과 푸르른 바다로 뒤덮여 파괴되기 이전의 지구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작은 포탄 하나에 지구만 한 행성 전체가 정화되기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크흐흐흐...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놀랍군, 정말로 놀라워...! 칼디르 자네, 육군원수의 앞에서 아카식레코드니 미래 예지니 잘도 떠들어댔다고 하더니만 우리 인민 생활 위원회의 최고 과학자들이 죄다 달라붙어도 해내지 못하던 일을 이렇게 눈 깜작할 새에 해치워버리다니 말이야! 으하하하하!”
칼디르가 개발했다는 기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존 과학기술로도 ‘만들 수는 있는’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워프 엔진, 테라포밍 장치, 초고도 인공지능 등이 그러했다. 다만 칼디르가 지금 선보인 것과 같은 성능을 같은 비용- 칼디르를 통해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니 사실상 공짜-을 들여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당장 여기서 성능이 입증된- 함선에 부착된 갖가지 계측기가 행성의 방사능 지수 등 부정적인 수치가 정상수준으로 돌아왔음을 증명해주었다- 테라포밍 장치만 따져 봐도, 기존 기술로 하자면 졸라게 뺑이 쳐도 몇 달은 걸리는 판에... 이 가격(공짜)에 이 정도 성능을 낼 수 있다? 아, 이런 기술을 가진 공순이라면 탐내지 않을 수 없지.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폭소를 터뜨려서야 쓰겠나?”
케인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칼디르의 기술에 만족감을 표출하자, 서기장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칼디르는 여기에 끼어들지 않고 그 주변에 있던 또 다른 무인 행성에 조금 다른 장치를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행성 표면에서 회색 물결이 일어났고 숲과 바다 대신 현대적인 도시와 공장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일행은 함선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테라포밍 장치는 몇 발 남아 있었고, 모두의 기대가 하늘을 찌르는 가운데 함선은 또다시 어딘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