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1화 (57/225)



〈 57화 〉낮은 돌무더기의 사나이: 1화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는 결국 자유 민주주의를 가장한 자본-제국주의를 굴복시키고 전체주의의 승리를 끌어냈지만, 과거 찬란했던 문명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서 다만 몇몇 도시만이 겨우 살아남았을 뿐, 주변을 둘러봐도 낮은 돌무더기밖에는 보이지 않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나이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래, 적절한 사상이 그에게 녹아들어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아틀란티스 제국이 처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패배주의, 비관주의, 허무주의에 젖어들기에 충분했지만,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나 파시즘과 같은 극단주의가 널리 퍼져나가기에도  좋은 환경이라 할  있었다.


하루 1센트도 채 되지 않는 임금. 90%가 넘어가는 세금. 16세부터 64세까지의 모든 남성을 징집한다고 하지만, 높으신 귀족분들은 ‘예외’로 두는 국민개병제. 군인에 대한 혜택 전무. 백골징포, 황구첨정. 4대 보험이나 휴일 같은 노동자 복지는 꿈도  수 없음. 고위층에 만연한 부정부패.

이러한 것들은 공산주의에는 최적의 환경이 아닐 수 없었고, 그리하여 정작 오늘날 아틀란티스에서 벌어지는  루시드 저항운동의 최대 지원국인 카테스 제국은 자본주의 국가였음에도 저항운동 세력 내부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황태자로서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서 저항운동에 뛰어든, 아틀라인 1세 서기장의 ‘아틀란티스 인민당’과 이로 대표되는 ‘아틀란티스 인민정부’, 그리고 해외 공산주의-스탈린주의-와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하는 ‘아틀란티스 공산당’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실 가는 데 바늘 가는 법이라고, 공산주의가 그들의 나라 안에서 위협적으로 세력을 뻗어 나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좀 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빨갱이들을 때려잡자! 반공 자유 아틀란티스를 수호하자!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남의(藍衣)를 입고 민중 속으로 녹아들어 가자!

이 나라에 식민 통치 체제를 성립시킨 루시드 제국을 상대로 베트남전과도 같은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 공산주의 세력과는 다르게 아직 이들 파시즘 단체의 세력은 미미하다 할 수 있었지만, 언제고  불씨가 들러붙는다면 대화재로 커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파시즘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아무런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은, 하얀색 종이와도 같은 사나이가 하나 있었다. 만일 그에게 적절한 사상만 주입해준다면, 그는 바로 목숨을 건 반 루시드 저항운동에 투신하게 되리라.

이 남자, 김범혁(金凡革). 아틀란티스 제국에서는 변방에 속하는 서울에서, 소수민족에 해당한다 할  있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띄고 태어난 남자.


이와 같은 남자가 하인리히 힘러처럼 수많은 생명을 단지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할 수 있으면서도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같은 선전선동 능력을 갖추고, 그러면서 에르빈 롬멜이나 발터 모델처럼 뛰어난 전략적 재능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천재성마저 겸비하였으면서도 알베르트 슈페어처럼 행정에도 능하며 그들 모두에게 없었던 초능력- 그것도 아주 막강한-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우주는 우리 우주 하나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인류는 그 드넓은 우주에 거미줄처럼 뻗쳐 나갔다. 그러니 개중에 하나쯤은 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모든 것을 갖추었으나 기구한 운명으로 루시드 제국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고만 아틀란티스에 태어난 사내, 어쩌면 세계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남길 수도 있는 사내, 김범혁은 자신의 이름을 남몰래 한자로 종이 위에 써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름의 뜻을 풀이해보자면 이렇게 된다: ‘범(凡)인, 즉,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혁(革)명의 뜻을 잃지 말아라.’ 오늘날 아틀란티스가 처한 현실을 살펴보면 이 ‘혁명’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독립투쟁이요, 곧 평범한 사람들 속에 묻혀 살아가면서도 뜻을 잃지 말고 투쟁하여 영웅이 되라는 의미의 이름임이 틀림없었다.


혁명에 독립투쟁...  좋은데... 나는 이 나라의 주류 인종인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이다. ‘유색인종’ 따위가 하는 말을 누가 귀담아들어나 줄지 모르겠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이쪽이 내미는 손을 잡아줄지도 모르겠지만...

한민족...뿐만 아니라 황인종, 흑인종으로 대표되는 소위 ‘비주류 인종’이 괴뢰 아틀란티스 제국 영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원래부터 이른바 ‘유색인종’에 대한 이 나라의 대접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틀란티스 제국의 주류는 외계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인류’ 중에서도 순혈백인, 개중에서도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나고 자란 ‘아틀레노스 민족’뿐이었고, 한민족은 그저 수많은 황인종 중의 하나로서 그 전체가 중국의 조선족과 같은 취급을 받는 소수민족에 속했다.

그리고 그는 나라가 타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였다.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던 대접은 더더욱 안 좋아졌고, 소수민족 출신 평민 따위에게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대학 입학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주 지랄들이로군. 결국은 다 똑같은 사람인데, 인종별로, 민족별로 격리하는 정책을 수천 년씩이나 유지해오다니. 그럴 행정력을 개혁에 쏟아부었더라면 지금쯤 이 꼴은 나지 않았겠지.”

돈도 없고, 신분도 천하여 비록 대학에는 가지 못한 처지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나름 먹물을 좀 먹었던 범혁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의 조국을 기꺼이 비웃어주었다. 그의 말에는 일견 타당한 점이 있었다.

아니, 외계인들로 둘러싸인 마당에  같은 인류끼리 사이좋게 지내면 어디가 덧나나? 그러지 않아도 외계인들이 드글 대는 세상에 또 민족, 인종별로 갈라져 반복하고 지내야만 하나? 범혁은 오래전부터 이것이 불만이었다. 태어나고 보니 나라는 이미 식민지가 되어있지, 그 와중에 사람들은 힘을 합치지 않고 나뉘어서 반목하고 있지...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개인’이 하나의 ‘전체’가 되어 루시드 제국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더라도 모자랄 판인데, 쓸모없는 분리주의와 갈등에 여력을 소모해가며 제 살을 깎아 먹어 가는 꼴이라니, 이보다 웃긴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독립투쟁에 몸을 담고 싶어도 컬러드 따위의 말을 누가 들어 주느냐, 이 말이지. 지나가던 백인들이 다 비웃겠다.”

범혁은 자신의 이름을 쓴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내던져 버렸다. 어쩌면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르겠지만, 조 단위의 대병력이 맞부딪히는 전장에서 한 줌의 소수민족이 추가되어봐야 변하는 것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아무도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판단 외에도 그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의 값을 해내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건... ‘혁명’이라는 단어가 지닌 문제였다. 혁명... 좌익 냄새가 지나치게 풍기지 않는가? 정치에 관한  아직 정답이 무엇인지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는 그저 붉은 냄새가 풍기는 것이라 하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혁명... 아버지께서는 나 보고 빨갱이가 되라고 말하는 것인가? 폴란드 인들을 카틴 행성계에서 일방적으로 학살해버린 다음 묻어버리고, 고의적으로 대기근을 유발하여 수백억 명의 우크라이나 인을 굶겨 죽인 스탈린주의를  보고 추종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 말을 절대로 따를 수 없었다. 아무튼, 공산주의는 싫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무엇이 정답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차라리 답이 명쾌했던 학교 시험문제가 그에게는 더 나았다. 하지만 답이 딱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이러한 문제 앞에서는 그의 천재성도 별 소용이 없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보고서 고등학교 3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난이도로 50페이지 분량의  풀잇법을 창안하고, 슈퍼컴퓨터로도  달은 걸릴 계산을 1분 만에 해치우며, 인류 역사상의 수많은 천재가 풀지 못한 우주의 비밀들을 손쉽게 밝혀내는 머리로도 정치에 있어서는 무엇이 정답인지 분간해낼  없었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으므로 정답을 찾지 못하고 미로에서 헤매게 되는지도 몰랐다. 하기는 초등학교는커녕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들이 열에 아홉은 되는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진작 졸업하고 15살에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아있는 사람부터가 희귀한 생물이기는 하지만...

“어, 또 범혁이냐? 너는 학교도 진작 졸업했으면서  맨날 학교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는 거냐?”


“뭐... 그거 말고는 딱히  것도 없기도 하고요.”

사서 선생이 그에게 친한 척을 했지만, 범혁은 그저 밍밍하게 받아쳤다. 아닌 말로, 융단 핵 폭격으로 ‘낮은 돌무더기’가 되어버린 지구에서 할 일을 찾을 수나 있겠는가? 일자리도, 먹거리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가 내일의 희망을 꿈꾸지 못하고 그저 절망 속에서 살아갈 뿐이었다.


“너 말고 다른 애들은 할 거 없다고 도서관에 찾아와서 책을 읽는다던가 하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일없다고 약탈이나 하고 다니는  제 취미가 아니라서 말이죠.”


그것이 범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거리가 없다고 남의 것이나 빼앗고 다니면서 의적을 자칭하는 자들은 너무나도 하찮은 자들이었다. 범혁은 그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일을 해내고 싶었기에, 그런 자들이 자기네에게 끼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정처 없이 걸으며 ‘정답’이 과연 무엇인지를 찾던 중의 일이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서 자신이 졸업했던 고등학교의 도서관-그곳에 꽂혀 있던 책은 이미 다 한 번씩은 읽어보았다만-을 방문해보았다. 신간코너에서 쓸 만한 책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흠... 역시 없는 건가. 잠깐... 이 책은...?


“나의... 투쟁...? 저자는... 아돌프... 히틀러...?  책은 뭐지?”

역시나 볼 만한 책은 없구나 하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 ‘나의 투쟁’이라는 제목의 책이 그의 시선을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그것은 ‘정답’을 찾아서 헤매던 범혁의 앞으로의 인생 전체를 뒤바꿔놓은 운명의 순간이었다.

범혁은 뭔가에 홀리듯이 ‘나의 투쟁’을 대출하였고,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번이나 읽어본 다음 반납하고 나서는, 발품을 팔아서 어떻게든 소장용 책과 독서용 책을  권씩- 그것도 따끈따끈한 최신 개정판으로- 사서 그것을 또다시 탐독하였다. 그는 그렇게 충실한 국가사회주의자-나치-가 되어갔다.


어느덧 ‘나의 투쟁’ 한국어판을 100번 넘게 읽어보면서 그것을 분석한 글을 집필하기에 이른 범혁은 역시 유명한 파시스트로 전 세계에 알려진 일-두체의 ‘나의 자서전’을 읽을 적에도 그렇게 했다.


이후에는 밥도 먹지 않고 독서에 골몰하여, 파시스트들의 서적을 모조리 수집하여 읽어보는가 하면 번역본으로는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없다며 원어를 배워 원어 판을 읽어보고, 한국어판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어판도 수집하여 또다시 읽어보고, ‘나의 투쟁’ 같은 경우는 아예 그 자신이 직접 옛 고대 인류가 쓰던 상고 그림문자나 외계인의 문자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천재가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사상에 빠져드니, 그 열의는 가히 대단했다. 그는 작금의 혼란을 멈추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방법으로 파시즘을 선택했고, 이른바 ‘유대-볼셰비즘’이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전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막연한 불쾌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왜 그것을 증오해야 하는지, 왜 그것이 전 우주에서 말살되어야만 하는 사상인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래,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보다는 이유를 대면서 미워하는 쪽이  품격이 있지.


“아 시발, 또 유대인놈들이 여기에 돌을 묻어놨네. ‘배후로부터의 중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그는 길 가다 넘어져도 이게  유대인들 내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며 욕설을 퍼붓기에 바빴다. 이제  자신에게 걸맞은 사상을 찾아낸 그가 생각하기로, 그의 조국이 남의 식민지가 된 것도, 그가 지금까지 ‘낮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살아왔던 것도  유대인들의 음모였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천재로서 살아온 삶의 족적은 그가 그 자기 생각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총통’은 절대 무오류의 존재로 우뚝 섰고, 그 자신은 국가사회주의의 충실한 첨병으로 만들었다.

“오, 범혁이 아니냐? 오랜만... 그런데 그 제복은 뭐냐?”

“아, 별  아니야. 내가 직접 만들어 입어봤어.”

“그런 건 군인 아저씨들이나 입는 거 아니야? 너... 군대에 가려고?”

“군대? 천만에. 외계인들이랑 혼종인류로 점철된 그따위 더러운 군대는 줘도 안 간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슈츠슈타펠 무장 친위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조직 특유의 검은색 제복을 어떻게 구해서 입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복 착용이 입대를 희망한다는 의사의 표현은 아니다.


피식, 어디서 개가 짖는 건가?  보고 그따위 오합지졸에 한 몫 끼라는 거야, 뭐야?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종족적으로 심각하게 오염된 데다 식민지 군대로 전락한 현재의 아틀란티스 국방군은, 범혁이 생각하기에는 그 자신이 몸을 담기에 적합한 조직이 아니었다. 내가 일전에 같은 인류끼리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지만... 아닌 말로 외계인이랑 혼종인류가 노예지, 그러면 말할 줄 아는 지성체인가?

‘종족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지니! 그는 언젠가 혼종인류나 외계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순수 인류’만의 군대를 창건하여 지휘하기를 갈망하며 또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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