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4화
시간을 좀 더 뒤로 돌려서, 범혁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지구에 있는 황궁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이곳에서 칼디르를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포르노 영상과 19금 화보집을 만들어내신 공주님께서는 그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그냥저냥 무난하게 칼디르로부터 성 봉사를 받으면서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셨다.
“하아, 정말이지... 난... 공주님이 너무 부러워... 나도 마키의 혀로 저렇게 봉사 받고 싶어.”
“공주님의 몸에 빙의라도 하고 싶어지네.”
츄르르릅, 츄릅... 음, 으음... 막 부끄러워하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지금은 또 메이드답게 야한 차림을 하고서 쟁반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집안일을 돕다가도 내가 불러 세우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내 품에 안겨 와서 보지를 빨아주는 꼴이라니. 내가 바라던 바기는 하지만, 조교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빠른 것 같았다.
“후아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너랑 오로라랑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인 거 같은데... 그 전에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 아니었어?”
“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뭐든지 간에 주인님께 성 봉사를 해드리는 것보다는 중요한 일이 될 수는 없지요.”
공주님께서는 자기 일보다 성 봉사에 열중인 칼디르를 기특한 눈으로 내려다보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 역시 하셨다. 마키가 루시드 제국을 몰아내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내 여인이 될 사람으로서 대단한 포부를 품고 있다 싶었는데, 내가 그런 여자를 암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키에게 보지 빨리면서 봉사 받는 것도 기분 좋지만, 마키가 이 땅에서 루시드 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책략으로서 과연 어떤 계획을 세워놓았을지 슬슬 궁금해지기도 하고, 나 혼자 좋자고 마키에게 도움을 받아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지금처럼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두는 것도 안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기서 이만 참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음에 계속하면 돼.”
“주, 주인님... 이것만으로 정말 충분하신가요? 평소에는 이것보다도 더하시고도 만족하지 못하셨는데...”
“어허, 나를 뭐로 보고. 나도 성욕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공주님께서는 칼디르보다 겨우 1살 많으신 주제에, 칼디르에게 지구에서의 일을 마칠 수 있게 해줄 겸, 또 어른스럽게 굴어보실 겸 해서 칼디르의 머리통을 잡아서 자기 보지에서 떨어뜨려 놓으셨지만... 오래지 않아 성욕을 참을 수 있다는 그 말은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칼디르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것으로 성욕을 최대한 억누르려고 하셨던 공주님의 손은 차츰차츰 엉덩이, 젖가슴, 보지 쪽으로 옮겨 가셨고, 공주님의 혀가 칼디르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어느샌가 한 쌍의 보지가 샌드위치처럼 포개져 버렸다.
내 말 취소다, 취소. 성욕 같은 거 절대 못 참아. 공주님께서는 결국 메이드들이 다 지켜보는 주방에서 칼디르를 범하신 뒤에야 조금 떨어진 성욕을 어떻게든 참으실 수 있게 되었다. 그마저도 걸어가면서 칼디르의 온몸을 주무르시는 거로 참으신 거지만.
“으으응... 참으실 수 있다고 하셔놓고...”
“참고 있잖아. 내가 너를 보고 30분 이상 섹스를 참은 것만 해도... 이거 대단한 거라고? 나도 노력하고 있는 거야!”
공주님의 ‘최대한의 배려’로 인해, 칼디르는 범혁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신의 초능력을 과소평가 중이지만, 칼디르의 계획에 따르면 반드시 포섭해야만 할 인물. 공주님께서는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말을 들으신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 만남을 허락하셨다는 건 비밀이다.
“작은 오빠야 나랑 한 세트라고 치고,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또 따로 치는 거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점에서 나도 안심이 되네... 휴. 그런데 너, 그런 차림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갈 수는 없는 거잖아? 평소 원래 살던 곳에서는 뭐 입고 다니는데?”
“보, 보통... 주, 주인님께서 제게 하사하신 옷이나... 첫날 연회장에 입고 갔던 옷보다는 노출도가 낮은 옷들을... 주로 입고 다녔어요...”
공주님께서도 자기가 칼디르에게 입혀 놓은 옷이 남들 앞에 선보일 만한 옷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셨고, 칼디르가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이 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렇게 물어보셨는데, 칼디르의 대답은 상당히 의외였다: 하얀색 와이셔츠,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구두. 흠,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남성의 복장인데.
평소 차림 그대로 만나야만 한다는 사람과 만나게 해주되, 브라랑 팬티만 압수하고 나는 어디 몰래 숨어서 지켜보면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것 같다. 그렇게 결심하신 공주님께서 칼디르의 목에서 개 목줄 마저 푸시고는 칼디르가 가자고 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 가셨다.
황제를 비롯한 여러 귀족은 가면을 쓴 채로 ‘칼디르 칵테일’을 계집 노예들에게 아낌없이 주사하며 질펀하게 놀아나느라고 궁궐에서 공주님이 빠져나가는지 어쨌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범혁은 노브라 노팬티 상태의 마조 변태녀가 자기를 만나러 올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그날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사실 범혁이 자신의 결심에 따라 초능력을 아예 안 쓰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루시드 군의 대대적인 핵 폭격에 의해 초토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상당한 인구가 거주 중인 지구에서는 초능력을 갈고닦을 만한 장소를 마땅히 구하기가 힘들었기에 어디 머나먼 무인행성에 가서 소소한 실험을 해보았다.
순간이동 정도면 일이 잘못돼도 사람들에게 크게 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힘으로 사람들을 치유해줄 수 있을까, 혹은 지구의 환경을 다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것도 몇 번인가 실험해보았는데...
아무 동물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끌고 와서 거기에다 대고 정신을 약간 집중해본 결과 애꿎은 동물 몇 마리만 태워 죽이고 내 힘은 누군가를 치유하는 데 쓸 수는 없겠노라는 씁쓸한 결론만 얻었다. 실험해보기를 잘했지. 지구에서 이랬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동물 몇 마리 정도면 아주 값싼 대가지... 흠... 아까우니까 도로 갖고 가서 사람들한테 줄까?
파시즘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사상이라도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기 위해서는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법, 파시즘은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국가와 풍족한 미래라는 비전을 약속할 것이다! 그래, 언젠가는 말이지. 지금은 아니더라도 말이야. 범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돼지를 들춰 매고 이름 모를 행성에서 다시 지구로 순간이동했다.
“이건 화성에서 가져온 돼지니까 먹여도 괜찮겠지... 음?”
범혁은 평소 몇 번인가 마주해온 마을 입구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방사선 피폭 지대 안이라 대도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우리 마을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 곳이었나? 지나가는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있는 건 건물과... 공기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는데,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뚜벅뚜벅, 그 소리는 아주 작았으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범혁은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그토록 만나기를 고대해온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씨익 웃었다. 모든 희망을 잃고 나락에 빠진 아틀란티스 인들에게 ‘내일’을 약속할 사람! ‘퓌러’가 될 자격을 지닌 사람!
“정말 생각도 못 했어. 국가의 영웅이라고 하면 보통 방탄훈장으로 무장한 나이 든 영감님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는 뒤돌아서서 자신과 똑같은 형태의 남색 제복을 입고 있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양빛이 정체 모를 여자의 금빛 머리카락에 부딪혀 흩날렸고, 허여멀건 피부는 태양빛 아래에 서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희게 보였다.
두 눈동자는 흑해 바다- 루시드 군의 핵 폭격으로 증발해버렸다만-처럼 짙고 푸르렀고, 거기서는 어떠한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여태껏 내가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던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지... 전체적으로 마른 형상과 군대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 미모의 백인 여자는 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모의 여인... 확실히 사람들이 ‘영웅’하면 보통 떠올리고는 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리타분하다면 고리타분한 생각이지만,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카리스마 있는 영감님이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장면을 상상하고는 한다.
언뜻 ‘영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여자에게서는 초능력자라는 징후나, 굳이 초능력이 아니더라도 뭔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범혁은 직감으로 그녀 또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초능력을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하였던가?
“이거, 초면인데 통성명부터 해야겠지? 나는 김범혁이라고 해.”
“저는 칼디르 아스트라라고 합니다. 칼디르라고 불러주십시오.”
자신을 칼디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백인 여자의 목소리는 그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다 같은 사람끼리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여느 백인과 다르게 예의 바른 태도에 한 번 놀라고, 전혀 한민족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튀어나오는 것에 두 번 놀란다.
부자들은 그냥 동시 통역기를 쓴다고 하지만- 사람은 으레 자기가 쓰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법이지... 시험 삼아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봤는데, 아주 만족스럽다. 대화를 더 나눠봐도 될 것 같다.
“이 공간은 물론 네가 나와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서 만든 거겠지?”
“그렇습니다. 귀하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고 싶어서 지구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대화에 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뭐? 귀하라고? 이상해서 나이를 물어보니 나와 동갑이다. 나를 그렇게 높여줄 필요는 없는데... 원래 그런 성격인가? 어쨌거나, 범혁과 칼디르는 이제 막 만난 사람들답지 않게 꽤 친밀한 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쪽은 반말로, 다른 쪽은 존댓말로 대화에 임했지만 말이다.)
“칼디르, 너는 반공 십자군의 대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지? 유대-볼셰비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말이야.”
범혁은 칼디르의 미모는 인정하면서도 연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모처럼 여자와 단둘이 대화할 기회를 얻고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로 그렇게 돌직구를 날렸다. 다 좋은데, 국가사회주의의 핵심이념인 반유대주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면 너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유대-볼셰비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셨습니까? 말씀에서 적의가 느껴지는군요. 이 말을 들으시고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바로 그 유대인들과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뭐? 말도 안 돼. 어떻게 고결한 아리아인이 더러운 유대인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범혁은 칼디르의 대답에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망이 너무 컸던 탓인지, 금발벽안이라는 신체적 특징만 보고서 칼디르가 아리아인-더 정확하게는, 게르만족-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그 자신의 본심까지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실례지만, 귀하께서는 더 큰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악마와의 동맹이라... 유쾌한 일은 아닌데.”
김범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 저 사람이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을 유대인을 향해 저토록 강렬한 적의를 드러내 보이는 바탕에는 단지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있을 뿐이다. 단지 어떤 사람이 쓴 책을 읽고서 선입견을 품은 정도라면 충분히 설득해낼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칼디르는 범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범혁도 바로 돌아서지 않고 칼디르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었고, 덕분에 칼디르도 공주님의 앞에서 보여준 마조 본능은 싹 감춘 채로 자신의 이론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귀하께서는 우리 제국의 ‘진정한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유대-볼셰비즘과 유태-자본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유대인들이지!”
칼디르의 질문에, 범혁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칼디르는 그런 범혁의 말을 부정하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지난날 우리에게서 영토를 빼앗아가고 수천 조의 인명을 살상한 늙은 제국주의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적’이라고 하였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현 제국의 상태를 돌아보았을 때 유대인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 멀리 있는 다리에까지 가려고 하는 모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제삼국에서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한들, 우리에게는 타인을 돌아볼 정도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범혁이 증오해 마다치 않는 카테스 제국의 ‘엘-카우디요’와 만날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괜히 더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지금은 이야기해주지 않는 편이 낫겠지.
어쨌거나, 유대인 중심 국가인 카테스 제국이 자기네 식민지에서 학살극을 자행했던 주민들을 재료로 생체실험했든 그것은 식민지 거주민들의 문제이고 제삼자인 우리가 유대인들을 미워해야 할 이유는 못 된다는 것이 칼디르의 견해였다.
유대인들이 가진 힘은 실로 막강하다. 시온 의정서니 신세계 질서니 하는 음모론들을 전부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유대인과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데 공연히 우리와 상관 없는 이야기를 들춰서 그들을 적대할 필요나 있겠는가?
당장 유대인들을 적대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더 있다. 현재 제국은 루시드 제국에 의해 아틀레노스, 아틀랜드, 아틀랜드 회랑 등으로 갈리었고, 국내정부, 구국정부, 구국군정 등 저항운동 세력만 따져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