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13화 (75/225)



〈 75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13화

칼디르는 이어서  번째 이유- 어쩌면 첫 번째 이유와도 연관이 있는-를 들었다: 이제 정통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맹세하였으나, 아직 정부 내에서 별다른 지위와 권한을 내려받지 않은 상태에서 독단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은 안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서기장님은 부정하셨지만, 제국의 황태자셨다는 지위로 보건대 제국의 뒤를 이을 정통성은 인민정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정통성 있는 지도자인 서기장님께 인정받고자 이리 뵙게 되었습니다만, 아직은 아무런 지위에 있지 않은 제가 섣불리 취한 행동으로 인해  나라의 정통 정부가 자칫 제삼국으로부터 경계를 사게 된다면...”

“그 점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자네가 무엇을 들고 왔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 서기장의 명예를 걸고 자네에게 합당한 지위와 권한을 내려주겠네.”


서기장은 가지 가족을 구해준 데다, 앞길에 희망을 틔워주려고 하는 칼디르에게 그 정도는 해줄 용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정통 정부의 권위에 복종하고자 한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힘이라고 할지라도 정부가 통제할 수 없다면 말짱 꽝인 법이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황태자 운운은 하지 말게나. 이미 오래전에 버린 이름을 들으니 자꾸 닭살이 돋는군.”


애초에 자기가 잘나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그가 보일 만한 반응이었다. 인민정부의 권위가 전국민적 투표에 의지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비록 그 자신이 황태자였다는 사실이 인민정부에 정통성을 더해준다는  자체는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칼디르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흠, 죄송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혹시 ‘단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가’라... 전제 왕정을 말하는 것인가? 인류가 우주 곳곳으로 뻗쳐 나간 이 시대에 최고 권력자 한 명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체제는 오래 버틸  없는 법이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는가?”

비단 칼디르 자신과 같은 강대한 초능력자뿐만 아니라, 그 어떤 유능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한 명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나라는 정상국가라고 볼  없었다. 그런데 칼디르가 자기 힘만으로 이 나라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해버린다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칼디르는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는 신적 권위를 얻게 될 것이다.


 결과, 아틀란티스는 칼디르 단  명이 자리를 비우는 것만으로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 허약한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설령 칼디르가 영원토록 권좌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안에서부터 썩어서 쓰러지게 될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을 타개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인’의 개성을 억누르고 ‘전체’를 강조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영구히 권좌를 지키는 독재자가 되기를 바란 적도 없다.

칼디르  자신이 정말로 영구불변의 권좌나 마르지 않는 재산 따위의 것을 원했다면, 당장 이 힘을 가지고 정통 정부를 무시한 채로 모든 것을 휘어잡는 아주 간단한 방법도 있는데 왜 지금처럼 힘든 길을 걸어가고자 하겠는가?


고기를 던져주기보다는 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라는 옛말이 있다. 이 나라를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빠르게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어쩔  없이 초능력을 쓰게 될 일도 많겠지만, 동시에 칼디르는 자신의 지식을 널리 퍼뜨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자신과 같은 규격 외의 초능력자 없이도 자립해나갈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자네... 단순히 생각이 깊다고만 봤는데,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있었군. 하기야, 자네가 정말로 타브급 초능력자라면 신적 권위를 얻어 누구도 범접할  없는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되겠지.”

이쯤 되니 칼디르가 정말로 그 정도의 초능력을 가졌는지 실험해보고는 싶은데, 자기 호기심을 채우자고 무고한 이들이 만일의 사태에 휘말리게 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서기장은 고뇌에 휩싸였다.

“그런데... 자네나, 카테스 제국의 카우디요가 타브급 능력자라는 사실을 이토록 쉽게 발설하고 다녀도 되는 것인가?”


인공 블랙홀 탄 따위의 물건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타브급 능력자의 존재는 해당 국가의 비대칭 전력으로서 철통 같은 보안으로 묶어놔도 지나침이 없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기가 타브급이라는 건 그렇다고 쳐도, 제삼국에 그 정도의 능력자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하고 다녀도 되는 건가?

“거듭 말씀드리게 되는 사실이지만, 서기장님은 정통 정부의 수장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이런 중요한 정보를 말씀드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직설적으로 풀어보자면: 정부 수반에게 1급 기밀을 취급할 자격이 없다면,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자격이 있느냐는 말이었다. 그리고 칼디르는 카테스 제국의 카우디요가 그동안 우리나라에 퍼부어준 지원의 규모를 고려해보았을 때, 그가  정도 일로 유감을 품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족을 덧붙였다.

여기서 서기장은 ‘칼디르가 어떻게 인민정부가 카테스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는 대신, 여태까지 그들이 해준 지원의 규모를 떠올리며 ‘음, 하긴 그 정도면 카우디요가 우리나라에 각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라고 생각하였다.

이상으로 자기가 그동안 초능력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다섯 가지 이유를 설명한 칼디르는 홀로그램 설계도 파일 몇 개를 슝슝 소환해내더니 그것을 서기장에게 건네고는 이제 슬슬 본론을 시작하자는 눈빛을 보였다.

서론이 좀 길었던  같기도 하군. 이 설계도들은 뭐지? 서기장은 홀로그램 파일을 펼친 다음 그것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세한 것은 우리 측 병기국 공학자들에게 넘겨 봐야 알  있겠지만, 이것들은 모두 어떤 병기의 설계도로 보였다. 그 스펙트럼은 보병용 레이저 건에서부터 우주 전함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했다.


“저도 루시드 인들에 맞서는 전장에 직접 참가하기는 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은 마련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설계도들은 모두 그 방법에 관한 것으로, 제가 직접 그린 설계도입니다.”


“이 세밀함은... 당장에라도 대량 양산에 참고할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설계도로 보이는군. 이것들을 모두 자네가 직접 그렸다고? 도움을 받지 않고?”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다닐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칼디르였으니,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병기들을 설계할 적에 도움을 구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설계하고, 만들고, 실험해보고, 교리를 발전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모두 수행해야만 했지만, 오로라와 플랑을 만든 뒤로는 그 작업도 아주 심심하지만은 않았다.

일반적인 설계 과정과 칼디르의 설계 과정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보통은 예산에 맞춰서 설계를 짜낸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시제품에서 결함을 찾아내고 최종 양산형에 개선점을 반영하는 식으로 병기개발이 진행된다면, 칼디르는 허허벌판에 일단 최종 양산형을 만들어놓고 이걸 다른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설계도를 그리고는 했다. 설계도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다니지 않는다면 고를 수 없는 방법이었다.


“서기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것들은 전부 대량 양산을 염두에  설계도들입니다. 카탈로그상 스펙은 물론, 극한 환경에서의 작전 능력, 정비성, 생산비용, 보급 문제, 훈련 문제 등과 같은 사항들 역시 최대한 반영하였습니다.”


칼디르는 자기가 만들어낸 병기들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지,  성능은 주요국의 그것들보다도 뛰어날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정부 수반을 앞에 두고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그 당당한 태도를 보고 서기장은 무어라고 의혹을 제기할 수 없었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 번뜩 뜨인 눈, 곧게  허리.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이 사실을 당장 병기국의 공학자들과 여러 장군에게도 알려줘야겠군. 혹시 성능 테스트에 사용해볼 시제품은 있는가?”


서기장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뜬 듯 보였다. 아직 전문가들을 통해 교차 검증을 거치는 과정이 남아있건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카테스 제국이라는 거대 물주 외에도 신뢰도 높은 병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새로운 거래처가 생겨난 듯했다.


아닌 말로, 칼디르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카테스 제국에 대한 의존도를 상당히 낮출 수 있을  아닌가? 자주성은 절대로 포기할  없는 문제다. 카테스 제국이 비록 최대 후원국이라고 하나, 그들도 결국은 외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건 놓칠  없는 기회.

“성능 테스트용으로 투입할 분량뿐만 아니라, 당장 50조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의 분량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즉시 인민정부 휘하 병력에 보급할 수 있습니다.”


칼디르의 말은 모처럼 들뜬 서기장의 기분에 쐐기를 박았다.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것은 망설였던 칼디르는 초능력의 힘을 빌려 병기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김에 그냥 많이 만들었고, 원료에서 원자를 하나씩 떼어내어 조립하는 식으로 만든 무기들은 저 멀리 ‘제3 소우주’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하여 공장에서 생산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도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당장 그렇게 할 여력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약소하게나마 서기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선물을 가지고 와봤습니다.”


초능력을 세밀하게 다루는 훈련도 할 겸 칼디르는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냈는데, 원료는 발에  만큼 많고, 병기화 작업에는 오롯이 그 자신의 초능력만이 들어갔으니 자기가 이걸 대가로 돈을 받지만 않는다면 인민정부로서는 사실상 공짜로 대량의 병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는  이르자, 서기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얼씨구나, 여기 갈아 넣기 딱 좋은 공순이가 하나 굴러들어왔구나! 공밀레다, 공밀레! 한 명의 사나이로서 크고 아름다운 병기들을 공짜로 들일  있다는 말을 듣고서 어찌 아니 흥분할 수 있을쏘냐! 내 딸이 모처럼 대단한 인재를 구해왔어!

자기 딸이 단순히 갈아 넣기 좋은 공순이가 아니라 예비 며느리를 물어온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의 표정이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해지지만, 적어도 지금은 굉장히 기뻐 보였다.

그래도 일단 교차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에 서기장은 칼디르에게 상당히 높은 지위를 약속하여 내보낸 다음, 방문이 닫힐세라 병기국 공학자들에게 전화를 싹 돌리고 국내정부와 구국군정 측에 연락을 넣기까지 했다. 드디어,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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