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국방군 장교단의 의무: 1화
칼디르가 섹스 타임을 가지느라 허비해버린 시간은 그녀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게 된 아틀라인 서기장, 제임스 병부대신, 그로즈니 육군원수에게는 그녀의 ‘제안’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실현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나 유용한 것인지를 검증해볼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어차피 그들이 나름대로의 검증 과정을 거쳐 칼디르의 제안이 지닌 가치를 깨닫고는 뭐든 줄 테니 당장 네가 설계했다는 이 무기들의 실물을 내놓아보라고 닦달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동안은 공주님과 슈가랑 함께 이런 짓 저런 짓을 다 해도 시간이 충분할 거라는 게 칼디르의 계산이었다.
‘사실 그건 핑계고, 그렇게나 재미있는 짓을 그만두고 일을 하러 가기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닐까?’
아리아가 속으로 칼디르를 빈정댔다. 하긴 칼디르가 저 세 사람의 눈에 드는 순간 공순이로서 한도 끝도 없이 갈려 나갈 것이 뻔한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밍기적거리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갈려 나가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대신하여 최후의 섹스파티를 벌인다, 이는 아리아가 이해해줄 수 있는 범주 안에 들어있는 일이었다.
자, 칼디르가 제안한 갖가지 무기들이 정식으로 아틀란티스 국방군의 제식 무기로서 편입되려면 과연 저 세 사람 중 어느 쪽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까? 아틀라인 서기장? 그의 직책이 가장 높기는 하지만, 태생이 군인이 아니라 정치가인 이상 군인 출신인 나머지 둘의 의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병부대신? 그가 보급과 부대 편제, 훈련의 명수라고 한들 야전군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한 그로즈니 육군원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었다. 결국, 칼디르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었다.
국방군 내에서 그보다 경력이 긴 군인들은 거의 다 죽어 나가 해공군까지 모조리 긁어모아도 그가 전군의 최선임자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상, 상명하복의 원칙이 그 어떤 조직보다도 철저히 지켜지는 군대에서 그가 ‘칼디르가 설계한 무기를 앞으로 우리 군의 제식 무기로 한다!’고 선언하면 그대로 시행되게 될 터였다.
“아, 드디어 왔는가. 실은 내가 누군가로부터 해공군의 병기에 관한 설계도를 받을 일이 있었는데, 내가 육군 출신이다 보니 해공군에 관한 일은 잘 몰라서 자네들을 불렀네. 부디 좋은 조언을 해주기를 바라네.”
“아, 아닙니다, 원수 각하... 각하의 군력이라면 필시 해공군에 관한 일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내게 아부할 필요는 없네. 어떤 일이든지 간에 해당 분야 전문가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법이지.”
그로즈니 역시 자신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니는 무게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칼디르의 설계도를 놓고 혼자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부르는 등 신중을 기하였다. 특히 해군의 주력이 될 우주 전함이나 공군이 채용할 워프 전략 폭격기와 같은 것이라면 그의 전문분야인 육군에서 벗어난 일이었으므로 더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그로즈니는 필요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검토 과정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이 설계도를 그린 자가 15살짜리 평민출신 소녀라는 사실만큼은 말해주지 않았는데, 그 자신은 지난날에 남존여비의 고리타분한 관습을 깨고 칼디르의 양어머니인 아스트라 대령에게 손수 대령 계급장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내려줄 정도로 깨어있는 자라 할지라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까지 전부 그럴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설계자의 신상정보에 관해 떠들어댔다가 그들이 색안경을 끼고 설계도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무슨 불행이란 말인가? 그의 초청으로 검토 과정에 끼게 된 이들도 그가 설계자에 관해서 말해주지 않자, 감히 먼저 물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온화한 장수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이곳은 군대였기에.
그들에게 색안경이 씌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무기의 성능 면에서는 호평을 해주었다. 다만 오랜 전쟁으로 아틀란티스는 상당한 공업력을 손실한바, 신규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죄,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자네 잘못도 아닌데 왜 자네가 그렇게 겁을 집어먹는가? 오히려 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여기까지 끌어올 수 있게 해준 공학자들, 그리고 우리 노동자들의 헌신에 감사하고 싶을 따름이네.”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칼디르가 무기를 설계하면서 생산성 문제를 어느 정도 고려했다고 하나,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압도하는 성능’을 설계의 제1원칙으로 삼기도 했고, 지난번 대전쟁 당시에 루시드 군이 아틀란티스 제국 전역에 전략 핵폭격을 가해 주요 공업지대를 모조리 날려버린 탓도 컸다.
주요 공업지대가 다 날라갔는데, 무기를 숨 쉬듯이 찍어낼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다. 괜히 이루어지지도 않을 욕심을 내기보다는, 지금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무기를 만들어내는 공학자들과 노동자들을 칭찬해줘야 할 판국이다.
“그러면 종합해보지. 지금 우리의 공업 역량으로서는 신규 무기의 성능이 100% 보장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대량으로 생산하기는 매우 어렵네. 맞는가?”
생산 라인을 모조리 바꿔버리면, 이미 생산된 무기들의 정비와 보급은 어찌 유지할 수 있겠는가? 칼디르가 ‘50조에 달하는 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의 병기가 있음’이라고 했던 말을 실물로 증명해 보이기 전에는 기존 생산 라인은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칼디르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검증해보자고 이렇게 토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 예, 맞습니다, 각하!”
“하지만 성능 테스트용으로 사용할 시제품을 생산하는 것 정도라면 기존 생산라인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겠지. 맞는가?”
“예,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각하!”
그가 뭐라고 하건 하급자들의 대답은 거의가 ‘Yes’였다. ‘No’라고 말하는 것에는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고, 까마득한 상관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차라리 만용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이는 몇 없었다.
일단 그의 지시에 떨어지자, 전차를 비롯한 육군 병기들은 며칠 만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설계도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던 데다, 공학자들이 노동자들을 죽도록 갈아 넣어 중대급 인원을 무장할 만큼의 무기가 뚝딱하고 나올 수 있었다. 다만 육군 병기보다 좀 더 큼지막한 해공군의 것은 그렇게 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원수 각하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가장 먼저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난 육군 병기들의 독자 테스트부터 시행하고, 해공군과의 연계 테스트는 추후에 시행하기로 했다.
“야 시발, 호랑이 정비하기도 좆같아 죽겠는데... 고놈 참, 큼지막한 게 엔진이랑 변속기 갈아주기 힘들게 생겼네!”
“이 큰 거북이가 과연 제대로 움직일 수는 있을까? 듬직하게 생기기는 했다만...”
가장 먼저 실물을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된 전차병들의 평가는 그러했다. ‘8호 전차 티렉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 물건, 한눈에 보기에도 방어력은 뛰어나 보이는데... 원래 쓰던 57톤 짜리 티거도 느려 터진 판에 이거 제대로 움직이기는 함? 손에 익은 티거에서 잠시 떠나와 모르모트로 쓰이게 된 그들은 대체로 신병기를 불신했다.
어쨌거나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이다. 실전 테스트에 돌입하기 전, 훈련장에서의 사전 테스트는 실물이 나오고 죽음의 돌려 돌려 돌림판으로 차출 대상자들이 정해지자마자 시작되었다. 자, 그러면... 과연 일선 병사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칼디르의 무기들은 사전 테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뭔가 잘못된 것 같군. 설계도에 첨부된 카탈로그상 스펙과 사전 테스트의 결과 사이에 수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지 않는가?”
사전 테스트 결과는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칼디르가 서기장의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카탈로그상 스펙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서기장 동지의 말씀을 듣고 이 설계도가 우리 군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타개할 해법이 되어줄 줄로만 알았는데, 사전 테스트 결과대로라면 기존 무기보다 조금 우수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우리 똑똑한 아들’이라면 전과목 만점을 받아올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틀린 문제가 제법 많아서 죄다 80~90점대 점수를 받아온 격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보다 못한 점수를 받은 학생들에 비하면 ‘우리 똑똑한 아들’이 받아온 점수는 뛰어난 건 맞지만, 기대한 것만은 못하니 실망감을 표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면 우선의 실망감을 감춘 채로 옆 반의 ‘티거’ 학생이 70점대 성적을 거두어들인 것에 비하면 뛰어난 성적이라고 칭찬해줘야 할까? 모를 일이다.
“송, 송, 송구합니다, 각하...! 설계도 상의 스펙을 전부 충족시키기에는 공업 역량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가... 신규 무기 생산에서 어떤 점이 가장 문제가 되었는가?”
“그, 그것이... 설계도에 따르면 ‘아틀라늄’이라는 금속물질을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아, 이는 카테스 제국에서 ‘야훼의 기적’이라고 부른다는 바로 그 물질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방군의 역량으로서는 이 물질을 제련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질이 떨어지는 물질로 병기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사전 테스트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원수 각하께 보고하러 온 공학자가 말끝을 흐렸지만, 그로즈니는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 말을 끝까지 내뱉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겠지.
그로즈니는 일단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잔뜩 겁을 집어먹은 공학자들을 집무실에서 내보내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야훼의 기적’이라... 카테스 제국의 무기라면 우리 군도 지원받은 것이 좀 있을 텐데, 그것이 그토록 다루기 힘든 물질이었단 말인가...”
사전 테스트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유는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이른 시일 내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칼디르라는 소녀에게 실물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겠군... 이윽고 그는 어떤 결심을 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