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하는 두 눈을 부릅뜨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미미하게 빛이 드는 강가 주변의 숲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비린내와 젖은 땅냄새, 젖은 나무냄새, 여러 수풀냄새에다가 습기를 머금은 공기 때문에 알파의 페로몬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먼 거리에서 지켜 보고 있다가 화살을 날린 것인지도 몰랐다.
두두는 손아귀에 움켜쥔 것을 단번에 콰직 부러뜨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단히 성이 난 듯했다.
“두우―! 두우―! 두우―!”
두두는 캄캄한 숲에 몸을 숨긴 상대를 위협하듯 괴성을 내지르다 말고 별하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윽!”
끌려가는 순간 정반대 방면에서 날아든 화살이 별하가 서 있던 자리를 관통했다. 일순 중심을 잃은 별하는 크게 휘청이며 두두에게 몸을 기댔다. 그 바람에 품에 안겨 있던 블루칩이 튕겨져 나가 모래바닥에 처박혔다.
“읏, 블루칩……!”
흰 모래알갱이를 뒤집어쓴 작은 짐승을 어서 주우려는데 두두가 별하의 팔을 붙들어 저지했다.
“두두! 두두!”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억세게 잡아당겼다. 슈우욱― 뒤편에서 날아온 화살이 별하의 옆 나무기둥에 퍽 박혔다.
별하는 어금니를 물었다. 다음에 날아올 화살이 제 몸 어디를 꿰뚫을지 알 수 없었다. 두두에게 이끌려 깊은 숲으로 내달리면서도 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하얀 무덤 위에 다소곳이 누운 듯한 새파란 짐승을 눈에 담으며 빈 주먹을 움켜쥐었다.
“미안…… 미안해, 블루칩…….”
별하는 뜨끈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앞을 내다보았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몇 번이나 몸을 던져 저를 도와준 친구를 잃었지만 애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살기를 묻힌 기척이 이곳저곳에서 날아들었다. 그가 알파의 페로몬을 느끼자마자 가까운 곳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으읏.”
별하는 목덜미에서 불에 데인 듯한 통증을 번쩍 느꼈다. 급히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진득한 체액이 느껴졌지만 살짝 베인 정도였다.
별하와 두두는 검은 인영들이 발을 들이지 않던 미지의 구역을 거의 목전에 두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교목들 사이를 지나는데 돌연 두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어둑한 앞을 빤히 직시했다. 어둠 너머의 어떤 형상을 마주한 듯이.
“하아…… 하아…….”
두 무릎을 짚은 별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옆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곧 몸을 똑바로 세우고 두두와 같은 곳을 내다보았다. 깊은 밤이었고 날씨마저 나빠 가시거리가 극히 짧았지만 별하도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앞쪽에 무엇인가 있었다.
102.
강에서 급작스럽게 날아들던 화살도 그렇고, 그들은 도망자들이 이쪽으로 올 것을 앞서 예측한 듯했다. 숲 여기저기에서 음습한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막무가내로 덮쳐들지는 않았으나 뒤쫓는 목표물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 살기와 흥분감으로 뒤섞인 눈초리들이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전해졌다. 땀에 절인 비릿한 체취까지.
별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화살이 또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화살이 아니라 창이나 돌칼이 날아와 심장에 박힐 수도 있었다.
“하아……. 빌어먹을…….”
두두는 앞쪽을 향해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얼른 별하의 손을 잡고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가려던 방향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그야말로 온 사방에서 알파들의 페로몬이 진동했다. 두두는 차츰 이쪽으로 영역을 좁혀 오는 인기척을 향해 포효하듯 고함을 쳤다.
“두우우―! 두우우―!”
그러자 캄캄한 숲 안쪽에서도 외마디 괴성들이 터졌다. 포악한 맹수들이 맞붙기 전 기싸움을 하며 내는 울음소리 같았다. 지금의 사정을 몰랐다면 정말 들리는 대로 믿게 될 정도였다.
별하는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화살을 피해 커다란 교목을 등졌다. 곧 두두의 앞으로 길쭉한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의 가면을 쓴 알파들이었다. 희뿌연 달빛 아래 선 알파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별하와 두두를 빙 둘렀다. 사이사이 베타들도 속해 있었는데 전에 없던 살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우! 두우!”
알파들은 흥분 상태의 두두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저들만의 세상에 파묻힌 족속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늑대들이 사는 사화산에는 오로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오늘날에도 꾸역꾸역 산을 오르고 있었다. 왕의 손가락질에 멀쩡한 사람이 살고 죽던 옛날처럼.
그 말인즉슨 하이 알파의 페로몬을 견뎌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정신적 지주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그들의 곁에.
쿵― 바닥이 울리자 원주민들이 길을 만들었다. 넓게 트인 공간으로 누군가가 걸어들어 왔다. 긴 로브 망토를 두른 족장이었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쿵쿵쿵 내리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니쟈다어이라허아! 인니다비바으가!”
숲을 울리는 큰 목청으로 호통치듯 쏘아붙였다. 그에 두두는 발끈해서 족장의 말이 끝나기 전에 목에 핏대를 세웠다.
“두! 두! 일댜니아르대라아!”
감정을 그대로 실은 대화들이 몇 번을 거칠게 오갔다. 별하는 그들의 대화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야밤에 벌이는 논쟁의 중심이 무엇인지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저를 두고 대립한 두두와 족장 무리를 보며 속으로 거친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하아…… 하아……. 비, 빌어먹을 식인종 새끼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군. 하아……. 이럴 거면서 왜, 왜 그딴 개고생을……. 개새끼들…….”
두두가 다시 윽박지르자 가면 속에 숨은 알파들의 누런 눈동자가 족장에게로 향했다. 족장은 독을 품은 듯한 눈으로 지팡이를 높이 들어 땅으로 내리쳤다. 쿠웅―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번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나뭇가지에 검고 둥그스름한 열매들이 매달려 있었다. 열매라고 하기에는 몹시 거대한 기형의 물체에게 의아함을 느낀 순간, 머리 바로 위의 검은 형체가 꿈틀거렸다.
“―?”
검은 형체는 어둠 속에 숨기고 있던 긴 팔다리를 펼쳐 곧바로 별하의 위를 덮쳐들었다. 손에 움켜쥔 돌칼이 어둠 속에서도 번들거렸다.
“뭐, 뭐야!”
별하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려 검은 인영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별하에게 턱없이 불리했다. 파비안이 쥐여준 창은 언제 손에서 빠져나갔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시야 역시 최악이었다. 주위를 에워싼 알파들의 역한 페로몬과 오롯이 한 사람을 향한 살기는 상상 그 이상으로 위압적이었다. 사지에 쇠사슬이라도 매달린 듯 마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크윽…….”
별하는 이를 갈았다. 돌칼을 겨누며 다가오는 검은 인영의 위협에 멈칫멈칫 물러나는데, 두두가 그 사이로 길게 손을 뻗었다. 움직이는 올가미처럼 검은 인영의 목을 단숨에 움켜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두! 두!”
이제 외팔이 되어버린 두두였지만 그럼에도 보통의 알파들은 접근조차 쉽지 않은 강한 기백이 여전히 넘쳐흘렀다.
별하는 숨을 얕게 몰아쉬었다. 목숨이 달린 위급한 상황 때문일까? 하이 알파의 강한 페로몬에 약간의 동요는 일었으나 예전과 같은 혼미한 증상이 더는 없었다. 그는 턱끝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바쁘게 움직였다.
몹시 분노한 두두는 곧장 검은 인영의 목을 부러뜨릴 기세였다. 일족이든 뭐든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마치 제 아비의 부당하고 비열한 행동에 대한 아들의 심판 같았다. 우승자를 죽여 숭고한 축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데 대한 벌. 이번 승부에 하이 알파의 자긍심을 걸었던 제 입장과 의견을 무시하는 처사라 생각해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인생 게임을 함께하며 생겨난 전우애도 조금은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두! 두!”
“크허, 어억…….”
두두의 두툼한 손아귀가 검은 인영의 목뼈를 부러뜨리기 직전, 머리 위에서 다른 그림자들이 재빠르게 뛰어내려 그를 와락 덮쳤다. 두두의 어깨 위에 올라타거나 다리를 붙잡아 넘어뜨리려 달려들었다.
그 찰나, 별하는 뒤섞인 그림자들 사이로 두두와 눈길이 마주쳤다. 다른 알파들과는 달리 누르스름하지 않고 깨끗한 동공을 지닌 두두의 그것은 지금 한 가지만을 말하고 있었다. 도망. 기회를 봐서 도망가라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별하는 눈도 깜짝이지 않고 그를 직시했다. 덮쳐드는 알파들에 떠밀려 검은 인영을 손에서 놓친 두두는 건장한 몸을 흔들며 저항했다. 알파들이 그를 저지하느라 상처 부위를 건드려 핏물이 배어 나와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제 등에 올라탄 녀석을 우악하게 앞으로 끄집어내려 단박에 주먹으로 내리쳤다.
뒤집어쓴 가면이 박살 날 정도의 위력으로 머리통을 맞은 알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차례차례 바닥에 널브러지는 녀석들 다음으로 다른 알파들이 줄줄이 두두와 대치했다. 그에 단단하게 에워싸고 있던 포위진이 느슨해졌다. 별하는 숨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다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우! 두우!”
두두가 거칠게 몸을 뒤흔들며 호승심에 불이 붙은 알파들의 시선을 잡아끌 때, 별하는 황급히 근처 숲을 향해 돌아섰다. 우거진 수풀로 발을 내딛는 찰나였다. 캄캄한 숲 안쪽에서 후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기척이 날아왔다.
“윽―”
별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어붙은 목울대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것은 창날이었다.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영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늑대 가면 대신에 얼굴을 검게 칠한 원주민이었다.
검은 분장에도 숨길 수 없는 앳된 느낌의 원주민 옆으로 다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에서 봤던 오메가들보다는 조금 어린 듯했고, 화살을 쏘던 알파 녀석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로 돌아가라며 경고하고 있었다.
“…….”
별하는 얕은 숨을 내뱉으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들은 짐승처럼 페로몬을 분출하는 알파가 아니었다. 저와 같은 오메가들이었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하는 오메가들.
그들은 묶여 있지 않았고, 억압당해 기죽은 모습도 아니었다. 창을 움켜쥔 자세나 표정에서 알파 못지않은 기개가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출현에 당황한 별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진, 정해…….”
오메가들은 별하의 얼굴과 저들을 향한 흰 손바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가운데서 매서운 눈길을 보내던 오메가 하나가 다짜고짜 손바닥을 창으로 찔렀다.
“―!”
별하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창끝이 살짝 비켜 간 손가락 사이로 끈적한 물기가 느껴졌다. 오메가들은 피냄새에 흥분한 듯 아직 변성기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목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뒤쪽 알파들의 이목이 곧장 이쪽으로 향했다.
“제기랄.”
별하는 목전의 오메가들을 피해 숲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속속 형체를 드러내는 또 다른 오메가들에 앞을 가로막혔다. 다급히 도망갈 경로를 찾는 별하의 바로 뒤에서 쿵― 땅이 진동하는 듯한 기척이 일었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일순 별하는 깎아지른 절벽에서 굴러떨어질 때와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생에서 죽음의 기로로 넘어가야 할 때의 딱 그 기분이었다.
그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족장이 등 뒤에서 서 있었다. 혼탁한 눈알을 부릅뜨고서 당장 그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
검은 인영들과 알파들에 붙잡힌 두두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거친 난투에 다시 터진 듯 온통 피범벅이었다. 아직도 의식을 잃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족장은 별하에게 두 눈을 꽂은 채 지팡이를 쿵 내리쳤다.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쿵쿵쿵 연달아 감사납게 내리쳤다.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무리 속에서 검은 인영이 걸어 나왔다. 낯설지 않은 외형의 돌칼을 허리에서 꺼내 드는 검은 인영은 두두의 핏물에 몸뚱이가 번들거렸다.
“하아…… 하아…….”
별하는 흐트러진 숨만 겨우 불어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전에 눈앞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다. 검은 인영이 든 저 뭉툭한 돌칼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를.
103.
저들은 바로 이곳에서 오메가인 별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별하는 족장과 검은 인영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발뒤꿈치가 어딘가에 걸려 뒤를 홱 돌아보았다. 또 다른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고개를 젖혀야 검은 눈동자가 보이는 인영은 역시나 먹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분장이 손에 익지 않았는지 목덜미와 겨드랑이 쪽에 누른 살갗이 보였다. 오늘 처음 해본 것일 수도 있었다. 별하는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인영과 눈을 맞댔다.
“…….”
“…….”
검은 인영은 제 앞에서 도망가는 별하를 먹이를 낚아채듯 붙들었다. 양쪽 팔을 뒤로 돌려 잡아 강한 힘으로 억눌렀다.
“으윽, 그…….”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에 신음하는 별하의 앞으로 진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뭉툭한 돌칼을 든 검은 인영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별하는 붙잡힌 팔과 통증이 이는 어깨를 뒤틀며 저항했다. 방심한 듯 억압하는 악력이 느슨해진 찰나를 놓치지 않고 온 힘으로 몸을 들썩였다. 그러자 창을 든 오메가들이 서둘러 다가와 검은 인영을 거들었다.
“안, 그만……. 개 같은……!”
영어도 아닌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별하는 두 주먹을 불끈 그러쥐고서 거칠게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알파를 포함한 여러 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아아…… 하아아…….”
별하는 이내 저항을 멈췄다. 숨을 크게 할딱이며 제 앞에 선 검은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의 검은 형체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게걸스럽게 생명을 거둬들이는 사신이었다.
피칠갑한 두두가 난폭한 괴성을 지르며 제게 달라붙은 알파들을 끄집어 내렸다. 그것도 잠시, 계속해 달려드는 놈들의 위세에 금세 기력을 잃고 두 무릎을 꿇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이 곧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벼, 라…….”
무표정의 저승사자는 뭉툭한 돌칼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대로 새카만 공기를 갈라 내리치면 끝이었다. 모든 게 끝날 수 있었다.
“하아…….”
별하는 허공에 뜬 돌칼을 올려다보았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기 직전 찰나의 순간, 이곳에 온 후 겪은 수많은 생명의 위협들을 떠올렸다. 폭풍우에 휘말려 익사할 뻔하고, 산 채로 미라가 되는 게 아닐까 할 정도의 극심한 갈증으로 갈사할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알 수 없는 벌레에 물려 생사를 오간 적도 있었다.
원주민들에게 끌려와 한 그릇 저녁거리가 될 뻔했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금방 또 다른 시련에 부딪혔다. 늑대의 전리품을 갖기 위해 사화산을 오르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기억은 아직도 몇 시간 전 일처럼 생생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같은 위험을 겪으면서도 또 꾸역꾸역 헤쳐나왔다. 이제 드디어 지옥 같은 악운에서 벗어나는 건가 기대했는데, 마치 악운에 낙인이라도 찍힌 듯 다시금 생명의 위협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생명의 마지막을 느꼈다.
별하는 방금 막 어떤 감정을 깨우쳤다. 목숨이 날아갈 이 상황이 이상하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무딘 칼날이 제 목을 몇 번이나 내리칠 동안 받게 될 고통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도 감정의 동요가 생기지 않았다. 몇 번의 위기 속에서 불사하며 그에 관한 내성이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별하는 몸을 떨고 있었다. 지면을 딛고 선 두 다리가 눈에 띄게 바들바들 떨렸다. 분명 두려움을 느낀 육체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안위에 대한 감정 반응이 아니었다. 이 순간 별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제 안위보다 혼자 남게 될 파비안 블랙그레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마음을 주고받던 파트너가 기별도 없이 떠난 뒤 이곳에 홀로 남게 될 그의 고독과 비감들이 별하를 두렵게 했다. 소중한 사람과 헤어져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미래가 무엇보다 두려웠다.
찰나로 허공에 떠 있던 돌칼이 스산한 소음을 내며 불시에 어둠을 갈랐다. 별하는 희뿌옇게 달무리 진 밤하늘을 응시하며 짧게 읊조렸다.
“미안해, 파비안…….”
검은 그림자가 눈앞을 휙 스치며 눅진한 바람을 일으켰다. 별하는 어금니를 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목울대를 움직여 바짝 마른 목을 축였다. 뻑뻑해진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중에도 어쩐 일인지 목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
별하는 허공으로 향해 있던 눈을 아래로 내렸다. 무표정한 검은 인영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도 시커먼 몸뚱이는 이곳에 버려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물체가 별하의 발가락 끝에 툭 닿았다.
“……?”
별하는 그것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시커멨지만 무척 낯이 익은 구 형상과 주변의 부산한 기척, 발가락에 튄 뜨뜻무레한 액체의 질감에 그것이 사람의 머리통임을 알아차렸다. 눈앞에서 체액을 뿜어대는 검은 인영의 몸뚱이에서 잘려져 나온 것이었다. 단단한 목뼈를 무른 살코기 자르듯이.
“―!!”
별하는 돌연한 상황을 인지하고 번뜩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찾아 가시거리가 제로에 가까운 숲을 돌아보는 동시에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뒤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번졌다.
“커으윽―”
“큭!”
별하를 압박하던 검은 인영과 오메가들의 등에 화살들이 박혀 있었다. 근처의 알파 몇몇도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속수무책 꿰뚫렸다. 주변을 살피던 족장이 불현듯 지팡이를 번쩍 치들었다. 지팡이 상단에 화살이 퍽― 박혀 들었다. 족장은 눈을 희번덕이며 신경질적으로 괴성을 질렀다.
“크하아악!!”
그 때 숲 안쪽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별하! 이쪽으로―!”
은하수가 드리운 해변의 밤처럼 맑고 담백한 저음은 혼몽 중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를 깨달은 별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달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뒤쪽에서 두두의 외침이 들려왔다.
“두! 두! 두!”
마치 어서 멀리 도망가라며 응원을 보내는 것 같았다.
습격을 당한 알파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족장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격분에 찬 탁성을 내뱉었다. 그에 흩어져 있던 검은 인영들과 몇몇의 알파들이 일시에 어둠으로 녹아들어 도망자를 뒤쫓았다.
지팡이질을 멈춘 족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무릎을 꿇은 두두는 일어서지 못했다. 끊어질 듯한 미약한 숨만 겨우 불어내며 족장을 아슴푸레하게 쳐다보았다.
“하아……. 두, 두…….”
족장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곁으로 다가가지도 않았다. 실핏줄이 도드라진 가는 눈초리가 더없이 냉랭했다. 혈육이 죽어가는 이런 상황도 족장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 같지 않았다. 오로지 제 기대를 저버린 두두에 대한 원망밖에 없는 듯했다. 이방인들을 상대로 승부에서 지고, 제 뜻에까지 반기를 드는 혈육이라면 차라리 그대로 죽어 없어지라는 속내가 확연하게 전해졌다.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하지 않은 데에 감사하라는 듯 얼음장처럼 차갑게 휙 돌아섰다. 족장은 움켜잡은 지팡이를 손아귀에서 내던졌다. 걸치고 있던 긴 망토를 휙 벗어 던지고는 온갖 그림들로 뒤덮인 얼룩덜룩한 피부를 달빛 아래서 훤히 드러냈다.
그는 돌연 구부정한 몸뚱이를 움찔움찔 뒤틀었다. 우두둑우두둑― 돌처럼 굳은 육신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이내 등허리가 곧추섰다. 척추를 곧게 세운 족장은 파비안이나 두두의 신장에 뒤지지 않았다. 체격은 그들만큼 크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힘줄이 시커먼 피부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아우우우―!”
족장은 짐승처럼 고개를 쳐들고 괴성을 질렀다. 흡사 신비로운 거대 늑대를 동경하고 염원하다 결국 미쳐버린 괴인처럼 보였다. 그는 앞서 도망자를 추격하는 검은 인영들을 뒤쫓아 숲을 내달렸다. 지금까지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하게.
“하아……. 파비, 하아…….”
별하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나무 아래서 달음박질을 멈췄다. 뒤쪽에서 저를 쫓아오는 기척을 들으며 급히 사위를 돌아보았다. 그의 페로몬이 주변에서 짙게 풍기고 있었다.
“파비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누군가 옷자락을 건드는 기척을 느꼈다. 옆을 돌아보는 별하의 눈동자에 새카만 인영이 길게 드리웠다.
“윽.”
당황해 얼른 뒤로 물러서는 별하의 팔을 새카만 그림자는 부드러운 악력으로 움켜잡았다.
“……하.”
“파비안?!”
맞닿은 피부로 전해지는 체온이나 비린 누기를 타고 달콤하게 밀려드는 체향의 정체는 분명 그였다. 파비안. 검은 인영처럼 어둠에 파묻힌 파비안은 곧장 별하를 이끌며 낮게 외쳤다.
“어서 이쪽으로!”
별하는 파비안을 따라 깜깜한 숲을 달렸다. 발이 어딘가에 걸려 통증이 일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온 파비안의 존재만으로도 지금까지 모든 시름이 날아가는 듯했다. 별하는 앞서 어둠을 파헤치는 파비안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파비안도 강한 힘으로 별하의 손을 맞잡았다.
머리 위가 온통 수목으로 우거진 곳을 벗어나자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대기 중에서 엉겨 붙은 누기는 그 무게를 더 견디지 못하고 새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하아…… 하아…….”
별하는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쓸며 뒤를 돌아보았다. 적막을 깨우는 빗줄기에 작게 미동하는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와 근처 나무기둥에 퍽 박혔다.
“―!”
앞쪽에서 파비안의 저음이 날아들었다.
“괜찮아, 별하?”
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괜찮아. 넌?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암살을 목적으로 엄선된 검은 인영과 남겨졌던 파비안이었다. 흉악한 무기를 든 불청객과 그를 남겨두고 어쩔 수 없이 떠났던 별하였지만 파비안의 안위에 대한 상념을 한시도 내려놓지 못했었다.
적의 홈구장에서 불리한 싸움을 이길 수 있을지, 짐승 같은 그들을 제압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예감하긴 했으나 부상을 입지는 않을는지 걱정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104.
다행히도 파비안의 차분한 숨소리나 평이한 목소리, 가벼운 움직임에서 부상을 입은 듯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은연중에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가 그에게서 나는 건지, 별하 자신에게서 나는 건지 분간하지 못했다.
파비안은 잠시 뜀박질을 멈추고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지형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위치를 가늠하는데 날씨가 영 좋지 않아 곤란한 듯했다. 나무기둥에 몸을 기댄 별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쪽을 경계했다.
“언제까지, 하아……. 이렇게 도망가야 하는, 하아……. 거야?”
잠시라도 멈춰 서면 화살을 날리며 쫓아오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이곳의 현지인들도 야밤에 쏟아지는 비 때문에 난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파비안은 금방 지리를 확인하고 다시 길을 재촉하며 대답했다.
“멈추지 않을 거다. 저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때까지.”
별하는 파비안이 먼저 밟고 지나간 자리를 밟으며 그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 성취한다는 게 날, 가리키는 건 아니지……?”
부정문으로 물었으나 별하도 이제 모를 수가 없었다. 저를 쫓는 원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족장이 저의 무엇을 탐내는지 이 섬의 누구보다 확실하게 절감하고 있었다.
오메가의 박동하는 심장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식인종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별하는 가슴팍을 크게 오르내리며 불규칙한 호흡을 이어갔다. 먹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처지를 부정하듯 이를 악다물며 물음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