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3화
내가 하는 말에 공감해주는 지지자들의 숫자가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는 건 분명 좋은 소식이지만... ‘컬러드’끼리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면 뭘 하나! 하다못해 다른 도시의 사람들까지 끌어모으는 정도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면...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하면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를 않는다.
자존심 높은 백인 코쟁이들을 이렇게 설득해내려면 정신 지배라도 걸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을까, 범혁은 본격적으로 연설 놀이를 하고 다니면서 생긴 자신의 ‘팬’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신 지배... 물론 매력적인 능력이지.
하지만 그런 능력에 의존해야 할 정도라면 결국, 나를 진정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끌고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 되지 않나? 나는 가급적이면 초능력을 쓰지 않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고 싶단 말이다! 뭐... 지금처럼 노력하면 백인 코쟁이들도 내 말을 들어주려나?
별다른 속임수 없이 오직 세치 혀로 지지자들을 얻는 것이야말로 정치가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나를 안 좋게 보거나, 얕보는 이들까지도 세치 혀로 내 지지자로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그래. 여태까지 그래 왔던 대로 초능력을 이 단상 위에서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초능력 없이 끝까지 가보는 거야.
범혁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은 굳이 그렇게 숨기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마음껏 쓰고 다녀도 감히 제지할 사람이 없을 만큼 강력했지만, 범혁은 스스로 ‘이 정도 초능력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뒤였기에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초능력 사용만큼은 억제했다.
그로서는 지구라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서 초능력에 관한 연구결과들이나 논문 따위를 읽어보고, 다른 초능력자들의 힘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아볼 길이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판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최대한 신중함을 기하는 대신, 눈에 띌 것을 각오하고서 초능력을 마음껏 쓰고 다니면 무엇을 할 것인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틀란티스 인들에게 ‘내일’을 약속할 ‘퓌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텐데. ‘퓌러’가 될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는 나는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한다, 범혁은 또 그렇게 생각했다.
범혁은 자신의 역할을 ‘총통’이 아닌 ‘총통의 충실한 보좌진’ 정도로 한정 짓고 있었다. 그가 구상하는 바에 따르면... 음... 국내의 모든 수사기관과 법률기관을 통합적으로 지휘하는 동시에 무장친위대라는 무력까지 그가 틀어쥐게 될 테니 ‘총통의 충실한 보좌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크흠...
그는 일찍이 활약했던 파시스트 조직인 검은 셔츠단과 돌격대를 모범으로 삼으면서도 일찍이 그들이 누린 바 없는 지위에 올라가고자 했다. 파시즘의 종주국이라는 대게르만국에서도 일찍이 슈츠슈타펠, 아프베어, 게슈타포 따위의 조직들을 한 사람이 거머쥔 적이 없었지만, 그의 탐욕은 그 모든 것을 한 손에 넣고 싶어 했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이 정도 포부 정도는 가슴 속에 품은 채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그러한 속삭임으로 그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 어떤 속삭임으로 자기합리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총통’이 될 만한 사람이 도무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지금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기는 그런 재목이 흔하게 널려 있을 리가 없으니,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을 보낼 뿐이다.
“총력전 연설... 젠장! 난 도대체 언제쯤 이런 명연설을 할 수 있는 걸까?”
범혁이 내는 중저음의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 15살이 아니라 한 30대 중반쯤으로 들리는-는 연설에 적합했다. 하지만 오늘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연설을 마치고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그는 연설 놀이에 나서는 동시에 유대인이 어째서 사악한 존재이며, 그들을 도대체 왜 타도해야만 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한 바 있었다. 일찍이 인종과 민족으로 인류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온 범혁이었지만, ‘유대인은 하나의 인종임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라고 퓌러께서 말씀하셨다...! 퓌러께서 거짓을 말씀하실 리가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퓌러’의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도 불사했다. ‘퓌러’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 뭔가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퓌러’의 말씀에 부합하는 증거를 찾기에 급급하고, 그런 것을 도저히 찾아내지 못한다면 현실을 비판할 뿐, ‘퓌러’의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점이 그의 연설을 지켜봐 주는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지만, 그러한 편향성에 비판을 가할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쟤가 저렇게 말하니까 참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아?”
“그러게. 역시 연설이 먹히려면 얼굴부터 되어야 하는 건가?”
“범혁이는 우리보다 똑똑하니까... 범혁이가 하는 말이면 다 맞는 말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좋아. 연설 때마다 어디에선가 빵을 구해다 주니까, 나는 다음에도 이 자리에 나올 거야. 이제 더 이상은 굶주리며 지내고 싶지 않아.”
“그래, 범혁이가 뭘 좀 안다니까. 어차피 농사도 잘 안되어서 할 일도 없겠다... 연설이나 들으면서 빵이나 먹자고.”
“오늘도 제법 들을 만한 연설이었어, 그렇지? 빵도 맛있었고.”
“이런 연설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환영이야.”
나는 언제나 내 연설이 만족스럽지가 않은데, 사람들은 그런 내 연설에 박수를 쳐주는 것이 고맙지만... 지금 저렇게 나를 향해 환호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반공 십자군의 대의에도 공감해주기를, 범혁은 바랐다.
“하하하... 칭찬 고마워. 잘 들었으면 다음에는 사람들을 더 모아줬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래야지. 거... 어차피... 농사도 안 되겠다, 네 연설을 들어주러 올 만한 사람은 넘쳐날 걸?”
범혁은 연단에서 내려와 자신의 친구와 악수하면서 한참을 내려다 봐야만 했다. 두 사람은 친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도 거의 머리통 2개 이상의 키 차이가 났다. 그 친구의 말대로- 루시드 인들이 무식하게 때려 부은 핵폭탄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농사가 잘되지 않았기에 대부분 소작농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말 그래도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행성으로부터 식재료가 들어오고는 있었고,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영역도 있었기 때문에 지구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는 있었다.
“그럼 이만... 읍... 커헉, 컥...”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게 꼭 긍정적인 문구인지에 관해서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목숨을 부지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놈의 지구에서 실업자가 된 것에서 끝나면 다행이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핵폭탄의 직격을 피해나간 곳에서는 방사능에 찌들어 사람들이 하나둘씩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초능력자라 그런지 방사능에 찌든 쌀로 밥을 지어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던데, 다른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피부가 검게 변하며 죽어갔다. 나로서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혀를 찰 뿐이다.
힐링 기술...이라고 해야 하나? 공격 기술이라면 굳이 전문기관에서 배우지 않고서도 지금이라도 곧바로 쓸 자신이 있었는데, 힐링 기술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내 머리로 방사능 질병 치료제를 만들어서 뿌려보고 싶어도 필요한 장비를 구할 길도 없고 말이야.
과연 내가 저 사람들에게 ‘내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범혁은 자신의 ‘팬’들과 헤어져 혼자서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의 연설을 스스로 평가해보자. 연설, 루시드 인, 독립투쟁, 파시즘, 반공 십자군의 대의, 유대-볼셰비즘... 잠깐, 유대-볼셰비즘이라고?
“빨갱이들하고 손잡을 바에는 차라리 루시드 인들하고 손을 잡고 말지...”
범혁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빨갱이들이 아무리 미워도 우리나라 사람 4천조를 죽인 루시드 인들만 하겠냐? 4천만도, 4천억도 아니고, 무려 4천조를 죽였다고! (공식 전사자 통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전쟁 전후 인구조사를 비교해보면 적어도 4천조 명이 루시드 인들의 손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범혁은 소위 ‘빨갱이들’과 직접적으로 원한을 산 일이 없었지만, 단지 파시스트들이 책을 빌려 하는 말만 듣고서 ‘빨갱이들’을 향한 증오심을 키워 갔고- 그러한 증오심은 어느덧 루시드 인들을 향한 분노에 못지않게 커져 있었다.
단지 책에서 그네들의 악행을 봤다는 것만으로 그토록 누군가에 대해 무한한 악의를 품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범혁은 그 예외사례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무한한 적의를 ‘이념에 투철한 모습’으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해준다면 얼마나 큰 인물이 되어줄 것인가, 그런 생각마저 든다.
그나마 ‘총통’께서 그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따져보자면,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고서도 술 담배를 곧 잘 즐길 수 있었던 그에게 ‘담배는 독극물이다’라는 호통으로서 그로 하여금 술 담배를 끊고 여인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삶에 접어들게 했다는 것 정도일까. 여인은 처음부터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범혁은 자신과 같은 ‘이념적 광신자’와 함께 전 우주에 악명을 떨칠 만한, 뭔가 큰일을 해보고 싶었다. 루시드 제국에 피의 보복을 가하고, 이 우주에서 공산주의를 완전히 뿌리 뽑고, 우리 인류의 정당한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 필수권)’를 건설하고!
내가 그토록 만나기를 바라는 ‘총통이 될 자격을 지닌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물리쳐야 할 적은 우리 제국을 병탄한 루시드 제국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다음에는 빨갱이들을 무찌르고 싶다! 겸사겸사 행성 이름도 ‘아틀렌스부르크(작가 주: 아틀렌은 아틀란티스 제국의 건국자임)’로 바꿔놓고 말이야. 행성 이름이 레닌그라드가 뭐냐? 응?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진짜로 있다고 해도 내가 지구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보장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한다지?”
내가 아무리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도 당장은 그와 연락할 방법은 없는데... 문뜩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자, 그의 소망은 더더욱 간절해지게 되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그것도 그 자신이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인물과의 만남. 그, 아니, ‘그녀’는 그 자신을 ‘칼디르 아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소개했고, 겉보기로는 파시즘과 같은 극단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내가 몇 번을 강조했듯이- 우주는 드넓고, 인물상은 다양한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