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는 온갖 불상사들이 벌어졌던 장소에 가득 차 있는 침묵을 바라보며 파비안을 떠올렸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었다. 그는 저에게 죽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사라진 것이었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가 그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누군가가 신겨준 새 운동화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광장에 서 있던 별하는 문득 한 곳을 상기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로 밀림을 가로지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은 작은 가능성도 놓칠 수 없었다.
별하는 탐색1팀과 함께 곧바로 움직였다. 백색 강과 싱크홀이 난 절벽, 침엽수의 숲을 지나 철옹성 같은 절벽길을 되짚었다. 돌바위 사이의 낯설지 않은 동굴 앞에 다다랐을 때까지도 의구심을 갖던 별하는 동굴의 어둠 속에 발을 딛는 순간, 알아차렸다.
그는 희미한 불빛도 들지 않는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려 들어갔다.
“파비안!!”
언젠가 둘이 함께 뒹굴었던 두툼한 이끼 위에 그가 누워 있었다. 뒤따르던 사람들의 플래시 불빛이 동굴 안쪽을 어지럽게 비췄다. 새빨간 셔츠로 복부의 상처를 막은 파비안은 죽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별하는 황급히 그의 생사부터 확인했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 파비안. 파비안…….”
미약하지만 가느다란 숨결을 느낀 순간 별하는 오랜 시간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파비안은 수시간에 걸쳐 해변으로 옮겨졌다. 그는 어떻게 목숨은 붙어 있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위독한 상태였다. 임시 거처에서 응급처치와 수혈을 받은 후 급히 육지의 병원으로 이송을 준비했다.
두두두두― 헬리콥터의 커다란 프로펠러가 돌아갔다. 적도 섬의 무성한 파초와 야자수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별하는 인공호흡기를 단 파비안의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크고 작은 상처들로 뒤덮인 파비안의 새하얀 손을 감싸 쥔 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떨어진 사이 그 역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줘서 감사하고 또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 생명을 몇 번이고 구해줬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웠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두두두― 모래 위에 안착해 있던 헬리콥터의 몸체가 번뜩 떠올랐다. 중력을 거슬러 위로 떠오르는 그 때, 별하의 손 안에 들어와 있던 흰 손이 움찔거렸다.
“파비안?!”
별하는 얼른 파비안에게 몸을 붙여 다가갔다. 오래도록 감겨 있던 눈꺼풀이 곧 느릿하게 열렸다. 유리구슬보다 맑은 오드아이가 환한 햇살에 비쳐 반짝거렸다.
“별, 하……?”
별하는 파비안의 손등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파비안,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파비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힘을 넣어 별하의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그 때 별안간 별하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파비안이 의아한 듯 응시하는데 다시금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저 안쪽에서부터 솟구치는 구역감이었다.
“웁―”
별하는 얼른 제 입을 막았지만 다음번의 구역감도 참지 못하고 곧바로 헛구역질을 이었다.
“우웁―”
별하와 파비안의 눈길이 일시에 밀착했다. 별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침을 거르고 급히 먹은 점심이 체한 것일지도 몰랐다. 파비안의 안위에 안심한 나머지 몸이 그제야 피로감을 느끼고 이상 반응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하 스스로,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제 안이 변화하고 있음을.
흐릿하게 미소 짓는 파비안을 바라보던 별하는 바람이 불어 드는 옆을 돌아보았다.
헬리콥터의 저 먼 너머로 적도의 섬이 내려다보였다. 보석 같은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워갔다.
그 모습을 말끄러미 응시하는 그 때, 해변의 야자수 가지에 앉아 있던 새파란 무언가가 이윽고 힘찬 날갯짓을 하며 녹음 속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별하의 눈가가 어렴풋이 휘었다. 그는 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안녕, 블루칩.
안녕, 빌어먹을 적도의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