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하는 이제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멀찍이에 앉아서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두두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
별하는 지난 기억에 빠져들었다. 한때는 그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치를 떨며 울분을 삼켰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를 구하려는 걸까. 파비안의 걱정대로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식인종인데. 자신을 겁탈하려 한 망할 쓰레기인데.
그런데도 제게 과일을 건네며 쳐다보던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별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이의 옆을 지켰다.
뚜둑― 마른 가지를 밟는 소리가 숲 안쪽에서 들려왔다. 나무에 기대어 깜빡 졸았던 별하는 움찔 놀라 등을 세웠다.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깃들었다.
“파비안.”
물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웠던 파비안이었다. 핏자국이 깨끗하게 빠진 그는 머리칼이 살짝 젖어 있었다. 물을 찾은 것 같았다.
“거기 물이 있었어?”
“오래전에 흘렀던 흔적만 남아 있더군. 자리를 옮기면서 작은 샘물을 발견했어.”
그리 답하는 파비안의 양손에는 주먹 크기의 동그란 무언가가 한데 주렁주렁 묶인 채로 들려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파르름한 색깔과 모양, 냄새로 봐서는 과일이었다.
또한 그의 허리에 불그스름한 색깔의 반들반들한 덩어리도 두어 개 매달려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별하는 그가 내미는 것을 받아 들자마자 비릿하게 풍기는 냄새와 함께 정체를 파악했다. 껍질과 핏물을 제거한 동물이었다. 낮에 늑대가 잡아먹었던 소동물.
파비안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별하의 안색을 살피며 물어왔다.
“많이 배고프지, 별하?”
별하는 그가 땀 흘려 가져온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이를 올려다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응.”
085.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는 천조각을 과즙에 적셔 입술에 물렸다. 그래도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 건지 그들도 장담하지 못했다. 최악의 환경에서 당장 과다출혈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진땀을 흘리며 사경을 헤매던 이의 오한도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한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잠시 숨을 돌릴 때 별하와 파비안은 주린 배를 채웠다.
처음에는 불빛과 고기 냄새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다가 불에 구운 고기를 한 점 맛보는 순간 더 이상의 고민은 사라졌다. 숯불 고기의 맛은 언제나 그랬듯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입에 넣으면 넣는 대로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뼈까지도 녹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다디달았다.
파비안은 허기만 없앤 후 두툼한 가슴살은 별하의 앞으로 밀었다. 별하는 나무꼬챙이 꿴 고기를 정신없이 뜯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난 이제 배불러. 너 먹어, 파비안.”
파비안은 별하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번들번들하게 기름진 입술을 엄지로 살짝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많이 먹어, 별하.”
별하는 그의 거칠거칠한 손에 입술을 누르고는 다시금 먹는 데에 열중했다. 목이 막힐 때는 과즙으로 갈증을 다스려가며 뼈에 붙은 살을 남김없이 뜯었다.
언제 정신을 차릴지 모르는 환자의 몫을 남겨두고 과일까지 단시간에 먹어치운 그들은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하늘과 맞닿은 숲은 동굴처럼 어두웠다. 타닥타닥― 어둠을 밝히는 모닥불을 살핀 파비안은 제 품에 들어와 앉은 별하의 다친 팔을 들여다보았다. 늑대에게 물려 살점이 날아간 곳이었다. 당시에는 출혈이 있었지만 지금은 얇게 딱지가 앉아 차츰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되도록 손대지 않도록 해. 짓무르면 위험하니까.”
별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상처에서 어렴풋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팔을 먹히고 정신을 잃은 사람을 앞에 두고 차마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불 옆에 고이 놔둔 것들만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늑대의 발톱과 이빨이었다.
“…….”
그는 여전히 꿈속에 갇힌 기분을 느꼈다. 분명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기분 좋은 꿈이었는데 갑자기 악몽으로 돌변해 더없이 씁쓸했다. 새하얀 털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두두의 두툼한 팔을 집어삼키던 늑대의 위세가 떠올라 오한을 느꼈다.
그보다 더 마음을 짓누르는 한 가지는 새하얀 늑대가 돌아설 때 찰나로 마주쳤던 파르스름한 눈동자였다. 상처 입은 듯한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 새끼 늑대가 있었어.”
파비안은 그의 뒷머리에 뺨을 붙이고서 나직이 호흡했다. 별하는 독백하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발톱도 쌓여 있었어. 몇 개 더 가져와서 사이좋게 나눴더라면 서로 상처받을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 욕심 때문인가…….”
“…….”
“난 해변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너와 함께 무사히.”
파비안은 다 안다는 듯 그의 웅크린 어깨를 토닥였다.
“녀석이 자초한 일이야. 이렇게 될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어.”
“…….”
“하이 알파로서의 가치를 의심받기보다 죽는 편이 훨씬 더 쉬웠을 테지.”
별하 역시 한편으로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돌칼을 잡고 있던 두두의 모습이 떠올라 영 마음이 불편했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절벽에서 버티는 심정이 어떠한지 저도 익히 경험해 봤기에 더 그랬다.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 들자 불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서늘한 바람이 스친 장작은 전보다 더 크게 타올랐다. 별하는 묵은 고민을 털어놓듯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원주민들은 어째서 오메가를 잡아먹는 걸까? 섬에 짐승들이 이렇게 많은데. 과일나무도, 생선도, 해산물도.”
파비안은 별하의 뒷덜미에 코를 묻으며 답했다.
“군림하고 싶었겠지. 지성으로 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가장 빠르고 쉬운 폭력을 선택했을 테고.”
“…….”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별하는 침묵했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달빛이 비쳐드는 분화구 아래 황금바위를 내다보았다. 새하얀 늑대의 울음소리를 마지막으로 그곳에서는 더 이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금자리가 발각되어 다른 안전한 곳을 찾아가 버린 건지도 몰랐다. 그는 새하얀 늑대의 향기로운 페로몬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음.”
파비안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전에도 큰 관심 없이 목표물을 향해 달릴 뿐이었지만 발톱과 이빨을 손에 넣은 지금은 거의 눈 밖에 난 것 같았다. 별하는 제 목덜미에 뺨을 비비거나 연신 입술을 누르는 파비안을 내버려 둔 채 자답했다.
“원주민들은 강해지고 싶어서 오메가들을 잡아먹은 게 아닐까……?”
파비안의 애정 공세가 느릿하게 멎어 들었다. 느직이 고개를 든 그는 별하의 어깨 너머로 의식을 잃은 이를 응시했다. 두두는 겨울잠에 빠진 동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별하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불길에 잠겼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밤 숲을 내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새하얀 늑대와 같은 오메가를 먹으면 저들도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파비안은 식인종들의 우두머리를 떠올렸다. 거대 발톱을 제 목숨처럼 지니고 다닐 정도라면 별하의 의견에도 충분히 부합했다. 어쩌면 단순히 폭력적으로 위장을 채우는 일보다 훨씬 중대한 사안일 수 있었다. 온갖 짐승들로 들끓는 적도의 섬을 누비고 다니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이유가 뭐가 됐든, 이해하고 싶진 않지만.”
별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희미한 한숨을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파비안은 눈길을 내려 별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들의 그런 논리대로라면, 나도 별하를 먹으면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인가?”
나직한 저음이 귓가의 솜털을 스쳤다. 잠깐 생각에 잠겨 들었던 별하는 뒷사람을 슬쩍 돌아보았다. 불그스름한 음영에 감싸인 얼굴이 새삼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훌륭해 보였다. 어제보다 오늘 더, 아침에 봤을 때보다 지금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라 파비안의 장점들이 더욱 면밀하게 드러났다. 별하는 제 모습이 오롯이 담긴 이색의 눈동자와 이제 거의 다 마른 금발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겨 주자 남자답게 잘 빚어진 이마까지 훤히 드러났다. 사춘기에도 여드름 하나 나지 않은 것 같은 곳을 스쳐지나 작은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원해?”
반짝이는 오드아이에 언뜻 묘한 눈빛이 드리웠다가 이내 사라졌다. 파비안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별하를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별하의 전부를 원해.”
별하는 어렴풋이 입가를 당기며 대답했다.
“전부는 조금 어렵고, 손가락 한두 개는 내줄 수 있어.”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식인종들의 논리에 타당한 근거가 존재한다면 미련 없이 내어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에서 좀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가 식인종이나 사나운 맹수와 대치하느라 위험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파비안은 저를 또렷하게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의 기세에 백기를 든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빌어야겠군.”
별하는 이전에 광장에서 본 오메가를 문득 떠올렸다가 얼른 머리를 털어냈다. 느른한 한숨을 내쉬며 파비안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토테미즘의 일환이겠지.”
중얼거리는데 불쑥 하품이 튀어나왔다. 하으음― 정신력으로 버티던 체력이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파비안은 별하의 옆머리에 입술을 붙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눈 좀 붙여. 저 녀석은 내가 살필 테니.”
별하는 묵직해진 눈두덩을 손등으로 비볐다.
“너도 피곤하잖아. 알파 늑대들이랑 싸웠지, 나 찾아다닌 것도 그렇고 저녁거리도 준비해 줬잖아.”
“음.”
“그러고 보니 오늘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네. 뭔가 떠올리는 것도 엄청 피곤해.”
“이제 곧 끝나.”
“응.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돌아갈 수 있어.”
“좀 더 욕심내서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별하는 따뜻하고 너른 가슴에 기댄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파비안은 별하가 혹여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그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 때 가까운 숲 안쪽에서 작은 기척이 일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별하는 번뜩 눈을 뜨고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뭐, 뭐야? 늑대야?!”
파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놀란 별하의 어깨를 쓸며 진정시켰다.
“너구리야.”
“…….”
별하는 숨을 얕게 불어내며 파비안을 아슴아슴 올려다보았다. 파비안은 그를 다시 제게 기대도록 했다. 경직된 등과 어깨를 가만히 쓸며 수면을 유도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별하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잠들어도 돼.”
별하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몹시 향긋한 페로몬과 규칙적인 심장 소리, 높은 체온에 감싸이자 금방 강한 잠기운이 덮쳐들었다. 그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파비안. 조금만 자고 일어날 테니까 늦어지면 깨워줘. 교대하자…….”
“그래. 알았어.”
별하는 이마에 와 닿는 입술 감촉을 희미하게 느꼈다. 잘자, 별하. 달콤한 숨결 너머로 다정한 밤 인사가 귓전에 닿는 순간, 의식의 끈을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았다.
07. Almost Heaven
오랫동안 감겨 있던 눈꺼풀이 다시 뜨였을 때는 새로운 태양이 분화구를 방문한 한낮이었다.
“…….”
별하는 마른 눈동자를 끔뻑이며 한낮에도 타오르는 모닥불을 오도카니 쳐다보았다. 밤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버린 것도 그랬지만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엊저녁까지 생사를 헤매던 중환자가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질겅질겅 뜯어 먹으며.
086.
별하는 아직 꿈을 꾸는 건가 생각했다. 밤새도록 옛 화산 분화구에서 날개 달린 늑대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아직도 깨지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이 떨어진 사람이 저렇게 태연히 앉아 생고기를 뜯을 수는 없었다. 아직 피딱지도 앉지 않은 위급환자인데.
말이 전연 통하지 않는 상대였지만 별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괜찮, 은 거야……?”
불길만 물끄러미 응시하던 두두의 눈길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안색은 핏기없이 핼쑥했고 눈 밑도 무척 어두웠지만 눈동자의 초점만은 또렷했다. 두두는 입술 사이로 흐르는 핏방울을 혀로 핥으며 다시 생고기를 뜯었다. 순간 별하는 오메가를 산 채로 잡아먹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두두의 팔은 오른쪽밖에 없었다. 왼팔이 떨어져 나간 어깨에는 피에 젖은 남방과 셔츠가 압박하듯 둘려 있었다. 그가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는 몰라도 이제 평생 한쪽 팔에 의지해 살아가야 했다.
확실하게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두두는 팔만 하나가 없을 뿐 이전과 다름없었다. 걱정했던 패혈증이나 다른 어떤 증상도 없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나콘다든, 고릴라든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하는 이게 가능한 일인지 머리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분명 눈앞의 인간은 그랬다. 팔이 떨어져 나갈 때의 비명을 생각하면 무통각증 환자는 아니었기에, 그저 고통을 생으로 참고 있다는 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
생고기를 뜯는 두두는 맛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오직 기력을 찾기 위해, 살기 위해서 먹고 있었다. 다친 몸으로 생고기는 어떻게 잡아 온 건지, 파비안은 어디로 갔는지 멀거니 주위를 돌아보던 별하는 수풀 쪽에서 기척을 감지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다 자리가 몹시 푹신한 것을 깨닫고 내려다보았다. 간밤에 그가 두두에게 해준 것처럼 주변에 온통 나뭇잎이 깔려 있었다. 아마도 파비안이 해놓은 것 같았다.
별하는 잠자리 곁에 놓여 있는 것들도 그제야 발견했다. 자체만으로도 빛이 나는 듯한 늑대의 거대한 발톱과 이빨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구운 고기 몇 덩이와 어제와는 또 다른 과일. 그것들은 반듯하게 세팅되어 있었는데 일어나서 먹으라고 준비해 놓은 듯했다. 별하는 밤에 먹었던 천하일미가 생각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두 볼을 크게 불리고서 인기척이 들리는 수풀로 향하는데, 막 안쪽에서 장신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파비안이었다. 그는 별하를 발견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담았다.
“벌써 일어났어, 별하?”
별하는 입안 가득 들어찬 고기를 급히 우걱우걱 씹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깨워달라고 말했는, 음냠, 데 잊은 거야?”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
“지금까지 정신없이 자버렸잖아. 교대도 못 하고.”
파비안은 별하의 이마에 입술을 짧게 붙이고는 모닥불로 향했다.
“괜찮아.”
그는 손에 길쭉한 파초 이파리들과 핏물이 떨어지는 생고기를 들고 있다가 그것들을 두두의 옆에 툭 던져주었다. 마치 더러운 들개라도 보는 듯했다.
두두는 생고기를 질겅거리다 말고 눈을 들어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번득이는 안광은 여전히 살기로 그득했다. 어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파비안은 더없이 무미건조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당장에 거친 육탄전을 벌일 기세들이 느껴졌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비안은 제 곁으로 다가온 별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부드럽게 누그러진 눈길로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
금방 고기를 다 먹어치운 별하는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자는 내내 꿈을 꾸느라 아직 정신이 없었지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열두 시간 이상을 푹 잔데다, 발정기의 후유증도 이제 완전히 사라져서 딱히 나쁠 수가 없었다. 자잘한 피로감 정도는 오히려 활력처럼 느껴졌다.
별하는 빈손에 긴 나무작대기 하나를 주워 들었다. 알파 늑대에게 납치당했을 때 잃어버린 창 대신으로 쓸 생각이었다.
파비안은 옆에서 늑대 발톱과 이빨을 만지작거렸다. 길쭉한 파초잎으로 그것들을 돌돌 말아 묶은 후에 다시 파초잎을 양쪽으로 연결했다. 그는 가방 형태로 만든 것을 옆 사람에게 건넸다.
“별하가 어렵게 가져온 거니, 잘 보관해. 잃어버리지 않도록.”
별하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내키지 않았다. 어제는 두두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제 품에 안고 왔었지만 그 이상은 영 의심스러웠다.
걸핏하면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서 있던 벽까지 무너져내릴 정도로 운이 좋지 않아서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두려운 만큼 집착이 생기기도 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것만은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는.
별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두는 결국 그것을 건네받았다. 원주민 부락에 도착할 때까지 목숨을 다해 지켜낼 각오가 검은 눈동자에 서려 있었다.
“나보다는 쟤가 저 상태로 걸을 수 있을까? 일어서는 것도 힘들 거 같은데.”
두두는 가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깨의 통증을 견디느라 숨을 고르다가도 별다른 내색 없이 식사에 임했다. 저를 기다리는 이들을 눈치챈 것인지, 드디어 배가 찬 것인지 생고기를 조금 남기고는 곧 식사를 끝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 번뜩 일어났다. 곧바로 움직일 생각 같았다. 파비안은 두두 쪽은 쳐다보지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시간을 끌수록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 거야. 정신을 잃지 않는 이상, 죽기 살기로 돌아가려 할 테니 별하는 걱정할 필요 없어.”
두두의 밥까지 손수 챙겨주면서도 저와는 일절 관계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별하는 당장 기절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환자를 힐긋 돌아보았다.
“아직 완전하게 지혈된 게 아니라서 작은 충격도 위험할 텐데…….”
그러다 이쪽을 쳐다보는 두두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 눈을 굴리는 별하와 달리 그는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자신의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이를 드러내며 극하게 분노하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늑대 발톱과 이빨을 습득함으로써 파비안과의 사이를 인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위치 또한.
아무것도 못 본 체하며 휙 뒤돌아선 두두는 더 지체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별하와 파비안이 저를 따라오는지 간혹 고개를 슬쩍 돌려볼 뿐 그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원주민들이 닦아놓은 길은 예상외의 곳에 나 있었다. 사화산의 안벽 아래 빛이 들지 않는 구석에 긴 타원형의 바위가 서 있었는데, 그 뒤편에 구멍이 있었다. 평범한 성인 남자도 똑바로 서서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은 다름 아닌 땅굴이었다.
두두는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곳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따라오라거나 따라오지 말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별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횃불 하나 만들어 올 걸 그랬어.”
파비안은 땅굴의 위치와 모양, 그 주변을 빙 둘러보고 곧 말했다.
“머리 위 동굴만큼 길지 않을 거야. 지름길일 테니까.”
듣던 중 그나마 위안이 되는 말이었지만 별하에게 큰 힘은 되지 못했다. 어쨌거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길을 다시 걸어야 하는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었기에. 별하는 어깨에 사선으로 두른 것을 만지작거리며 호흡을 추슬렀다.
“어서 가자. 두두 녀석 놓치면 안 되잖아.”
파비안은 먼저 상체를 살짝 숙여 안으로 들어섰다. 별하는 그를 바로 뒤에서 따랐다.
입구에서부터 더듬더듬 걸어 들어가는데 발끝이 어딘가에 툭 닿았다. 바위인가 해서 옆으로 주춤 물러났다가 다른 곳에 어깨를 툭 부딪쳤다. 순간 방향 감각을 잃은 별하는 희미한 인기척들이 들리는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제 손끝도 보이는 않는 암흑에 문득 두려움을 느끼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파, 파비안…….”
낮게 목소리를 내자마자 손끝으로 열감이 와 닿았다. 익숙한 체온에 실린 체향은 파비안의 것이었다. 그는 숨결이 오롯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 별하?”
별하는 파비안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방향 감각을 되찾았다. 앞사람의 팔과 가슴을 더듬더듬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잠깐 헤맸어. 이제 괜찮아.”
“…….”
“파비안?”
대답이 없는 파비안의 턱과 뺨을 더듬거리다 저도 모르게 눈 쪽으로 손이 움직였다. 별하는 눈을 찔리고도 피하지 않는 그에게서 얼른 손을 떼며 물러났다.
“미안. 눈 괜찮아?”
그 때 돌연 파비안이 성큼 다가왔다. 부딪힐까 봐 뒤로 물러나려는 별하를 단번에 번쩍 안아 올렸다.
“읏, 파비안?!”
갑작스럽게 안아 올려지는 바람에 당황한 별하는 바닥에서 뜬 다리를 버둥거렸다. 파비안은 그가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만 참아줘.”
암흑으로 뒤덮인 별하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이,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장난이지?”
그도 그럴 것이,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안고서 암흑 속을 걷는다는 건 맹인이 차도를 걷는다는 것과 똑같은 수준이었다. 별하는 파비안의 팔을 붙잡으며 얼른 그를 저지했다.
“아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 상태로 어떻게 걷는다는 거야? 나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어. 괜찮으니까 내려줘, 파비안. 너까지 다쳐.”
파비안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부터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몸이 흔들리는 감각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읏. 파비안.”
별하는 억지로 내려가려고 버둥거리다 파비안까지 다칠까 봐 더 저항하지 못했다. 따뜻하면서도 너른 어깨를 바짝 끌어안고서 움직임을 최소화한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속도에 맞춰 숨을 얕게 불어냈다.
087.
젖은 흙냄새가 진동하는 땅굴 길은 확실히 원주민들이 인위적으로 터놓은 것 같았다. 지면이 무척 골랐고 길을 막는 장애물도 없었다. 파비안의 바른 걸음걸이도 한몫해 어둠 속을 걷는 내내 단 한 번도 비틀거리거나 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측면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 끝자락에 별하의 뒤통수가 부딪쳐 짧은 신음이 터졌을 뿐이었다.
차츰 뒤통수의 아픔이 가시고 파비안의 안락한 품에 슬슬 적응되어 갈 때쯤, 멀찍한 전방에서 작은 빛조각이 아른거렸다. 멀지 않은 앞에서 걷고 있을 거라 예상했던 두두는 벌써 빛조각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별하는 괜히 불편한 듯 몸을 뒤적이며 말했다.
“파비안, 이제 다 왔어. 거의 다 왔으니까 그만 내려주면 안 될까?”
파비안은 성인 남자를 수십 분 동안 안고서도 자세에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빛조각이 점점 크게 다가오는 전방을 응시한 채로 우직하게 걸었다.
“아직 어두워서 위험해. 밝은 곳으로 나가서 내려줄게. 조금만 더 참아줘.”
“아, 정말 괜찮은데.”
별하가 연신 자세를 바꾸며 불편한 내색을 내비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작은 빛조각이 그들의 신장만큼 커졌을 때, 길고 길었던 어둠길은 완전히 끝이 났다. 컴컴한 장막을 걷어내고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동굴 밖으로 빠져나온 순간, 별하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나무냄새와 풀냄새가 가슴 안쪽을 채우는 느낌이 몹시 상쾌했다.
파비안은 별하를 안은 채로 저들이 빠져나온 구멍의 위치부터 살폈다. 땅굴은 벽이 무너졌던 석회동굴과 그리 멀지 않은 숲의 작은 언덕 아래에 나 있었다. 철옹성의 절벽이 가까이서 내다보였는데, 두두는 절벽 근처에서 밤을 보낸 후 곧바로 땅굴을 통해 사화산의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돌연한 발정기를 보낸 별하와 파비안보다 적어도 하루에서 하루 반나절 일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