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6화
원수 각하께서 친히 신병기를 끌고 전장에 나가시기로 했다면, 아랫것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도 ‘병사들이 새로운 무기의 조종법 정도는 최소한 익혀둬야 하지 않겠느냐’는 어떤 참모의 말이 먹혀들어가 카이프를 잠시간 묶어둘 수는 있었다. 말 그대로 ‘잠시’에 지나지 않는 순간이라 그렇지.
한 몇 시간 정도 뺑이 치게 해놓는 겸 이 새로운 야수, 티렉스를 명품 중전차 티거와 맞붙여보면 그 성능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겠다는 것이 카이프의 계산이었고,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격파하지 못하는 전차가 없기로 유명한 티거가 영거리 포격으로도 티렉스의 장갑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난 장갑은 티렉스의 주포도 아닌 부포에 산산이 조각났다... 음, 이로써 티렉스의 성능이 입증되었군!”
거기서 바로 티렉스를 끌고 전장으로 나아가려는 카이프를, 참모들이 또다시 갖가지 이유를 들어 붙잡아 두었다. 만일 그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피곤해지는 게 참모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뭐라고요? 성능은 훌륭한데, 아직 병사들이 조종법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바로 출격하기는 어렵다고요? 칼디르 말로는 티거 조종법을 기준으로 내부를 꾸며놨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익숙해지기 힘든가? 하도 답답한 나머지 카이프는 티렉스에 직접 올라타서 요리조리 움직여도 포고 표적지를 향해 주포를 꽝꽝 발사해보았다.
그 결과, 그는 전차전의 슈퍼 에이스로서의 모습을 가감 없이 선보였다. 젊었을 때는 한 번 출격에 백 대가 넘는 적 전차를 홀로 격파하고 돌아오곤 하던 괴물로 유명한 카이프지만, 사실 요즘도 원수 체면에 티거 전차포로 대공전을 치르고 10대가 넘는 전투기 킬마크를 새기고 오는 등 젊었을 때의 기세가 아주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으음, 나도 이 나이까지 이등병 때 배운 전차 조종법을 잊지 않고 있는데, 우리 육군의 전차 에이스들이 이 정도를 해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본 사령관은 귀관들에게 정말로 실망했다!”
그가 구사한 언어를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되었다: 니들 장난함? 부사령관인 나도 수십 년 전에 처음 배운 기술을 지금까지 써먹고 있는데, 니들은 이걸 못한다고? 정말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라면, 할 수 있다고 할 때까지 빡세게 굴려줘?
이제 결론 났으니까 전장으로 가서 루시드 놈들을 쳐 죽이고 창끝에 적의 수급을 걸어 전차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일만 남은 건가? 아, 티거 상대로 전차전 떠서 이긴 데다 원수 각하께서 시범을 보이셨다면 인정이지... 히히히! 거기에 이르자, 참모들은 더는 그를 기지에 묶어둘 수 없게 되었다.
“자, 제군들. 출발이다! 그러나 긴장할 필요는 없다. 평소처럼 루시드 놈들을 쳐 죽이고, 시체까지도 이 육중한 강철의 야수로 짓뭉개버려 그들의 흔적을 지워 없애고, 적장의 목은 베어다가 창끝에 꽂고 개선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저 더러운 루시드 놈들에게 죽음을! los, los, los(전진, 전진, 전진)!”
쿠르릉... 쿠릉... 원수 각하의 일장 연설이 끝난 후, 1개 사단 규모의 티렉스 전차들이 엔진을 켜고 지면을 울리며 출발했다. 칼디르의 말에 따르면 무한궤도 대신 반 중력 에너지 분사구인지 뭐인지를 달아서 공중에서 조금 떠서 간다고 했는데, 그래도 숫자가 숫자다 보니 땅이 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냉엄한 진군을 시작한 티렉스 뒤편으로 강화복과 레이저 건으로 무장한 보병들을 태운 장갑차, 푸마의 무리가 보였다. 저 푸마들은 일단 제작자인 칼디르의 의사에 따라 장갑차로 분류되기는 했는데, 아틀라늄으로 제작된 이상 장갑차 닉값을 못하고 루시드 놈들이랑 전차전을 떠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실전을 치러보면 알 수 있겠지.
한 무리의 티렉스와 푸마는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워프 함선- 원래 다른 곳으로 가려던 함선인 모양이었지만, 원수 각하의 권한으로 징발되어 티렉스 수송에 쓰이게 되었다-에 일렬로 탑승하여 한참 루시드 총독부의 군대와 아틀란티스 국방군 사이에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행성으로 찾아갔다.
수송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포화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을들. 예전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이곳에 살았음을 마을(이었던 것)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틀란티스의 합당한 영토의 일부인 이 행성은 전쟁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행성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티렉스에 탑승한 버서커, 아니, 카이프 역시 죽 늘어서 있는 마을들의 폐허 앞에서는 잠시 숙연해졌지만, 그는 군인이었기에 계속 그렇게 슬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장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언뜻 시체처럼 보이는 것에서 눈길을 떼고 그는 현지 부대를 이끄는 사단장을 만나 보고를 받았다. 예정에 없었던 원수 각하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의 보고는 꽤나 상세하였고, 원수 각하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다만 보고의 말미에 갈수록 원수 각하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그와 같은 일개 사단장이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자네의 보고대로라면... 이 행성에 루시드 놈들이 들이닥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이토록 많은 마을이 폐허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
“송, 송구합니다...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기에는 시간이 부, 부, 부족...”
함선을 끌고 와 행성 상륙을 시도하는 루시드 군을 상대로 방어에 실패하여 그들이 이 땅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한 데다, 그들을 다시 우주로 몰아내지도 못하고 지루하게 시간을 소모해온 사단장이 원수 각하의 앞에 서서 고해성사를 하였으나, 격전 중에 지휘관을 끌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카이프는 넘어가 주었다.
어느 행성이든 일단 상륙을 한 번 허용해줬다면, 남은 선택지는 최대한 빠르게 적의 상륙대를 몰아붙여 섬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마침 우리 국방군은 원래 쓰던 것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성능의 무기들을 선물로 받은 상태. 데뷔전을 치르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에, 조건도 나쁘지만은 않다.
티렉스 전차와 푸마 장갑차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데뷔전. 아마 설계자 겸 제작자인 칼디르도 원수 각하께서 친히 자기가 만든 전차를 실험해주신다는 데 더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공돌이든, 공순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으레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껌뻑 죽어 나가는 법이지.
“자네 사단의 소모율은 얼마나 되는가? 20%? 30%? 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면 안전한 선까지 재량껏 후퇴해도 좋네. 남은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현지 사단장의 보고를 다 듣고 난 뒤, 카이프가 내린 결정은 ‘전진!’이었다. 오랜 전투로 꾸준히 소모되어온 병사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제 안전하게 후퇴하여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니까.
‘방어의 사자’ 그로즈니의 제자, ‘버서커’ 카이프가 이 행성에 내려왔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전장으로 퍼져나갔고, 그 소문은 한계까지 소모된 병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그들이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질서 있게 후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에 반해 그를 직접 상대하게 된 루시드 군 진영에서는 큰 혼란이 일었다.
“시발, 원수 체면에 진짜 전차 조종간을 잡고 몸소 납셨다고? 그거 다 개 헛소리 아니었냐? 시발, 시발, 시발! 어째 상륙 한 번 편안하게 한다 했더니, 함정이었느냐고!”
“도대체 우리 정보원들은 원수께서 납신다는 소식을 물어오지 않고 어디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구석에서 딸딸이들이나 치고 계셨나?”
루시드 군에 퍼진 카이프라는 인간의 이미지는 대략 이러했다: 그 새끼는 전차를 몰고 다니면서 ‘나 여기 있으니까 쏴볼 테면 쏴보라’는 듯이 대놓고 큼지막한 성판에 원수기까지 달고 다니는 ‘진짜’니까 웬만하면 직접 상대하지 말고 튀어라! 아군이 그 새끼 병력보다 10배는 많다고? 시발, 10배 가지고 되겠니? 그냥 말로 할 때 튀라고!
쾅! 쾅! 쾅! 질서 있게 후퇴하는 병사들 뒤로 이제 막 행성에 도착한 카이프의 기갑사단이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레이저 포를 부착한 알파형이든, 일반적인 전차포를 단 베타형이든, 티렉스는 일단 한 번 불을 뿜으면 반드시 루시드 군이 공들여 만든 무엇인가를 산산이 조각내어버렸다.
루시드 군이 이 행성에 내려와서 알박기할 심산으로 올린 벙커, 대공포의 견제를 받지 않고 희희낙락하며 하늘을 거닐던 항공기, 현지 아틀란티스 사단에 티거를 비롯한 중전차가 한 대도 없어서 오래간만에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된 경전차... 그 모든 것이 티렉스의 먹잇감이 되었다.
포탑 옆면에 큼지막하게 철십자를 새긴 강철의 야수들은 폭군 도마뱀이라는 명칭에 걸맞게도 계속된 승리에 취해있던 초식동물들을 물어뜯으며 진군을 거듭했다. 갑자기 나타난 폭군 앞에서 루시드 군 병사들은 진영을 흩뜨리며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나 그들이 도망치는 속도 보다 티렉스의 무리가 더 빠를 것만 같았다.
“좆됐다! 그 좆같은 카이프 왔단다! 어서 뛰자!”
적장을 보고 ‘좆같다’고 욕을 박는 것은 당사자를 향한 더 없는 극찬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도망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인 선택지이기도 했고.
“뭐? 조금만 더 있으면 이 행성이 우리 쪽으로 넘어 올 거라고 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도 뛸란다!”
“야, 기관총수가 뛰면 우리 분대는 어떻게 하라고! 나, 나도...!”
그러잖아도 그들의 나라에서 억지로 끌고 와서 가뜩이나 사기가 바닥을 찍던 루시드 군은 카이프가 떴다는 소식이 한 번 퍼지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총을 버리고 빤스런을 시전했다. 병사들의 빤스런을 막아야 할 부사관, 장교, 헌병들은 진작 어디로 도망가고 없었다.
심지어 장군들마저 카이프의 이름을 듣고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자기랑 친한 장교들만 데리고 행성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이 행성에 처음 상륙할 때만 했어도 ‘무적황군의 일원으로서 이 정도쯤은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고 소리치던 용장의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평소처럼 원수기를 펄럭이며 전차를 몰던 카이프도 루시드 군 진영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혼란을 알아채고는 의아해했다. 이거... 어째 티렉스의 성능을 제대로 뽑아보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도망치다 밟혀 죽은 루시드 군의 숫자가 더 많이 나올 것만 같은데...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부터 칠 생각을 하는가? 정말이지,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군. 그렇다면 나 또한 기꺼이 짓뭉개줄 자신이 있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