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7화
전원이 꺼진 채로 메모리까지 뽑혀 나가 있는 10여 대의 카메라, 각종 체액-섹스의 부산물-으로 어지럽혀져 있는 침대 시트, 조금 전까지도 주인 년이 이곳에 있었는지 진하게 남아있는 페로몬. 하지만 정작 우리가 찾는 사람은 보지 털조차 보이지 않고 빈방에 공주님이 남기고 간 듯한 사진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지금 이 상황.
한 가지밖에 없군. 이년들 이거, 내가 온다고 한 날에 맞춰서 떡이나 쳐대다가 다른 데로 튀었나 보네. 정확히 여기서 만나고 한 적은 없기도 하고, 나도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는 했는데... 막상 일이 진짜로 이렇게 되고 보니 칼디르 이년이 더욱 괘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누구는 자기 명령 수행하느라고 고생은 다 했는데...
“칼, 칼디르 냄새다. 확실해. 분명 여기에 조금 전까지 칼디르가 있었어. 그 아틀란티아인지 뭔지 하는 년도 같이. 킁킁, 킁...”
오로라 덕분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슈가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어질러져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어지러워져 있는 방을 뛰어다니면서 한 마리 암캐라도 된 듯 코를 킁킁거리고 다녔다. 딴에는 칼디르의 체취가 진하게 남아있는 이 방에서 뭔가 물증을 찾아내려고 하는 행동이었다.
방바닥에 남아있는 거라고는 가짜 좆물이랑 애액뿐인데, 냄새를 맡으면 거기에 누가 싸질러 놓고 간 거라는 표식을 찾아낼 수 있나? 오로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자기가 나서서 말린다고 그만둘 슈가가 아니었기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암캐처럼 킁킁거리고 다니는 언니 모습도 너무 귀여워...♥ 역시 언니는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습이 잘 어울려. 언젠가는 언니 목에 개 목줄을 채우고 산책하고 다니고 싶어...♥”
진작부터 생각해온 거지만, 이년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로군. 당분간 설탕(슈가)이랑 소금(솔트)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어. 친언니를 향해 색욕에 젖은 눈길을 보내는 솔트를 보면서 오로라는 그저 자매가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행동을 취하고자 할 때까지 입구 쪽에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오로라가 잠시 쉬고 있는 동안, 마침내 공주님께서 슈가 일행 앞으로 남겨둔 선전포고문을 발견한 슈가가 그 사진이 올려져 있던 책상 앞에 멈춰 서버렸다. 안대에, 재갈에, 뒷짐결박까지 당한 전라의 칼디르 옆에 승리의 V자 사인을 그리며 활짝 웃는 아틀란티아 공주님의 모습.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명백히 슈가 자신을 향한 선전포고문이었다.
“오로라 언니야... 저... 두 분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플랑, 너나 나나 로봇에 지나지 않아. 3원칙을 어기고 인간님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말리는 건 옳지 않아.”
“아니, 언니가 언제부터 3원칙을 그렇게 잘 지켰다고...”
로봇이 괜히 무슨 일이 끼어들고 싶지 않을 때도 둘러대기 좋은 핑계, 3원칙!...이 아니라, 이 언니의 진심을 몰라주는 어리석은 동생년에게 꿀밤을 한 방 세게 먹여준다. 플랑이 악! 소리와 동시에 기절해버릴 정도로 세게.
그나저나 나는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저 사진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슈가님은 이제야 보신 모양이군. 언젠가 안주인님과 슈가님이 주인님을 놔두고 맞붙을 일이 있을 때 거대한 불꽃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때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다가올 것 같다. 슈가님이 저 사진을 봐버린 이상, 이제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됐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확해졌네. 더러운 배신자에게 징벌을! 악랄한 도적에게는 죽음을! 피의 보복을! 우우우!”
슈가의 육신을 장악한 얀데레 인격은 칼디르가 자기는 내버려두고 다른 년이랑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은하 구석에 있는 고대 밀림행성의 야만인들처럼 포효하기 시작했다. 징벌과, 죽음이라... 슈가님께서 말씀하시는 배신자는 분명 우리 주인님이고, 악랄한 도적은 공주님이겠지.
불쌍한 우리 주인님, 공주님의 앞에서 이미 처녀 혈은 터진 지 오래인데 15년 지기 소꿉친구한테 온몸을 뚜드려 맞아서 다른 곳에서까지 피를 보게 되시겠네. 그러니까 도대체 왜 바람을 피우고 다니시는 겁니까? 진작 슈가님한테 엉덩이 한 번 대주셨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감히 언니를 배신한 칼디르 언니에게 징벌을...! 헤헤, 헤.”
솔트, 너는 왜 또 거기에 호응을 해주고 앉아있는 거냐? 그것이 네 나름대로 언니에 대한 사랑을 표하는 방법인 거냐. 사랑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든 그 말을 따라가는 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그리 부를 수 없다면 광기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칼디르 이년이 어디로 튀었는지 어떻게 알아내지?”
“그거라면... 혹시 제 주인님과 길이 엇갈렸을 수도 있으니, 우선 칼디르의 행성요새로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의 보복을 완수하기 위해 다음 목적지를 찾는 슈가에게 오로라는 혹시 칼디르 일행이 집으로 돌아와 있을 수도 있으니, 우선 돌아가서 찾아보고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보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슈가도 좋은 생각이라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혹시 칼디르가 지난 15년 간 함께 생활해온 행성요새에 돌아와 있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다. 바람을 피운 데 대해 마땅한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에 걸맞은 징벌 도구를 챙겨야 하는바, 행성요새로 떠나는 김에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오로라의 손을 잡고 눈꺼풀을 한번 감았다 떼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지구의 궁궐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눈의 산맥밖에 없는 칼디르의 요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새 부축을 받지 않고 쿵쿵 바닥을 울리며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한 슈가는 돌아오자마자 비밀 수집품 창고로 내려갔고, 솔트가 그 뒤를 총총 따라갔다.
슈가의 지하 비밀 수집품 창고. 그곳에는 슈가가 헌혈 봉사를 핑계로 칼디르의 몸에서 뽑아낸 혈액 팩을 비롯한 각종 기괴한 수집품들이 다 모인 장소이자, 오로라의 손에 한 번 털렸던 곳이기도 했다.
“아, 오로라. 또 어디에 갔다 왔는지는 몰라도... 때마침 잘 돌아와 주었구나. 잠시... 슈가 없이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슈가 일행이 자리를 비운 사이, 슈가가 칼디르와 함께 지내는 방에 남겨진 유서를 발견한 아스트라 대령이 오로라에게 다가와서 독대를 청했다. 오로라로서는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대령을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가 말이야, 어지간하면 우리 칼디르와 슈가의 관계를 인정해주려고 했는데...”
자리에 앉은 채 한숨을 푹 쉬며 운을 떼놓은 대령의 말에는 영 힘이 없었다. 그래, 힘이 없을 수밖에 없겠지. 슈가가 어렸을 때 매일 같이 다 크면 칼디르랑 결혼할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걸 보면서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치부해왔다가, 다 커서도 그러기에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나가던 시점에서 추악한 진실을 마주해버렸으니 말이다.
“슈가가 실의에 빠져서 자살을 기도하며 남겨둔 이 유서를 한 번 읽어 봐. 내가 비록 칼디르의 친어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미가 된 사람으로서 이런 형태의 사랑을 용납해주는 것이 과연 부모로서 옳은 일일까?”
그것은 충격적인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질문이요, 그 누구라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다. 오로라는 그저 대령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줄 뿐이었다.
내가 괜히 할 말 못 할 말 다해서 대령님의 진을 다 빼놓았으니,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뭐, 어차피 슈가님께서 주인님과 안주인님의 관계를 파헤치다 보면, 언젠가는 대령님의 귀에도 그 이야기가 흘러들어 가게 되었을 테니, 따끔한 주사를 좀 더 빠르게 맞았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라고 하는 건 너무 양심이 없어 보이잖아.
“여자가 같은 여자를 우정의 범주에서 더 나아가서 성적인 의미에서 좋아하는 것, 이 드넓은 우주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있을 수 있고말고. 당장 우리나라 사람만 해도 수천 조 명은 될 텐데, 어떻게 남녀로 구성된 ‘정상커플’만 존재할 수 있겠어?”
대령이 그토록 허탈해하는 것은 슈가가 자기 딸을 사랑한다거나, 공주님씩이나 되는 분께서 자기 딸을 사랑스럽게 봐준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그러한 사실 자체는 얼마든지 용납 가능한 것이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슈가의 유서에 따르면 칼디르를 죽여서라도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바, 그 사랑의 끝에는 파멸만이 있으리라는 것이 뻔히 예상되는 데도 칼디르의 어미 되는 자로서 이 일을 어떻게 막아서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 대령은 심각하게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슈가만 이상한 길-하드 SM 플레이-로 빠져들었더라면 자기가 나서서 슈가만 뜯어말리면 되었겠지만, 오로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전부 사실이라고 믿어준다고 하면 칼디르 역시 이상한 길로 접어들고 만 모양이니, 몸통이 하나뿐인 자기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이 일이 해결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고로, 칼디르의 작품인 네가 슈가를 어떻게 좀 뜯어말리고 칼디르를 공주님의 마수로부터 구해내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대령은 자신의 속에 들어있던 응어리를 모두 꺼낸 듯했다.
어, 저기 그러니까... 저도 제 주인님을 어떤 식으로 교육해야 할지 고민하던 참인데 저한테 그런 걸 물어보셔도... 쾅! 갑자기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슈가가 권총을 들고 방안에 들어왔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뻥긋거리던 오로라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고, 한 사람과 한 로봇의 눈이 문 쪽에 쏠렸다.
“나, 다, 다, 다들었어... 대령님이 감히 내게서 칼디르를 빼앗아가려고... 아무도 내게서 칼디르를 빼앗아갈 수 없어! 내게서 칼디르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면... 그게 누구라도 다 내 적이야!”
슈가의 손에 들려있는 권총은 분명 국방군 장교용 6발들이 리볼버였다. 오로라는 그 넓은 수집품 창고를 다 뒤져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어떻게 벌써...하며 놀랐고, 대령 역시 저 물건이 왜 슈가의 손에 들려있나 생각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있었던 건가? 솔트는? 이성을 잃은 슈가한테 벌써 권총을 맞고 쓰러진 건 아니겠지? 아무튼, 지금은 슈가를 말려야 했다. 사격 한 번 해보지 않았을 소녀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는 상황을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이, 이거 놔아아! 내게서 칼디르를 빼앗아 가려고 하다니, 다 죽여 버릴 거야아아!”
대령이 강력한 염동력으로 슈가를 벽 쪽에 몰아넣자, 슈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슈가는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