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히 앉은 알파 늑대들이 살짝 내려다보이는 황금바위 안쪽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위치나 크기로 보아 동굴 같은 구멍은 아마도 새하얀 늑대의 보금자리 같았다. 안쪽의 지반은 바깥보다 살짝 낮았는데 바닥에 여린 잎들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전에 하룻밤을 머물렀었던 석회동굴만큼 큰 보금자리도 보금자리였지만 별하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부드러운 잎들 위에서 동그랗게 꼬리를 말고 잠든 새끼 늑대였다. 새끼 늑대들. 서넛의 작은 늑대들은 셰퍼드만 했으나 잠든 얼굴이나 보송보송한 솜털로 봤을 때 태어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아기였다.
별하는 제 뒤에 앉은 새하얀 늑대를 돌아보았다. 미리 낳은 새끼들인지, 또 다른 늑대의 새끼들인지는 몰라도 새하얀 늑대는 더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수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처럼 저를 대하는 새하얀 늑대에게서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단짝 친구처럼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잠꼬대를 하느라 꼬물거리는 새끼 늑대들에게로 다시 그의 시선이 옮겨갔다. 그는 새끼 늑대들의 작은 발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경외시하는 거대 늑대의 발톱이 오메가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저들이 성욕 해소 도구, 내지는 푸짐한 저녁거리로 취급할 뿐인 오메가가,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터주신이라는 것을.
오메가인 저를 난생처음 보는 듯하는 새하얀 늑대의 행동에 어리석은 그들은 절대 알지 못했으리라 확신했다. 앞으로도.
젖비린내가 느껴지는 새끼들을 고요히 바라보던 그 때 별하의 눈길이 구석으로 향했다. 주변의 황금바위 때문에 보금자리 안쪽까지 양지처럼 빛이 들고 있었는데, 수북한 풀 사이에 뭔가가 섞여 있었다.
황금바위 조각이라고만 생각하다가 미세하게 빛을 반사하는 성질의 것임을 깨닫고 불쑥 안으로 들어갔다. 둥지에 한쪽 발을 내디딘 후에야 별하는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
새하얀 늑대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콧잔등을 일그러뜨리지도 경고의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자기 새끼를 만져보라는 듯 평온한 태도로 별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의심을 모르는 존재처럼 저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이는 늑대를 향해 눈길을 건넸다.
“금방 들어갔다 나올게. 네 새끼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해.”
새하얀 늑대는 대답하지 않고 잠잠히 지켜볼 뿐이었다.
별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쌕쌕대며 잠든 새끼 늑대를 조심히 지나 풀 속에 박힌 물체로 다가갔다. 선명한 외형을 뽐내는 물체는 저와 파비안이 수백 시간 동안 고대하고 고대하던 것이었다. 늑대의 거대한 발톱이었다.
그는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것을 손에 넣게 된 데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서둘러 그것에 다가서는 별하의 얼굴빛은 어떻게 해서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풀 속에 박힌 발톱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폭신한 풀 여기저기에 황금처럼 박혀 있었는데 풀이 깔리지 않은 구석에는 마치 작은 돌산처럼 쌓여 있었다. 발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것도 섞여 있었다. 이빨이었다.
별하는 메마른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심 봤다.”
발톱 하나에도 기세등등하던 원주민들에게 여기 이것들을 내보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심히 궁금했다. 패배감에 젖어 더는 자신들을 괴롭히지 못하는 상황을 그리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별하는 서둘러 그중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발톱과 이빨을 골라냈다. 한눈에 봐도 족장의 것보다 훨씬 크고 훌륭했다. 그는 그것을 금은보화처럼 품에 안고 아늑한 동굴을 나섰다. 햇빛이 드는 자리에서 온순하게 기다리고 있는 새하얀 늑대에게 그의 발톱과 이빨을 내보였다.
“미안하지만, 이거 가져가도 될까?”
허락을 구하는 행위를 새하얀 늑대는 아는지, 모르는지 별하의 앞에 다시금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서 제 배를 만지라는 듯.
“그래, 알았어. 그전에 잠시만.”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별하는 너덜너덜한 남방을 벗어 발톱과 이빨을 돌돌 말았다. 양소매를 당겨 힙색처럼 허리에 묶은 뒤 새하얀 늑대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크림 같은 배를 쓰다듬었다.
안쪽의 경이로운 움직임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이곳에 오기까지 다난했던 지난날들을 위로받는 그 때, 근방에서 늑대의 날 선 울음소리가 일었다. 아우우―
“―!”
새하얀 늑대가 번득 몸을 일으켰다. 움찔 놀란 별하는 새하얀 늑대를 따라 알파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서둘러 향했다.
제 예상대로라면 알파 늑대들이 경계하는 이유는 분명 파비안 때문이었다. 바위를 헤쳐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아니나 다를까 저를 찾아온 이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파비안―!”
험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알파 늑대들을 가뿐히 제압한 뒤 안으로 들어서던 파비안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는 저에게로 달려와 안기는 이를 아연히 내려다보았다. 다친 곳은 없는지부터 살피며 물었다.
“별하, 어떻게 된 일이야? 괜찮―”
그는 말을 똑바로 끝맺지 못했다. 별하의 뒤로 나타난 새하얀 늑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늑대와 처음 대면했을 때의 별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별하에게는 더 없는 친구처럼 굴던 새하얀 늑대가 잘생긴 콧등을 일그러뜨리며 성인 남자의 팔뚝만 한 이빨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파비안에게서 스멀스멀 풍겨 나오는 페로몬을 느낀 별하는 얼른 그 사이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했다.
“이 늑대는 해치지 않아. 그러니까 파비안 너도 그런 페로몬 풍기면 안 돼.”
파비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새하얀 늑대와 별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확실히 새하얀 늑대는 경계심을 보이는 반면, 위협한다거나 덤벼들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별하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이 늑대랑 친구 됐어.”
083.
“……친구?”
“느껴져, 파비안?”
파비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느껴진다는 건지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별하는 상기된 얼굴에 생기를 더하며 자답했다.
“오메가야, 이 늑대도 나처럼.”
파비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으나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하이 알파도 맡지 못하는 페로몬이 있다는 데에 별하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거기다 임신했어. 배 한번 만져볼래? 엄청 신기해.”
그는 파비안의 손을 잡아 멀찍이 서 있는 새하얀 늑대에게 다가갔다.
좀 전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순둥이처럼 배를 내보이던 늑대는 굉장히 예민해진 심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눈치가 없는 인간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신호였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새하얀 늑대의 일변한 태도에 시무룩해진 별하는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순한 짐승이 페로몬을 풍기는 인간 알파에게 모질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자연적으로 떠올라 안타까움을 느꼈다.
“우리도 널 해치지 않아. 절대.”
새하얀 늑대는 파르스름한 눈으로 별하를 응시할 뿐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의 뒤에서 거대한 늑대를 관찰하던 파비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친구를 상처 입히게 돼서 미안해, 별하.”
“―?”
별하는 파비안을 돌아보았다. 그의 말뜻을 곧바로 캐치해 내지 못하고 안광이 번득이는 오드아이를 응시하다가, 제 허리에 맨 것부터 꺼내 보였다.
파비안이 새하얀 늑대를 상처 입히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이미 손에 들어와 있었기에 굳이 죄를 지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쉬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상황이었다.
“엄청 크지? 둥지에 산처럼 쌓여 있던데 제일 큰 녀석으로 챙겼어. 물론 허락 맡고.”
“…….”
“죄 없는 짐승에게 해코지하지 않아도 돼.”
파비안은 새하얀 늑대의 발톱과 이빨을 확인하자마자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럼 어서 출발하지. 그 녀석이 이곳을 찾아내기 전에.”
별하는 그제야 또 다른 하이 알파를 떠올렸다. 자신들만큼, 어쩌면 훨씬 더 늑대의 발톱에 집착하는 인간이었다. 식인종 족장은 어떻게 발톱을 주운 것인지 몰라도 두두 역시 이곳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새하얀 늑대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불청객들을 어렵지 않게 처단할 테지만, 눈송이처럼 아름다운 털이 피로 얼룩진다거나 새끼 늑대들이 다치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별하는 무의미한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가진 것보다 조금 더 작은 발톱을 동굴에서 꺼내와 두두의 앞에 슬쩍 떨어뜨려 놓을까도 생각했다. 녀석이 게임에서 진다고 한들 먹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누구도 다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이제 더는 곁을 내주지 않는 새하얀 늑대의 차가운 태도에, 새끼 늑대가 잠든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깨달았다.
“미안해. 오메가 늑대…….”
별하는 멀리서 저를 지켜보는 늑대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먼저 돌아서는 파비안을 뒤따르며 계속해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늑대는 냉랭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역시나 아쉬운 듯 느릿하게 쫓아 나왔다. 별하는 생명이 담긴 늑대의 배를 다시 한번 쓰다듬고 싶은 욕심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별하.”
어서 오라며 저를 부르는 파비안에게로 돌아서는 찰나, 별하의 시야로 새카맣게 번득이는 물체가 걸려들었다. 정면 길을 돌아서 들어온 두두가 새하얀 늑대의 뒷덜미를 향해 돌칼을 던지기 직전이었다.
“위험해애―!”
누구를 향한 경고의 외침인지 알 수 없었다. 별하의 고성이 바위들 사이로 튕겨 나가 주변의 절벽에서 메아리쳤다. 새하얀 늑대는 곧장 제 뒤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두두 근처 바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두두는 새하얀 늑대의 압도적인 위용을 마주하고도 의기충천했다. 선대에게 익히 전해 들었던 것인지, 몇 번 대면해 본 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하이 알파로서의 자존심이 목숨보다 무거운 것인지 당장 새하얀 늑대의 발을 잘라낼 것만 같았다.
두두는 늑대의 하단을 노리며 민첩하게 접근했다. 허공에서 돌칼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선득하게 일었다. 늑대는 하이 알파의 페로몬이 강력해질수록 송곳니를 훤히 내보이며 분노했다. 제게 다가오는 두두를 물어뜯기 위해 이빨을 세워 달려들었다.
크하아악―! 당장 핏물이 솟구칠 것 같은 위험천만한 상황에도 별하는 기가 죽은 알파 늑대들과 같은 처지를 느꼈다. 본능에 지배당한 맹수들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다른 나갈 길을 찾으려면 어서 움직여야 해, 별하.”
파비안은 망부석이 된 별하의 등 뒤에서 건조하게 말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인 것은 확실했다. 허나 별하는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같은 인간으로서 두두에게는 미안했지만 새하얀 늑대가 혹 다칠까 봐 노심초사였다.
“정말 순했는데…….”
목적을 앞세운 인간들과 강제로 싸워야 하는 늑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파비안은 나직한 한숨을 불어내며 단언했다.
“별하의 친구는 무사할 거야. 지금까지 생존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야.”
“…….”
별하는 파비안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두두가 단순한 알파였거나 조금만 더 머리가 나빴다면 그렇게 믿었을 테지만, 그는 하이 알파였다. 거친 섬에서 살아가는 식인종이었고 용맹한 만큼 머리도 나쁘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뿐 생각보다 훨씬 더 비상할지도 몰랐다. 특히나 사냥에 대해서는.
별하의 걱정은 금방 현실로 일어났다. 두두의 돌칼이 새하얀 늑대의 발등에 꽂혀 들었다. 크하악! 깊게 박히지 않은 돌칼은 쉽게 발등에서 튕겨져 나갔다. 허공을 가로지른 그것은 깎아지른 바위 끝자락에 떨어져 벼랑까지 밀려났다.
두두가 재빨리 물러나 그것을 집으려 등을 내보이는 순간 새하얀 늑대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크아아학―! 주둥이를 찢어 벌려 두두의 어깨를 향해 돌칼보다 첨예한 송곳니를 세웠다.
“두우! 두우!”
두두는 기합을 넣으며 상체를 숙여 피했다. 간발의 차로 피하는가 싶었으나 한쪽 팔이 새하얀 늑대의 이빨에 걸려들었다. 늑대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몸체에서 분리해 냈다.
“으아아악!”
두두의 굵직한 비명이 터지자마자 검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외부로 쏟아졌다. 늑대는 떨어진 팔을 그대로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별하는 일순간 벌어진 상황에 새파랗게 질색했다.
그들은 똑같은 부위에 상처를 입었으나 정도는 판이했다. 어서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다.
두두는 비틀거리면서도 돌칼을 주워 들어 늑대에게로 겨눴다. 좀 전까지도 호기롭던 얼굴은 금방 핼쑥해졌지만 눈동자는 살아 있었다. 팔이 잘려나간 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주둥이를 새빨갛게 물들인 새하얀 늑대는 분노에 차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팔뿐만 아니라 몸통을 한입에 집어삼키려 두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별하는 더 보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 그만해! 친구―!!”
별하의 목소리를 들은 새하얀 늑대는 돌연 멈칫했다. 제 송곳니 아래로 들어온 두두의 머리통을 단숨에 깨부수지 않았다. 크르르르― 사납게 콧등을 일그러뜨리고서 침을 뚝뚝 흘리면서도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고 천천히 물러났다. 멀찍이에 서 있는 별하를 돌아보며 숨을 할딱거렸다.
별하 역시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른 입술을 찢을 듯 곱씹으며 새하얀 늑대를 마주 보았다. 그리 의기양양하던 두두도 꼼짝없이 죽을 뻔한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하얀 늑대는 전의를 상실한 적을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어서 자신의 땅에서 꺼지라는 듯 음산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때였다. 낑낑― 끼잉― 끼잉― 바위 위쪽에서 새끼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얀 늑대가 그를 돌아보는 순간, 패잔병처럼 서 있던 두두는 아래로 축 늘어뜨린 돌칼을 치켜들어 늑대의 턱밑을 향해 쳐올렸다. 새하얀 늑대는 느릿하게만 보이는 움직임으로도 그것을 쉬이 피해갔다.
순간적으로 늑대의 안광이 새파랗게 번뜩였다. 한 번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결국 기대를 저버린 두두의 몸통을 한입에 베어 물고는 절벽 아래로 패대기쳤다. 두두의 새된 비명이 여러 갈래로 이어진 절벽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아…….”
별하는 끔찍한 참상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순간 끼쳐 든 비감을 떨쳐내기 위해 어떤 대상을 비난해야 한다면, 그는 단연코 원주민들이었다. 모든 사단의 시작은 원주민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온전히 비난할 수만도 없었다. 폐쇄된 공간에 갇힌 이들은 이념을 따르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도태된 인간의 생존율은 죽음과도 같았다.
별하는 두두를 돕지 않은 저에게 죄책감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감정을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새하얀 늑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별하의 기대를 저버린 데 미안함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인류에 대한 작은 희망마저 포기해 버린 것인지 그대로 바위를 뛰어올라 모습을 감췄다. 숨죽이고 있던 알파 늑대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별하의 뒤에서 말없이 관망하던 파비안은 억양이 실리지 않은 저음으로 말했다.
“그 녀석도 지금쯤 겸허히 받아들였을 테지. 제 주제를.”
별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파비안의 잔잔한 독백이 잇달았다.
“한 번 뒤통수를 쳐본 놈은 반드시 다시 치게 돼 있어. 중독되기 쉽거든. 제 능력을 시험받지 않아도 되는 맛에.”
“…….”
별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파비안이 물었다.
“그래도 별하는 돕고 싶은가?”
“……두두 말하는 게 맞아?”
“…….”
“이미 죽은 자를 어떻게 돕는다는…….”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 생각하던 별하는 순간적으로 깨우쳤다. 두두는 죽은 게 아니었다. 아직 살아 있었다.
파비안은 별하의 생각을 읽은 듯 대뜸 혈투가 벌어졌던 벼랑으로 향했다.
084.
태풍이 빠져나간 듯 고요한 벼랑은 두두가 흘린 피로 흥건했다.
찢어진 살점과 허연 뼈가 드러나며 고통에 사로잡힌 비명이 터지던 순간이 떠오른 별하는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이곳에서 끊임없이 위기를 겪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 수없이 내몰려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두두처럼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두처럼 패기 있게 덤벼들지 못하고 가벼운 한입 간식이 되었으리라. 그 전에, 오메가가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강제로 떠밀려 오지도 않았겠지만.
파비안은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별하는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절벽에 드리운 빛과 그늘의 경계선에 역시나 물체가 붙어 있었다. 새하얀 늑대와의 싸움에서 패한 두두였다.
그는 돌칼을 절벽에 박아 넣고서 한 손으로 그것을 잡아 버티고 있었다. 팔이 찢겨나간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벼랑으로 떨어지기 전 돌칼이 수십 개 박힌 듯한 이빨에 베어 물린 상처들에서도 체액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운 두두의 얼굴은 사색이었다. 돌칼을 움켜잡은 채로 중력에 버티고 있었지만 언제 먼지 같은 한 톨의 희망마저 놓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별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벼랑 끝에 가슴을 붙여 최대한 길게 내밀었지만 두두에게는 한참 닿지 않았다. 별하는 아래로 던질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덩굴도, 뭐도 없었다. 황금바위와 돌, 풀, 꽃뿐이었다. 별하는 옆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아무리 뒤통수 쳐봤자 소용없어. 다 가진 건 우리니까.”
“…….”
“게임은 끝났어. 우리가 이겼어.”
파비안은 두두에게서 눈을 돌려 별하를 내려다보았다. 차마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별하가 경쟁에서 패한 상대를 매정하게 버리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자신을 도와준 것도 별하였었고 크루즈에서도 그랬다.
파비안은 곧 벼랑 아래로 팔을 내렸다. 전보다 두두에게 가깝게 닿았지만 여전히 거리는 있었다. 어서 잡으라는 듯 큰 손을 펼치자 두두의 가라앉은 눈동자에 언뜻 빛이 스쳤다.
“…….”
파비안과 잠시간 눈길을 맞대던 두두는 그 자리에서 번뜩 뛰어올랐다. 한쪽 팔의 완력만으로 절벽을 뛰어올라서는 돌칼을 밟아 제게 내민 손을 붙잡았다. 파비안은 두두의 손을 잡자마자 위로 끌어당겼다. 절벽을 거슬러 벼랑 끝으로 올라온 이는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하아…… 하아아…….”
그는 별하와 파비안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더니 곧 맥없이 풀썩 고꾸라졌다.
“두―”
별하는 어서 남방을 풀어 안에 든 것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남방을 돌돌 말아 어깨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두두의 환부에 대고 피를 눌러 막았다.
상처는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반대쪽 어깨와 가슴, 명치, 복부, 허리도 새하얀 늑대의 이빨에 찢겨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얼핏 뼈가 드러난 곳도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별하는 두 손에 두두의 피를 가득 묻힌 채로 덜덜 떨었다. 어느 곳의 상처가 심하든 일단 지혈을 하는 게 시급했다. 파비안은 쓰러진 두두의 목덜미 맥을 확인했다. 한참 눌러 확인한 후에야 말했다.
“아직 죽진 않았지만 언제 그렇게 돼도 이상하지 않아.”
별하는 하얗게 실색한 얼굴로 욕설을 뱉었다.
“제기랄. 피가 안 멈춰.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파비안은 제 셔츠를 벗어 지혈을 도왔다. 새하얀 셔츠가 차츰 핏물에 물들었다.
“곧 쇼크 상태가 될 거야.”
파비안의 무시무시한 저음 뒤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 폭발하듯 피어오른 소리는 웅대한 동굴을 흔들며 아득히 먼 곳까지 울려 퍼졌다. 가까운 수풀에 숨어있던 새 떼가 분주하게 날아오르는 기척이 일었다.
별하는 얼른 위쪽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바위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화구에서 모습을 감춘 태양의 잔재만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파비안은 의식을 잃은 부상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장소를 옮겨야겠어.”
돔 안은 바깥보다 훨씬 빠르게 어둠에 잠겨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춰들다 그것마저 사라지자 금방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들은 깎아지른 바위 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걸었으나 나가는 문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다. 최후의 보루인 벼랑길이 있긴 했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어둠 속에서 클라이밍을 해야 했다. 충격을 최대한 자제해야 할 환자를 업고 바위를 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무작정을 길을 찾아 어둠 속을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새하얀 늑대가 언제 인간들을 단죄하러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늑대의 보금자리에서 가급적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밤을 보낼 자리를 잡았다.
파비안은 양팔로 안고 있던 두두를 부드러운 풀이 깔린 나무 아래에 눕혔다.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진 두두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워낙 신체적 특성이 우월해 간신히 지혈은 되었지만 다른 처치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옷으로 겨우 상처 부위를 감싸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죽음의 사신이 옆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혹 패혈증에라도 걸렸다면 오늘밤은 그의 마지막 밤이었다.
별하는 불을 지피기 위해 황급히 나뭇가지들을 주웠다. 마른 가지들을 비벼 서둘러 불씨를 일으키는데 파비안이 다가왔다.
“물이 필요해.”
별하는 연기가 나는 곳에 바람을 후후 불어넣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불만 피우고 같이 가.”
파비안이 새하얀 늑대를 만나 두두와 같은 상황을 겪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두두에게 우위를 점한다고 해서 거대한 늑대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이길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반대로 새하얀 늑대에게 상처 입히는 파비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파비안은 별하의 불안을 달래듯 차분히 말했다.
“멀리 가지 않아. 오는 길에 수로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어. 금방 다녀올 테니 별하는 저 녀석을 지켜봐 줘.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별하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은 두두에게는 물론 자신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눈길을 맞댔다. 상반신을 드러낸 파비안의 몸 곳곳에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예쁘게 반짝반짝하던 금발도, 깨끗한 얼굴에도 검붉은 흔적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먼저 눈길을 거두고 숲으로 들어갔다. 별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
“파비안―”
파비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해.”
그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
어둑한 숲을 멍하니 바라보던 별하는 하던 일에 집중했다. 나뭇가지를 마찰시켜 연기를 피워 올리며 그 사이로 공기를 계속 주입했다. 희미하게 불티가 이는 곳을 잔가지들로 덮고서 한참 더 문지르자 이내 불이 붙었다.
“하아…….”
그는 작은 불길 위에 나뭇가지들을 빙 둘러 세운 후 두두를 살폈다. 진땀으로 흥건한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열이 끓고 있었다. 몸은 녹아내릴 듯 뜨거운데 입술은 동사 직전처럼 새파랬고 상처 부위의 피부는 흡사 시체의 그것처럼 거무스름했다. 별하는 옷을 들춰 상처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주변만 열심히 살폈다.
불길이 제법 커진 후에도 몸을 떠는 환자가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을 맞이해 고개 숙인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적당한 것을 찾았다. 면적이 크고 부드러운 나뭇잎이 무성하게 달린 나무를 찾아내자마자 뛰어올랐다. 나뭇잎이 풍성한 줄기에 매달려 줄기째로 꺾었다.
별하는 양손에 다 들 수 없을 만큼 꺾어낸 줄기들을 안고 두두에게로 돌아갔다. 경련하듯 와들와들 떠는 환자를 그것으로 덮었다. 상처가 포진해 있는 상반신을 우선해서 꼼꼼하게 덮고 남은 것으로 다리와 발을 살짝 덮었다. 조금 부족한 것 같아 근처의 길쭉한 파초들을 잘라내 빈틈을 메꿨다.