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소꿉친구의 전용 생체 오나홀: 3화
‘아이고,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구나!’
방에 쳐들어가자마자 수북이 쌓인 칼디르 굿즈들 한가운데 목을 매달고 있는 슈가를 발견한 대령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당장에 슈가의 목을 조르고 있는 밧줄을 초능력으로 불태워버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그토록 좁은 범위만을 노려 불태우는 것은 지난날 행성을 불태우고 다니던 것보다도 더더욱 어려웠지만, 그것으로 슈가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왠지 이럴 것 같아서 행성요새 거주민들의 삶을 위한 서류작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해봐도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섬뜩하기만 하다. 설마하니 진짜로 자살기도까지 할 줄은.
“대, 대령님... 언니, 살, 살... 살 수 있는 거지요?”
“그, 그래... 안심하거라.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다! 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고!”
밧줄이 끊어지자마자 바닥에 떨어진 슈가를 아슬아슬하게 받아낸 대령은 온몸을 떨고 있는 솔트를 안심시키고는 그대로 의무실로 순간 이동하여 침대 위에 내려놓고 이에 대한 해결방법을 알고 있을 법한 오로라를 목청껏 불러대기 시작했다.
“예, 무슨 일이십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것 같군요.”
대령이 자기를 부르자마자 어디선가 플랑과 함께 슝 나타난 오로라는 한눈에 슈가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보았다. 밧줄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전에 이미 2분 넘게 목을 졸린 탓인지 온몸에 생기가 다 빠져나간, 아주 위독한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오로라는 곧이어서 웬 혈액 팩 하나를 꺼내더니, 슈가에게 수혈할 준비를 하였다. 자살 기도자를 치유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그다지 일가견은 없는 대령이었지만, 피를 흘린 것도 아닌데 혈액 팩이라니? 대령이 뭐라 말은 하지 못하고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하자, 오로라는 이같이 대답하였다.
“이건 제 주인님 되시는 분, 그러니까 칼디르님의 혈액 팩입니다. 슈가님께서 헌혈 봉사를 핑계로 수집품 삼아 이런 걸 몇 개고 모아두셨지요. 보관상태는 최상이니, 즉시 수혈이 가능합니다. 그나저나... 모르셨습니까?”
몰랐다니? 도대체 무엇을? 오로라의 해명을 들은 대령의 표정이 더더욱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변해갔다. 오로라의 추가설명은 더더욱 요지경 속이었다: 혈액 팩을 수집품으로 삼은 건 칼디르님을 향한 슈가님의 마음이 그만큼이나 깊다는 것이고, 슈가님은 그동안 칼디르님을 떠올리면서 자해를 해오신 바 있으니 수혈이 도움될 거라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슈가의 양 손목이 붕대로 묶여있네. 언제부터인가 계속 저러고 다니길래 어디서 다쳤는지를 물어봐도 도통 말을 해주지 않던데, 그런 이유에서였나. 내 양딸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자해를 일삼다가 실의에 빠져 마침내 자살을 기도할 정도에 이르고 만 것인가.
‘이 정도였다면, 슈가가 어릴 적부터 칼디르와 결혼할 거라고 노래를 부르던 것을 그대로 허락해줄 수밖에 없겠군. 마음이... 착잡하다...’
아무래도 슈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슈가가 남긴 비밀 일기장의 내용을 엿보고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구토하고 말았지만, 이제 막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아이에게 ‘칼디르의 양어머니로서, 너의 칼디르에 대한 그 뒤틀린 사랑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소리 치는 것은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에 대령 그 자신조차 여성 장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꼰대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해온바, 이제 와서 슈가에게 동성애는 허락할 수 없다는 식의 보수적 성 관념을 강요한다면 농담거리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만큼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내게 친히 대령 계급장과 기사십자장을 내려주신 육군원수께서 이 일에 관해 알게 되신다면 어찌 반응하실지 궁금해지는군. 지금 당장 그분께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3대 귀족 가문 출신이시면서도 천민 출신 병사들도 차별 없이 포상해주시던 분이니...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으시겠지?
대령이 칼디르와 슈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이, 오로라는 슈가에 대한 수혈을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슈가가 그토록 사랑하다 못해 죽으려고 드는 칼디르의 피라 그런지 들어가자마자 슈가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칼디르가 슈가를 위해 손수 지어준 약보다 칼디르의 피가 더 효과가 좋은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오로라가 미리 슈가의 수집품 창고를 털어서 챙겨온 혈액 팩을 모두 소모했을 때쯤 슈가의 낯빛은 보통 사람들처럼 돌아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제 슬슬 바닥에 쓰러져 있을 솔트를 데려와서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좋겠다 싶었던 대령은 자기 예상대로 자신과 부딪혔던 장소에 털썩 주저앉아있던 솔트를 언니가 누워있는 의무실로 데려가서 그녀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며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 그럼... 우리 언니... 괜찮은 거지요...? 다, 행... 다, 다행, 다행이야...”
솔트는 오로라와 대령으로부터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아낸 뒤에야 겨우 안심했다는 투로 말했다. 하기는 나도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지 걱정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오로라가 대단해 보였다.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고 해도, 역시 로봇이라 사람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언니와 단둘이 있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몇 분 동안 언니의 손을 부여잡고 가만히 있던 솔트가 다시 입을 떼면서 내뱉은 말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소소한 부탁이었다. 비록 슈가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는 했어도, 단둘이 두는 것이 맞는 건지 잠시 고민한 대령은 이내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면서 오로라와 플랑을 데리고 나갔다.
오로라가 이에 대해 걱정을 표했지만, 콧물까지 훌쩍거리며 간곡히 부탁하는 솔트를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 대령은 이를 가볍게 물리쳤다.
“솔트야, 힘, 힘내! 슈가 언니... 괜찮을 거야!”
“그, 그래... 플랑... 고마...워...”
그때까지도 아무말 없이 가만히 서 있던 플랑이 쭈뼛거리면서 한마디를 하고 방을 나서자, 의무실에 언니와 단둘이 남게 된 솔트가 훌쩍거리면서 9살 꼬마에 걸맞은 연기를 집어치우더니, 갑자기 표정을 확 살벌하게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깜작 놀랐잖아, 언니... 언니는 내 여자인데...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려서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을 홀로 남겨두고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혼자 도망가려고 했더니...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깨어나면... 벌을 받아야겠지?”
그랬다. 슈가가 소꿉친구를 향해 비뚤어진 연심을 품은 얀데레라면, 솔트는 단순히 얀데레에서 그치지 않고 친언니를 노리는 시스콘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슈가의 옷에 묻은 칼디르의 페로몬에 간접적으로 노출된 채로 때마침 자기 언니를 마주한 것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라는 것을, 솔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언니. 언니는 내가 지켜보이고 말 테니까.”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솔트의 표정은 너무나도 섬뜩해 보였다. 겉으로 봤을 때는 밝게 웃고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많았다. 아무리 봐도 중학교 2학년 나이의 언니보다 6살이나 어린, 초등학교 2학년 나이의 소녀가 보일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슈가도 사정은 비슷해서, 시스콘 여동생이 무방비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꿈속에서 때아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선한 인격과 악한 얀데레 인격이 육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혈투는 가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히히히... 저항하지 말고 이대로 눈을 감는 편이 더 좋을 텐데... 너도 실은 나를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끄으윽... 끅... 내가... 포, 포기할까봐... 너 같은 거한테는... 절대로 칼디르를 넘겨줄 수... 없...어...”
목숨이 끊어질 뻔한 위기에서 겨우 살아돌아온 뒤에, 그전까지는 서로 뒤섞여있다가 확실하게 나누어지게 된 두 인격의 싸움은 어느 한쪽이 다른쪽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식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암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어디선가 비쳐오는 한 줄기의 빛만이 사투를 벌이는 두 인격을 비춰주고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연애과정을 거쳐서 사랑의 결실을 보고자 하는 선한 인격은 칼디르의 몸을 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얀데레 인격에 목을 졸리면서 서서히 암흑속으로 집어 삼켜져 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얀데레 인격이 선한 인격으로부터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어들이게 된다면, 모처럼 칼디르에게 심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은 일은 흐지부지되고 다시 칼디르를 쟁취하기 위해서 피를 흘릴 각오까지 되어있는 얀데레 인격이 육신의 주도권을 쥐고 모든 것을 흔들게 되리라.
얀데레 인격에 잠식된 슈가의 육신이 칼디르에게 어떤 심한 짓을 저지를지, 그것을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노력하는 선한 인격이었지만, 선한 인격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얀데레 인격이 그녀를 덮침으로써 시작된 싸움의 승패는 처음부터 판가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칼...디르... 그 착한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아아? 그거? 별 거 안 해. 그저... 우리 괘씸한 칼디르의 첫 경험을 가져가 버린 개년에게 칼빵을 좀 놔주고... 칼디르에게도 합당한 ‘처벌’을 가할 뿐이지...”
갈색 곱슬머리 장발, 토끼 귀, 거유, 살이 약간 잡힌 배, 풍만한 엉덩이까지 모든 것이 똑같은 두 인격의 싸움은 결국, 얀데레 인격의 승리로 끝났다. 선한 인격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고는 사라져버렸고 혈투 끝에 승리를 쟁취한 얀데레 인격은 번쩍하고 눈을 떴다.
스윽.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펴보는 슈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 아니, 익숙한 여동생이었다.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거지...? 일단 이곳은 의무실인 거 같은데, 이곳까지 왔다는 건 오로라가 나를 도와줬다는 소리가 되고... 그렇다면 대령님도 이 일에 반드시 끼어들었을 텐데... 왜 내 옆에 너만 덜렁 남아있는 거냐?
“헤헤, 언니. 깨어났다, 깨어났어. 다행이다.”
솔트는 언니가 깨어나기 전까지 짓고 있던 음흉한 웃음을 싹 지워버리고는 그저 해맑게 웃으면서 포옹으로 정신을 차린 언니를 반겨주었다. 제법 따뜻한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