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꿈과 희망의 공순이: 2화
칼디르와 아틀란티스 수뇌부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 뒤 한 며칠 동안은 그녀와 만나기를 청한 이들은 고위급이라기보다는 영관 이하의 군인이나 공학자들 같은 실무자들이었지만, 그 숫자는 제법 많았고 칼디르에게 면담을 청하는 이유도 그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했다.
“뭣이! 15살짜리 평민 계집 따위가 육군원수 각하의 눈에 들었다고! 내가 그년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군대에 공헌해왔는데, 내가 그년보다 못할 게 뭐요?”
“내 말이 그 말이오. 듣자하니 루시드 군의 최고 기밀과 우리 국방군에 대한 갖가지 조언을 육군원수 각하의 앞에서 말했다고 하는데...”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칼디르라는 계집이 얼마나 뛰어난지 직접 한 번 점검해보러 갑시다.”
칼디르의 존재를 알게 된 군인들은 대체로 그녀가 국방군의 최선임자 되시는 그로즈니로부터 모종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니꼽게 여겼다. 누군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꼴을 달가워할까? 그것도 군대에 몸 담아온 날이 그녀가 살아온 햇수인 15년보다 긴 이들의 눈에는 칼디르가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신분 출신이나 성별, 나이 같은 것을 명목으로 하여 진정으로 배척하고자 하는 이들은 애초에 칼디르에게 면담을 요청하지도 않은바, 그녀를 찾아온 군인들은 최소한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들어줄 준비는 된 이들이었다.
휘하에 실전 부대를 거느린 지휘관, 작전을 설계하는 참모,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힘겹게 정보를 물어오던 첩보 요원들... 그들의 성분은 아주 다양했고 칼디르에게 설득당했을 경우 국방군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도 제각기 달랐다.
“말도 안 돼...! 내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발명품이 어디서 굴러들어온 계집의 발명품보다 열등할 리 없지 않은가!”
“이건 사기야! 속임수라고! 신원도 불분명한 계집이 자기 힘으로 그런 대단한 물건들을 발명해낼 수 있다면, 대학교에 바친 내 젊은 시절은 도대체 뭐가 되는 거냐고!”
“안 되겠어, 그년을 직접 보고 무슨 수를 썼는지 알아내야겠소!”
“아니... 도대체 우리가 뭐가 아쉽다고 우리가 그년을 보러 가야 한다는 거요? 그년이 우리를 보러 오는 것도 아니고?”
“그럼 여기 가만히 앉아서 그년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점이라도 쳐서 알아보시던가! 나는 그년을 만나러 가서라도 그년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밝혀 내고 말 것이오!”
공학자들이 보인 반응도 군인들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군인들이 칼디르의 신분을 근거로 그녀를 깎아내린다면 공학자들은 여러 가지 실험 끝에 그야말로 어디선가 뜬금없이 나타난 사람이 가지고 온 발명품이 자신들이 온 힘을 들여 만들어낸 작품보다 뛰어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다.
그들이 나름대로 칼디르의 발명품을 검증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계측기들이 그녀가 만들어낸 물건들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칼디르의 존재를 모를 때는 그녀의 물건에 높은 평가를 주었지만, 그로즈니가 칼디르의 신상정보를 공개하자마자 헐레벌떡 결함이 있나 없나 재검토 작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고지식한 공학자들의 반대를 위한 반대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어떻게든 단점을 찾아내려고 시작한 재검토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나오라는 단점은 나오지 않고, ‘장점투성이’라는 사실만이 드러났다.
당장 군인들이 하나라도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무기만 따져 봐도 화력, 방어력, 기동성 등 모든 면에서 기존의 것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고장률이 0%에 가까워- 어쩌면 아예 고장이 나지 않을 수도 있고- 정비할 필요도 없고, 효율적인 에너지원과 자동 장전기, 포탄 생성기 등을 갖추어 보급조차 받지 않고 무기한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티렉스 전차를 필두로 한 한 개 기갑 사단을 이끌고 나가 루시드 놈들의 손아귀로부터 몇 개의 행성을 해방시키는 동안, 아군의 손실이 얼마나 나왔는지 아는가? 사상자는 0명에, 중장비 손실률도 0%네, 0%!”
고장도 안 나고, 보급도 필요 없고, 사람을 앉히는 대신 그냥 무인으로 굴리면 식량 보급 부담까지 덜 수 있다는 사실은 원수 체면에 직접 전장으로 뛰쳐나갔다 돌아온 카이프가 몸소 증언해준 바 있었다.
안, 안 그래도 우리도 실험실에서 우리 나름대로 그년의 기술을 검증해보는 중이었는데, 원수씩이나 되시는 분이 실전 자료들을 가지고 오시면... 그 앞에다 대고 뭐라고 반박해야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아니, 칼디르의 기술을 흡족히 여기시는 원수 각하의 마음을 감히 돌리려고 시도할 용기를 낼 수나 있을까?
한 가지 트집 잡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칼디르가 ‘아틀라늄’이라고 명명한 그 특별한 금속물질을 가공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에 생산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단점마저도 칼디르를 통해서 대량으로 공급받음으로써 상쇄 가능한 단점이라는 사실 앞에 공학자들은 절망했다.
“끄응... 생각해보면 그년은 이 단단한 금속을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다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이것을 가공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소리가 아니겠소? 그런데 우리는 우리보다 어린 계집년도 하는 걸 못 하고 있다는 소리고.”
“이 주기율표에도 없던 물질을 가공하는 기술을 우리도 체득하여 곧잘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나마 트집 잡을 수 있을 만한 생산성 문제도 해결될 테고...”
생산성 문제는 물론 치명적인 단점이지만, 이걸 문제 삼았다가는 ‘나는 박사 학위까지 가진 몸이지만, 초등학교도 안 나온 그 계집보다 멍청해서 아틀라늄인지 지랄인지, 하여튼 이 금속을 제련할 기술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꼴이라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정말로... 내가 그년보다 못하다고...?
물론 군인들과 공학자들이 모두 한몸이 되어 칼디르를 깎아내리는 데 집중했던 것은 아니요, 칼디르가 가진 정보와 기술의 유용성을 알아보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 처자가 평민 출신에다 학력사항도 미비하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요...?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처자가 가진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이 기술들은... 오랜 전쟁으로 수많은 기술을 상실한 우리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기술들을 습득하고 발전시킨다면 잃어버린 기술력을 회복하는 데서 더 나아가 아예 다른 나라들을 치고 나가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그 처자가 가진 정보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오. 그렇게 한다면 벌써 수십 년째 이어져 온 루시드 놈들과의 전쟁도 좀 더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고, 인명 피해도 훨씬 적게 낼 수 있을 것이오.”
“애국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는 법, 일개 처자라고 할지라도 조국을 향해 공헌하고자 하는 마음이 확고하다면 우리가 그 처자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맞는 말이오. 평민이니, 귀족이니,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소리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처자가 가진 정보와 기술이 대단히 유용하다는 사실 뿐이오. 원수 각하께서 몸소 그 사실을 입증해주시기도 하셨고...”
칼디르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든 일단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왔다면 그 얼굴에 친절한- 어쩌면 가식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미소를 띠고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보냈다.
루시드 군의 현황과 앞으로 취할 행동, 그에 대한 국방군의 대응 방법, 그 방법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병기의 설계와 생산 조달 문제 등등... 이 중에서 예지 능력으로 엿본 미래에 관한 정보는 즉시 검증할 방법이 없었으니 모처럼 찾아온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는 없었지만, 대신 다른 부문에서 점수를 따서 만회할 수 있었다.
응~ 어차피 지금은 점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넘겨들은 정보까지도 나중에 가서는 제발 좀 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어~ (‘미래 예지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다.’는 칼디르의 신념과는 다르게, 그녀의 예지 능력의 정확도는 100%에 가까웠다.)
칼디르로서는 자신을 찾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기에 아쉬울 것이 없었다. 물론 짧은 면담 시간 동안에 모든 정보와 기술을 전수할 수야 없겠지만, 자신과 대화를 나눈 이들의 머릿속에 ‘다음에 한 번 더 만나러 올 가치는 있겠군.’ 정도의 생각만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로즈니의 소개로 가장 먼저 자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된 이들을 통해서 앞으로 더더욱 많은 사람과 더더욱 자주, 가깝게 접촉하면서 그들의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칼디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고, 개중 일부를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의 참모로 포섭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국방군 전체에 팽배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고지식한 귀족 가문 출신의 도련님들 이야기고 카이프처럼 평민 출신으로서 실력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앞으로도 개인 면담을 핑계로 은근슬쩍 파시즘을 팔아먹을 수 있다면 국방군을 장악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대놓고 정치성을 드러낸다면 정치군인이라고 욕을 먹게 될 테니 주의 깊게 파고들어야겠지만, 언젠가 이 땅 위에 세워지게 될 파시즘 정권을 위해서 기꺼이 충성을 바칠 사람의 숫자를 늘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공을 들일 가치는 있었다.
칼디르가 이런 의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장본인인 그로즈니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칼디르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죄다 칼디르를 채용하는 것을 반대할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지라.
“칼디르, 자네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용할 집무실이 생기자마자 도대체 얼마나 되는 인원이 여기를 오간 건지 세기도 힘들군. 하루에도 꼭 수십 명씩은 자네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아서 내가 따로 불러내기에 미안해질 정도야. 부디 앞으로도 자네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게나.”
“육군원수 각하의 바람이 그러하시다면, 저는 마땅히 그에 따를 뿐입니다.”
그로즈니가 격려 차 건네는 말에 칼디르는 그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감사를 표할 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로즈니 역시 파시즘 정권의 존속을 위해 ‘포섭해야만 하는 사람’의 명단에 올라 있었기에.
일단 칼디르의 존재가 그녀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도 경쟁심과 호승심을 일으켜 오랜 전쟁으로 지친 마음에 새로운 자극이 되고, 긍정적으로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정보 습득 창구 겸 기술 발전 경로로서 자리매김한다면 그 결과물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그로즈니의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이 맞건 틀리건, 처음에는 실무진급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칼디르와의 면담과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의 지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더니 급기야 아틀라인 서기장 밑에서 일하는 장관급 인사들까지도 칼디르를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일대다 회담 일정이 잡히기에 이르렀고,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헌데... 하필이면 그런 중요한 날에 현관문 앞에서 슈가의 손길에 이끌리는 바람에 벗겨지고 아무렇게나 범해진 다음 온몸에 키스 마크를 잔뜩 새겨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도착하여 가쁜 숨을 고르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앗, 차, 차...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좀 가다듬고... 넥타이도 다시 매고, 어디 옷매무새가 틀어진 데 없나 거울에다 대고 면밀히 살펴본 다음 군인에 걸맞은 걸음걸이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어쨌거나 순간이동 능력 덕분에 인민정부 행정청 청사에 늦지는 않았고, 진한 붉은 색의 키스 마크와 귀갑 묶기로 몸에 감긴 밧줄은 군복으로 가렸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일은 없었다.
“아니, 서기장 동지. 듣자하니 근래 아주 유능한 처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하시던데, 어떻게 제게도 언질을 해주지 않으실 수가 있는 겁니까? 정말로 섭섭합니다, 동지.”
“케인스 동지. 동지에게 말해주지 않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가 오면 털어놓으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오.”
“서기장 동지께서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처자를 꽁꽁 숨겨둘 생각이셨더라면... 이미 육군원수 동지가 그 처자의 신상에 관해 알려준 바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런... 칼디르에 관해 알게 되었다면 하는 수 없지. 내 생각보다는 빠른 것 같지만, 어디 한 번 그 처자와 만나 대화를 나눠보겠소?”
“그리하게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겸사겸사 다른 부서의 위원장 동지들도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케인스 폰 도플러 외무 인민 위원장, 그러니까 외교부 장관쯤 되는 직함 외에도 여러 부서의 장관직을 두루 겸함으로써 인민정부 내에서 서기장 다음가는 위치를 다진 이 남자의 발언을 계기로 성사된 오늘의 회담은 그 성격상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괜히 이상한 눈치를 받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 이 케인스라는 사내도 장관급으로 기용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인물인데 첫인상부터 어그러지게 된다면... 휴, 이제 문앞까지 왔으니 잡생각은 지우자.
끼이이익... 칼디르가 안내를 받아 회담장 안에 들어서자, 긴 탁자의 최상석에 아틀라인 서기장이 배석한 가운데 차상석에는 케인스 위원장이, 다른 자리에는 다른 부서의 대표들이 그 서열에 맞추어 앉아 있었다.
다만 원래대로라면 케인스 위원장 다음가는 사람이 앉아 있어야 했을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칼디르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정부 내 일인자, 이인자 바로 다름 가는 자리에 앉게 되다니, 칼디르를 향한 아틀라인 서기장의 신뢰도를 짐작해볼 만했다.
칼디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서 앉아 회담장의 문이 다시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고, 문이 완전히 닫힘과 동시에 케인스의 요청으로 성사된 회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