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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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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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2화
범혁이 생각하기에, 인류라는 하나의 종족을 민족이나 인종 같은 분류로 구분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제아무리 민족별, 인종별 분리정책이 수천 년간 유지해온 아틀란티스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혼혈을 완전히 방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족’이라는 카테고리로 제국 내의 수많은 지적 생명체를 분류하는 것은- 적어도 파시즘에 심취한 그가 보기에는- 합리적이었다. 그는 인류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충실한 인류 제일주의자인 그에게 외계인은 협력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혼종인류’는 또 어떠한가? 외계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들어갔다면 그자는 ‘혼종인류’다! ‘인류의 순수성’을 재고하기 위해서는, 단언컨대 이 자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 버려야만 할 것이다!
‘인류의 순수성’을 재고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난 대전쟁에서 ‘혼종인류’가 배후에서 적성국가인 루시드 제국을 위하여 부역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구의 아들들은 루시드 제국군의 칼날에 쓰러져 간 것이 아니라, 이 반역자들에게 배후를 찔려 죽어간 것이다!
‘혼종인류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은 그들의 ‘완전한 절멸’이 될 수밖에 없다! 범혁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대게르만국을 이끄는 파시스트들이 유대인들을 탄압할 때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차용하여 ‘혼종인류’를 모조리 제거해 버려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유대인 역시 이 우주에서 지워 없애버려 마땅한 존재이지.’
민족 또는 인종의 차이를 빌미로 차별을 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그 자신의 신념과는 뭔가 모순됐지만, 범혁의 머릿속에서는 유대인 역시 외계인이나 혼종인류와 함께 쓸어버려 마땅한 적에 불과했다.
그 유대인들이 주류가 되어 이끌어가는 나라가 지금 기축통화를 꽉 쥐고 있는, 세계 경제력 1위에 군사력 1위를 자랑하는 카테스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거대한 적, ‘종족적 오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적!
다른 모두가 파시스트들의 범죄를 비판할 때, 그는 그것을 보고 ‘우리도 하자!’는 축에 속했다. 그쯤 범혁은 정치관의 차이로 자신의 아버지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으레 아들이 독립투쟁에 투신하면 좋겠다는 뜻을 담아 김범혁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파시즘에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으니 갈등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아들아, 요즘에 이상한 책을 읽고 다니는 것 같던데...”
“아버지! 이상한 책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위대한 사상가의 역작을 그렇게 폄하하시면 안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말리거나 말거나, 루시드 제국과의 무역선을 통해 가끔 들어오고는 하는 무장친위대 제복을 어떻게 구해서 입고 다니며 파시즘 서적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들거든, 더더욱 그런 행동에 빠져들었다.
범혁은 15살 답지 않게 키가 190cm나 되는 거구에다가 환상적인 8등신에 황인종하면 보통 떠올리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피부가 백옥처럼 훤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던지라, 그러한 제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런 미남이 마을 광장에 마련된 즉석 단상 위에 올라서서 연설 놀이를 펼친다면?
“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뭐. 너는 우리보다 똑똑하잖아?”
“우리는 우리 이름도 쓸 줄 모르는데... 너는 어디서 뭘 어떻게 배워왔길래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거냐?”
천재성과 뛰어난 용모까지 갖춘 그가 파시즘에 관해 떠들고 다니면 이 일대의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박수를 쳐주기까지 했다. 패전국이라는 특수한 정치 환경 속에서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극단주의가 판을 치기 좋았으니만큼,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추종자를 끌어모아서 소동을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단지 조그마한 마을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바였던가? 범혁은 그보다는 훨씬 더 큰물에 나가 놀고 싶었다. 처절한 패전을 맛본 ‘카이저’의 제국을 대신하여 ‘퓌러’가 통치하는 새로운 제국 건설할 수 있다면 좋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우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세계인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마음 같아서는 지난날 파시스트들이 그러했듯이- 검은 셔츠단의 행진이라든지, 뮌헨 의거라든지- 나 또한 나만의 셔츠단을 이끌고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지구에 파시스트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을 꽂고 싶지만... 겨우 이 정도의 초능력을 가지고 설치다 보면 오래지 않아 수배되고 체포당하거나 사살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주는 넓고, 따라서 나보다도 강력한 초능력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이 힘이 우주 전체로 보면 얼마나 희귀한지,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만큼은 내 장담할 수 있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세간의 편견과는 다르게 초능력자들은 그 자신이 가진 초능력의 세기가 아무리 세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보다도 뛰어난 두뇌를 통해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기척을 감출 수 있었다.
사실 그가 초능력의 기척을 숨기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워낙에 특이한 옷차림과 용모, 연설 놀이 때문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만, 15살에 190cm의 떡대를 자랑하는 그에게 그 문제를 걸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여태까지 어디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거냐. 이제는 밥만 먹고 바로 또 다른 곳에 가보겠다고? 내가 네 이름을 지을 적에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지었는지...”
“제가 혁명가가 된다면, 혁명에 맞선 혁명가로서일 것입니다.”
아버지를 향해 그러한 냉소를 지어 보이고 집을 나온 범혁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은 연설 놀이를 하루 쉬고 다가올 새로운 전쟁에 도움이 될 만한 병기를 설계해보기로 했다.
우선 ‘스캐퍼플로우’에서 제국의 전투함대가 자침을 결정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전투함대의 재건은 당연히 급선무가 된다. 크고 아름다운 전함들을 설계해보자. 극소수의 초능력자들이 이런 크고 아름다운 전함조차 종이 자르듯 잘라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함선의 쓸모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
지난 대전쟁 당시에 집단 자침을 선택한 우주함대를 빼고 생각하더라도, 아틀란티스 국방군이 지난 전쟁 때 입은 피해는 너무나도 크다. 그러니 쓸 만한 폭격기, 전투기, 수송선, 전차, 레이저건 따위의 물건들도 설계해보자.
‘나의 투쟁’의 저자는,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이끈다면, 저항은 모든 시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루시드 제국’이라는 ‘국가’가 ‘아틀란티스 인’이라는 ‘민중’을 ‘폐허’로 이끌고 있으니, 내가 그토록 추종해 마다치 않는 저자의 말을 실천에 옮기려면 아주 많은 무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만 단위, 억 단위가 아니라 조 단위의 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 많으면서, 통일성마저 갖춘 무기가. 끄응, 그러면 무기 자체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생산설비와 공장을 설계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생각해봐야겠네.
그는 이곳저곳을 오가며 여러 가지 무기를 설계하고 자신이 설계한 무기를 바탕으로 전술과 전략을 수립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슈퍼컴퓨터 부럽지 않은 두뇌를 하드웨어삼아 워게임을 해보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대부분의 땅이 방사능에 찌들어 농사조차 지을 수 없게 된 지구에서는 별달리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범혁의 아버지는 매일 같이 어디 나가서 한참이나 뭔가를 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서,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에휴...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이제 너도 너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내가 더 간섭할 나이는 아니지.”
“아버지! 드디어 저를 인정해 주셨군요!”
“인정은 뭐... 아비가 아들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지지해준단 말이더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파시즘에 빠져드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아틀란티스 제국의 독립을 되찾는다는 목표만큼은 세운 것으로 보고 결국 아들을 인정해주었다. 어디로 가나 길은 독립으로 통하니까, 상관없겠지.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완전히 인정해주었다는 생각에 벅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그전보다 더더욱 열렬하게 파시즘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우리 아틀란티스 제국이 과거의 G1 지위를 회복하고, 사악한 유대-볼셰비즘을 섬멸하는 ‘반공 십자군’의 일원으로서 환대받을 수 있기를, 범혁은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야야, 쟤는 군인도 아니면서 왜 군복 비스무리한 걸 입고 다니는 거냐?”
“몰라, 나도. 전에 한 번 물어봤는데...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
“그렇게 똑똑하던 놈이 갑자기 뭔가에 미쳐서는...”
범혁의 몇몇 친구들은 군인이나 공학자도 아니면서 무기 설계에 심취하고, 정치가도 아니면서 연설을 하고 다니는 그의 뒤통수에다가 대고 뒷담화를 하기를, 그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다들 범혁이 정확히 뭔가에 빠져들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저 얼굴이랑 머리로 왜 그런 거에 빠져 들었대’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의 떡대에 겁을 집어먹은 이들은 그런 식으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해댈 뿐, 앞에서 뭐라 대들 용기 같은 것은 없었다.
“왜 범혁이 보고 그런 소리들을 하는 거야! 쟤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래!”
“너희는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왜 그렇게 말이 많은 거야? 범혁이처럼 미적분이니 뭐니 하는 걸 알기는 해?”
“아니 뭐... 나쁜 의도로 한 건 아니고... 야, 튀자!”
범혁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그렇게 뒷담화를 까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범혁의 용모와 천재성에 홀라당 넘어간 이들이 끼어들어 범혁을 변호해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면 뒷담을 까던 이들이 옹호파의 숫자에 밀려 금방 깨갱하고 물러서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어느덧 마을 전체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었,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그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갔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지루한 시간도 달래고 울적함도 덜어낼 겸, 범혁의 연설 놀이에 점점 많이 참여해주면서, 범혁 역시 살아가는 의미를 그에서 찾게 되었다. 아틀란티스 파시즘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심장으로부터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