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는 보이지 않는 두두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먼저 그곳에 들어가 있었던 거네? 우리가 오길 계속 기다렸던 건가?”
파비안은 땅굴 옆 교목의 기둥 뒤에 서 있는 그늘로 잠깐 눈길을 던지고는 별하를 바닥에 조심히 내려주었다.
“그랬을 수도 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으음.”
겨우 자유로워진 별하는 늑대 발톱과 이빨이 무사한지부터 살폈다. 후에 파비안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보낸 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들, 식인종들이야. 이런 갱을 만들 정도의 집착이라니.”
“인간의 신념은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지. 맹목적일수록 더.”
별하 역시 아둔한 인간의 신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고 늘 생각해 왔었다. 오만한 알파들이 특히 그랬다.
그는 자신의 발톱과 이빨을 선뜻 허락한 새하얀 늑대에게 새삼 깊은 감사함을 느꼈다. 만약 이것을 구하지 못했거나, 운이 나빠 두두보다 훨씬 늦어졌더라면 집요한 알파 식인종들에게 결국에는 먹힐 게 확실했다.
한동안은 파비안의 도움으로 도망 다닐 수 있을지 몰라도 도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으리라. 평생을 사화산을 떠돌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별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찜찜한 상념들을 털어냈다.
“그나저나 두두 녀석은 어디 간 거야? 설마 혼자 가버린 건 아니겠지?”
파비안은 그의 뒤로 턱짓했다. 나무 아래 진한 그늘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지켜보던 인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두두의 안색은 땅굴을 지나 오면서 한층 더 창백해져 있었다. 새파란 입술은 버석버석했고 남방과 셔츠는 곧이라도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두에 서서 길을 헤쳐나갔다.
두두는 절벽으로 난 길이 아닌 늑대들에게 당한 시체들이 즐비하게 깔린 길목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지금 상태로 절벽 길은 무리인 듯싶었다.
별하는 파비안과 손끝이 부딪치는 거리에서 걷다가 문득 근처 수풀에서 작은 기척을 감지했다. 인기척을 들은 작은 기척의 정체는 빠르게 수풀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황급히 땅을 박차며 뛰어오를 때마다 기다란 양쪽 귀가 달랑거렸다. 토끼였다.
“어―”
동물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한 숲에도 역시나 생명체는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기척을 최대한 누르고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터득한 저들만의 생존법으로.
별하는 불현듯 작고 새파란 생물체를 떠올렸다. 사람 말을 한 번 만에 완벽히 흉내 내며 온갖 애교를 다 떨던 블루칩의 자리가 허전해 숲을 돌아보았다. 고요한 숲에는 어떤 동물들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블루칩……. 둥지에 무사히 잘 돌아갔을까?”
멀찍한 선두를 응시하며 걷던 파비안이 별하를 힐긋 내려다보았다.
“블루칩?”
“응. 블루칩 녀석. 보기랑 다르게 겁이 많거든.”
별하는 블루칩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아련한 그리움을 느꼈다. 뱀에게서 짝을 잃고 저에게 안겨 들던 작은 존재의 따스한 체온과 무게감이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다. 파비안은 감상에 잠긴 별하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선두를 내다보았다.
“걱정하지 마, 별하. 영리한 녀석이니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어디로 날아갔든 다른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 간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걸었다. 야트막한 비탈길을 내려갈 때쯤 활엽수들의 숲에서 벗어나 익숙한 풍경의 밀림과 마주했다.
별하는 파비안에게 주의를 주었다.
“싱크홀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
파비안은 고개를 까딱였다. 별하는 앞장선 두두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으나 말이 통하질 않는 데다 들을 생각도 일절 없어 보여 알려줄 방도가 없었다.
그전에 별하가 굴러떨어졌던 지점과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살짝 비켜난 길로 들어섰다. 두두는 이 부근의 지형지물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덩굴이 우거진 숲을 막 지나는 중에 나뭇가지에 걸린 선두가 비틀거렸다. 기력이 바닥난 듯 나뭇가지를 걷어낼 힘도 없어 보였다. 별하는 선두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부축했다.
두두는 처음에 거부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가 그런 행위도 유지하기가 힘든 듯 별하에게 몸을 의지했다.
“윽.”
그렇지 않아도 거구인 그가 축 늘어지기까지 하자 별하의 어깨가 묵직하게 눌렸다. 억지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디며 걷는데 불편한 듯 지켜보던 파비안이 불쑥 별하의 자리로 들어와 두두를 부축했다.
“내가 할게. 별하는 되도록 녀석에게서 떨어져. 안 좋은 냄새 배.”
별하는 잠깐의 부축에도 결린 제 어깨를 주무르며 파비안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거구의 두두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축하는 그는 어쩐지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별하는 그들을 앞장서 덩굴들을 걷어주며 쉬어갈 만한 곳을 찾았다.
태양은 아직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습도가 높지 않은 무척 쾌청한 날씨였으나, 이대로 길을 강행하기에 무리라고 판단한 이들은 이전에 하룻밤 묵어간 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잡았다. 장작불을 피웠던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 상태가 좋지 못한 두두를 나무기둥에 기대어 앉히고 별하는 그의 어깨를 들여다보았다. 상처에 덮인 남방과 셔츠를 건드리자마자 핏물이 흐르는 부위는 분명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다시 벌어진 것이었다. 약도 뭐도 없는 이 상황에서는 응급처치할 수 있을 만한 게 전무했다.
별하는 그에게 겨우 물을 먹인 뒤에 진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주려 손을 뻗었다. 어금니를 물고 고통을 참던 두두가 별하의 손을 단박에 움켜잡았다. 아픈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
생각지 못한 힘에 당황해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그가 거칠거칠한 입술을 달싹였다.
“리인디임아하, 아알미나?”
“……?”
이런 상태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검은 눈동자는 별하를 가득 담고 있었다.
“리인디임아하알미나, 벼, 라?”
“뭐……?”
별하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두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건지, 잘못 들은 건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눈썹을 찌푸렸다.
“두두, 아파. 이거 놔.”
“…….”
두두는 악력을 거두지 않았다. 나무에 기댄 등을 세워 별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 때, 나무기둥 뒤에서 커다란 인영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며 걸어 나왔다. 장작을 주우러 나갔던 파비안이었다.
한 손에 돌칼을 돌려 잡은 파비안이 두두의 뒤편에 우뚝 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게임 룰에 경쟁자를 죽이지 말라는 규칙이 있을까?”
음산하게 뇌까리는 물음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별하를 잡아먹을 듯하던 두두는 이내 악력을 풀어냈다. 지독한 고통을 다스리려는 듯 나무에 몸을 기대고선 눈을 감았다. 별하는 붙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파비안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많이 아파서 그래. 아무 일 아니야.”
“…….”
파비안은 별말 없이 그를 비켜 지나 주워온 장작을 그을음이 남은 자리에 내려놓았다. 금방 불을 만들어 피우고는 저녁거리를 찾으러 강으로 들어갔다.
묵묵히 고통을 견디던 두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별하는 그가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도록 잠자리를 살펴주었다. 거칠던 숨소리가 차츰 느른하게 가라앉아서야 한숨을 돌렸다.
“하아…….”
별하는 파비안을 찾아 강가를 돌아보았다. 나무 아래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던 걸로 봐서 상류로 올라간 듯했다. 물고기라도 잡는 것 같았다.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별하는 마른 목부터 할 수 있는 만큼 가득 축였다.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을 씻어내고 땀이 밴 뒷덜미를 문지르다가 이내 묵직한 옷가지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088.
이전의 낯간지러운 기억이 떠올라 잠시 주춤했으나 진득한 느낌을 떨쳐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그것을 넘어섰다. 별하는 수심이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복부가 잠기는 깊이에는 우거진 관목이 있었는데 햇빛을 피해 쉬기에 좋았다. 나무껍질과 이끼 냄새가 진하게 섞인 특유의 강냄새를 맡으며 부드러운 물살을 느끼다가 천천히 몸을 누여 잠수했다. 가슴과 목, 턱, 입술과 눈이 차츰 잠기고 코끝까지 물속에 완전히 묻혀 들자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별하는 낮은 물속에 누워 투명한 장막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가로이 흔들리는 수목들 위로 새파란 하늘을 마주하고서야 현실을 실감했다.
이제 드디어 끝이 났다. 악몽과도 같은 식인종들에게서 벗어나 별천지 해변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두두의 상태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생명을 위협받으며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
뽀록― 뽀로로록―
별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수면으로 올라왔다. 어느덧 눈가를 덮을 만큼 자라난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넘겼다. 살짝 가빠진 숨이 빠져나오는 입술과 얼굴을 물로 씻어내리며 고요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청아한 물소리가 못내 상쾌했다.
별하는 가까이에 있는 관목에서 나뭇잎 몇 장을 뜯어내 피부를 문질렀다. 목덜미와 어깨, 가슴팍, 복부, 허리를 차례로 문지르다가 다친 팔을 들여다보았다. 피딱지가 앉은 상처에서는 이제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금방 아물 것 같았다.
다리 곳곳에는 크고 작은 멍들이 포진해 있었다. 허벅지와 무릎, 오금, 정강이를 지나 몹시 얼룩덜룩한 발가락까지 깨끗하게 씻어냈다. 물로는 씻어 내려가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허투루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은 사타구니였다. 허리 아래로는 물에 잠겨 밖에서 보이지 않는데도 별하는 괜스레 의식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적한 강가에는 개구리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오기 전에 얼른 볼일을 끝내려 뒤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이제 약간의 붓기만 남은 뒤는 거의 아물어 있었다. 발정이 지난 뒤에는 멋대로 젖지 않아서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파비안의 우뚝한 흉기가 아직도 내벽에 틀어박혀 있는 듯한 이물감만 없었다면 엉덩방아를 가볍게 찧은 정도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아…….”
별하는 움찔거리는 주름과 그 주변을 문지르며 뒤를 씻었다.
처음 한두 번은 이전에 했던 섹스들처럼 오르가즘에 도달하기 직전에 빠져나가 밖에다 사정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발정의 최고조에 달해 잠깐 이성을 잃었을 때는 서로 참지 못하고 결국 내벽 안에서 사정을 하고 말았다.
해변에서 불시에 섹스했을 때도 안에다 사정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극렬한 쾌감이 별하를 관통해 그를 각성시켰다. 단맛을 처음 맛본 아이처럼, 알파의 정액을 통한 감각에 각인된 것이었다. 그 후로는 고삐가 풀려 계속해 안쪽에서 절정을 맞이했었다. 파비안의 뜨거운 정액으로 뱃속이 가득 찰 때까지.
“…….”
별하는 자신이 로우 오메가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이 오메가들은 우수한 외모도 외모였지만 높은 임신율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로우 오메가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외모, 집안과 더불어 자궁의 품에서도 제법 큰 차이를 보였다. 성범죄의 타깃이 되는 이유 중에 낮은 임신율이 상위를 넘볼 정도였다.
별하는 자신이 로우 오메가인 것에 처음으로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임신이 잘되지 않는다면 아직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기함을 하면서도 파비안과의 섹스를 뿌리치지 못했다. 뿌리치기는커녕 쾌감에 지배당했던 그 순간들을 수없이 떠올리며 되새김질했다.
의식적으로 억누르며 아닌 척을 했지만 그의 페로몬과 체온이 스칠 때마다 등허리가 저릿했다. 동굴에서 장시간 안겨 있을 때는 그야말로 곤혹, 그 자체였었다.
별하는 파비안의 페니스가 수도 없이 드나든 흔적이 남은 제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엊그제 날밤을 새울 정도로 섹스를 나눴음에도 그를 떠올리자 금방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피부를 녹일 듯 감겨 들던 파비안의 뜨거운 열기와 그의 묵직한 무게감, 하반신이 강하게 부딪칠 때마다 안쪽으로 박혀 들던 감각, 깊은 곳이 열리는 쾌감, 예민한 성기가 깊게 맞물려 신음이 터지면 맞닿아 떨어지지 않던 유리 눈동자, 그 모든 게 흥분을 이끌었다.
별하는 맑은 물속에 잠긴 제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며 움찔거리는 구멍으로 중지를 밀어 넣었다.
“응…….”
붓기 때문인지, 물속이라선지 생각보다 구멍이 잘 열리지 않았다. 수면에 코가 닿을 듯 아래를 들여다보는데 불현듯 등 뒤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별하?”
별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얼른 뒤에서 손을 떼고 제 어깨 너머를 돌아보았다.
“어, 어? 파, 비안?”
새하얀 상반신을 드러낸 파비안이 우뚝 서 있었다. 의아한 기색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양손에는 물에 젖은 커다란 털뭉치가 들려 있었다. 유명을 달리한 설치류였다.
“자위했어, 별하?”
별하는 제게서 풍기는 페로몬을 감추려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머리끝까지 잠수했다가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는 파비안 앞에서 느지막이 고개를 들었다.
“……자위는 안 했어.”
“…….”
“이번에는 붓기가 금방 가라앉았길래 만, 져봤어. 조금…….”
파비안은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든 것을 물가 수풀로 휙 던지고는 별하와 눈높이를 맞췄다.
“봐줄게. 괜찮은지.”
별하는 대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괜찮아. 이제 아무렇지 않아. 붓기 없어.”
“이런 날씨에 덧나면 위험해.”
“…….”
“괜찮아, 별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
별하는 걱정하는 파비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이에게서는 음흉한 분위기나 그 비슷한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파비안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혹 우악한 힘으로 몰아붙여 버티기 힘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성심을 다해 오롯이 섹스에 임할 뿐이었다.
“…….”
별하는 파비안과 마주한 눈길을 가만히 내리깔았다. 맑은 물속에 숨기고 있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세웠다.
수면을 뒤덮은 반사광에 유독 반짝이는 오드아이와 다시 눈길이 맞닿았을 때, 그는 별안간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음기에 허덕이는 사람은 파비안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말고.”
관목 수풀의 우거진 구석에는 어지러이 엉킨 줄기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비쳐들고 있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지만 안팎으로 잘 보이지는 않는 사각지대였다. 나무를 향해 선 별하는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마른 침을 삼켰다.
“보여, 이제……?”
별하의 뒤편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파비안은 대답이 없었다. 별하의 노력에도 잘 보이지 않는지 다시금 부탁했다.
“조금만 더.”
“파비안…….”
별하는 입술을 곱씹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으로 벌리고 있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아 벌렸다. 파비안은 그제야 안쪽에 숨은 주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여.”
그는 갈라진 둔부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옴폭하게 말려 들어간 구멍은 약간 부어 있을 뿐 별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 혈색도 불그스름하게 이상이 없었고 찢어진 곳도 없었다.
별하는 제 은밀한 곳을 말없이 들여다보는 파비안의 시선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섹스하는 사이였든 어쨌든, 말짱한 제정신일 때에 음부를 훤히 내보이는 상황은 생전 처음이라 경미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가쁜 숨을 불규칙하게 들이쉴 때마다 벌어진 둔부 안쪽의 주름이 움찔거렸다.
“괜찮, 지?”
별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바짝 굳은 등허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옴폭한 골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움찔움찔하는 주름을 적시며 흩어진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던 파비안이 입술을 열었다.
“다른 곳은?”
“……어? 다른, 곳?”
더없이 가라앉은 저음이 뒤따랐다.
“안쪽은 어때?”
“…….”
“알파 정액 깨끗하게 긁어내지 않으면 배 아파, 별하.”
별하는 눈앞의 나무껍질을 한참 쳐다보았다. 우툴두툴한 외피에 달라붙은 이끼와 그 위를 열심히 기어 다니는 개미들을 보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별하가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움찔거리는 그곳으로 파비안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으읏, 잠깐. 파비안.”
바짝 움츠러든 주름을 누르며 들이닥친 이물은 곧바로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물속에서도 빡빡하게 잘 열리지 않던 주름은 윤활액이라도 바른 듯 쉬이 진입을 허락했다.
당황한 별하는 나무기둥을 끌어안듯 붙들며 그곳에 이마를 붙였다.
“파, 잠깐만…….”
파비안의 반듯한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한 저음으로 말했다.
“힘 빼, 별하. 금방 확인하고 뺄게.”
그는 별하에게 최대한 밀착하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검지를 내벽으로 밀어 넣어 안쪽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힘껏 조여드는 주름 안쪽과 따뜻하면서도 탄력적인 점막을 찬찬히 살폈다. 손끝으로 내벽을 신중하게 쓸며 혹 찢어지거나 다친 곳은 없는지 찾았다.
역시 부어있을 뿐 상처는 없었다. 주름을 지나 좀 더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별하는 가만있지 못하고 허리를 들썩였다. 더없이 부드러운 움직임에도 별하는 큰 고통을 받는 듯 이를 악다물었다.
“으…….”
“괜찮아.”
“읏, 음.”
검지가 최대한 닿는 곳까지 확인을 끝낸 파비안은 안쪽에서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잠깐 벌어졌던 주름이 급하게 오므라드는 그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둔부 사이를 찾아들었다. 눅진하게 젖은 말캉한 감촉은 혀였다.
“파, 파비안??”
089.
파비안은 방금 손가락을 밀어 넣었던 곳에 혀를 가져다 댔다. 당황해 피하는 별하의 허리를 붙잡아서는 둔덕을 벌려 안쪽의 구멍을 핥았다. 회음부에서부터 골이 시작되는 뒤쪽까지 길게 핥아 올리자 부어오른 점막이 금세 번들거렸다.
“으, 파비안. 으읏, 그만.”
별하는 이마에 닿는 나무기둥과 완고한 파비안 사이에서 빠져나가려 허리를 비틀었다. 파비안은 엉덩이에 힘을 꽉 준 별하의 안쪽 주름을 혀로 핥으며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다 나을 때까지는 당분간 이걸로 참아줘, 별하.”
“다, 다 나을 때, 읏, 까지 이걸 하겠, 흣, 다는 거야?”
별하는 벌어진 엉덩이 사이를 핥는 감촉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움칫거리는 주름을 당장 파고들 듯 눌러 드는 감촉이 못내 위협적이었다.
“매일 핥아줄게.”
“그렇게 심하지 않, 아. 읏, 파비안…….”
파비안은 의료 행위를 하는 것처럼 말했고 별하 역시 그리 들었으나, 육체는 어떤 거짓이나 가식 없이 솔직하게 반응했다.
별하는 휑한 가랑이 사이로 파비안의 따뜻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등허리를 움찔거렸다. 고환은 긴장으로 올라붙어 있었고 페니스는 물속에 있을 때부터 꼿꼿하게 발기해 있었다. 요도에 맺힌 투명한 쿠퍼액이 곧 흘러내릴 듯했다. 타액에 젖은 점막이 흥건하게 무르녹았을 때쯤, 파비안은 그를 빨 듯이 부드럽게 흡입했다.
“파비, 싫, 하앗…….”
부어오른 점막은 작은 자극에도 놀라 강하게 조여들었다. 별하는 나무에 이마를 붙인 채로 낮게 헐떡였다. 벌린 다리를 오므리려 할수록 그를 붙잡은 악력이 따라서 강해졌다. 파비안은 별하의 뒤를 활짝 벌리고선 안쪽을 아무렇지 않게 핥고 빨며 길들였다. 이미 치료 목적을 넘어서, 사심이 듬뿍 담긴 애무였다.
“괜찮아, 별하. 참지 않아도 돼.”
“하아…… 하아…….”
“긴장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느껴.”
별하는 가쁜 숨을 불어내며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았다. 달콤한 저음이 흘러든 가랑이 사이의 페니스는 한껏 솟구쳐 있었다. 그 아래로 움찔거리는 구멍을 질척하게 빠는 소리와 선득한 감각이 흘러들었다.
“으읏, 파비안…….”
거칠어진 별하의 숨소리에 어느덧 흥분감이 감돌았다. 그에 파비안은 일부러 더 소리 내어 점막을 자극했다. 혀 전체로 사이를 핥다가 혀끝을 세워 주름을 눌러 들었다. 안쪽이 열리지 않도록 강하게 오므라드는 곳을 쪽쪽 빨자 별하의 페니스에서 체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별하는 급히 제 열기둥을 움켜잡았다. 파비안에게 뒤를 훤히 내준 채로 그가 전하는 감각에 그대로 휩쓸렸다. 터질 듯한 페니스를 빠르게 훑어 올리며 곧장 고지를 향해 내달렸다.
“으, 으응…….”
파비안은 한 곳만 집요하게 건드렸다. 당장 사정할 듯 흥분한 별하의 뒤에서 투명한 애액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핥아먹으며 별하의 앞으로 한 손을 가져갔다. 젖은 페니스를 커다란 손 안에 넣어 귀두를 중심으로 어루만지자 별하의 목 안에서 가파른 호흡이 쏟아졌다. 사정감을 느끼자마자 하반신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순간 파비안은 뒤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우악하게 주름을 흡입했다.
“흐읏, 읏.”
아픔을 느낀 별하가 허리를 접는 순간 뾰족하게 세운 살덩이가 구멍을 파고들었다.
“아앗……!”
별하는 순식간에 뜨뜻한 손안에서 파정했다. 파비안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허리를 들썩이는 별하에게 밀착해 마지막 여운을 안겨주었다.
“하아, 읏, 파비안…….”
별하는 채 사정을 끝내지 못한 상태로 제 뒤를 돌아보았다. 말간 엉덩이 뒤로 보이는 금발이 유독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체액으로 번들번들해진 구멍을 아무렇지도 않게 핥는 이를 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흐트러진 숨을 억누르듯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비안, 어서.”
파비안은 내리깐 눈을 들어 올렸다. 맑은 강물처럼 투명한 오드아이와 마주한 별하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는 사정한 후에도 흥분감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부채질을 당한 듯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파비안. 파비안.”
“…….”
파비안은 천천히 별하의 뒤에서 떨어졌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서는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흥분한 별하에게서는 솜사탕이나 달콤한 캔디와 비슷한 페로몬이 풍기고 있었다. 발정기 때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눈앞의 알파를 동요시킬 수 있을 진한 향기였다. 별하의 뒤에 우뚝 선 파비안의 바지 앞은 이미 한참 전부터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별하는 물과 땀에 젖은 나신을 꼼지락거렸다.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려 발그스름한 음부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숨을 할딱였다.
“파비안…….”
그는 흥분을 참으려는 듯 긴 한숨을 불어내는 파비안의 앞에 제 뒤를 문질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옷감 너머로 서로의 열기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파비안의 인내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파비안. 별하가 다시 그의 이름을 혀 위에서 녹이는 순간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단숨에 덮쳐들었다.
흥분한 이들은 다급히 맞물렸다. 뜨겁게 치솟은 열기둥이 질척하게 젖은 구멍을 꿰뚫는 순간 상기된 신음이 뒤엉켰다.
“흐으읏.”
“음.”
파비안은 별하의 안쪽을 점령하자마자 과격하게 허릿짓을 했다. 쇳덩이처럼 경직된 페니스의 위세에 부어 있던 구멍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거칠게 뒤를 쳐올리는 파비안과 나무기둥 사이에 끼인 별하는 금방 번득이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거칠거칠한 나무기둥에 페니스가 닿지 않도록 허리에 힘을 주고서 파비안의 위력을 견뎠다. 양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고 버티는데 허리가 멋대로 밀려 나갈 정도로 부딪혀 오는 위력에는 속수무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