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5화 (127/225)



〈 127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5화

처음에는 칼디르를 반신반의했던 카이프도 웜홀을 넘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공간 안에 수북이 쌓인 무기의 산맥을 보고는 그녀를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저 무기들의 성능이 영 시원찮다고 하더라도 무기가 부족한 나머지 화승총까지 들어야할 지경에 이른 국방군에 큰 보탬이  수 있겠지.

“지평선 너머까지 무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군.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 공간을 ‘제3 소우주’라는 이름으로 칭하였는데, 혹시  하늘 위에 떠 있는 행성들에도 여기처럼 자네가 만들었다는 무기가 쌓여있는 건가?”


“예, 원수 각하. 웜홀 근방 수십  행성계는 모두 이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하신다면 추가 생산도 가능합니다.”

지구만 한 행성 하나에 쌓아놓은 무기의 대수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이렇게 무기가 쌓여 산맥을 이룬 행성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씩이나 된다니. 이 부분도 칼디르와 함께 순간 이동으로 돌아다니면서 직접 보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아틀란티스의 명품 중전차로 그 이름도 유명하신 티거는 물론이요,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다’는 T-34보다도 많은 초중전차의 대열은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초중전차, 장갑차, 보병용 무기의 대열은 지평선 끝까지 들어차다 못해 지하로 파고 들어가 격납고를 만들어서 쌓아둘 정도에 이르렀고, 워프 전략 폭격기, 전투기의 무리는 지구만  행성의 하늘을 완전히 덮을  있을 정도로 많고, 우주 전함은 그 크기가 크다 못해 행성에 버금갈 정도로 커졌구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칼디르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거늘, 진짜로 더는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물을  돌아보고 나서 카이프는 칼디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저쪽에 있는 행성은 이 공간에 원래부터 있던 행성은 아니고, 제 손으로 만든 ‘행성급 전함’입니다. 지구보다  큰 저것을 만드는 데 시간이 제법 소요되어 다른 병기를 더 많이 만들 수도 있었는데, 그만 50조 정도의 병력을 무장시킬 분량에 그치게 된 것입니다.”


“허허, 지구보다  큰 전함이라고? 그런 크기의 함선이 워프할 수 있기는  건가?”


“물론입니다. 현재 테라 마리네(Terra marine: 지구 해군. 아틀란티스 제국 해군을 이르는 말)가 보유한 구축함에 준하는 속도로 워프 돌입과 해제가 가능합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지구보다 정확히 1.4배 크다는 저 전함...이라기보다는 ‘인공 행성’이라고 불러줘야 할  같은 저 물건이 조그마한 구축함에 준하는 속도로 워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칼디르가 보유한 기술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로 봐서는 거짓말 같지도 않고...

“혹시  행성급 전함에 자네가 만들었다는 병기들을 한꺼번에 실어서 옮길 수는 없겠나? 그리한다면 집단군 단위로 무장을 개편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전함이 별다른 예고도 없이 바깥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때아닌 관할권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원수 각하께서 테라 마리네의 여러 제독님에게 부디 잘 말씀해주십시오.”

“하긴,  정도 크기의 전함이라면 어느 함대에서 운용하느냐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겠군... 일단 내 기회가 되면 국방군의 부사령관으로서 테라 마리네에 자네의 뜻을 잘 전달해주겠네.”

잘 춰봐야 네 손녀뻘에 지나지 않는 이 처자에게  정도 무기를 지원해주는 도박수를 둘 국가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것들은 전부 저 자의 손아귀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는 말이 되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처자로구만. 정말이지 군수부 대신의 지위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를 즉시 채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인재가 없다고 한탄할 자격조차 없겠지.

“서기장 동지, 모름지기 모든 인재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물론 하늘 위로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무기들의 성능을 실험해보는 일도 화급하지만,  처자가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아무런 포상도 뒤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정부의 불명예일 것입니다.”

카이프가 서기장의 귓속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였고, 서기장 역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단 한 줌의 무기라도 급한 국방군의 처지에 성능 테스트야 실전으로 치러서 알아보면 될 일이고, 이들도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지라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칼디르가 금전적인 보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서기장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카드를 꺼내 보인 이상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녀가 한 거라고는 그들에게 무기 구경을 시켜주면서 설명충 노릇을 한 것밖에 없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몸값은 엄청나게 무거워져 버렸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칼디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뭐든지 말해보게나. 이 서기장의 이름을 걸고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터이니.”

“서기장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달리 보상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제게 보상을 내려주신다고 한다면 조국의 독립을 찾은 뒤에 내려주셔도 늦지 않을  같습니다.”


아무리 봐도 15살짜리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한 35살쯤은 먹은 건가? 서기장은 그녀의 말에 내심 만족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감추고 있다고 여겨 조금  추궁해보았다. 그러자 칼디르가 원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지금 당장 돈이 드는 일은 아니었다.


“제가 정식으로 입대하는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다만  존재를 용인해주시는 서기장님과 원수 각하들과는 다르게 OKW의 여러 장군님들은 저와 같은 일개 소녀의 지휘를 받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테니, 주제넘은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


육해공군과는 별도의 명령 체계를 가지고 OKW의 지휘를 받는 제4의 군종을 창설하고,  조직의 명령권을 달라. 이것이 칼디르의 부탁이었다. 이는 그녀가 끝까지 금전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기존에 있던 지위 중에서 높은 것을 골라 주려고 했던 서기장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칼디르의 말을 이토록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서기장과  원수가 아주 특이한 경우에 해당하고 ‘평민 계집-  천박한 어휘를 동원하자면, 품격 없는 금발벽안에 커다란 젖탱이 말고는 돋보이는 것도 없는 더러운 창부-주제에  그렇게 나대느냐’고 소리치는 군인이 대다수일 터인즉, 그런 부탁을 하게 된 경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잔 다르크와 같은 예시를 들 수도 있겠지만, 잔의 밑에 들어가게  자들도 처음에는 그녀의 군략을 의심하다가 그녀의 천재성이 드러난 뒤에야 그녀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점을 되새겨보자.

과연 칼디르보다 수십 살씩은  먹은 장군과 원수들이 서기장과 두 원수의 가호가 있다고 해서 그녀의 명령을 순순히 따라줄 것인가?  사이의 갈등이 잔 다르크의 사례처럼 어떻게든 봉합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제4의 군종을 신설하여 칼디르에게 명령권을 쥐여주고 칼디르가 원하는 사람을 데려다가 기용하도록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다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관해서는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없던 명령 체계를 새로 창설해달라니? 그로즈니는 국방군의 최선임자로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한 물자야 칼디르를 통해서 공짜로 조달할 수 있다고 쳐도...

차라리 금전적인 요구라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줄 텐데, 기존에 없던 권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서기장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칼디르의 말투에서 권력  자체를 ‘목표’로 삼기보다는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일개 ‘수단’으로 보는 듯한 태도가 묻어나온다는 점에서 더더욱.


과연 칼디르가 육해공군과 별도의 명령 체계를 가진 조직을 휘어잡아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당장의 권력보다도 더 큰 목표’란 무엇일까?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자리에서 그것을 캐낼 수는 없을 듯하였다.


세 사람이 생각에 잠긴 사이, 칼디르 역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육해공군과는 별도의 명령 체계를 가지면서 ‘오베르코만도 데어 베어마흐트(Oberkommando der Wehrmacht: 국방군 최고 사령부)’, 줄여서 OKW라고 불리는 기관의 통제만을 받는 제4의 군종.


만일 이 자리에 충실한 ‘국가사회주의자(나치)’임을 자처하는 범혁이 있었더라면 ‘그런 조직의 이름은 당연히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가 되어야 하는  아님? 하일, 히틀...’같은 말을 했겠지.

그의 숙원에 따라 제4의 군종의 이름을 무장친위대라고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칼디르가 생각하기에 새 군종의 탄생은 아틀란티스 내에서는 미약한 세력만을 보유하고 있는 파시스트 세력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예부터 무력조직은 모든 권력의 근원이 되어왔던바, 파시즘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파시즘 정당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무력 조직이 필요했으나 원래부터 존재해온 육해공군은 ‘군인은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기에 파시스트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당장 이 자리에서 ‘사실 저는 우리나라가 파시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틀란티스 국민 파시스트당 같은 이름의 정당을 만들고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아틀란티스 인민당의 당세를 쳐묵쳐묵하려고 합니다.’같은 말을 했다가는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상황을 혐오하는 그로즈니에게 조인트를 까였을 거다.


닥치고 황제 폐하께 충성해야 한다는 국방군의 유구한 즈언통과는 별개로, 고위 귀족 출신인 그로즈니가 보기에도 국민을 벗겨 먹을 생각만 하는 귀족들의 통치 방식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것이어서 언제 한 번 ‘이 정권은 범죄정권이다.’ 같은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정통정부의 권위에 승복하여 그 밑에서 천천히 파시즘을 퍼뜨려 나가서 언젠가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파시스트당 스스로 정통정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이상, 여기서 당장 요구가 먹혀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넌지시 암시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칼디르는 판단했다.

“으음, 자네의 요구는 잘 알겠네. 정식으로 입대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겠네. 다만 나머지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네.”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고 나온 것은 그로즈니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나중 일로 미룸으로써 분위기가 삭막해지는 것을 막았다. 정식으로 입대하게 해달라는 부탁만큼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졌다.


음... 그런데 어느 정도의 계급을 내려주는 것이 적당할까? 여성 장군은 전례가 없지만, 명색이 육군원수를 따라다니는 요인의 계급이 영관 이하라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는 일일 것이다. 칼디르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4의 군종을 창설한다고 하면 지금 주는 계급은 의미가 없게 될 수도 있고.


그로즈니는 이 문제도 뒤로 미루기로 하고 자리를 파하였다. 허허, 생각해보면 계급이 무슨 상관이람? 짬밥 순위 1등이 부하들 보고 칼디르를 ‘신뢰’하라고 하면 그거로 이야기는 끝난 거지. 군 조직에서 상관의 ‘권고’가 지닌 의미가 뭔지 모르는 건가요, 휴먼?


그렇게 네 사람의 만남이 끝난 뒤, 서기장은 칼디르의 도움을 받아 인민정부 행정청으로 돌아갔고... 카이프는 우리우주로 돌아오자마자 칼디르의 병기를 넉넉하게 놓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수소문하여 우선 1개 사단에게 쥐여줄  있을 만큼의 병기를 넘겨받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아, 끝난 모양이로군.”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라는 카이프의 예상이 무색하게도, 칼디르는 그가 찾아낸 공터의 좌표를 전달받자마자 1개 기갑 사단을 꾸릴  있을 만큼의 병기를 그 자리에 소환해주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서기장도, 이 만남에 함께 하지 못한 제임스 역시도 그만큼의 병기를 받아볼 수 있었다.


‘병부대신께서도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일을... 하긴 그분은 지금도 내부 분란을 막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시겠지.’


그로즈니의 권위가 확고한 구국군정, 마찬가지로 아틀란이  잡은 인민정부와는 다르게 제임스가 이끄는 국내정부의 경우 ‘당장에라도 좌우대합작이니 나발이니 다 때려치우고 빨갱이들부터  때려잡고 보자!’는 쪽과 ‘지금 루시드 인들을 눈앞에 두고 그게 할 소리냐?’는 쪽으로 갈려 갈등을 벌이고 있는 판국이었으므로 그들의 대표자인 제임스가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기는 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있는 무기보다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국방군의 입장 상, 거기에 탑승할 인원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차출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서 일련의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한 번 살펴본 다음, 그는 그로즈니에게로 돌아가 신규 무기의 성능을 자기가 몸소 시험해보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육군원수께서도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작전이나 정보라고 할지라도 검토해보는 것이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저는 그 처자의 무기를 직접 살펴보겠다고 발언한 적도 있으니, 제게 지워진 의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 체면에 최전방에 나서는 위험을 감수할 터인가?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듣지 않겠군.”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포스타보다 높은 파이브 스타라. 얼핏 머릿속에 그리기 힘든 장면이지만, 카이프는 아직도 자기가 수십 년  젊고 혈기 넘치는 병사인 줄로만 아는지 최전방에 나서기를 마다치 않았다. 그로즈니가 말려도 기어이 나서서 티거  대로 수십 대의  전차에 항공기도 덤으로  대씩 잡고 돌아오기를 수십 번.

이제는 그로즈니도 카이프를 말려봐야  몰래 나갔다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아는지, 무덤덤하게 출격 요청을 승인해주었다. 부디 나가서 어디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다녀오라는 말은 덤으로 따라붙었다.


야아, 신난다! 전장이 나를 부른다! 티렉스에 올라탄 카이프의 얼굴은 집무실에 콕 박혀있을 때보다 훨씬 밝았다. 그는 태생이 후방에 앉아있는 참모보다는 최전선에 나서는 장수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이제 새로운 야수와 호흡을 맞춰볼 순간이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