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8화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어떻게든 슈가를 벽 쪽에 몰아넣기는 했는데... 손에 들려있는 권총부터 빼앗는 게 좋겠지? 그때까지도 권총을 꽉 쥐고 있던 슈가의 손에 아스트라 대령이 힘을 쓰자 손가락이 하나씩 펴졌고, 이윽고 한 사람을 능히 죽일 힘을 가진 흉기는 슈가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슈가야,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다. 내 말을 한 번 들어보거라. 내가 너한테서 칼디르를 빼앗아가려던 게 아니고...”
“거짓말하지 마! 나, 똑똑히 들었어! 우리의 결혼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걸... 다 들었다고!”
대령이 슈가를 짓누르는 염동력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상태인데도, 슈가는 소리를 빼애액 질러대며 반항했다. 내 품에 안겨서 다 죽어갈 때도 그렇고, 평소에는 예의 바르던 아이가 어떻게 칼디르가 엮인 일이 터졌다 하면 저렇게 이성도 잃고 마구 난리를 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은 건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내가 한 말을 잘못 들은 모양이구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너희 둘이 결혼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에스엠인지 뭔지... 아무튼, 그런 심한 짓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마음에서...”
“칼디르는 내 여자야! 내가 내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간섭하고 드는 거야!”
예에? 무슨 자격이요? 칼디르의 양어미...정도면 딸내미의 가정사에 간섭할 자격은 있지 않을까요? 큰일이다, 아주 큰일이야. 뭐라고 해도 슈가를 설득할 수는 없을 것 같네. 무슨 말을 했다 하면 바로 말을 끊고 들어오니, 원. 슈가를 잠시 재워놓고 대책을 세워놓는 편이 좋겠어.
“이이익...! 이거... 풀어...! 풀란 말이얏...!”
대령이 자신을 강제로 재우려고 드는 순간, 격하게 몸을 움찔거리던 슈가가 염동력의 형틀에서 자기 힘으로 풀려나오고 말았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형틀에서 풀려나왔다기보다는 형틀 자체를 없애버린 것 같았다.
어어? 일이 이렇게 되자, 대령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단순히 슈가를 묶어둔 힘의 기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예 염동력이라는 능력 자체가 봉인 당한 듯 슈가를 다시 묶어버릴 수가 없었다. 슈가는 분명 초능력이나 주술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을 텐데, 어떻게 한 거지?
“내게서 칼디르를 빼앗아가려고 한 죗값... 당신의 목숨으로 받아갈 테다!”
슈가가 바닥에 떨어진 리볼버 권총을 다시 부여잡고 대령의 심장을 조준한 채 방아쇠를 당기는 그 찰나의 순간, 오로라 역시 돌발 상황에 연산회로가 마비된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리볼버의 총구에서 튀어나온 총알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대령을 향해 날아들었고, 제대로 자세도 갖추지 않고 무작정 총을 쏘아댄 슈가는 반동으로 밀려났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위험하지 않았느냐!”
일시적으로 염동력을 봉인 당했다고 해도 초능력자는 역시 초능력자. 대령은 불과 수m 떨어진 곳에서 초음속으로 날아든 총알을 손가락으로 잡아채는 묘기를 선보였다. 만일 대령의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가 일반인과 같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몰라... 몰라...! 칼디르는 내 거란 말이야... 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지 대가를 치러야만 해...!”
슈가는 반동으로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잘도 그렇게 지껄였고, 아 이게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오로라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서 대령과 슈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제아무리 뛰어난 로봇이라고 해도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길 수 없는 것인가?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될 것 같군요. 조금 무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메이드 로봇으로서 두 분이 잠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어떨는지 제안을 드리는 바입니다.”
흑색 장발의 메이드 로봇이 흥분에 겨운 두 사람을 중재하려고 드는 모습은 제법 웃겼다. 마음만 먹는다면 합리적인 판단만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는 로봇 대 비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대변하는 인간의 대치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이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음에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나도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것 같고...”
치이이익... 뜨겁게 달아오른 총알을 맨손으로 잡는 바람에, 대령의 손가락에서는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오로라의 제안을 듣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는 총알을 바닥에 툭 던지면서 오로라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오로라는 그녀의 자비에 감사를 표하면서 슈가를 데리고 대령의 방에서 물러났다. 흥분을 억누르고 이성을 되찾은 슈가의 얀데레 인격은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 되는 분께 며느리가 될 사람으로서 너무 심하게 굴었나 하는 생각을 곱씹어보며, 오로라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이끌려 가주었다.
어차피 여기에는 칼디르가 없는 모양이었으니, 빠르게 챙길 물건만 챙기고 다른 곳으로 뜨는 편이 낫기도 했고.
“아, 언니.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나가더니,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9살짜리 혼자서 이 무거운 상자들을 들어서 옮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지하 비밀 수집품 창고에 들어온 슈가와 오로라를 반겨주는 것은 앙증맞은 키의 솔트였다. 대령의 집무실에 몰래 도청기와 초소형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감시해오다가 자기에 관해서 부정적인 말이 나온다 싶으니까 바로 뛰어 올라갔던 슈가가 솔트의 뼈 있는 말을 듣고는 머쓱해 했다.
“미안해. 내가 잠시 미쳤나 봐...”
나 자신을 향해 내뱉는 말이었지만, 미쳤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칼디르에게 아주 제대로 미쳐버렸지. 이성을 놓아버리고 시어머니를 향해 권총을 들이댈 정도로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어. 뭐가 됐든 간에, 내 의지로 칼디르를 향한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사과했으니까, 나도 언니를 용서해줄게. 그런데 그렇게 급하게 뛰어 올라가더니, 성과는 좀 있었어?”
“성과... 성과라... 그러고 보니...”
대령님이 나를 염동력으로 묶었는데, 내가 자력으로 그걸 풀고 뛰쳐나왔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도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고 지내온 내 능력이 이제야 깨어난 셈인가?
사실 여기에는 슈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무대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지휘 감독하는 아리아가 다가올 히로인 쟁탈전-아틀란티아 공주님과의 멸망전-에 앞서서 일종의 밸런스 패치 차원에서 슈가의 분노를 동력원으로 삼아 새로운 능력을 각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그 공주라는 년에게는 서큐버스 특유의 능력들이 있는데, 그에 맞설 사람은 비 능력자라니. 그건 너무나도 불공평한 처사지.”
그리하여, 슈가가 얼떨결에 새로이 각성하게 된 능력은 바로 ‘능력봉인’이었다. 이미 전개된 지속능력을 막는 데는 그다지 효과가 없을지 몰라도, 시전자의 의지 없이는 지속하지 않는 능력이나, 전개되지 않은 능력을 막는 데는 그보다 좋은 비장의 카드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 아틀란티아라는 개년에게 통렬한 배빵을 먹여주고 칼디르를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아.”
“꺄아아, 언니 멋져... 반할 것 같아...”
자기 힘을 깨닫고 굳게 결심하는 친언니를 바라보면서 멋지다고 꺅꺅대는 솔트였다. 거의 뭐, 아이돌 빠순이처럼 보인다. 친언니가 이제 능력을 각성하는 바람에 자기가 언니를 따먹기 위해 세워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그토록 좋아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불편한 진실을 알아차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능력이 돌아온 것 같군. 아까는 정말이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슈가의 시야에서 벗어난 대령은 염동력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피로감이 극심했다. 그녀의 집무실 의자는 그다지 부드러운 재질이 아니었음에도, 그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리 앉았고... 곧 깊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러면 언니야... 뭔가 다른 수가 생겼다면, 여기 도구들은 그대로 들고 갈 거야, 말 거야?”
“사람 일이라는 게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으니, 무거운 상자는 내버려두고 가벼운 것만 좀 챙겨가자.”
능력 봉인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기는 했어도, 오늘이 되어서야 깨우친 능력이니만큼 보험을 들어놓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언니의 굳은 결심을 전해들은 솔트는 채찍, 수갑, 족쇄, 쇠사슬과 같은 비교적 가벼운 소품들을 트렁크 가방에 욱여넣는 데 협조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칼디르의 불륜 보지에 징벌을 내리고 내연녀 아틀란티아에게 응징을 가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슈가는 일제 돌격을 앞둔 병사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로라 네 생각은 어떻지? 칼디르가 여기에도 없다면... 어디로 갔을 거 같아? 나도 몇 군데 떠오르기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두 분이 공주님의 아버님 되시는 아틀라인 서기장이 계시는 곳에 가셨을 것 같군요.”
“아틀라인 서기장? 칼디르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이야기해준 것 같기도 하고...”
슈가가 길을 떠나기 전에 목적지를 어디로 삼아야 할지를 오로라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슈가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다가 오로라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 마침내 깨달았다는 듯 토끼 귀를 탁! 쳤다.
“그 사람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 한 번 가보자.”
드디어 종착점을 향해 출발하게 되는 건가. 읏차, 그러지 않아도 먼 길 떠나면서 챙길 짐이 있는데 너마저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는구나. 오로라에게 한 방 맞은 뒤로 줄곧 기절해있던 플랑은 오로라 일행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 나갔다.
불륜 보지 징벌 열차는 너무나도 장엄하게 출발했다. 뭔지는 몰라도 그 종착점에 이르게 된다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