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2)화 (42/49)

“이 녀석들만 정리하면 돼.”

“어떻게 하려고? 잘 보이지도 않는데…….”

이쪽을 해코지하려 살금살금 다가오는 불청객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팔을 붙잡아 살짝 당겼다.

“우선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

별하는 잡아당기는 손길을 따라 침상 아래로 발을 내렸다.

“들어오면?”

“공격 불능으로 만들어야겠지.”

파비안이 냉담한 발언은 마치 경우에 따라서는 죽일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충분히 이행할 의지가 느껴졌다.

“…….”

별하는 부디 그런 상황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나 도래한다면 파비안과 자신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앉은 몸을 서둘러 일으켰다.

그 때 건조한 나무 마찰음이 움막 안을 울렸다. 삐그극― 별하와 파비안의 눈길이 어둠 속에서 맞닿았다. 동시에 문밖에서 희미한 기척이 일었다. 평평한 발바닥이 지면을 밟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멀지 않은 문 너머 들려왔다.

파비안은 빠르게 속삭였다.

“문 옆 벽에 붙어.”

“넌?”

동공이 어둠에 익숙해졌다고 한들 몸을 부대끼며 힘겨루기를 할 환경이 아니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들이닥칠 정도라면 목적은 명확했다. 이런 이들이 어리숙하게 맨손으로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칼과 창, 화살로 무장했을 게 틀림없었다.

파비안은 재빨리 침상을 옆으로 돌려세운 후 문가로 향했다. 별하는 늑대의 발톱을 찾아 근처 바닥을 창과 발로 쓸다가 이내 포기하고 혀를 쯧, 찼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이런 취급이라면, 없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별하는 서둘러 파비안을 따라 맞은편 벽에 등을 붙이고는 작게 내뱉었다.

“제기랄. 대체 몇 명인 거야?”

“검은 녀석들 전원, 알파 몇이 끼어 있을지도 모르지.”

별하는 마른침을 넘겼다. 숲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먹이를 노리는 악마처럼 그늘 속에 숨어 이쪽을 직시해 오던 이들의 형상을 떠올렸다.

이전처럼 살이 떨리는 듯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알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메가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할 생의 업이었다.

문틈 사이로 흐릿한 달빛이 비집어 들었다. 한데 뒤섞여 스며드는 바람이 못내 눅눅했다.

별하는 문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높은 창문 아래 그늘에 선 파비안은 한참 전부터 별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불확실한 앞날에 불안감을 느낀 듯 어금니를 꽉 다문 이에게 차분히 말했다.

“신호하면 달려.”

별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리, 라고? 같이 싸우는 게 아니라?”

파비안은 억양을 누르며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혹 별하가 잘못 이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발음을 정확히 했다.

“지금 여긴 남서쪽이야. 문을 나섰을 때 보이는 맞은편 숲 방향이 북동이야. 그 방향으로 달리면 돼.”

“그 방향에 뭐가 있는데?”

파비안은 담담히 대답했다.

“이곳과 가장 먼 해변.”

대번 그의 뜻을 눈치챈 별하가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이전보다 강한 악센트로 지시했다.

“신호하면 곧장 달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의견도, 제안도 아닌 명령과 다름없는 어조였다. 별하는 눈썹을 선명하게 찌푸리며 어깨를 세웠다.

“나 혼자 가라는 거야? 어째서?”

이제는 문밖의 불청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을 홀로 해결하려는 파비안이 더 큰 문제였다. 어둠을 타고 미세하게 들려오던 기척은 이제 바로 문밖에서 느껴졌다. 파비안은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하는 오메가잖아.”

“……뭐?”

“오메가는 절대 알파를 이길 수 없어.”

옆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육체적으로. 그 작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별하는 손등이 하얘지도록 창을 움켜쥐었다.

파비안의 말은 거짓이나 과장이라곤 일절 가미되지 않은 사실이자 현실, 그 자체였다. 알파의 페로몬이 조금만 발현되어도 오메가는 맥을 추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별하 역시도 그러했다. 그래서 더 분함을 느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의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울 만큼.

별하는 어떤 말로도 반박하지 못하고 숨만 얕게 몰아쉬며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파비안은 눈길을 살짝 내렸다. 상대의 감정을 고취시켜 제 뜻을 따르게 할 의도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는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작게 덧붙였다.

“이것들만 정리하고 바로 뒤따라갈게.”

별하는 바깥에서 비쳐드는 빛에 반짝이는 눈을 깜빡였다. 비열한 식인 원주민들이 저들을 순순히 포기할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둘 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이제는 도무지 모를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를, 파비안을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말이야?”

파비안은 턱을 들어 별하와 눈을 마주했다. 흐릿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들이 깊게 밀착했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을 달싹였다.

“내 성을 걸고.”

별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영롱한 이색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미안해. 힘이 못 되어줘서.”

파비안은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별하는 턱을 물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다음의 말을 꺼내기 위해 어렵사리 입술을 여는 순간, 문이 작게 덜그럭거렸다.

“―?!”

“…….”

별하와 파비안은 곧장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말을 맞춘 듯 기척을 죽여 진한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끼익― 쉬이 열린 문이 천천히 바깥으로 당겨졌다.

희끄무레한 밤 빛이 문틈 사이로 비춰 들었다.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어둠처럼 들이닥친 그림자들은 어떤 말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알파 특유의 비릿한 체취만이 진동했다.

길쭉하게 뻗은 검은 다리가 문틀을 넘어 가만히 바닥을 밟았다. 다음에 반대편 다리가 바닥을 밟으며 건장한 몸체까지 완전히 문턱을 넘어섰다. 어슴푸레하게 비켜 드는 달빛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불청객은 예상대로 검은 인영이었다. 늑대 가면을 뒤집어쓴 검은 인영은 기다란 돌칼을 손에 쥐고 있었다.

늑대 가면 속의 코를 실룩이며 어둑한 내부를 휘휘 둘러 살피다 화로 옆에 세워진 침상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소리 없는 걸음을 내디뎠다. 검은 인영의 뒤로 또 다른 검은 인영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돌칼, 화살, 창을 든 이들이 그것들을 세워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구석의 그늘 속에서 밀려드는 어둠을 지켜보는 별하의 안색이 창백했다. 긴장한 제 페로몬을 맡을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여섯에서 일곱의 검은 저승사자들이 들어온 뒤 더 따르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 파비안과 눈길이 맞닿았다. 그대로 어서 밖으로 나가라는 파비안의 눈짓에 일순 의아함을 갖다가 더 생각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진한 그늘을 벗어나 겨우 몇 발자국을 떼었을 때였다. 가장 늦게 들어온 검은 인영이 돌연 뒤를 휙 돌아보았다.

“…….”

“…….”

별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함을 내지르려 벌어지는 입 안에서 뭉툭한 나무막대가 퍽 튀어나왔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뒤쪽에서 그것을 날린 파비안이 명료하게 외쳤다.

“별하! 어서 나가!”

100.

텅 빈 침상 주변에 늘어선 있던 그림자들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인영의 입 안에서 튄 핏방울이 별하의 뺨을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별하는 차마 파비안을 두고 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어서―!”

파비안의 외침 뒤로 검은 인영들이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읏.”

움막 안에 가득 들어찬 알파들의 페로몬을 더 견디다 못한 별하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안광을 번득이며 저를 매섭게 재촉하는 파비안을 남겨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쪽의 검은 인영들은 움직이는 물체를 본능적으로 쫓는 살수처럼 별하를 쫓았다. 파비안은 그보다 빨리 문 앞을 막아섰다. 경로를 가로막힌 검은 인영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듯이 쇳소리를 냈다.

“하아악―!”

“흐아아악―!”

파비안은 제 손에 든 것을 그들의 발치로 던졌다. 늑대의 발톱과 이빨이었다. 검은 인영들은 그것을 냉담하게 내려다볼 뿐 누구도 주워 들지 않았다.

“……?”

검은 인영들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파비안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언제부턴가 저들 알파의 페로몬을 그보다 상위인 하이 알파의 페로몬이 뒤덮고 있었으나 검게 칠한 얼굴들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거대한 곰을 마주한 난폭한 사냥개들처럼 검은 인영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손에 쥔 무기를 겨누며 당장 목을 칠 기세였다.

파비안은 검은 인영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치이는 트로피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했다. 늑대의 전리품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검은 인영들이, 족장이, 이곳 원주민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는 차츰차츰 거리를 좁혀 오는 검은 인영들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

이제 이곳에는 별하도, 다른 오메가도 없었다. 저에게 반기를 드는 아둔한 알파들뿐이었다. 파비안은 제 앞에 맥없이 고꾸라진 검은 인영의 시체로 다가갔다. 뒤통수를 단박에 꿰뚫어 깊숙하게 꽂힌 창을 뽑아 드는 그의 반듯한 입매가 비스듬하게 어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였는데 적절한 타이밍이군. 감사할 지경이야.”

검은 인영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비안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음산하게 뇌까렸다.

“내 스트레스 풀이 상대가 돼줘서.”

* * *

“하아…… 하아…….”

한참 어둠 속 숲을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한 번 구른 별하는 절뚝거리며 뒤를 살폈다.

움막을 벗어나 숲에 들어서서부터 제 뒤를 쫓아오던 기척은 분명 파비안이 아니었다.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검은 인영들을 붙잡은 그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검은 인영들도 아니었다. 그들이었다면 벌써 붙잡혔어야 했으므로 다른 알파나 베타들 같았다.

별하는 거칠게 쏟아지는 호흡을 다스리며 계속해 숲을 가로질렀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나무 위 어딘가에서 바스스 기척이 들려와 창을 움켜쥐고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아…… 하아아…….”

나무 위에는 몸을 숨긴 알파도, 아나콘다도 없었다. 묵직한 습기를 머금은 흐린 달빛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있었다. 별하는 눈가로 흐르는 진땀을 닦아낼 정신도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숲 저 멀리에 노르스름한 불 한 덩이가 떠 있었다. 흡사 도깨비불처럼 일렁이는 그것은 좌측의 멀지 않은 곳에도 떠 있었는데 곧장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하아…….”

그것들이 저를 쫓는 횃불임을 깨달은 별하는 어서 뒤돌았다. 그러다 앞쪽의 파초 너머에서 일렁이는 횃불을 발견하고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언제 벌써 여기까지 따라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타지인에게 있어 이곳은 수풀이 우거진 위험한 밀림이었지만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앞마당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별하는 횃불의 빛살을 피해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 더 가면 검은 인영들도 쫓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구역이었다.

“조금만 더…….”

별하는 파비안이 일러준 곳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 나무 그늘을 뛰어넘었다. 횃불이 뒤쪽으로 물러나는 위치에 놓였을 때였다. 덩굴들이 어지럽게 내려온 나무 아래 그늘로 서둘러 들어가려는데 작달막한 인영이 덩굴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

별하는 숨을 훅 들이켰다. 뒤편의 횃불이 그곳을 스칠 때 인영의 형태가 얼핏 그늘 밖으로 드러났다. 어른이 아닌 아이였다. 약간 누른 피부, 새까만 단발머리,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은 얼굴, 눈 밑과 입가를 새빨갛게 칠한 사내아이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일전에 돼지우리에서 만났던 금방 기억을 떠올린 별하의 눈길이 아이의 손으로 내려갔다. 화살이었다. 날카로운 촉이 화살대에 메워져 있는 모양이 결코 장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

“…….”

별하는 알파의 페로몬을 여지없이 풍기는 아이와 눈을 맞대고서 천천히 빈손을 내밀었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아이는 누르스름한 눈을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별하를 쳐다보았다. 뒤쪽에서 아른아른 스치던 횃불이 잠깐 사라졌다가 수 초 뒤에 떠올랐을 때 부리나케 화살을 치켜들어 별하를 향해 겨눴다. 어떻게 저지할 수 없을 만큼 민첩한 움직임으로 칼날 같은 화살촉을 날렸다.

“잠, 윽.”

별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살기가 묵직하게 실린 화살은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그를 비켜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별하는 얼떨결에 피하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 심장을 향해 날아온 화살이 다음번에도 실패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기동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급소가 아닌 다른 곳을 노릴 수도 있었다. 가령 다리라든가, 눈이라든가. 그는 아이가 다음 화살을 메우는 틈에 지체 없이 달려갔다. 손에 든 창을 세워 아이의 옆 머리통을 힘껏 후려갈겼다. 뻐억― 아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그 자리에서 나뒹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의 기척을 들은 추적자들이 아우성을 내며 단번에 쫓아왔다. 별하는 곧바로 달렸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고 이끼를 잘못 밟아 휘청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앞길을 가로막는 커다란 바위를 빙 두르며 방향을 확인하는 그의 코끝에 일순 짙은 냄새가 끼쳐 들었다. 좀 전의 아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역겨운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하아…… 하아…….”

별하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를 드리운 수풀이 걷힌 사이로 밤하늘의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져 있어 조금도 밝지 않았다. 별하는 거칠게 오르내리는 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사위를 경계하며 창을 바짝 세워 들었다.

이제 미지의 구역이 코앞이었다. 거리를 정확하게 재기는 힘들었으나 밀림의 밀도가 점점 빡빡해지는 모양으로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뒤쫓는 횃불과 더 가까워지기 전에 걸음을 내딛던 별하는 순간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

욕설을 내뱉을 여유도 없었다. 체온을 지닌 물체가 등 뒤에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의 정체를 또렷이 자각하자마자 튀어 나가듯 전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덫에 옭아 매이듯 붙잡혔다. 검은 인영은 뒤에서 별하의 목을 팔로 압박했다.

“으윽…….”

우악한 완력을 서슴없이 발휘하는 검은 인영은 별하를 포획하려는 게 아니라, 마치 이 자리에서 살해하려는 듯했다.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숨쉬기도 힘들어진 별하는 제 목을 압박하는 팔을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썼다. 창으로 후려치고, 주먹으로 때리고, 손톱으로 긁어내려도 올가미는 꿈쩍하지 않았다. 죽이려는 게 틀림없었다.

“으, 으으……. 파…….”

얼굴에 피가 몰린 채로 헐떡이는 그 때,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무언가가 검은 인영에게로 달려들었다. 푸드덕푸드덕― 그에 뒤에서 목을 조이던 올가미가 언뜻 풀렸다.

별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손에서 떨어지기 직전인 창을 움켜쥐고 온 힘으로 뒤쪽을 찔렀다. 일순 뒷사람이 죽지는 않을까 염려 아닌 염려를 했지만 상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무른 진흙으로 강철벽을 때리듯 검은 인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별하는 믿기지 않는 듯 힘을 실어 재차 창을 휘둘렀으나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윽, 대체…….”

검은 인영은 거칠게 푸덕거리며 제 얼굴을 집중공격하는 생물체를 향해 손을 휙휙 내저었다. 검은 얼굴에 흰 배설물이 투둑 투둑 떨어져도 거리낌이 없었다. 돌덩이같이 커다란 손이 공중에서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생물체의 몸통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순간 작은 날짐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멀리 튕겨져 나갔다.

희미한 달빛이 드는 지면에 곤두박질친 작은 그것은 새파란 날개를 흐느적거리며 별하를 향해 작게 신음했다. 빠비아안……. 이내 구부러진 양발을 오그리며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브, 블루치이, 으윽!”

쓰러진 블루칩을 발견한 별하는 그곳으로 달려가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검은 인영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더 강한 완력으로 별하의 목을 조였다.

“블, 으…….”

의지와 달리 눈가에 고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별하는 별안간 죽음을 예감했다. 어둠뿐인 이곳에서 죽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을 누구도 알지 못한 채로.

“파비…….”

그 때였다. 검은 인영의 뒤로 그보다 더 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101.

기척 없이 나타난 거구의 그림자는 검은 인영의 목을 단박에 움켜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으윽…….”

갑작스러운 외력에 당황한 검은 인영의 완력이 곧장 풀렸다. 살기로 점철된 억압에서 벗어난 별하는 고꾸라지듯 땅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질식당하기 전에 부러지리라 예감했던 목을 더듬으며 기침을 거칠게 토해냈다. 쿨럭쿨럭― 쿨럭― 쿨럭쿨럭― 묽은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찔한 정신이 서서히 돌아올 때쯤 별하는 무릎으로 땅바닥을 기어 블루칩에게로 다가갔다.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작은 몸을 얼른 안아 올렸다. 쉴 때도, 놀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양날개를 꼭 붙이고서 안쪽의 깃털까지 부지런하게 정리해 대던 녀석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제 몸을 만져도 늘어뜨린 날개를 접지 않았다.

“브, 블루칩. 블루칩―”

별하는 새파란 깃털이 헝클어진 날개를 급히 똑바로 보듬으며 블루칩의 눈꺼풀을 뒤집었다.

“블루, 칩?”

어두워 상태를 확인하기가 여의치 않자 부리 위의 자그마한 코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이리저리 만져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곧바로 보드라운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눌러 심장 박동을 찾았다.

자신의 불규칙한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려 블루칩의 가슴께에 귀를 바짝 붙였다. 별하는 들릴 리 없는 소리를 찾아 한참을 분주히 움직였다. 작은 생물체의 어떤 생명 반응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

너무 어두워서 그래. 시끄러워서 안 들리는 거야. 잠시 기절한 것이라 애써 다독이며 아직 따뜻한 블루칩의 발을 만지작거리는데, 뒤쪽에서 둔탁한 기척이 울렸다.

“크허억―”

별하를 노리던 검은 인영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뒤늦게 나타난 거구의 그림자는 머뭇거림 없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

별하는 짙은 그늘을 헤치며 다가오는 그림자의 정체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파비안이 아니었다. 알파 원주민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페로몬을 풍기는 이는 바로 이곳의 하이 알파, 두두였다.

“두! 두!”

두두는 촘촘히 뜬 견직물을 상처 부위에 두르고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파리하게 좋지 않았지만 치료를 잘 받은 듯 어디서도 핏빛이 비치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빠르게 접근해 오는 도깨비불들을 빙 둘러본 그는 늘어진 블루칩을 품에 안은 별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두.”

“…….”

“두두.”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별하의 팔을 붙잡아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다미디아니니자이리아.”

두두는 주문 같은 언어를 빠르게 지껄이며 별하의 팔을 당겨 길을 재촉했다.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도 제 아비처럼 야비하게 해코지하려거나 속이려는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족장의 추종자인 검은 인영을 쓰러뜨린 것도 그렇고 알파 원주민들에게 쫓기는 별하를 도우려는 의도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별하는 두두의 손에 팔을 잡힌 채로 캄캄한 숲을 가로질렀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욱신거려도, 거친 덩굴과 나뭇가지에 긁혀 생채기가 생겨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별하는 흐트러진 숨을 길게 불어내며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뒤를 쫓던 도깨비불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따돌린 건가? 이제야 포기한 건가? 아니면……?

그는 혹여 파비안이 저를 찾아오지 못할까 염려스러워 걸음을 늦췄다. 그러자 두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두!”

걸음을 늦추지 말라는 뜻이었다. 별하는 제 팔을 아프게 잡아당기는 두두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계속해 팔을 옥죄던 악력이 선뜻 떨어져 나갔다.

“두. 두.”

“…….”

“…….”

두두는 별하의 한 걸음 앞에서 걸으며 뒷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별하는 그를 따라 걸으면서도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비안이 알려준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지 알지 못했다. 거기에 집중하지 못한 정신은 온통 뒤쪽으로 향해 있었다. 검은 인영들이 들이닥친 움막에서 혼자 도망쳐 나온 뒤 그곳에 혼자 남은 파비안은 어떻게 됐을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도 어려웠다.

파비안이 위대한 하이 알파이고,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이곳은 검은 인영들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에.

별하는 두두의 널찍한 등판을 쳐다보았다. 그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게 지금 이 순간만큼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손짓 발짓이라도 통할 수 있다면은 얼마나 좋을까. 혹 파비안을 보지는 않았는지, 그에 대해 들은 건 없는지, 또 원주민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고 있는 대로 전부 다 듣고 싶었다.

별하의 그런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두두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

“…….”

별하도, 두두도, 서로 오가는 말 없이 경직된 눈길만 주고받았다. 복슬복슬한 블루칩을 품에 꼭 끌어안은 별하는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무엇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문득 이마를 스치는 희미한 감촉을 느꼈다.

번뜩 위를 올려다보는 별하의 눈가에 다시금 감촉이 느껴졌다. 빗방울이었다.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밤하늘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옜다. 금방 비가 쏟아질 듯했다. 두두도 빗방울을 맞은 듯 진한 눈썹을 찌푸렸다.

“나리이늬니디야니리이.”

“…….”

“아린나리댜아니애다이…….”

두두는 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별하는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혹시라도 제 페로몬이 밤비에 지워지는 건 아닌지 더없이 걱정스러웠다. 소리 없이 밀려드는 누기처럼 증식하는 불안감에 입술만 찢을 듯 곱씹었다.

“하아…….”

별하는 깜깜한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한숨을 불어냈다. 고이 안긴 블루칩이 비를 맞지 않도록 보듬으며 두두를 뒤따랐다.

점점 진해지는 누기와 함께 밀림 속에서 바람을 느낄 무렵, 높다란 관목들로 울창한 강가에 다다랐다. 백색 강의 상류였다.

수면에 희끄무레한 달빛이 비쳐 그나마 주변의 풍경이 보였다. 그리 깊지 않은 강의 수심은 두두의 허벅지가 잠길 정도였다. 그를 거침없이 건너는 두두를 따라서 별하도 물에 발을 담갔다. 어디를 다친 건지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들여다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두두는 큰 걸음으로 금세 강을 지나갔다. 흰 모래가 깔린 강가에 도착해 뒷사람을 기다렸다.

별하는 허리까지 오는 강을 부지런하게 가로질렀다. 물살에 떠밀리지 않게 다리에 힘을 실어 앞사람이 기다리는 마른 모래에 발을 디딜 때였다. 슈욱― 바로 귓가를 스치는 소리에 번뜩 뒤를 돌아보았다. 첨벙― 무언가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

별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보았다. 두두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낯선 기척을 알아차린 듯 같은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순간, 또 한 번 낯선 바람이 일었다. 슈우욱― 두두는 재빨리 별하의 앞을 막아섰다. 하나 남은 팔을 허공으로 내젓다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가 허공에서 낚아챈 것은 깃털을 단 화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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