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총독부의 사정: 7화
지나치게 넓은 현재의 전선을 축소하여 병력의 밀도를 높이고, 상태가 좋은 부대는 따로 빼내어 적의 약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 포위 섬멸을 시도한다. 클로세가 주재한 작전 회의의 결론은 그러했으나, 회의를 끝내고 책상에서 일어서자마자 그의 야심한 작전은 크게 틀어지게 시작한 것만 같았다.
“때마침 잘 만났네, 예산실장. 작전 회의에서 나온 결론에 따라 방어선을 개편하려면 우리 부대를 좀 많이 옮겨야 하고, 그러자면 예산이 필요해서 자네를 만나러 가던 참이었는데... 혹시 이 일에 들어갈 예산을 충분히 구할 수 있겠는가?”
“아, 부총독 각하... 그, 방어선 개편에 사용할 예산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까? 그, 그것이... 총독부의 재정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아...”
“아니, 전투를 치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대를 옮기는 데 쓸 돈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예산실장?”
괜히 그 근처를 걸어가다가 클로세의 눈에 띄어 시비를 걸리게 된 예산실장은 그가 어떤 질문을 하든 간에 그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해버리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그의 대답을 듣는 클로세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을 지옥에서 퍼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예산실장으로서 없는 예산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는 해도 이곳, 아틀란티스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없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안 되겠는가?”
“각하께서도 말씀하신 대로... 여기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많은 부분은 폭동 진압과 군수물자 생산에 쓰이고 있기에 대규모 부대 이동에 할당할 만한 예산을 구할 길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부터 하지는 말게. 뭐 하면 아틀란티스 놈들을 좀 더 쥐어짜거나, 다른 부문에 배정된 예산을 이쪽에 돌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니던가?”
“둘 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총독부의 노예 노동 강요, 아니, ‘교화 작업’은 최고 수준이므로 더 쥐어짤 것도 없을뿐더러... 부총독 각하의 면전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총독 각하와 그 측근의 부패가 심각하여 있는 예산도 빼돌려지는 판에 이미 예산을 타가기로 한 부서에 양보 좀 해달라고 말하기에는...”
“아니, 군대가 굶어 죽으면 다른 부서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자네는 아는가, 모르는가? 군대는 모든 국가와 정부 조직의 근원이야! 모두에게 예산이 충분히 돌아갈 수 없다면, 당연히 군대가 우선적으로 예산을 할당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힘듭니다.”
“다른 데서 예산을 빼낼 만한 곳이 없다면 우리 총독부에 협조적인 귀족 놈들에게서 ‘기부’라도 받던가, ‘아틀란티스 인 복지’에 쓰일 돈이라도 내놓게!”
“안, 안 됩니다. 아틀란티스의 고위 귀족들은 총독부가 본인들의 특권을 보장해주고 있기에 협조해주는 것이지, 우리 루시드 제국에 진정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은 아니기에 ‘기부’를 요청했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그리고 쥐꼬리만 한 복지 예산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 더더욱 거세지게 될 것입니다...!”
“자네는 명색이 총독부의 예산 담당자이면서, 할 줄 아는 말이 ‘안 된다’, ‘어렵다’, ‘힘들다’, ‘불가능하다’, ‘죄송하다’ 이런 것들뿐인가?”
클로세로부터 끊임없이 압박을 받은 끝에 예산실장은 ‘총독께서 칼디르 칵테일 만드신다고 하시면서 부총독께서 말씀하신 경로들을 통해 예산을 먼저 갈취해가셨기에, 예산을 내어드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소리를 쳐버리고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뭐... 뭣이...? 그냥 예산이 없어서 못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언급한 방법들로 발틱 놈이 선수를 쳐서 남아있는 예산을 가져가 버린 탓에 줄 방법이 없는 거라고? 게다가... 그 돈을 도박으로 다 털어먹기까지 했다고? 이... 이... 빌어 처먹을 물개 새끼가...!
안 좋은 일은 덩달아 일어나는 법인지, 쪼르르 달려와서는 그의 귀에다 전장의 소식을 속삭여주는 장교의 말도 그다지 긍정적인 소식은 아니었다. 우리가 비효율적인 방어선을 개편하려고 해도 예산이 없어서 발이 묶여있는 동안, 저쪽에서는 용기백배 충전하여 날뛰고 다니면서 방어선 곳곳을 터뜨리고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클로세는 발틱과 함께 옛날 옛적에 ‘그로즈니 선’에 인력을 수백 조 명씩 갈아 넣다가 ‘아, 저놈들이 쳐놓은 방어선에 먼저 공격해봐야 좋을 게 없구나’하고 깨달은 것이 있어서 먼저 공격을 나서기보다는 마찬가지로 방어선을 구축해놓고 저쪽에서 먼저 쳐주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해왔는데, 이제 보니 다 부질없는 짓거리였던 것 같다.
우리가 놈들의 수도까지 지배하고 있는 이상 우리가 방어태세를 견고히 하고 있으면 놈들이 급해져서 손실을 감수하고 방어선에서 뛰쳐나올 거라고 예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로즈니 휘하의 정예병들이 방어를 풀고 공세로 전환할 때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던 루시드 군의 방어선을 보기 좋게 돌파해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도 우리 쪽 방어선을 시원하게 두들겨 패던 놈들의 손에 신무기까지 들렸으니, 지금쯤 아주 신이 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겠지? 우리가 예산이 없어서 부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에 빙글빙글 둘러서 포위 섬멸을 몇 번이고 멋지게 성공하면서?
이 모든 사태의 원흉에는 ‘그로즈니를 뛰어넘는 아틀란티스 국방군 최고의 명장’ 발틱 유니온 워싱턴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클로세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하고 끊어졌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미뤄왔던 ‘결단’을 지금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자네 둘은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나는 따로 총독 각하를 뵈러 가보겠네.”
그에게 심한 질책을 당할 줄 알았던 두 사람은 뜻밖에도 수월하게 풀려나게 되자 헐레벌떡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뭉그적거렸다가 그가 돌변하여 자기를 다시 잡아 세우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두 사람과 헤어지자마자 자기 집무실로 돌아온 클로세는 금고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황금색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가 발틱을 향해 내리기로 한 어떠한 ‘결단’에 사용될 수단이 그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상자와 마찬가지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포장지를 풀어내자, 발틱 총독께서 그리도 좋아하시는 칼디르 칵테일 주사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에게만 효력을 발휘하는 칼디르 칵테일의 특성상 원래는 남자의 몸인 발틱에게는 효과가 없을 테지만, 클로세가 언젠가 그에게 사용하기 위해 비밀리에 준비한 이 물건은 이야기가 달랐다.
칼디르 칵테일 ‘델타(ð)’형. 이 약물을 주입당한 남성은 이전에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초절정 거유 연약 미소녀로 TS되는 동시에, 칼디르 칵테일 특유의 그 강력한 최음제 성분에 취해 자기 몸에 어떤 위해가 가해져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몸이 된다고 한다. 만일을 대비해 인체실험까지 거쳐서 효능을 검증한 이상, 걸리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TS 약물이라니, 칼디르 칵테일과 계집을 그리도 좋아하시는 총독 각하께는 더없이 어울리는 최후가 아니던가.”
클로세는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2단으로 되어있던 상자의 아래쪽 칸에 있던 황금색 권총과 함께 주사기를 품 안에 넣었다. 그래... 이왕에 놈을 처치하기로 한 이상, 그냥 죽이는 거로는 내가 그동안 그놈 때문에 받아온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니 철저히 갖고 논 다음에 죽여주겠어.
하극상을 결행하기로 한 이상, ‘거사’ 이후에 총독의 지위를 접수할 만한 병력이 필요한데 다른 곳에 있는 부대를 옮겨오기는 힘든 상황이니 그는 ‘아틀란티스 공산주의자들이 총독 각하를 암살했다. 이 통신을 수신한 모든 부대는 지구로 집결하라.’는 거짓 군령으로 태양계 안의 부대를 움직이기로 했다.
아틀란티스 영내 공산주의 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는 해도 그것이 총독을 암살할 정도나 되는지에 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그 정도 의문은 부총독의 권위로 어떻게든 짓뭉개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총독이 아닌 부총독의 명령에 복종하는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를 구분해둔바, 통화를 싹 돌려 자신을 따르는 부대는 지금이라도 지구로 달려올 수 있는 상태임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집무실 의자를 박차고 나섰다.
위험한 무기를 두 개씩이나 소지하고 무장 경호원까지 대동한 채로 총독이 있을 연회장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참석자들의 무기 소지 여부를 검사해야 할 총독의 경호원들은 클로세가 ‘지금 감히 부총독의 몸을 더듬겠단 말이냐’고 호통치는 말에 깨갱하여 그를 그대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리고 명색이 총독부의 2인자인 그가 고위 관료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이 이상야릇한 연회장에 들어온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지라, 무장 경호원과 함께 안쪽에 들어서도 이상한 눈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아니, 클로세와 함께 온 남자들이 무장 경호원일 거로 생각하는 이들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윤간 플레이라도 즐기려고 몸 좋은 남자들을 구해온 거라고 넘겨짚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거사의 성공 가능성이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부총독 각하. 어디로 안내해드릴까요? 각하께서 자리를 잡으시는 대로 계집들을 들여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계집은 됐네. 그보다는 총독 각하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각하께서 계시는 곳으로 안내해주게.”
클로세는 그를 마중 나온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을 앞세워 총독이 계집들을 후리면서 놀고 있다는 방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방해될 만한 놈은 없어 보였다. 안쪽에 아주 약간의 무장 병력만 있었어도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었는데... 이 정도 경계 태세라면 생각보다 일을 쉽게 끝낼 수 있겠어.
스르륵. 안내역을 맡은 집사가 얇은 창호지가 덧대어져 있는 문을 열자, 웃통을 드러낸 채로 10여 명의 계집에게 둘러싸여 있던 총독의 모습이 클로세의 눈에 들어왔다. 띠디딩... 띵띵띵~ 이상한 음색으로 연주되는 악기 소리는 덤이었다. 네놈의 그 추태를 두고만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발틱.
탁. 그가 방안에 앉은 것을 확인한 집사가 좋은 하루 되시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한 뒤에 다시 문을 닫고 몇 분이 흘렀을까. 안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소리가 끊어지고, 안쪽에서 거친 총성 한 발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문을 열어보려 했던 집사의 관자놀이에는 총알이 한 방 박혔고, 클로세를 충실히 따르는 무장 경호원들은 집사를 처리하자마자 뛰쳐나가 주변에 있던 총독의 측근들을 닥치는 대로 쏘아 죽이기 시작했다. 총독의 방은 다른 참석자들이 있는 곳과는 외따로 떨어져 있었기에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