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3화
아틀라인 서기장도, 제임스 병부대신도 칼디르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그로즈니와 매한가지였다. 아니,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무기의 성능이 분명히 나쁘지는 않았는데... 벌써 20년 넘게 이어져온 루시드 제국과의 전쟁을 한순간에 끝낼 수 있을 만큼의 성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서기장은 하지만, 실망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칼디르가 구현했다는 것을 우리는 구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칼디르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현재 우리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고차원의 기술이 동원되었으므로 대량 생산은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되지만...
그는 ‘그러므로 칼디르라는 인간을 더더욱 집요하게 파고들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 한 번 생각해보라. 오랜 전쟁으로 수많은 기술을 상실한 아틀란티스라고 하나, 최고의 과학자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을 칼디르는 손바닥 뒤집듯이 해치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는 소리가 되지 않는가.
그 기술들이 칼디르의 순수 창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고급 기술들을 넘겨받을 만한 배후가 있다는 추론은 가능하니, 반드시 진실을 캐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최대 후원국이라는 카테스 제국도 정작 핵심 기술 이전에는 미온적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칼디르라는 처자와 빨리 다시 만나봐야만 한다... 아틀란티아와 같이 있을 텐데... 원래 방에 없다고?”
그로즈니와 만나기로 일정까지 잡은 이상, 칼디르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자기 딸과 같이 있을 거로 생각한 서기장은 두 사람에게 내어준 트윈베드 방에 사람을 보냈는데 웬걸,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면 그새 말도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겨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틀란, 너는 며칠 전에 아틀란티아가 지내는 방에 들러봤다고 하지 않았느냐. 혹시 그때 무슨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아니요, 아버지. 평소 상태 그대로 던대요? 방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필사적으로 저를 막으려던 것만 빼고요.”
“네가 들어오려고 하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방안에서 칼디르라는 소녀와 뭔가 하고 있었다거나, 뭐 그런 말도 없었고?”
“예, 뭐... 음, 간만에 동성 친구를 사귀어서 재밌게 놀고 있는데 평소에도 지긋지긋하게 얼굴을 봐온 작은 오빠가 자기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크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아!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긴 하던데...”
“뭐라고? 호, 혹시 열이 올라있었던 건 아니냐?”
“아니요, 저도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필사적으로 부정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길로 돌아섰는데...”
그래서 단서를 가지고 있을 만한 작은아들을 불러서 몇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유의미한 정보를 캐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작은아들, 아틀란은 자기가 막내의 방을 방문했을 당시 슈가라는 이름의 영 생뚱맞은 년한테 엉덩이를 딜도로 처박히고 있었다는 것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바, 유의미한 정보를 가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서기장의 탐문탐색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고, 1시간이 조금 안 되어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원래 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2층 방에서 자기 딸과 칼디르, 그리고 그새 불어난 정체불명의 여자 손님 몇 명-슈가, 솔트, 플랑-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니, 방을 옮겼으면 옮겼다고 말을 할 것이지... 뭐, 찾았으니까 됐다.
“그 칼디르라는 처자에게 전하도록. 그로즈니 육군원수가 직접 만나보자고 했다고. 이는 일찍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고의 영광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서기장은 자기한테 막내딸의 소식을 물어다 준 사람에게 그 말을 전하도록 했다. 그로즈니와 칼디르의 나이 차가 딱 100살. 웬만해서는 직접 만나기는커녕, 서로 그 이름조차 모르고 지낼 정도의 나이 차지만... 평민 소녀와 육군 총수의 만남이 또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녀도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테지.
“아잉, 마키... 오래간만에 출근해보는 거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로즈니 원수님과 만나러 가는 길이라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몸값이 올라갔나 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공주님. 그렇게 기뻐하시는 걸 보니, 공주님도 원수 각하를 알고 계신가 보지요?”
“당연하지! ‘방어의 사자’를 모르면 간첩 아니야?”
서기장의 호출을 받아 실로 오랜만에 출근 아닌 출근을 하게 된 칼디르는 또 오랜만에 멋들어진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군대라는 조직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두었지만, 정식으로 입대하지는 않은바 칼디르는 어두운 색깔의 국방군 군복과 엇비슷하게 보이는 정장을 입고 다니며 기분을 내고는 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치마도 아닌 바지 정장이라면 남자들이 주로 입고 다니는 옷일 텐데 칼디르에게도 아주 잘 어울렸다. 정장 핏도 아주 잘 받았다. 정장으로 가리려고 해도 도저히 가려지지 않은 가슴의 굴곡과 골반의 라인은 정말이지, 크으... 그나마 와이셔츠 단추가 칼디르의 가슴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일 따름이었다.
칼디르가 지금 걸친 정장은 공주님께서 오붓한 신혼생활 기분을 내보신답시고 손수 다려준 옷이었고, 이제 공주님은 알몸 에이프런 차림을 한 채 칼디르에게 검은색 넥타이를 매어주며 다정한 아내를 연기하고 계셨다.
공주님은 자기 아내의 목에 개 목줄 대신 넥타이를 매어주시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공주님의 말마따나 그로즈니는 단순히 전군의 최선임자일 뿐만 아니라 백 번 붙어 백 번 모두 이기고, 아군 병사 하나가 죽어 나갈 때마다 적군에게는 100명이 넘어가는 대출혈을 강요하는 최고의 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아내가 그런 사람의 관심을 끌어 직접 만나볼 기회를 얻었다는 말에 좋아해 주지 않을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여기서 칼디르가 높으신 분들에게 점수를 따는 데 성공한다면 그대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우리 아빠하고 원수님이 그렇게 딱딱하신 분은 아니니, 어쩌면 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잘 다녀와~ 꼭 성공하고 돌아와야 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언젠가 태어날 우리 딸들의 미래도 결정되는 거야~”
“네,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올게요!”
공주님께서는 현관까지 달려나가 칼디르와 가볍게 뽀뽀하며 배웅해주셨다. 슈가? 오늘은 내가 마키를 독점하기로 한 날이니까 걔는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일이지. 꼬우면 행운 스텟을 좀 더 올리던가?
서기장과 독대할 때도 정장 차림이었던 칼디르는, 그로즈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그때와 똑같은 차림을 하되 로터를 붙인다거나 딜도를 구멍 안에 박아 넣는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혹여나 이 일생일대의 만남을 그르칠 일은 없을 것이다.
같은 시각, 그로즈니는 자기 집무실에서 조용히 서류를 결재하고 있다가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킨 생각이 쉬이 정리되지 않는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창문가로 다가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밖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있고 폭우가 내리고 있었기에 눈에 담아두기에 썩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래, 아스트라... 그 성씨를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는데... 아스트라 대령, 그녀와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는 벌써 10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을 되새김질해보는 중인 것 같았다. 칼디르의 양어머니인 아스트라 대령은 강력한 초능력자로서 전장 곳곳에 발생한 구멍을 메우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었고, 그로즈니는 그런 그녀를 일종의 ‘전략 예비대’로 전격 발탁하여 유용하게 활용한 바 있었다.
모두가 일개 계집에게 대령 계급장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내려주는 것은 불가하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로즈니는 ‘여자든, 천민이든, 혼종 인류든, 외계인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조국을 위해 공적을 세웠다면 마땅히 그 공적에 따라 평가받아야만 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에게 최고의 영광을 내려주었다.
고위 귀족 출신으로서 나이도 먹을 때로 먹은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과감한 면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연대장의 직책을 맡은 뒤에도 그로즈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수많은 적군을 베어 넘기며 화답하였고, 어쩌면 아틀란티스 여성 최초로 국방군 장성에 임명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통신망이 와해되며 그녀의 부대를 비롯한 상당수의 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육군원수의 권한으로 기꺼이 그녀를 장성의 지위에 올려주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대령과 연락이 닿은 곳이 칼디르라는 이름의 얼음 행성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내가 만나보고자 하는 처자의 이름은 칼디르 아스트라.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내가 알고 있는 여인 중에서 가장 용맹한 이의 성씨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향한 행성의 이름을 물려받은 처자와 ‘우연히’ 만나게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로즈니는 원래 나이에 맞지 않게 휘하 장교들의 이름과 얼굴을 대대장급까지는 모조리 외워두고 다니는 인물이었고, 개중에서 여성의 몸으로 그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그녀가 유일무이했기에 그녀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서기장이 막내딸과의 인연으로 칼디르를 알게 되어 ‘우리 과학자들이 실패한 걸 쟤는 성공했으니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면, 그로즈니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인물과 그녀를 연관 지으며 기대를 품어보았다.
그런 여인의 딸이라면 당연히 보통의 처자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추측대로 칼디르는 대령의 양딸이요,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만한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이들은 감히 그가 품은 뜻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지만.
“이제야 생각났군, 아스트라 대령... 각하께서 어째서 그리도 그 처자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건지 알 것도 같군.”
그로즈니의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 해온 카이프 역시 자기 집무실에서 총사령관이 왜 저러고 있나 골몰히 생각해보다가 이내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카이프 역시 평민 출신에 일개 이등병에서 시작하여 원수봉을 쥐는 데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니 만큼 대령의 전공을 평가절하하지는 않았고, 그런 여인의 딸이라면 기대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칼디르는 모두를 만나보기도 전에 모두에게 한 움큼 기대를 안겨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