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2화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 그로즈니는 자신의 결심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자신의 심복이자 국방군 육군의 부사령관인 카이프 베이론 등 여러 장군과 함께 급조된 기갑 중대의 기동 및 포격 훈련을 직접 살펴보기로 하였다.
일개 사단장조차 산을 없애고 강줄기를 바꾼다고 하는데, 하물며 육군의 총사령관이 별들을 데리고 부대 시찰을 나온다고 하면 일선 부대가 과연 어찌 되겠는가? 차출자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게 된 심정으로 원수 각하께서 시찰 나오기 전에 신무기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맹훈련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 누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과연 한 소녀의 제안이 그러한 결과를 불러올 거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시발, 시발!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걸 만들어낸 새끼는 악마가 분명해!”
“아니, 그냥 보고 자료만 올리고 나면 끝날 거라고 했으면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칼디르가 새 무기를 만들어내면서 훈련 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도록 그 조종방법은 기존 병기와 흡사하게 설계했고, 거기에 더해 아예 훈련이 필요 없도록 무인 운용도 가능하게 했다고 하나, 끌려와서 뺑이 치게 된 병사들에게는 좆도 의미 없는 소리였다.
어이구, 무인운용이요? 그런 기능은 최대한 빠르게 시제품을 뽑아내기 위해서 중간에 다 빼버렸는데요? 그러면 없는 인공지능을 찾을 시간에 사람이 안에 들어가서 먼지 나도록 굴러야지, 별수 있나.
그나마도 그들이 평소에 몰고 다니던 ‘6호 전차 티거’보다 몸무게가 배는 더 나가서 ‘티렉스’라는 이름이 과연 잘 어울리는 이 거북이는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새 무기를 받아들게 되어 심란한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으니 병사들은 얼굴도 모르는 설계자를 향해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설계도에는 분명히 들어가 있었던, 기동을 책임질 반물질 반응로는 또 어따 팔아먹었느냐고요? 어휴, 우리한테는 그걸 전차에 부착할 수 있을 만큼 소형화할 기술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디젤 엔진 달고 다녀야지, 뭘!
아, 200t급 차체를 디젤 엔진 가지고 굴리기는 힘들 것 같다고요? 그건 이제 니들이 해결해야지, 나 보고 어쩌라고! 이번 훈련을 책임지게 된 실무 장교들에게 멱살이 잡힌 공학자의 변이었다.
그리고 최강의 에이스들은 이런 실험을 위해 불러내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운즉, 지금 끌려 나온 자들은 에이스라기에는 어딘가 한수 처지는 자들이었으므로 원수 각하의 앞에서 혹여나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금 땀을 흘려야만 했고, 그러한 경험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헉, 헉, 헉... 나, 살아는 있는 거냐? 원수 각하 표정은... 어떠시냐...?”
“어, 저기... 표정이 그다지 밝지는 않으신 것 같은데요?”
“아이고, 맙소사! 그 지랄을 떨었는데...! 그럼 우리 모두 좆된 거야!”
원수 각하 앞에서 다시 한 번 선보인 기동 및 포격 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이 고생도 의미가 있었구나 하고 강줄기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한 움큼 닦아낸 다음 전차 밖으로 뛰어나가 한숨을 쉴 수 있었을 터였지만, 현장에 내려와서 모든 것을 살펴본 그로즈니의 표정은 어딘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본 중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라는 불호령만으로도 병사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본 사령관은 너희에게 실망했다!’로 치환된다면? 그것도 야전군, 집단군 사령관보다 훨씬 높으신 육군의 총사령관을 실망시키게 한 경우라면? 그 후폭풍이 얼마나 거셀지는 생각해볼 가치도 없었다.
부사령관으로서 그로즈니를 곁에서 보좌해온 카이프 원수가 그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알아보고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서 뭔가 속삭였는데, 일선 병사들에게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전차 기동음에 다 파묻혀서 사람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그걸 어찌 아느냐고? 저 사람 얼굴도 굳어있거든!
일개 소녀가 설계한 무기에 무슨 기대를 그렇게 한 건지 그로즈니의 표정이 밝아지는 일은 절대로 없었고, 분위기를 읽은 다른 장군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결국, 별들의 무리는 이번 훈련에 대해 뭔가 평가를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철수해버렸고, 남은 병사들의 운명은... 음.
“육군원수 각하, 애초에 이 무기들을 설계한 자의 신분 자체가 그다지 믿을 만해 보이지는 않으니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훈련이 종료된 후, 부사령관 카이프는 총사령관의 집무실에서 그와 독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즈니는 다른 사람에게는 칼디르의 신상정보를 철저히 감췄으나 그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털어놓은바, 이제 그는 칼디르를 물어뜯어 일선 병사들의 실패를 만회하려 하고 있었다.
몰락귀족조차 아닌 쌩으로 평민 출신에, 연고도 없고 별달리 학식을 쌓은 적도 없는 15살 처자. 태생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군 조직 안에서라면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공격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으므로, 카이프의 지적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그년이 여주라 주인공 버프를 받으니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부사령관, 그 처자와 같은 평민 출신인 자네조차 그렇게 말하는가?”
이윽고 침묵을 깬 그로즈니의 대답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이제 그만 모든 실험을 중단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었음에도 아직 더 밀어붙일 마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각하, 단지 그 처자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카탈로그상 스펙이 그 정도로 높은 병기들이 그런 처자의 손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여러모로 힘들지 않나, 그러한 점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카이프의 말을 들어보면 칼디르를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닌 듯했지만, 그렇다고 상관의 뜻에 완전히 순응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칼디르를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카이프가 그녀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줄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이나, 말도 안 되는 정보라고 할지라도 검토해보는 것이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이네. 귀관도 명예로운 장교단의 일원이라면 그 점을 모르지는 않을 터.”
카이프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로즈니는 자기 뜻을 쉬이 꺾지 않았다. 당장 육군 대국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몰락시킨 ‘낫질 작전’을 창안한 에리히 만슈타인 역시도 처음에는 ‘이 새끼 도랐구나’ 소리나 듣고 좌천당했던 일을 떠올려 보자.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이던 작전이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막장이 되어버리거나, 계획 단계에서는 누가 봐도 쓰레기 같다고 할 만한 작전이 실은 국가와 국민을 구원할 신의 한 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이 얼마나 많았나!
10살의 나이에 육사에 입교하여 어느덧 그 나이가 115살에 이르게 된 그로즈니는 그 누구보다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군 생활 106년차인 그의 생각에 따르면 칼디르는 철부지 소녀나 희대의 사기꾼이 아닌, 혜성처럼 나타난 구원자일 가능성이 더 컸다.
‘신이 정말 있다면 우리를 실험해 보기 위해서 구원자를 평민 처자의 형태로 가장하여 내려보내신 것일지도 모르지. 구원자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무시해버리기 쉬울 테니. 신이 우리를 실험하시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에 응해야 한다.’
자신의 상관이 확고한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린 카이프는 그를 끝까지 설득하여 그 마음을 돌리려고 시도하기보다는 만일에 대한 보험을 마련해두자는 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편이 나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각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서기장 동지를 통해 그 처자와 직접 만나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저 역시 함께하겠습니다. 만일 그 처자가 감히 거짓을 말한 것이라면 마땅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총사령관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칼디르에게 분명 무엇이 있을 거로 생각한 카이프는 부사령관 체면에 몸소 칼디르가 직접 제작한 전차에 탑승하여 그 성능을 실험해볼 마음까지 먹었다. 지금은 다 늙은 야전 원수지만, 한창때는 한 번 출격에 100대가 넘어가는 적 전차를 박살 내버릴 정도의 슈퍼 에이스였던 카이프가 모처럼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하도록 하게. 하지만 만일 그 처자가 구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어찌할 텐가?”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 처자가 한 말에 거짓이 한 점 없다면... 이는 즉시 군수부 대신에 임명될 수 있을 정도의 사안이라고 봅니다.”
카이프 역시 그로즈니와 마찬가지로 칼디르가 건네준 설계도 자체에 관해서는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녀의 군략이 어떤지는 아직 알지 못하니 ‘야전 원수 자리도 아깝지 않다’는 말은 하려다가 도로 집어넣었지만, 대신 ‘일개’ 원수보다 더 높은 자리인 대신의 지위를 언급할 정도로.
그렇게 의견 일치를 보게 된 두 사람은 새로운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무기나 만들어지고 있는 무기의 처리법에 관해 잠시 논한 뒤- 추가 생산은 그만두되 최소한의 정비가 가능할 만큼의 생산 라인만 남겨놓고 이미 생산된 분량은 실전에 투입하기로 했다- 즉시 아틀라인 서기장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어차피 칼디르와 한 번 만나보려면 서기장과 통화를 해야만 하는 거,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있겠는가? 때마침 그로즈니의 집무실에는 서기장과 연결된 핫라인도 있었다. 몇 번의 통신음이 흘러간 뒤, 서기장의 얼굴이 홀로그램화 되어 허공중에 나타났다.
“육군원수, 혹시 칼디르라는 소녀에 관한 일로 연락을 주었는가?”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서기장 동지께서 건네주신 설계도 파일을 가지고 검증을 해보았으나, 그다지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역시 그랬군. 이쪽도 상황은 마찬가지네.”
서기장은 그가 왜 전화를 걸어왔는지 안다는 듯이 굴다가도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병력을 즉시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병기가 있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어도 한때의 해프닝으로 치부해버리고 잊을 수 있었던 일을... 서기장이 속으로 그렇게 혀를 차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로즈니는 실망을 금치 못하는 서기장이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준 뒤에 칼디르와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서기장은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대화 주제는 곧 접선 시각과 장소, 방법으로 넘어갔고, 그 모든 사항에 관한 협의는 물 흐르듯 이루어져서 카이프가 미처 간여할 틈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로 칼디르를 만나는 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