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총독부의 사정: 5화
발틱 총독의 결단을 요하는 긴급한 소식이 계속해서 들어왔지만, 총독이 베푸는 ‘그들만의 연회’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루시드 주둔군과 아틀란티스 국방군이 맞부딪치는 전장에서는 매일 같이 수많은 병사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지는 반면,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는 연회장의 문틈으로는 하하 호호 즐거운 웃음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총독에게 보고를 올리러 왔다가 연회장 출입문에서 막혀 발만 동동 굴리다가 체념하여 돌아서 버리는 장교들과 연회장 안에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즐겁게 떠들어대는 높으신 분들의 얼굴이 심히 대조되었으나, 그들은 분명 아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이제 발틱은 자기가 연회장 바깥으로 나갔다 하면 아랫것들이 귀신같이 알아내고 보고를 올리려고 다가온다는 점을 깨달았는지, 연회를 끝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연회장 안에서 나가지 않고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며 뻗댄다는 식의 계획을 세워놓고는 아틀란티스의 여러 고위 귀족과 좆목질이나 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야, 아랫것들의 보고를 받고 결재하는 일련의 작업은 끔찍하게 노잼이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고위 귀족들과 더불어 옆구리에 계집들을 낀 채로 술을 붓고 고기를 먹으며 노는 일은 즐겁기 그지없었으니까.
총독부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직무유기를 서슴지 않으니 졸지에 머리 없이 몸통과 팔다리만 남은 병신 꼴이 된 아랫것들은 자기네끼리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어떻게든 개선해나가고자 했다.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가용 가능한 병력의 비율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보고는 너무 과장된 것이겠지? 말해보게! 총독 각하의 앞에서 현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과장해서 말한 거냐고 묻고 있지 않나!”
부총독 겸 루시드 주둔군 해군 부사령관 클로세 유니온 워싱턴. 그는 수장과는 다르게 현 상황을 개선해 나가려는 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눈으로 봐도 자기네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부총독으로서 주둔군이 처한 상황을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발틱의 앞에서 ‘현 병력의 단 10%만이 실제로 가동 가능한 상태다.’라고 말했던 장교에게 더 자세한 것을 캐물어 볼 정도로 말이다.
“그... 기준을 대폭 완화한다면 100조 명 정도를 가동 가능한 상태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병력의 질을 분간하는 기준을 완화한다고 해서 전장의 환경이 자동적으로 개선되는 건 아닌지라...”
“하,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구만... 제기랄! 20조 명이면... 행성계 하나에 몇 명의 병사가 따라붙을 수 있는 건가?”
“우리 은하의 항성 개수가 약 5천억 개인데 괴뢰 아틀란티스 제국의 영역이 그 중 절반 정도이므로 행성계 하나당 80명 정도를 배치할 수 있습니다. 100조 명을 기준으로 할 경우 400명 정도...”
“80명이나 400명이나 별 차이도 안 나는데, 자네는 뭘 그렇게 세세히 설명하고 앉아있는가? 제기랄... 이거 완전, 구멍 투성이로구만.”
우물쭈물하며 답하는 장교의 말을 듣고 클로세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뻥 차버렸다. 저 젊은 장교가 하는 말에는 거짓이 한 점도 들어있지 않았다. 당장 징병 신체검사의 기준을 대폭 완화하여 조직 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한 정신병자들과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병신들까지 아득바득 받아들인 결과가 현 상황이었으니.
각각 대가리와 몸에 문제가 많은 병신까지 보조병이 아닌 전투병으로 받아들인 결과 현재의 병력 규모를 어떻게든 유지는 할 수 있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팔다리가 붙어있고 정신도 멀쩡한 남자들도 혹독한 전장에 홑몸으로 던져지면 미쳐버리기 딱 좋은데, 하물며 병신들은 어떻겠는가?
정상인들도 정신론 숭배자들과 똥군기가 만연한 루시드 군에 들어왔다 하면 바로 전쟁범죄와 프래깅(상관살해)부터 배운다 하니, 말 다했다.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는 거야 이놈의 군대에서 안 그러는 놈을 찾기가 더 어려우니 포기한다 치더라도, 싸움이라도 똑바로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에만 도가 튼 대부분의 루시드 군 병사들은 막상 전투가 시작됐다 하면 민간인을 학살할 때 보여준 그 용맹은 어디로 갔는지 겁쟁이가 되어서는 앞다투어 도망치기 일쑤였고, 병사들의 질이 좋지 않으면 물자라도 풍부해야 했는데 물자도 모자랐다.
“물자라... 그래, 혹시 우리에게 남아있는 물자가 얼마나 되는가? 그 물자를 가지고 아틀란티스 현지에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하여 사용할 수는 없겠는가? 내 생각에는 부족한 병역 자원도 보충하는 겸 아틀란티스 인 사이에 내분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어렵습니다, 부총독 각하. 보급선이 불안정한 현 상황에서 각 부대는 지금도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보급 창고를 꽉 붙들어 놓고 열어주지 않고 있는데, 현지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그 창고에 들어있는 물자를 내어달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봐, 이봐! 여기는 군대야! 군바리는 위해서 까라고 하면 까는 게 당연한 거야! 젠장... 그래, 당장 나눠줄 보급품이 없다면 우리가 추가로 생산할 방법은 없겠는가?”
“그것도 어렵습니다. 지난날 아군의 대대적인 핵 폭격은 아틀란티스의 여력을 분쇄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으나, 그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어 총독부가 지배하는 영역 안에 남아있는 공장들로는 현재 병력을 유지하는 데도 급급한 실정입니다. 그나마 있는 자금과 원료는... 그... 모조리 총독 각하의 여흥에 투입...”
“그놈의 칼디르 칵테일인지 뭔지... 당장 그만둬! 그만두란 말이야! 발틱, 그딴 자식이 내 상관이라니... 신이시여, 제가 당신에게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기에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이제 클로세는 자기 앞에 놓인 서류를 한 움큼 움켜쥐고는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고 답하는 장교의 얼굴을 향해 집어 던졌다. 하지만 장교는 거짓을 고하지 않아 꿇릴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지난날 아틀란티스 제국의 수많은 행성계를 불태워버렸던 루시드 제국의 전면적 핵 폭격은 아틀란티스의 여력을 제거하는 데는 분명 효과적이었으나, 사태의 원흉인 루시드 군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바로 그 땅을 지배해야 하는 처지가 된 뒤에 다시 생각해보니 자충수도 그런 자충수가 없었다.
현 전선에서 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하든, 방어에 유리한 지점까지 선행적으로 후퇴하든 간에 물자가 필요한데... 그 물자를 생산해낼 공장 대부분을 우리 손으로 망가뜨려 버렸고, 그나마 있는 것은 빨갱이들의 파괴 공작에 터져 나가거나, 높으신 분들의 사리사욕에 이용당하거나 둘 중 하나...
대체 그 많던 자금과 원료는 다 어디로 갔을까? 병력의 질 향상에 사용되어야 했을 물자들이 지금쯤 누구 뒷주머니로 흘러들어 갔을지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하, 시발... 본국 정부와의 사이도 나날이 나빠져 온 데다, 본국도 경제 사정이 곱창난 것은 매한가지라 그쪽에서 필요한 물자를 지원해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어디에서는 그로즈니의 이름만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오줌을 지리면서 비밀리에 아틀란티스 군과 접촉하여 자기네가 쓰기에도 모자란 물건을 애써 팔아치우며 우리 쪽은 제발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청탁하기까지 한다고 하니, 루시드 군의 한심함을 짐작해봄 직했다.
그게 남의 나라 군대라면 모를까, 지금 내가 어떻게든 멱살을 잡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군대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 와중에 우리가 상대해야 할 놈들은 어디선가 새로운 무기를 구해 와서 우리를 밀어낼 힘을 길러내고 있다, 이 말이지?
털썩. 젊은 장교의 얼굴을 향해 서류 더미를 내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클로세가 맥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는 분노에 찬 아틀란티스 인들의 손에 목이 뎅겅 하고 잘리거나, 본국으로 쫓겨나서 그곳에서 모든 책임을 지고 본보기로 처형당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그렇다고 당장 뭘 하려니 윗대가리들이 죄다 칼디르 칵테일에 홀딱 빠져서 그나마 있는 자금과 원료를 거기에다 다 꼬라박고 있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끄응... 이대로 가다간 확실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특히나 아틀란티스 인들의 손에 붙들리게 될 경우 벌어질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군. 우리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죽여 놨으니, 목이 잘리는 거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 거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다. 삼십육계 줄행랑. 여기에 가만히 죽치고 앉아있을 수도, 본국으로 냅따 도망갈 수도 없다면 그 누구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서 군벌 노릇이나 하며 먹고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든 개선해야 한다는 점은 확고한 사실이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차라리 경각에 달한 내 목숨이라도 무사히 건져내는 것, 그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았다.
나도 웬만하면 어떻게든 도망치지 않고 계속 싸워보겠는데, 이건... 도저히 답이 없다. 그 미치광이 카이프에게 새 장난감이 생겼다고 하지 않냐! 그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박제로 전시되는 건 싫다고!
“크흠, 흠... 내가 잠시 흥분을 했나 보군. 각급 부대의 보급품 창고를 여는 것도, 추가 물자 생산도 어렵다면 우리 손아귀에 확실하게 남아있는 힘이라도 잘 활용해야겠지. 현재 아군 함대의 전력 상황은 어떠한가? 내가 자는 사이에 또 어디서 터져 나간 건 아니겠지?”
“예, 각하.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지금 아틀란티스 놈들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땅개 놈들입니다. 우리 해군의 전력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 전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작전을 한 번 짜보도록 하세나.”
일단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부사령관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그러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 보일 수는 없었으므로 클로세는 딴소리를 했다. 해군 함대 전력 체크, 이는 줄행랑을 놓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절차였으나 제삼자의 귀에는 항전을 이어나가기 위한 정보 확인 절차처럼 들릴 터.
클로세는 참으로 뻔뻔하게도 본마음을 감춘 채 적군을 분쇄하기 위한 작전 회의를 개최한다는 명분하에 회의를 열어놓고 줄행랑을 치기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도 본질적으로는 발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비겁한 인간이었고, 빌뇌브와 마찬가지로 자기 혼자서 살아나갈 궁리를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자기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