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로피컬 아일랜드 (41)화 (41/49)

“오십보백보.”

어둠에 휩싸인 숲은 고요했다. 족장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예상만큼 음침한 곳도 아니었고 검은 인영들이 불시에 덮쳐들지도 않았다. 광장의 북소리가 크지 않게 들려오는 거대한 교목의 뒤편 움막이었다.

마주 보는 형태의 움막은 자그마했지만 광장의 움막들보다는 정성스럽게 잘 지어진 모습이었다. 곧은 문이나 외벽에 난 창들, 뒤틀리거나 구멍이 나지 않은 지붕에 허술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움막 안에 불을 피워뒀는지 불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족장은 베타들이 지키고 선 움막을 가리키며 어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곳에서 묵으라는 뜻을 이해하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별하와 파비안을 각기 다른 움막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각각의 움막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들어가 있었다. 또 다른 오메가들이었다.

눈앞에서 사라진 오메가들과 비슷한 또래의 그들은 작은 덩치의 남자들이었다. 별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이거, 뭐야?”

“…….”

파비안은 움막 앞에 서기 한참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오메가들은 히트 상태였다. 억지로 히트를 유도했는지 어쨌는지 상당히 진행된 모습이었다.

히트를 맞이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움막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뒤늦게 족장의 뜻을 이해한 별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097.

“지금 이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 맞, 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수에게 포상을 내리듯 발정이 온 오메가와 마음껏 섹스하라는 뜻이었다.

파비안은 대답 대신 옅은 한숨을 흘렸다. 딱히 원주민 오메가의 페로몬을 힘겨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편할 리도 없었다. 얼마 전에 함께 발정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언제 또 기습적인 러트가 불쑥 찾아들지 몰랐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별하와 파비안이 말을 잃은 사이, 그들은 각자 따로 움막에 떠밀려 들어갔다. 별하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번득 정신을 차렸다. 장작이 타오르는 움막 안쪽으로는 실눈도 두지 않고 곧장 문으로 향하는데, 바로 뒤에서 기척이 일었다.

“…….”

“하아아…… 하아아…….”

발정이 난 오메가의 기척이었다. 별하는 열기가 느껴지는 곳을 힐긋 돌아보았다. 오메가 원주민은 확실히 히트 상태였다. 눈동자 초점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고 상기된 뺨은 탐스러웠다. 체온이 올라 진땀이 밴 피부가 일렁이는 불빛에 몹시 번들거렸다.

생식기를 가린 하의 앞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당황해서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 나도 오메가야. 잘못 짚었어.”

별하는 히트가 온 오메가를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인 대상의 영화나 만화에서나 본 게 다였다. 무턱대고 발정부터 하는 알파도 알파였지만, 저와 같은 동족의 히트를 눈앞에서 목격하는 것도 썩 좋은 기분은 되지 못했다. 오한과 함께 본능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오메가 원주민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꺼려져 별하는 성큼 물러났다.

“워우, 진정해. 진정해.”

“하아…… 하아아…….”

오메가 원주민은 별하가 저와 같은 오메가인 것을 진즉에 인지한 듯 놀라거나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별하에게서 어떤 매력이나 성적 흥분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상이 없는 지금 강렬한 삽입 욕구에 못 이겨 덤벼들었다.

별하는 슬쩍 몸을 틀어 오메가 원주민의 손길을 피했다. 붉은 천을 휘두르는 투우사를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소처럼 몇 번이나 손을 내미는 통에 욕이 절로 나왔다.

“젠장. 정신 차려, 나도 오메가라고.”

“하아아…… 하아…… 하아아…….”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오메가 원주민은 눅눅한 눈을 끔뻑이며 별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알파든, 베타든, 오메가든 상관없는 듯했다. 그저 페니스를 지닌 남성이라면, 어쩌면 유사행위가 가능한 여성이기만 해도 달려들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별하는 페로몬의 열기를 흩뜨리며 끊임없이 밀착을 시도하는 오메가의 팔을 잡아 가볍게 뒤로 돌렸다. 오메가 중에서는 제법 체격이 좋은 편인 별하의 완력에 오메가 원주민은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별하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문을 밀었다.

설마, 하는 불안과는 달리 문은 막혀 있지 않았다. 뒤에서 옷자락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혹시 쫓아 나오지 않을까 주먹을 움켜쥐고 뒤를 경계하는데 한 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하아……. 제기랄.”

움막 앞을 지키던 베타들이 일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별하를 힐끔거리면서도 전처럼 거친 행동을 보이며 저지하지 않았다. 마치 새로 전입해 온 상관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태도로 경계했다.

별하는 뒤쪽을 불안하게 돌아보며 서둘러 맞은편 움막으로 향했다. 자신이 지나온 곳처럼 단단히 닫힌 문을 밀어내려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파비안이 왜 아직 나오지 않는 거지? 자신이 오메가 원주민과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벌써 나오고도 남았을 텐데 그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파비안은 아직 움막 안에 있었다.

짝 없는 오메가 원주민이 안쓰러워 고민 상담을 해주는 건 아닐 테고, 갑작스럽게 기면증이 생겨 기절하듯 잠든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무엇을 하느라 아직 나오지 않는 거야? 별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싶은 충동과 그가 제 발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

베타들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체하며 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불빛이 비쳐나오는 움막 안은 조용했다. 거친 몸싸움을 한다거나 수다를 떠는 듯한 기척은 전혀 없었다.

별하는 문가에 등을 기대고서 파비안을 기다렸다. 커다란 늑대의 발톱을 든 그에게 박혀 있던 베타들의 눈길이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캄캄한 어둠에 휩싸인 나무 아래는 한적했다. 광장에서의 소음이 들렸으나 그것 말고는 없었다. 별하는 외벽에 뒷머리를 기댄 채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의 밤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해변으로 돌아가면, 허락해 줄래?’

‘너와의 각인을.’

자신 없이 물어오던 파비안의 목소리가 못내 달콤했다.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파비안과, 그 잘난 하이 알파인 파비안 블랙그레이와 각인을 하다니.

별하는 문득 파비안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늑대의 발톱을 구하러 가는 동안 내내 길을 앞장서고, 먹을거리를 찾고, 두두의 간호까지 척척 해낸 그가 사실은 꽤나 지친 상태가 아닐까 추측했다. 컨디션이 영 좋지 못해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판단한 게 아닐까…….

저에게 의향을 물어올 때의 파비안은 분명 진심이었다. 가볍게 생겨난 마음이 아닐뿐더러 쉬운 선택도 아니었다. 그것을 별하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의문은 하나였다.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인가. 이곳에서 구조된 후에도.

“…….”

별하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각인을 하고 싶었다.

오메가와 알파의 각인 관계가 서로에게 완벽한 구속력을 갖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이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짝의 권한으로 당당하게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이닥친다 해도 알파는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알파의 못된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각인은 그런 의미였으니까.

별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불어냈다. 파비안이 움막 안에서 히트가 온 오메가와 무엇을 하든 방해 놓을 입장이 되지 못하는 지금만큼 해변을 그리워한 적이 없었다.

발이 묻혀 들어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흰 모래와 따가운 햇볕, 야자수 나무 그늘, 건조한 바람결, 날짜를 새겨 넣다 만 바위, 미지근한 파스텔색 바닷물, 색색의 알록달록한 물고기와 불가사리, 온통 붉은 석양빛으로 물들었다가 금세 은하수로 뒤덮인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해변이 그리웠다.

별하는 그곳에서 마주 선 자신과 상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악몽 속의 천국과 같은 풍경을 멍하니 그려나가던 찰나였다. 그가 기댄 외벽의 문이 활짝 열렸다.

“―!”

불빛이 비쳐나오는 움막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파비안이었다. 별하는 눈을 크게 깜빡이며 기댄 몸을 똑바로 세웠다.

“……끝났어?”

맞은편 움막에 두 눈이 꽂혀 있던 파비안은 얼른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는 별하의 안위를 확인하자마자 의연하게 되물었다.

“무엇을?”

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비안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징후도 알고 싶지 않아 슬쩍 고개를 돌렸다.

“떨어지면 안 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함께 있어야 해.”

파비안은 그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문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별하를 찾으러 가려고 했어.”

“…….”

별하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전과 다름없이 보드라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파비안을 힐긋 마주하고는 움막 안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내부가 훤히 내다보이는 움막 안에는 역시나 이미 누군가 있었다. 인육을 노느매기하듯 이방인들에게 배분한 발정기의 오메가 원주민이었다.

별하가 맞닥뜨린 오메가보다 좀 더 마른 이쪽의 오메가 원주민은 안벽 구석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움막을 들락날락하는 기척에도 움직임이 전연 없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별하는 그제야 움막 안에서 어떤 무거운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제 뒤에 따라 들어오는 파비안을 얼른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설마 죽은 건, 아니지?”

파비안은 나뭇가지에 젖은 셔츠를 걸어둔 화롯가로 별하를 이끌었다. 아연히 쳐다보는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에게 담담히 대답했다.

“잠깐 재웠어. 달려들어서.”

“…….”

역시나 저 지경으로 만든 이는 파비안이었다. 별하는 저에게 달려들던 오메가와 마찬가지로 파비안에게 달려들었을 오메가 원주민을 떠올렸다.

그저 족장이 시키는 대로 본능에 충실했던 것뿐인데 바닥 신세로 만들어 어쩐지 동정심이 들었다. 본인이 직접 그런 건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덤덤한 파비안을 보자 별하는 자신이라도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별하.”

파비안은 다른 데에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별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두툼한 파초 잎을 돌돌 감아 만든 바구니였다. 커다란 바구니 안에서 향긋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는데 열대과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별하는 제가 있던 움막에서 얼핏 보았던 것들을 이곳에 와서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과일의 강한 단내에 순식간에 혀 밑으로 침이 고여 들었다. 파비안은 잘 익은 두리안을 악력을 쪼개 안쪽의 알맹이를 별하에게로 건넸다.

“배고팠을 텐데 어서 먹어.”

“……응. 고, 마워.”

별하는 괜히 파비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입에 넣자마자 녹아 없어지는 것을 묵묵히 받아먹다가 돌연히 물었다.

“저 녀석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파비안은 별하의 먹는 속도가 느려질 때쯤에서야 과일을 뜨문뜨문 제 입으로 가져갔다. 더 먹지 못하고 의견을 기다리는 별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뻔하잖아.”

별하는 줄곧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이며 이어 차분히 말했다.

“우선 잠시 눈 붙였다가 날이 밝는 대로 여길 벗어나자.”

98.

별하의 눈길이 파비안에게로 향했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안 기다리고?”

“족장 자리를 물려줄 생각은 없어 보여. 이전 같은 경계심을 보이지도 않고.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인 것 같으니 우리는 그만 퇴장해도 될 것 같아. 되도록 조용히.”

파비안은 이제 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린 듯했다. 별하는 자신이 가진 것과 파비안이 제 셔츠 아래 던져둔 것을 스쳐 보며 물었다.

“이것들은 어쩔 거야?”

“두고 가야겠지. 쫓아올 테니까.”

“으음.”

별하는 정신을 잃은 오메가를 돌아보며 제 턱을 가만히 문질렀다.

“아무 조건 없이 넘겨도 괜찮을까?”

파비안 역시 확신하지 못한 듯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당도 높은 과일을 기계적으로 씹으며 불길을 응시했다.

“믿어보는 수밖에. 이곳 알파들의 자긍심을.”

“…….”

별하는 새하얀 늑대의 발톱과 이빨을 바라보던 원주민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신기해하면서 탐을 내기도 하던 눈동자들은 그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늑대의 존재를 구전동화처럼 접하기는 했으나 누구도 제 두 눈으로 목격한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발톱을 소유한 족장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어디에서 주운 건지, 누구에게 물려받은 건지, 혹은 알파 늑대들의 발톱은 아닌지 당장 확인할 수는 없어도, 새하얀 늑대와 직접 대면해 본 이는 지금 이곳에서 단 셋뿐임을 확신했다. 로우 오메가 하나와 하이 알파 둘.

정말 족장이 직접 거대 늑대들과 조우했다면 그는 지금쯤 고지대 숲의 미라들과 나란히 세월을 보내고 있어야 했다. 새하얀 늑대는 인간 알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별하는 입 안에 남은 과일 조각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을까?”

“어떤?”

“그리 탐내는 이것들이 다 오메가 것이란 거.”

단단한 과육을 베어 문 파비안은 한숨처럼 건조하게 웃었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별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데 식인을 한다고? 오메가를 잡아먹는 이유가 가축 정도로 생각해서 아니야? 그렇게 하찮은 오메가를 숭배한다는 게 지금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

담담한 저음이 곧바로 잇달았다.

“전에 별하가 했던 말을 생각해 봐.”

“…….”

“광적인 집착으로 본다면 식인의 이유가 분명해져.”

별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메가들의 처형식을 다시금 마주하고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일시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파비안의 말대로였다. 알파들은 오메가의 육신으로 힘을 기르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리해서 다른 맹수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새하얀 터주신과 비등한 권력으로 이곳을 군림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원주민들의 원대한 소망은 바로 이것이었다.

식인 원주민들의 생리와 사정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이해하면서도, 별하는 그들을 향한 혐오감은 조금도 거둬들이지 못했다. 오메가를 희생시켜 저들 알파의 욕심을 채우려 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

별하는 문득 저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파비안이 과일을 질겅거리며 이쪽을 지긋이 보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질문을 던졌는데 듣지 못한 건가 해서 별하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으음? 뭐라고 했어?”

파비안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말도.”

“아……. 응.”

“…….”

별하는 밀려드는 정적 속에서 습관적으로 이전의 기억들에 잠겨 들었다. 지금까지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것은 만족했으나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좋은 생각과 좋지 않은 생각, 허무맹랑한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를 채우던 것도 잊고 생각에 잠긴 그 때 파비안이 느직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눈 좀 붙여, 별하. 그런 것들은 나중에 한가할 때 들여다봐도 되니까.”

별하는 눈을 들어 옆자리를 올려다보았다. 파비안은 별하를 스쳐지나 뒤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는 오메가 원주민 옆에 서서 발로 툭툭 건드렸다.

“…….”

다시 두어 번 반복했으나 오메가 원주민은 손가락도 꼼짝하지 않았다. 파비안은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오메가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별하를 등지고 곧장 문으로 향했다. 발로 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나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인형처럼 안겨 있던 오메가 원주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파비안 혼자였다. 별하는 혹시 그가 오메가 원주민을 문 앞에 던져버린 게 아닌가 해서 물었다.

“어떻게 했어?”

그래도 히트 중인 오메가인데. 베타들이 아무리 평범하다고 해도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었다. 파비안은 전연 관심이 없는 듯 대답했다.

“앞집으로 보냈어.”

기절시키기는 했지만 다행히 안전하게 맞은편 움막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별하는 저에게 간절히 매달려 오던 오메가가 떠올라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발정할 때의 몸속이 요동치는 고통을 알기에 더 그랬다. 억제제가 없는 이곳에서의 히트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끔찍한지 뼈저리게 절감해 봤기에.

“……거기 오메가는? 봤어?”

별하의 물음에 파비안은 관심이 없어 보지 못했다는 얼굴을 했다. 곧 문을 굳게 닫아 걸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파비안은 구석의 침상을 화로 가까이에 끌어와서는 별하를 돌아보았다. 별하는 그의 뜻을 금방 알아차리곤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이불은커녕 얇은 침구조차도 없이 나무로만 이루어진 침상에 걸터앉으며 작게 한숨을 불어냈다.

“두두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파비안은 대답 없이 그의 옆에 앉았다. 삐거덕― 잇대어놓은 나무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전혀 안 보이는 게 뭔가 불안하네. 부상자라고 그 녀석까지 잡아먹은 건 아니겠지? 쉽게 잡아먹힐 녀석은 아니지만.”

베타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걷던 두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아닌 줄 알면서도 불온한 쪽으로 생각들이 치우쳤다. 파비안은 별하를 잠자리에 눕히며 입을 열었다.

“굳이 알파를 잡아먹을 이유가 없어. 다른 목적이라면 또 모를까.”

별하는 딱딱하면서도 나름의 편안함이 있는 나무침상에 등을 붙이며 되물었다.

“다른 목적?”

“게임에서 진 벌.”

“…….”

파비안은 태연히 풀어 말했다.

“벌칙이 패자의 목숨이라면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긴 해.”

“……설마.”

본능이 전부인 이곳에서 하이 알파를 죽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지 않은 상상들이 계속해 밀려들었다.

파비안은 말을 잃은 별하의 옆자리에 몸을 길게 누이며 그의 머리 뒤로 팔을 밀어 넣었다. 자연스럽게 제게 달라붙는 이의 뒷머리를 쓸며 속삭였다.

“이만 쉬어. 어쩌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일찍, 더 많이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응…….”

별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여러 가지 상념들에다 이곳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근심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파비안은 그런 별하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는 그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수면을 유도했다.

“잘자, 별하.”

“……그래. 너도.”

움막 안에는 금세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으로 불어 드는 밤바람에 시커먼 불 그림자가 안벽 위에서 갖가지 그림을 그렸다. 광장의 시끄러운 소음은 어느덧 형체도 없이 수그러들어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별하는 파비안의 느른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불 그림자를 응시했다. 머리 위 지붕은 태풍에도 끄덕하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아늑했다. 늘 따라다니던 갈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는 잠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잠을 방해하는 벌레도 없고, 배도 불렀지만 별하는 쉬이 눈감지 못했다. 옆 사람을 끌어안고서 깊어지는 어둠만 바라다보았다.

혼탁한 침전물처럼 가라앉은 의식이 불시에 떠올랐다. 몸을 흔드는 기척을 느낀 별하는 감은 눈을 떴다. 들러붙은 눈꺼풀이 무거워 손등으로 비비며 억지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으음……. 파, 비안……. 무슨 일이, 읍―”

그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귓속을 파고는 저음에 어득한 정신이 단번에 번쩍 들었다.

별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도 깜깜한 앞을 내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익숙한 단내를 품은 손에 가로막힌 말이 다시 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갔다.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던 별하는 지금의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칠게 흐트러진 숨을 불어냈다. 제 입을 틀어막은 이가 파비안이라는 것 외에는 무슨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환하게 타오르던 화로는 어느새 작은 불씨도 남기지 않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밖은 여전히 캄캄했고 밝아올 낌새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

별하의 거친 호흡이 점차 가라앉으며 아슴푸레한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을 때 파비안이 손을 풀었다. 숨을 훅 들이켜는 이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밖에 뭔가 있어.”

“……?!”

별하는 급히 뻑뻑한 눈동자를 비비며 밖을 내다보았다. 야밤의 달빛이 희미하게 비쳐드는 곳은 더없이 고요했다. 작은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별하는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는 눈으로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뭐가 있다는 거야?”

최대한 소리를 죽인 질문에 파비안은 대답 대신 부산히 움직이는 기척을 어둠을 통해 전해 왔다. 별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불안감을 억눌렀다.

“베타 녀석들이 교대하는 소리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광장에서 나는 노랫소리나 북소리거나. 야행성 동물일지도.”

화로 주변에서 나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그런 녀석들이 아니야.”

“……그, 럼?”

파비안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단언했다.

“우릴 해치우러 온 녀석들이다.”

99.

별하는 어쩌면 아직 꿈속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현실이라기에는 파비안의 목소리가 몹시 부드러웠다.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 작은 기척이 이는 곳을 쳐다보았다. 마른 입술을 억지로 축이며 물었다.

“누가? 어째서?”

파비안이 불쑥 다가왔다.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그는 별하의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

별하는 손 안에 쏙 들어오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재질의 물체는 길쭉한 원통형이었다. 외피를 매끄럽게 잘 다듬은 나무막대기 같았는데 언뜻 창과 비슷했다.

아무것도 없는 움막에서 이러한 것을 구할 방법은 하나였다. 그가 앉은 나무침상이었다. 침상에서 뜯어낸 그것은, 놀이 용도나 불을 때기 위한 장작이 아니었다. 한밤의 불청객을 상대하기 위한 무기였다.

파비안은 별하의 뺨과 목덜미를 스치듯 쓸며 낮게 말했다.

“지금 여기서 떠날 거야. 움직일 수 있겠어?”

별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완전히 잠기운을 떨쳐낸 눈동자가 제 앞에서 선 파비안의 그림자를 어둠 속에서 분리해 냈다.

“그건 문제없지만……. 이거 족장 짓이지?”

“글쎄.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어.”

“족장 짓이 맞아. 분명해.”

별하는 어느 때보다 확신했다. 저를 보던 족장의 눈은 모른 척하려 해도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집요하고도 탐욕에 찌들어 있었다.

우두머리의 입장에서 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족장은 제가 가진 것보다 훨씬 큰 늑대 발톱을 본 이후로 비릿한 눈길을 한시도 거두지 않았었다.

발정 난 오메가가 들어 있는 움막에 파비안과 별하를 따로 집어넣은 짓거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이 알파의 러트만 이끌어 낸다면 홀로 남은 오메가를 요리하는 것쯤은 나무 아래 떨어진 과일을 주워 먹는 것만큼 간편하리라.

족장의 시선과 행동에서 그 속내를 짐작했음에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연유는, 그들이 한밤에 들이닥칠 만큼 비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족장에게는 알파의 자긍심 따위 없었다. 문명사회의 야비한 우두머리들과 똑같았다. 본능에 가까운 권력욕에 지배당한 짐승일 뿐이었다.

“망할 놈들.”

중얼거리는 별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파비안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하에게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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