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7화
누누히 말했던 바지만- 모든 아틀란티스 인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진 20여 년 전 순간, 그러니까 아틀레노스 왕국이 제정을 선포하고 아틀란티스로 거듭난 제국력 원년에 루시드 인들은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을 넘어와 수천 조에 달하는 인명을 도살하였다.
충분히 많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루시드 인에 자신의 가족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고, 수많은 아틀란티스 인의 머릿속에는 루시드 인이란 보이는 족족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가족을 잃은 분노로 군문을 두드린 사람의 숫자만 해도 몇 조 명은 족히 될 정도였다.
물론 마음을 먹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틀란티스 인들은 오히려 그토록 미워해 마다치 않는 루시드 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는 했다. 이는 전적으로 마음먹은 바를 실행에 옮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테스 제국이 그들에게 무기를 지원해주고 경제 제재를 통해 루시드 제국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식으로 도움을 주고는 있다지만, 루시드 인들은 자신들의 목을 옥죄어 오는 존재들로 인해 자기네들의 국고가 바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본전’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제 와서 아틀란티스에서 발을 빼기에는 꼴아박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고, 루시드 제국으로서도 천수백 조 명의 생명을 대 아틀란티스 전선에 투자한 이상 쉽게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가는 당장에 자기네들 정권이 뒤집힐 염려가 컸기 때문에 그들은 아틀란티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나날이 악랄해져 갔다.
민간인 다수 거주 구역에 핵폭탄을 갖다 박거나 과학 기술을 증진한답시고 사람들을 마루타로 끌고 가서 독가스와 세균으로 죽여버리는 것은 약과였다. 그러나 많은 아틀란티스 인에게는 그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기에 그저 무력하게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적어도 카이프가 내려온 이 행성에서만큼은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루시드 군을 몰아붙이는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이미 항복한 포로를 묶어놓고 재미 삼아 목 베기 시합 같은 것을 벌이거나 여성들을 성노예로 징발해갈 때는 그토록 악랄하게 굴던 루시드 군은 막상 ‘버서커’ 카이프가 신병기를 이끌고 나타나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 씹... 이, 이게 왜 튕겨 나가는 거...”
물론 불명예스러운 무리 중에서도 용기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대놓고 원수기를 펄럭이며 전장을 휘젓던 카이프의 전차에 가까이 접근하여 대전차 로켓포를 날리는 병사도 나왔지만, 그들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아틀라늄 장갑 앞에 팅~하고 경쾌한 금속음이 울리며 도탄될 따름이었다.
한 용맹한 루시드 군 병사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는? 카이프의 차례였다. 끼리릭... 카이프는 감히 자기가 탄 전차를 쏘아 맞히려 한 적군을 놓치지 않고 그쪽으로 전차포를 돌린 다음 통렬한 한 방을 먹여주었다.
어느 용맹한 병사의 일격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 안 그래도 전장에 남아있는 병사들보다 이미 도망쳤거나 한창 도망치는 중인 병사들의 숫자가 많았던 루시드 군 진영에서는 더더욱 큰 혼란이 빚어졌다.
티렉스와는 같은 ‘티’씨 성씨를 쓰는 티거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좆같았는데, 티거보다 몇 배는 무거워 보이는 놈이 티거보다 더 빠른- 어쩌면 자가용 승용차들의 속도에 견줄 만한- 속도로 달려오면서 우리가 날리는 공격은 다 튕겨 내며 우리 무기를 죄다 박살 내기까지 한다? 그 사실 앞에 루시드 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갔다.
“좋아, 아주 좋아! 자고로 적군을 갈아 마시는 것은 국방군 장교단의, 아니, 모든 국방군 장병의 신성한 의무이지! 다들 지금대로만 해라! 이 땅에 루시드 군의 그림자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밀어붙여라!”
그 무모한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최전방에 나선 카이프였지만, 루시드 군 진영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눈치 채고 그들이 안전한 선까지 후퇴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예리하게 파고든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었다.
카이프의 전차에 특별히 설치된 사단급 지휘용 통신망을 통해 카이프가 내리는 명령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고, 모든 장병은 원수 각하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눈앞에 있는 루시드 군이 백기를 휘날리건 말건 포탄과 레이저를 꽂아 넣어 주었다.
“썅, 전차포가 안 먹히면 공군을 부르면 되는 거 아니야? 공군 불러! 니미럴 티거도 뚜껑이 따이면 못 버틴다고!”
루시드 지상군은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끝에 코너에 몰려 더는 도망갈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기네를 따라온 공군의 존재를 떠올리고 대전차 지원 폭격 요청을 울려댔고, 워프 엔진을 부착하지 않은 대부분의 항공기는 지상군이 깨지면 뒤가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해주었다.
카이프의 전차가 선두에서 이끄는 무리는 가장 먼저 하늘의 맹금들에게 물어 뜯겼고, 곳곳에서 루시드 공군의 폭탄에 떨어지며 거대한 버섯구름이 일어났다. 하, 하하... 됐다, 됐어? 아무려면, 지들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아닌 다음에야, 이 정도 공격을 먹었으니 다 죽어 나자빠졌겠지?
“제, 젠장... 어떻게 된 거지? 버섯구름 때문에 안 보이는데... 해치운 건가?”
“이 시발, 니가 그 말하는 바람에 저 새끼들이 멀쩡히 살아서 튀어나오고 있잖아!”
어떤 병사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플래그가 되어버린 것일까, 카이프가 이끄는 기갑 사단은 항공 폭탄이 만들어낸 버섯구름을 해치고 나와 털끝도 상하지 않은 자태를 자랑했다. 한 차례의 폭격이 있은 후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 일반적인 전차로는 극복하기 힘든 지대가 형성되었으나, 공중에서 조금 떠서 가는 티렉스에게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았다.
결국, 공군의 폭격도 먹혀들지 않는 것까지 확인한 루시드 군은 막다른 골목에서 땅을 파가면서까지 도망치려 하거나, 아틀란티스 군을 상대로 흥정할 셈으로 같은 편을 포로로 잡고 총구의 방향을 돌리기까지 했다.
크흐흐흐... 흐흐흐... 역시 다른 어떤 가호보다도 효험이 뛰어나다는 주인공 버프가 쳐발린 전차라 그런가, 성능 한 번 확실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무한 상황에서 적군에게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할 수 있는 무기라니!
“오, 루프트바페(Luftwaffe: 공군)의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활약하게 되었구만.”
카이프가 자기 전차 안에서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 사이, 동체에 철십자 표식을 새긴 항공기들이 그 위를 지나갔다. 아무래도 아틀란티스 공군 역시 이제 막 칼디르의 위험한 발명품들을 양도받아 출격하게 된 듯했다.
괜히 자기네 지상군을 도와주겠답시고 깔짝대던 루시드 공군은 칼디르의 발명품 앞에 상대도 되지 못했다. 신형 항공기는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파일럿들조차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속도도 빨랐고, 초광속으로 움직이다가도 직각으로 꺾거나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등 운용의 편리성이 아주 컸다.
전차야 그렇다 치고,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항공기라면 자칫 잘못 몰았다가는 그대로 땅에 꼬라박고 죽게 될 텐데 루프트바페의 친구들이 오래간만에 과감한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어차피 루시드 군의 항공 폭격은 우리 새로운 전차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으니 굳이 엄호해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 내 할 일이나 하자.
내가 할 일은 바로... KILL! 카이프는 ‘모름지기 모든 군사작전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K, I, L, L.’고 한 평소 지론을 이번 전장에서 마음껏 발휘하였고, 루프트바페의 최고 에이스들의 엄호까지 따라붙게 되자, 한 몇 시간쯤 뒤에는 이 행성에 상륙했던 루시드 군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버서커’ 카이프를 원하는 행성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는 승리를 자축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전장을 찾아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로즈니가 일부로 신경을 써서 보내준 루프트바페 편대도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고, 새로 도착한 곳에서도 카이프는 ‘버서커’의 신화를 더해나갔다.
칼디르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불신하며 ‘만일 검증 결과 그년이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이 나오면 내 손으로 조지겠다’고 까지 말했던 카이프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애초에 ‘이게 진짜면 즉시 그자를 군수부 대신으로 채용해야 함’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건 카이프이기도 했거니와...
티렉스 전차와 티거의 교전 실험 결과를 보고는 ‘내 티거를 한 방에 깨부순 건 칼디르 자네가 만들었다는 전차가 처음이야! 한눈에 반했어!’ 뭐 그런 생각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티렉스 전차가 첫 실전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티렉스 전차에 올라타 있는 것은 최소한 사령부 안에서만큼은 그 또라이성을 감추고 정상적인 참모인 척하고 다니는 ‘카이프 베이론’이 아니라 투항병이고 나발이고 다 짓밟아버리는 폭주족인 것 같았다.
그가 한 행성을 평정하자마자 건너온 행성에도 루시드 군은 어느 정도 세력을 뻗쳐 둔 바 있었는데, 이곳의 루시드 군은 불행하게도 옆 행성에서 그와 먼저 싸운 부대가 빛의 속도로 산화해버린 탓에 카이프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채로 그와의 전투에 임해야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도 자기네 상대방으로 누가 왔는지를 알게 되자마자 졸렬한 모습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차포를 몇 번 빵빵 쏴주자마자 바로 백기를 들어 올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면 카이프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았다. ‘루시드 군은 민간인 학살에는 천재, 전투에는 좆병신이다.’
“사령관님, 저 새끼들, 아니, 저기 있는 루시드 군은 백기를 들어 올린 것 같은데요?”
“뭣이? 백기를 휘날렸다고? 자기네들을 제발 표적으로 삼아달라는 뜻인가?”
곳곳에서 하얀 깃발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카이프가 이끄는 부대는 이전 행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루시드 군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았다. 당장에 사령관인 카이프부터가 솔선수범하여 루시드 군이 휘날리는 백기를 표적지 삼아 투항해오는 자들에게 커다란 엿을 먹여 주고 있었다.
명백한 항복 의사를 표현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전쟁법 위반 소지가 있었지만, 애초에 전장의 ‘룰’을 먼저 어기고 포로를 닥치는 대로 죽여댄 것은 루시드 군인 데다 그들이 짐짓 항복하는 체했다가 아틀란티스 군이 다가오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버리는 식의 자폭 공격을 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닌지라 아틀란티스 국방군 장병 중 그들의 항복 의사 표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이곳의 루시드 군 역시 불과 몇 시간 전에 산화한 부대의 전철을 밟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