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10화
“너희는 결국, 우리 인민의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게 되리라.”
“나는 가지만, 조국의 독립은 오고야 말 것이다. 아틀란티스 인민 만세!”
“제국주의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흘리는 피 한 방울로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승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목숨을 바치리라!”
“제기랄, 마지막 순간에까지 제멋대로 떠들어대는군. 어떤 멍청이가 재갈도 물려두지 않은 거지? 다들 시끄럽다! 모두 장전! 저 빨갱이들을 향해 매운 맛을 보여줘라!”
타타타탕-! 광이 나도록 닦은 군도를 들고 악을 써대던 장교의 명령에 맞추어 발사된 총알의 폭풍이 지나긴 뒤, 또 한 무리의 반 루시드 저항 운동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이 무대 위에서 퇴장한다고 하더라도 반 루시드 저항운동의 불씨는 절대로 꺼지지 않을 터였다.
젠장할, 내가 어쩌다가 이 험한 곳에 발령을 받게 되었는지... 출세할 기회라고 해서 신청서를 써내던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손목을 분질러서라도 그 선택을 무르고 싶다. 병사들을 시켜 빨갱이들의 시신을 미리 파둔 구덩이에 대강 던져놓은 루시드 제국군 장교가 이빨을 빠드득 깨물었다.
루시드 제국은 분명, 지난번 대전쟁에서 아틀란티스 제국을 상대로 싸워 우주 역사에 기록될 대승리를 거두어들였다.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무단으로 옥쇄를 훔쳐낸 빌뇌브와 아틀란티스 원정군 총사령관 발틱이 화성에서 만나 악수를 할 때만 했어도, 그들의 앞길에는 빛나는 영광만이 있을 줄로 알았다.
발틱으로부터 승전보를 전해 들은 루시드 제국 정부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틀란티스를 괴뢰국으로 삼은 뒤, 그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자신들이 누리는 부에 보탠다는 내용의 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루시드 제국은 아틀란티스 영내에서 벌어지는 끝도 없는 저항운동에 휘말려 매일 같이 괴뢰 아틀란티스 제국에서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곳에서 잃고 있었다. 갈수록 심화하여가는 저항운동에 진압군 역시 점점 잔혹해져 갔지만, 하나를 밟아버리면 어디선가 열이 튀어나왔고, 그들을 지워버리고 뒤돌아서면 백이 되어 돌아왔다.
가히 베트남전과도 같은, 아니, 그보다도 심한 수렁의 연속이었다. 베트남전은 그래도 지구라는 하나의 행성, 그것도 인도-차이나 반도라는 아주 국지적인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지만, 반 루시드 저항운동을 뿌리 뽑는 것이 목적인 이 전쟁은 수백억 개에 달하는 행성계 하나하나가 최전방이었다.
개중에서도 압권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종족의 차이,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하나로 융합되어 성공적으로 저항을 이어나갔고, 끔찍한 고문을 당해 죽어가면서도 저항조직의 비밀을 내뱉지 않았다. 그들의 투철한 투쟁 정신에는 전문 고문 기술자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인민당의 지휘를 받는 ‘좌익 전투 노동조합’은 말이 노동조합이지, 게릴라전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대신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대규모 회전을 걸어올 정도로 세력이 컸다. 도대체 어느 동네의 노조가 전차와 전투기를 몰고 다닌단 말이던가? 하기는 섣불리 총파업을 벌였다가 혹독하게 진압당한 경험이 있었으니만큼, 그들로서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리라.
공산당은 인민당과는 정반대로 게릴라전을 선호했지만, 그 규모로 보자면 핵 수류탄을 품에 안은 첩자를 심어 경찰서나 군부대를 통째로 날려버리거나, 저격으로 고위관료들을 떼로 몰살시키는 등, 인민당의 그것에 절대로 뒤처지지 않았다.
이 두 조직은 국내 자생세력(인민당) 대 해외 원조세력(공산당)이라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루시드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기꺼이 손을 잡고 최후의 한 명까지, 최후의 일 초까지 전투를 마다치 않았다.
그러면 공산주의와는 상극일 우파 성향의 인물들은 루시드 제국에 호의적인가? 그렇지도 않았다. 수천 조 명을 일방적으로 학살해버린 루시드 제국의 만행에 그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하며 공산주의 세력과 연합전선을 이루었고, 이들의 사상적 차이점을 이용해 분열을 유도하는 총독부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좌우 대합작’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우익 세력의 '반동성'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해묵은 갈등을 잠시 접어두고 저 간악한 루시드 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싸움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동지들이여, 같은 아틀란티스 인 간의 투쟁은 나중으로 미루자!”
“조국의 독립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지난날의 맹세를 잊었는가? 지금은 공산주의자들보다도 더한 자들이 내미는 손이라고 해도 기꺼이 잡아야 할 때다! 명심하라, 당면한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라 루시드 인들이라는 것을!”
공산주의 세력이 저항운동 내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기는 했어도 아틀란티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본거지로 삼았다는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해 있었는데, 그보다 세력은 적을지 몰라도 지구에서 불과 수십 광년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우파성향 국내정부의 존재는 총독부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총독부가 파악한 것만 천억 명에 달하는 국내 정부군은 이른 시일 내로 격파할 수 없는 적으로 자리매김했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자기네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루시드 인들로서는 대전쟁 당시처럼 핵무기를 냅다 뿌리는 식의 초강경 진압은 도저히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거라면, 정복하고 지배할 이유나 있겠는가?
루시드 인들 덕분(?)에 귀족 가문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오랜 세월 탄압을 받아온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민들과 지체 높은 문벌귀족들이 악수하고, 포옹하는 기적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루시드 제국과의 항쟁 과정에서 아틀란티스 내부의 분리주의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칼디르가 그토록 원했던 ‘국민국가’의 기틀이 자리 잡아 갔다.
하나 된 이들의 저항은 실로 무서웠고, 100조를 넘어 200조에 육박하는 아틀란티스 주둔군은 곳곳에서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 아틀란티스에 집단군 규모의 의용병을 파병했던 카테스 제국의 대 루시드 제국 독자제재 역시 루시드 제국의 경제가 새로운 식민지를 확보한 이후에 오히려 철저히 몰락해가는 데 결정타를 먹였다.
“우리 카테스 제국 정부는 아틀란티스 영내에서 루시드 제국 정부가 벌이는 야만적인 행위들을 강력히 규탄하는 바요. 현 시각 부로 루시드 제국은 그 어떠한 국가와도 교류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이 제재를 위반하는 국가는 마찬가지로 제재를 받게 될 것이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폭거요! 본래 식민지를 어떤 방식으로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권리는 개별 자주국에 있지 않소? 제삼자인 카테스 제국이 무슨 명분으로 우리 제국이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식민지 운영에 개입하겠다는 말이오!”
루시드 제국 역시 ‘연합국’ 내에서 방귀깨나 귀는 열강이었지만, 카테스 제국의 힘은 그보다도 강력했다. 루시드 제국의 거부권 발동으로 UN 제재는 무산되어버렸지만, 카테스 제국의 독자제재는 UN 제재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었다.
세컨더리 보이콧을 처먹을 것을 우려한 각국 정부는- 심지어 카테스 제국의 오랜 숙적들조차도- 위험한 모험 대신 루시드 제국과의 무역거래를 중단하기에 바빴고, 아틀란티스 인들의 격렬한 투쟁심- 물론 패배주의자들의 숫자도 만만찮게 많았지만-이 이에 맞물려 루시드 제국의 올해 GDP 성장률은 -30%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카테스 제국은 하루하루 힘겨운 저항운동을 이어나가는 아틀란티스 인들을 위해 각종 물자를 보내주었고, 자기네들이 선언한 독자제재가 성실히 이행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함대를 동원하여 루시드 제국의 본토-우리 은하보다 훨씬 크다는 안드로메다은하-를 봉쇄해버리고는 모든 출입국 함선을 검열하기까지 했다.
카테스 제국은 그 자신의 월등히 높은 국력을 믿고 루시드 제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만’ 하지 않은 채로 그들의 목줄을 옥죄었으며, 국내 강경파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차마 카테스 제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던 루시드 제국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엌ㅋㅋㅋ 식민지 먹고 경제 꼬라박는 루재앙 수준 ㅋㅋㅋㅋ”
“응~ 루시드 천황 폐하 지지하는 개돼지들은 ‘대은하 전쟁’ 찬성해~”
수입도 그다지 시원찮은 식민지와 자기네들의 경제를 맞바꿔버린 루시드 제국의 ‘멍청한 선택’은 국제 인터넷상에서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아틀란티스 영토를 나눠 먹은 나라들은 정부 차원에서 루시드 제국의 선택을 비웃는 논평을 내지는 않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아틀란티스 인들에게 아직 독립이란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7년간의 ‘대전쟁’, 그리고 15년간의 ‘대은하 전쟁’- 반 루시드 저항운동의 공식명칭-은 우리 인민들에게도 엄청난 피로를 안겨주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루시드 인들도 점점 한계에 몰리는 듯 보이지만, 벌써 20년 넘게 용맹히 싸워온 우리 인민에게도 이제 휴식이 필요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피를 흘렸고, 너무나도 많은 행성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에게도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그것도, 저 루시드 놈들의 콧대를 단 한 번에 꺾어놓을 만큼 강력하고, 묵직한, 최후의 공세가. 카테스 제국의 후원은 물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들 역시 결국은 외세. 우리 인민의 힘으로 지구를 탈환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종주국 간판만 바꿔 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게 말이 쉽지. 뭔가를 바라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 빈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놈들이 알아차렸는지는 몰라도, 우리 인민당의 역량 역시 그동안 꾸준히 소모되어온 바람에 그와 같은 총공세를 시도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하자고 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총공세는 개죽음을 부를 뿐.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군. 내 아버지께서 자결하신 뒤부터 따져도 15년이나 싸워왔으니, 이제 놈들도 지쳐서 백기를 들 때도 됐는데, 징하게 버티는 꼴이라니...”
루시드 제국 역사상 가장 막대한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이자 전대 황제의 큰아들이며, 저항운동 내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아틀라인 1세 임시 서기장. 그는 오늘도 집무실에 콕 틀어박힌 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서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주적인 규모의 대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은 그에게 단 1초의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15년에 달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마약까지 복용해가면서 저항운동을 지휘해온 그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황태자라는 고귀한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때로 탄 제복, 푹 들어간 눈과 초점을 잃은 눈동자,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앙상하게 말라 들어간 몸.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령 주술에 의해 억지로 움직이는 뼈다귀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마약으로 수면욕을 억제할 수는 있었어도, 그 대가는 막대했다. 아버지가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보기 전부터 따지면 20년 넘게 그러한 삶을 살아온 그의 얼굴에는 짙은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슈가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사람이자- 아틀란티아 공주님의 아버님 되시는 분의 현주소였다.
그의 어깨에는 수천 조 아틀란티스 인민의 목숨이 달려있었기에,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도 없었다. 그가 포기해버린다면 마지막 희망조차 잃게 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의 소중한 딸과 아들이 루시드 인들의 틈바구니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조금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아틀란티아, 아틀란... 그때 구해냈어야 했는데... 루시드 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는지...”
그것만 생각하면 그는 너무나도 괴로워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저항운동을 총지휘하는 임시 서기장이기 이전에 한 명의 아버지요,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다. 내 자식들만 소중한 목숨은 아니니, 무리하게 구출작전을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어떻게 구해낼 수만 있다면...
“저기 앉아있는 분이 바로 우리 아빠야. 사실 나도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좀 오랜만에 보는 거라 확신은 들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서기장이라는 직함을 쓰는 사람은 우리 아빠밖에 없으니까, 맞을 거야.”
“저, 저분이 바로 주인... 아니, 공주님의 아버님...이신 건가요.”
이제는 환청까지 들려오는구만. 지금 이 집무실 안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두 소녀의 말소리 같은 게 들려올 리가 없는데... 잠깐, ‘아빠’라고? 초췌한 얼굴의 서기장이 얼굴을 들자, 그 앞에는 조금 전까지도 애타게 이름을 불러댔던 자기 딸과 처음 보는 얼굴의 소녀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내가 드디어 미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건가? 저 얼굴, 내 아내 헤라를 많이 닮았는데... 저 소녀가 정말 내 딸, 아틀란티아가 맞는다는 것인가?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을 오랫동안 바라오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그 순간이 찾아오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어... 저... 안녕... 아빠? 아빠 딸, 아틀란티아야. 여기, 나를 따라 온 건 마키... 아니, 칼디르라고 해.”
“아틀란티아... 정녕 내 딸 아틀란티아가 맞는 것이더냐?”
그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넋 놓고 있다가 마침내 자기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자기 딸이라는 확신이 든 뒤에야, 진실한 눈물을 선보이며 실로 오랜만에 자기 딸을 안아보았다. 지금 자기 딸이 서큐버스 특유의 아주 야한 란제리를 입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그가 보기에 그의 딸 아틀란티아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지내온 것 같았다. 내가 아비로서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자라주었구나... 오히려 칼디르를 만난 뒤로 잘 지내다 못해 방탕하게 시간을 보내오신 공주님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으으... 아으으... 주인님, 너무해앳...♥ 감동적인 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흙으로 더럽혀진 정장 대신 새 정장을 구해 입은 칼디르가 눈치 없이 계속 야한 소리를 냈다. 범혁의 앞에 섰을 때처럼 속옷을 걸치지 않고, 공주님이 아랫배에 새겨준 음문을 들킬까 말까 걱정하면서, 이번에는 보지에 로터까지 붙인 상태였기에 변명거리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