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8화
“내 후배님이 자네 발명품을 가지고 놀면서 무척이나 신난 모양이더군. 1분 1초가 멀다 하고 비밀 통신망에 올라오는 전과 보고 때문에 정신이 없네. 후, 정말이지... 자기가 아직도 원사 계급장을 달고 한창 날아다니던 그 사람인 줄로만 아는 건지...”
그로즈니는 자기 집무실에서 카이프가 전해오는 소식을 접하며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는 그도 한때는 최전방에서 달리면서 독가스도 좀 들이마셔 주고 총상을 입어 실려 나가기도 했으니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10살에 군문에 들어와 20살에는 사단장이 되고, 남들이 중대장 정도나 해먹을 30살에는 육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하지만 30살이면 아직 전장에서 날뛸 수 있는 나이인 부분 인정?’ 그 당시 그로즈니가 내세운 논리는 그러했다. 그로즈니의 주전공이 보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나마 전차 안에 들어가 있는 카이프보다도 무모했던 셈이었다.
카이프의 별명에는 ‘마법사(그로즈니)의 제자’라는 것도 있었는데... 과연 카이프는 누굴 보고 최전방에 기꺼이 나서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을까? 카이프를 탓해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을 아는 그로즈니는 그를 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어디 다치지나 말라고 지원을 보내주기로 했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었다.
“이왕이면 그분도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으면 했는데... 사령부로는 언제 돌아오신다고 합니까?”
“내 생각에는 오늘 하루가 다 가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니, 더 기다릴 것 없이 그냥 자네가 하려던 말이나 계속하게.”
카이프에 관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나 하자는 그로즈니의 건너편에는 멋들어지게 국방군 육군 정복을 차려입은 칼디르가 앉아 있었다. 본래 국방군에는 여성 장교를 상정에 두고 제작된 옷이 없는바, 칼디르에게 줄 옷을 급하게 구해오고 입대 수속을 거치는 사이 카이프는 전장으로 출격해버렸다.
“아... 음, 그러니까 이... 분의 군적을 만들어드리고, 이 분이 입을 정복까지 같이 제작해드리면 된다는 겁니까?”
“자네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나.”
암요, 군바리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합지요... 근데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네요... 그로즈니의 명령을 받들어 칼디르의 신체 치수를 재고 옷을 만들어오는 임무를 맡게 된 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여 그 부분에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기도 했고, 칼디르의 군적을 만드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는 했는데... 고새를 못 참고...
칼디르는 으레 총사령관과 부사령관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추가적인 정보를 건넬 셈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카이프에게는 나중에 따로 말해주는 수밖에. 어쩌면... 정식으로 군인이 되고 나서 루시드 군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거나, 국방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는 판단이 약간 어긋나버린지도 모른다.
원래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 중에서 하나가 빠진 데다 일단 군인이 되기는 했으나 직책도 계급도 없는 애매한 몸이지만, 칼디르는 그로즈니의 말을 받들어 루시드 군의 기밀정보에 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현재 아틀란티스 영내에 전개된 루시드 군의 배치 현황, 전략 무기가 잠들어있는 곳, 그들의 작전계획, 동원 가능한 인원, 우주 전함 내부의 구조 등...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정보였다. 물론 교차검증을 거치긴 해야겠지만, 칼디르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홀로그램 파일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그로즈니의 앞에 떡하니 제시했다.
“이 자료들은... 교차 검증용으로만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군의 작전에 큰 도움이 되겠군.”
개중에 일부 정보는 그로즈니 역시 가지고 있어 그 자리에서 교차 검증을 해볼 수 있었고, 두 자료가 대체로 일치하여 칼디르를 향한 그로즈니의 신뢰도는 더더욱 올라갔다. (‘완벽히 일치한다’는 표현 대신 ‘대체로 일치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그로즈니가 불안정한 첩보선을 통해 모아온 정보보다는 칼디르가 자기 능력으로 모아온 정보 쪽이 더더욱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는 공주님, 그리고 슈가와 더불어 섹스할 때만 써서 그렇지, 아카식레코드라는 게 사실 이런 식으로 쓰면 굉장히 무서운 능력이었다. 첩보전을 펼치지도 않고 적군의 1급 기밀을 캐올 수 있고, 반대로 조국을 배반할 마음을 품으면 아군의 1급 기밀을 팔아넘길 수도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사실... 육군원수 각하를 만나러 오면서도 각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서기장님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병기에 관한 정보를 먼저 보여드리고, 저를 인정해주신다면 그 병기가 향해야 할 방향에 관해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아니, 내가 자네를 인정해주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고? 내 어찌 자네와 같은 훌륭한 애국자를 인정해주지 않겠나?”
칼디르가 군인이라는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는 목소리로 기나긴 보고를 이어나가다가 문뜩 하던 말을 멈추고 감격 받았다는 듯이 한마디를 덧붙이자, 그로즈니는 고개를 저어 보이면서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는 식으로 대답해주었다.
그로즈니가 진정으로 칼디르를 무시하고자 했다면, 총사령관 체면에 입대 수속을 도맡아주고 거기에 더해 맞춤형 육군 정복을 만들어줄 이유나 있겠는가? 다시 찾아오지나 말라는 말이나 해주고 쫓아냄으로써 칼디르에게 ‘나는 정통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자 했는데, 정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식의 감정을 심어주어 흑화하게 만들었겠지.
그가 칼디르에게 하필이면 해공군의 것이 아닌 육군의 정복을 내려준 데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역시 인간인지라 자기가 속해있는 조직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는바, 칼디르와 같은 인재를 해공군에 넘겨주기보다는 육군에 묶어두고 싶다는 의지를 그런 식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이로서 그로즈니의 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칼디르는 ‘혹여나 제가 말씀드리는 정보가 부정확할 수도 있으니 앞으로도 교차 검증 과정을 충분히 거친 뒤에 작전에 반영하시라’는 상투적인 언어로 보고를 끝냈다.
아카식레코드나 미래 예지 능력 ‘따위’에 의존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어긋나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될 터. 칼디르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래왔듯, 앞으로도 편집증적일 정도로 정보를 수집하고 이론을 증명해보기 위해 실험해보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로서 그런 노력의 필요성을 그로즈니에게도 재고시켜주었다.
그로즈니 역시 노련한 군인으로서 칼디르가 한 말의 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그녀가 제공해준 자료를 따로 챙겼다. 그럼... 이걸로 이번 보고는 끝난 셈인데... 그로즈니가 뭔가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자네의 성씨가 ‘아스트라’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혹시 아스트라 대령이라는 군인에 관해 들어봤는가?”
그것은 그 자신이 직접 훈장을 내려주기까지 했던 한 여군과 칼디르의 성씨가 동일하다는 점을 들어 그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측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질문이었다.
“육군원수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아스트라 대령이라는 분이 혹시나 각하께서 직접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과 연대장의 직위를 내려주신바 있는 바로 그분이라면... 제 양어머니 되시는 분입니다.”
“아... 역시나...! 못본 사이 딸을 훌륭하게 키운 모양이로군...”
칼디르의 대답을 들은 그로즈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그런데... 친어머니가 아니라 ‘양’어머니란 말이지? 칼디르도 인간인 이상 낳아준 부모가 있을 텐데도 양어미의 품에서 자라났다면 친부모는... 이거, 괜한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구만. 이에 관해서는 더 캐물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그로즈니는 보고도 다 받았겠다 칼디르와 함께 사사롭다면 사사로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려고 했다가 칼디르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게 된 것 같아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분위기 전환 겸 대화 주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네에게 내어줄 집무실을 따로 마련해주지 않았구만. 내 정신 좀 보게... 이는 내 불찰이네...”
“염려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각하. 서기장님께서 저를 위해 인민정부 행정청 내에 방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혹시 같이 지내는 사람은 있는가?”
“같이 지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 서기장님과는 작은 아드님과 막내 따님을 구출해드린 일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개중에서 공주님과 함께 같은 방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공주님께서 제게 의지를 많이 하시더군요.”
사실은 칼디르가 공주님께 의지를 많이 하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이 자리에서 그로즈니가 칼디르의 마조히스트 성벽을 파헤칠 방법은 없었다.
“공주님... 아틀란티아 공주님을 말하는 것인가? 서기장 동지께는 다행스러운 소식이로군. 루시드 인들의 틈바구니에 있던 자제분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즈니는 그렇게 대화 주제를 칼디르가 지낼 공간 쪽으로 돌렸다가, 오늘은 군인으로서의 첫 출근이기도 하고, 달리 지낼 곳도, 함께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했으니 이만 그곳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해주었다. 공주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때만 기다리고 있던 칼디르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자네가 이곳 사령부 건물에 머물 동안에 사용할 만한 집무실은 내 최대한 빨리 구해보도록 하겠네. 언제라도 자네와 연락할 수 있도록 핫라인이나 놓아두고, 오늘은 이만 가보아도 좋네.”
그렇게 칼디르는 자기가 직접 만든 통화 장치를 그로즈니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는 그대로 신이 나서 쫄래쫄래 퇴근했다. 육신의 조국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물론 보람찬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의 즐거움 역시 칼디르로서는 놓칠 수 없었다.
아마도 ‘제가 사실은 분신 능력자라서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데요.’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조기 퇴근은 어림도 없는 소리가 되어버리고, 첫 출근 날부터 기계장치처럼 갈려 나가게 됐겠지.
벌써 갈려 나가려고 애쓰기보다는 이번에는 국방군 수뇌부와 더불어 서기장의 신임을 두루 사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공주님을 이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